9명의 수군재건로 답사자들은 2014년 12월7일 서울 강남 센트럴시티 버스터미널에서 7시35분발 진도행 일반버스를 탔다. 우등버스는 운임이 34,600원이고 일반은 우등보다 11,400원 싸다. 이날은 음력10월16일이니 명량해전의 날(음력9월16일)과 월령이 같다. 울돌목의 물살이 어떤지 알아보기 딱 좋은 월령이다. 그들은 벽파진 충무공 전첩비에서 걷기 시작했다. 진도타워에 올라 울돌목 해협을 내려다보며 타워 근무자의 명량대첩 해설을 들었다. 진도 대교를 넘어 우수영까지 걸었다. 이 답사기는 그 이후 고하도. 삼학도, 노적봉, 유달산까지의 기록이다.(필자 주)
1. 우수영의 밤
진도대교를 넘으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금오랑이 숙박업소를 찾겠다고 앞장서서 빠르게 걸었다. 대로(관광레져로)의 오른편 구도로를 걷다가 충무교 아래의 토끼 굴을 통과해 해안을 걷는 것이 좋다. 여객선 터미널 앞에는 거대한 크루즈선이 정백해 있었다. 우수영 성당을 지나 길가에 정차하고 있는 트럭 운전기사에게 모텔을 물었다.
“저기 ‘아름다운 호텔’이라고 보이지요?”
“호텔 말고 모텔요.”
“이름만 호텔이지 숙박비는 모텔이유.”
금오랑은 호텔로 들어가 방을 예약했다. 뒤따르는 회원들은 북서방향의 바닷가를 계속 걸었다. 그들은 우수영 밤바다의 운치를 느꼈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진도타워 안내자가 소개한 ‘현대 식당’을 찾는 것이다. 호텔 앞 문내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문내면소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현대식당(문내면 동외리)이다. 바닷가로 우회한 일행의 도착은 호텔예약을 하고 나온 금오랑보다도 늦었다. 정육점을 겸하는 식당인데 식당이 주업인 듯했다. 조용한 방은 다른 손님이 차지하고 있기에 너른 방으로 들어가 합석했다.
“답사자 여러분, 수군재건로 답사는 오늘이 사실상 마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금오랑이 일어나 설명을 했다.
“충무공이 본토에 정박한 것은 우수영이 마지막이고, 그 이후는 섬에서 섬으로 이동했습니다. 공을 따르는 우리는 배가 없으므로 섬에서 섬으로 갈 수가 없네요. 앞으로의 답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연구대상입니다.”
답사자들은 ‘쫑 파티’라면서 1인당 18,000원하는 등심을 주문했다. 4년 전부터 시작한 백의종군로 순례 이후 처음으로 하는 호사다. 순례자는 고행하는 것이므로 소박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늘 금오랑이 주장했다. 그런데 이날은 그런 제약이 없었고 숙소에 들어가서의 뒤풀이도 없었다. 이미 소주 각1병씩을 마셔서 충분했나보다.
2.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지
6시에 기상한 회원들은 바로 앞의 ‘황금관광’ 식당에서 7천 원짜리 아침을 했다. 호텔 근처 가로에는 대형 트럭이 주차해 있었다. 12월초 중부지방에 혹한이 몰려와 배추가 얼었다. 상인들이 해남 배추를 밭떼기 하려고 트럭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회원들은 문내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택시를 탔다. 편도 25,000원으로 2대를 불렀다. 식당 주인이 약 3만원 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후라서 그런지 아무도 더 싸게 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택시는 화원면을 가로질러 영암금호방조제를 건넜다. 여기서 동편으로 가면 어제 버스가 잠시 정차한 삼호읍이다. 택시 기사는 서쪽 허사도 방면으로 진입해 허사도 입구에 일행을 내려 주었다.(08:25)
일행은 고하도에서 출발인증 사진을 찍었다. 고하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영암삼호일반산업단지 현대삼호중공업의 높은 크레인이 보인다. 바다 쪽으로 난 경사지에 무화과 과수원이 있다.
“충무공의 백의종군로와 수군재건로를 젊은이들이 멘토와 함께 걷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금오랑이 김 사장 내외에게 포부를 말했다.
“꿈은 좋은데요, 젊은이들이 늙은이를 안 좋아하는 것이 문제예요.”
미세스 김이 의견을 제시했다.
“네델란드에서는 수형 중인 젊은이가 반드시 멘토와 국토를 걷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데요.”
“멘토도 젊어야 해요. 제가 은퇴 후 젊은이를 5년간 가르쳐 봤는데요. 늙으면 젊은이가 잘 안 따라요.”
