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나무(캐나다 4-2) / 황성훈
하루 전날 짐을 쌌다. 날씨를 검색해 보니 캐나다 기온은 우리나라보다 10℃쯤 낮았다. 도착하는 날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활동복과 정장, 구두, 우산, 110V 콘센트와 같은 잡동사니까지 꼼꼼히 챙겼다. 새로 산 큰 가방을 꾹꾹 눌러 겨우 잠갔다. 비행기에서 읽을 전자책도 여러 권 내려받았다. 잠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새벽 4시쯤 일어났는데 개운했다.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걱정보다는, 캐나다에 간다는 설렘이 더 컸던 것 같다.
대표단을 인천 공항에서 4월 23일(일요일) 16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14시쯤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재헌이에게 전화가 왔다. 대학 동창이자 입사 동기이며, 지금은 같은 국에서 일하는 친구다.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고맙기는 했지만, 신세를 지는 게 미안해서 여러 번 거절했다. 재헌이는 시간을 정하며, 그때까지 나오라고 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재헌이가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며 내 여행 가방을 차에 실었다.
공항에 가면서 20여 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배 탔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인천에서 미국과 캐나다로 가는 배를 탔다. 북태평양을 열 번 넘게 오갔다. 선원에게 힘들기로 악명 높은 항로다. 겨울철이면 저기압의 영향으로 파도가 몰아친다. 배는 놀이동산의 바이킹이 된다. 앞뒤뿐만 아니라 옆으로도 흔들린다. 배가 안 뒤집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시차를 이겨내는 것도 힘들다. 경도 15°마다 한 시간씩 조정하는데, 우리나라와 캐나다는 열일곱 시간 차이가 난다. 캐나다까지는 17일쯤 걸리는데, 도착할 때쯤이면 정신이 멍해진다. 그때 캐나다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 머리는 상쾌해졌다. 눈 쌓인 높은 산과 깨끗한 바다를 보면 마음은 맑아졌다. 캐나다에서 20년 전 찍은 사진을 보여 줬다. 친구는 ‘가스 타운’이라고 하면 그쪽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혀를 굴려서 ‘개스 타운’이라고 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는 짐을 내려 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사진을 많이 찍어서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가장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해외 여행객이 많이 늘었다는데, 공항 2터미널은 한산했다. 약속 시각이 되자 일행이 하나둘 모였다. 다들 들뜬 표정이다. 수속은 빠르게 진행됐다. 비행기를 타려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18시 40분에 이륙했다.
밴쿠버까지는 열 시간쯤 걸린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게 힘들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배를 타고 간 것에 비하면 호강이다. 비행기에는 승객이 가득 탔다. 나는 통로에 앉았다. 허리가 아프면 일어서서 움직이기도 편하고, 갑갑한 것도 덜 하기 때문이다. 먼저 전자책을 꺼냈다. 이문열의 <<삼국지>> 를 열 권 담아왔지만, 두세 쪽 보고 가방에 넣었다. 좌석에 달린 모니터로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 조명도 어두웠다. 비행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기내식이 나왔다. 우리 열에는 여자 외국인, 남자 유학생, 나 이렇게 앉았는데 전부 비빔밥을 시켰다. 포도주도 한 잔 달라고 했다. 술기운에 자려고 했다. 선잠이 들긴 했지만 금방 깼다. 유학생은 이것저것 주문했다. 나는 그때마다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다소곳이 “저도요”라고 했다. 덕분에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안대까지 얻었다. 안대는 캐나다에서도 유용하게 썼다. 컵라면은 속을 생각해서 포기했다. 한국 드라마 네 편을 보고, 두 번째 기내식까지 먹고 나니 도착 안내 방송이 나왔다. 캐나다는 4월 23일 12시 40분이었다. 배에서 느끼던 시차와는 사뭇 달랐다. 불편하게 선잠을 잔 데다 하루 만에 17시간의 시차가 생기니 몸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는 도시 철도를 타고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갔다. 밴쿠버는 흐렸다. 맑은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기는 여전히 상쾌했다. 도시 가로수인 왕겹벚나무의 분홍색 꽃이 활짝 피었다. 피곤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하 주무관과 한방을 썼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시내를 돌아보자고 했다. 우리에게 밴쿠버에서 주어진 시간은 반나절밖에 없었다.
숙소에서 가스 타운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렸다. 예전에 배를 탔던 하 주무관도 가 보고 싶다고 했다. 보슬비가 조금씩 내렸다. 밴쿠버는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답게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거리에 차와 사람도 많았다. 조금만 걸어도 왜 다민족 국가인지 알 수 있었다. 내게 길을 묻는 외국인도 있었다. 항구에 배들이 보였다. 오래전 배에서 내려 이곳으로 걸어왔을 나를 상상했다.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행복했을 것이다. 가스 타운의 상징인 증기 시계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섰다. 그곳도 빨리 찾고 싶었다. 하 주무관에게 비슷한 데가 있는지 봐 달라고 했다. 그렇게 5분쯤 걸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나무가 있었다. 예전보다 두꺼워졌지만, 휘어진 각도는 비슷했다. 주위에 건물, 거리를 보니 확실했다. 나무를 두어 번 어루만졌다. 그때처럼 또 추억을 남겼다. 비는 조금씩 굵어졌다. 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차이나타운 주변에는 부랑자와 마약 중독자가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20년 전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 거리를 걷던 젊은 청년, 그는 바로 나였다.
첫댓글 2023. 4. 23.
약 20년 전 어느 날
감회가 새로왔겠어요. 20년 후 사무관이 돼 한국 대표로 다시 방문하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어요. 갔던 일은 잘 마무리했지요?
너무 잘 마쳤습니다. 앞으로 두 번 더 글 쓰려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벤쿠버 여행 두 편의 글도 기대됩니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하하하.
이 거리를 걷던 젊은 청년, 그는 바로 나였다. 멋지네요 응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구체적으로 글을 써서 마치 캐나다 밴쿠버를 함께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졌어요.
휘어진 나무만 그대로이고 주변의 풍경과 사람이 화려하게 바꿨네요.
젊었을 적 황선생님 모습 어떤 모델보다 멋집니다. 친구와 우정도 부럽네요.
고맙습니다. 아직도 캐나다가 아른거립니다.
휘어진 나무는 그대로 있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주인공은 황선생인데, 세월이...
그러게요. 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멋지네요.
20년이 지난 거리를 찾아가다니요. 거기서 지난 날의 나를 잘 만나고 왔나요?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거기를 다시 찾을지는 몰랐습니다. 조금 걷다 보니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자기 자신을 만났네요.
너무 좋았습니다.
거리를 걷던 젊은 청년이 아름답네요.
아직 가 보지 못한 도시, 벤쿠버를 함께 여행하는 듯합니다.
감회가 얼마나 새로웠을까요?
공감이 가서 아련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