“어떤 학생들인데요?”
“살레지오 회라고 아세요? 수녀님들이 미혼모 자녀를 받아서 키우는 곳이어요.”
살레지오회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성 요한 보스코(St. John Bosco, 1815~1888) 신부가 청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9년 토리노에 설립한 수도회다. 보스코 신부는 ‘청소년들의 스승’,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이들의 의식주를 주고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이 원만한 인격형성을 이루도록 교육했다. 한국에는 1954년 처음 진출했다. ‘울지마 톤즈’ 영화의 이태석 신부가 살레지오회 수도사제이다
“어디 있나요?”
“대림동에 있는 데요 신라가 뭔지 백제가 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런 아이들도 늙은이는 별로로 생각해요.”
금오랑에게 이 이야기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맞어, 나도 그랬어. 대학에서 원로 교수가 들어왔을 때 강의를 들어보지도 않고 별로 실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편견을 가졌어.’ 이런 생각을 하며 고하도 길을 걸었다.
30분쯤 걸으면 마을이 있고 언덕에서 고하도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검암은 주민에게 물어 마을에서 목포로 가는 버스가 10시10분에 있음을 기억해 두었다. 그는 고하도 선착장에서 목포로 가는 나룻배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답사자들은 키 큰 소나무가 많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석축과 돌담을 반 시계방향으로 돌아 홍살문으로 들어가니 비각이 잇었다. 모든 창을 긴 백색 천으로 가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전라도 유형문화재 39호(목포시 달동 산230)로 지정된 ‘고하도이충무공기념비’의 안내문은 이러하다.
(아래 사진 참조)
비각 아래 바닷가 언덕에 정자가 있다. 답사자들은 정자에서 남은 음식을 모두 내놓았다. 이제는 목포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에는 먹을 것이 많다. 굳이 메고 다닐 필요가 없다.
“참 전망 좋다. 저기가 목포항인데 나룻배가 있나 물어보자.”
검암과 청호가 주민에게 물으러 내려갔다.
“금오랑, 검암이 매우 기쁜 표정이더라.”
청호가 소식을 전했다.
“뭔데?”
“목포 가는 다리는 자동차 전용도로라 걷지 못한데. 만일 우리가 고하도 용머리까지 갔다가 못 건넌다고 정지 시키면 낭패잖아. 여기서 부터 걷지 않아도 되니 거구의 검암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 그러면 나룻배는?”
“나룻배도 없데. 그러니 뱃삯도 굳었잖아. 시내버스타면 되니까...”
일행은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검암이 버스 시간 알아 둔 것이 선견지명이다. 한 시간에 한번 오는 버스를 2분 후면 탈 수 있는 것이다.
“뒤로 전달, 빨리 뛰어. 곧 버스가 온데.”
금오랑이 휴대폰으로 연락을 했다.
버스에 오른 금오랑은 버스가 다리를 건널 때 갓길을 유심히 확인했다. 좁은 갓길 구분 차선만 있고 정말로 인도가 없었다.
“이렇게 훌륭한 다리를 건설하면서 왜 인도를 안 만들었을까?”
“걷는 사람이 없다, 예산이 없다,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 뭐 그런 것 아니겠어?”
3. 삼학도, 노적봉, 유달산 그리고 목포의 눈물
버스의 종점은 삼학도 입구이다. 회원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삼학도 이난영 공원에 올라갔다(11:00). 공원에는 이난영이 불러 히트한 목포는 항구다, 목포의 눈물 가사비와 이난영 나무 등이 있었다. 주민이 버튼을 눌러보라 해서 누르니 이난영 특유의 비음 섞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난영(李蘭影 본명 옥례 1916.6.6.-1965.4.11)은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동의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10세 무렵(초교 4학년) 가난으로 어머니가 제주도의 가정부로 떠났다. 어머니의 주인집은 극장을 경영했다. 옥례는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 주인이 재능을 인정하고 그녀를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서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태양극단(太陽劇團)이 목포에서 공연할 때 어머니와 오빠 이봉룡(李鳳龍)의 권유로 이 극단에 입단했다. 난영이라는 예명은 극단 단장 박승희(朴勝喜)가 붙여준 것이다. 작사가 강사랑(姜史浪)은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사장에게 무명가수 이난영을 유망주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데뷔곡은 1933년 10월에 낸 "향수"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향토 신민요 노래가사를 공모했다.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샛별로 등장하였다. 문일석은 이난영 오빠 이봉룡의 친구이다.
삼학도에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보는 목포항은 유달산을 배경으로 넣은 한 폭의 풍경화였다. 공원에서 내려온 회원들은 시내구간을 걸을 것이기에 배낭에 맨 순례자 깃발을 거두었다. 그들은 목포항 어시장과 홍어시장을 둘러보며 유달산 방향으로 걸었다.
“저쪽 구역이 구 시가지야. 옛 건물이 있을지 가봅시다.”
검암이 앞장서 안내를 했다. 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외벽을 단장하는 공사 중이었다. 근대역사관이라는 안내판에는 1920년6월에 건축한 이 건물은 서양건축양식인데 침략을 실증하는 유적이라 했다. 유달산 오르는 길에 국도 1, 2호선 기점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검암은 목포의 명물은 민어회라면서 유명한 횟집으로 일행을 인도했다. 이제부터는 순례나 답사가 아닌 관광 모드이다. 회원들은 ‘영란횟집’(중앙동1가)에서 1인당 20,000원의 민어회와 탕으로 모든 답사를 마감하는 파티를 즐겼다.
회원들은 유달산을 오르기로 했다. 이왕 목포에 왔는데 유달산을 오르지 않는다면 참 아쉬운 여행일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시간도 많이 있다.(13:30) 유달산 오르기는 당초 계획에는 없었다. 고하도에서 목포 가는 다리를 걷지 못하고 버스를 타게 되어 생긴 시간이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검암은 여러 번 오른 산이기도 하므로 먼저 귀경했다.
유달산 정상과 노적봉 사이에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과 목포시내를 바라보는 동상이 있다. 조금 더 오르면 천자총통을 체험하는 공간이 있다. 회원들은 정상에 모두 올라갔다(2:20). 금오랑이 하산하여 시계를 보니 서두르면 3시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목포역에서 무궁화호는 15시10분과 16시50분발이 있다. 상경에 5시간 걸리므로 가급적 3시차를 타는 것이 좋다. 운임은 26,600원이며 경로우대 18,600원이다. 천천히 하산하며 즐기던 회원들은 금오랑의 독촉을 받고 서둘러 내려갔다. 금오랑은 공지한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어 만족했다. 그는 열차에서 회원들에게 회계보고를 문자로 알렸다.
“회계 보고합니다. 수입 540,000, 내역: 회비 60,000 9명. 지출 699,400, 내역: 7일 중식 73,000, 택시 31,000, 석식 190,000, 숙박 110,000; 8일 조식 63,000, 막걸리 2,400, 택시 50,000, 중식 180,000; 주최측 지원 159,400. 어려운 순례길, 답사길,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4. 에필로그
미하가 상경하여 고하도 방문 사진을 대학 동창 오 박사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그는 고향이 해남이다. 오 박사는 미하가 모르는 이야기를 카톡으로 보내 주었다.
“미하, 일제는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를 문제로 삼아 <목포의 눈물>을 금지 시켰어.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여기서 님은 이순신이다. 목포의 눈물은 이순신을 그리는 노래야.”
미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관련자료를 찾아 보았다. 금지곡이 되자 레코드사는 ‘원앙’이 ‘원한’으로 잘못 기입되었다고 변명해 금지를 해제 받았다. 이난영 공원 시비에 보면 1935년 가사가 ‘삼백련원안풍(三栢淵願安風)은 노적봉 밋해’로 되어있다. 당시의 음반을 들어보고 싶다. '원앙 품은' 인지 여기 시비 처럼 '원안풍은' 인지 확인하고 싶다. 淵의 음은 '련'이 아니라 '연'인데 시비는 '련'이라 했다.
검암이 상경한 다음 날 전화했다.
“진도 타워에서 장도가 어디냐고 물었지?”
“그래.”
“찾아보니 벽파진에서 동남 10km정도 되는 곳에 있네.”
금오랑은 젊은이와 은퇴 노인을 매칭하여 멘티-멘토 관계를 맺는 것은 이상(理想)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방법을 구했다. 그의 고민을 들은 대학 동창 화타가 아이디어를 주었다.
“운동을 하려면 뭔가 홈그라운드 터전이 되는 베이스가 있어야 할 거야. 대안학교 같은데 가서 봉사를 하면서 그 학교 의 중년 쯤 되는 선생님들을 먼저 포섭(?)해 봐라. 그래서 커리큘럼에 국토수례를 넣는 거야.”
금오랑은 향후의 운동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첫댓글 금오랑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특히 충무공께서 가정 어려운 시기에 진을 치고 수군의 불꽃을 살려낸 고하도 지도와 표시, 그리고 사진에 감사합니다.
유익한 자료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청년학생들과 같이 걷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춘천에서 의병장 유인석선생 전적지를 학생과 함께 걸으려다 포기했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