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최초의 쿠데타인 癸酉靖亂 전후의 '밭 田 字' 破字占
破字占을 쳐본적이 있는가?
나는 가끔 유희와 두뇌플레이 삼아 破字占을 쳐본다.
破字占은 미래를 예언하는 文字占으로 한문 글자 하나 하나를 破字해서 풀어보거나 그대로 해석하거나 분해하여 점을 친다.
破字占을 하는 복술가가 똑같은 글자를 가지고도 짚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해서 통상 <파자점설화>는 대개 한 글자를 두 가지로 상반되게 푸는 것으로 운명을 예언하는 바, 숙종이나 박문수 같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453년 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 단종을 폐위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성계가 반역으로 고려를 뒤엎고 세운 망조가 든 나라 이씨 조선은 이성계 생존시부터 정변이 일어난다.
장자 승계 원칙을 무시한 채 정통성과 능력도 부족하고 업적도 없는 막내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삼은 게 문제였던지라 어느 정도 반란을 일으킬 명분은 있었던 무인정사,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된다는 아주 확실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던 중종반정, 집권 이후는 막장이지만 적어도 반정 당시에는 폐모살제와 실정을 일삼은 광해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던 인조반정과는 달리, 계유정난은 단종이 정통성과 능력도 완벽하고 폭정이나 실정을 일삼은 적도 없었는데다가 어쨌든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도 귀양보냈다가 끝내 죽였기 때문에 반정을 정당화할 명분이 없었다. 애초에 명분이 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아니라 세조반정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는 조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후였기 때문에 많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조의 정통성은 이후 조선의 기득권을 잡게 되는 사림 세력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걸린 조의제문도 결국 이 문제에서 파생되었다.
'정난'은 '政亂(정계의 혼란)'이 아닌 '靖難(난리를 안정시킴)'인데, 이는 일단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세조가 역쿠데타로 수습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조금 더 확실한 의미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세조의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고
까지 미화되지 않은 것은, 중종반정 직전의 연산군과 인조반정 직전의 광해군이 곧바로 끌어내려진 것과는 달리 단종은 후일 사육신의 실패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봉되기는 하였어도 쿠데타 직후에는 끌어내려지지 않고 임금으로서 세조에게 양위했기 때문이다.
일단, 비극은 1차적으로는 문종이 미처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사실에 있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할 경우 보통 대왕대비 또는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통해 왕이 장성하기 전까지 정치적인 보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짧은 명줄부터 해서 온갖 운이 전부 없던 듯한 문종은 아내복도 없었는지 세 명의 세자빈을 들였지만 모두 이혼하거나 죽어버렸다. 즉,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왕후 자체가 없었다.
그 외에도 세종의 비이자 단종의 조모인 소헌왕후는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어린 단종을 돌봐주었으나, 그녀는 안타깝게도 정실이 아닌 후궁이라서 수렴청정의 자격이 없었다.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성종의 사례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문종이 배우자에 좀 더 관심을 두는 편이 아들의 왕권을 지키는 가장 좋은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문종은 재위 시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다. 유난히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여복이 없었던 왕이었다. 그 유명한 '레즈비언' 세자빈 순빈 봉씨가 둘째 세자빈. 그러나 왕 스스로가 여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세자빈들의 운명이 불행해진 면도 있다.
한편 세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는 극진하였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소헌왕후가 세종의 재위기간에 사망하지 않고 세종, 문종 사후까지 살아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손자에 대한 수렴청정을 했더라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친모에게 칼을 겨누었다가는 부모와 자녀간의 효를 중요시하던 유교 성리학이 강성했던 조선이었으니 당연히 온 나라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끝장날 때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가 바로 당시 대비인 인목왕후의 폐위라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인목왕후는 법적 모친이었을 뿐, 친모도 아니었고 나이도 광해군보다 어렸는데도 저런 반발이 일어났는데, 친모에게 칼을 겨눈다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태에서 왕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문종은 대신들과 신료들에게 어린 단종을 보필해 줄 것을 많이 부탁했다.
특히 문종은 재위 시에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결국 단종 초기에는 의정부와 군권을 장악한 당시 좌의정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 권력을 쥐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노신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 왕의 숙부들은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능력 있고 야심만만한 왕자들이었으며 부왕의 통치기에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한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않게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에 권력의 특질상 어쩌면 계유정난은 필연이였는지 모른다.
수앙대군이 癸酉靖難을 도모하던 당시 한양에서 가장 유명하던 파자술사로 洪武光이란 맹인이 있었다.
그는 밥상넓이 정도의 나무판에 부드러운 흙을 담아 점을 보러온 손님이 마음내키는 대로 글자를 쓰면 손으로 더듬어 읽고 길흉을 예언하였다.
수양대군은 擧事전에 일의 성사여부를 알기위해 거리에서 파자술을 하고 있던 홍술사를 찾았다.
"점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오?"
"거기 앞에 흙판에다 아무 글자나 생각나는 대로 쓰십시오"
수양대군이 田 字를 썼다.
홍무광이 더듬더듬 손으로 글자를 읽고 나서,
"田 字를 쓰셨군요. 雙日竝立(하늘에 태앙 두 개가 나란히 떴으니)하니 逆賊之事로소이다"
수양대군은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때문에 점을 치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거사 계획을 안다는 듯이 얘기 하니 말이다.
수양은 시치미를 떼고,
"에이, 여보쇼, 무슨 험한 말을 그리하는가? 아무래도 잘못 안것 같으니 다시 한번 해봅시다"
수양대군은 田 字를 다시 한번 썼다.
"또 田 字를 쓰셨군요. 사방이 開口이니, 여론이 두렵습니다"
[田) 입 口字가 넷이니 나이 어린 조카를 내치고 왕위를 찬탈하면 민심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제서야 수양은 홍무광의 두 손을 꼭 붙잡고서,
"그래, 이 사람아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내가 성공할 수 있겠나?"
"말 그대로이지요"
"아니, 말 그대로라니...?"
"左伐右伐(田字에서 왼쪽과 오른쪽 벽을 떼어내면 임금 王 字가 된다)하면 군왕이 되지 않겠습니까?"
수양대군은 이말을 듣고 당시 영의정이던 黃甫仁과 좌의정이던 金宗瑞를 제거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거사당일 수양은 최후의 결심을 굳히기 위해 다시 한번 홍무광을 찾았다.
당시 홍무광은 평소 그가 손님을 받던 거리에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수양대군은 수소문하여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쬐며 무슨 생각인가를 골똘히 하고 있던 그의 앞으로 다가간 수양대군은,
"이 사람아 ~ 날세, 일전에 田 字을 쓰고 묻던 사람인데 아무래도 앞일이 궁금해서 한번 더 물으러 왔네"
"예. 지금은 흙판도 없으니 마당에 아무 막대기나 주워 들고 이 앞에다 써 보시지요"
수양대군은 '날 一' 字를 썼다.
글자를 더듬어 읽은 홍무광은, "흙 토(土)에 加 1획하면 임금 王이 되니, 필시 제왕이 되실 것입니다"
하면서 벌떡 일어나 수양대군에게 큰절을 하여 임금을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에 수양대군은 만족했다.
집으로 들아간 수양은 자신의 심복인 권람(權擥)을 불러서,
"자네는 지금 홍무광의 집으로 가게. 거기가면 대문 앞에 그가 앉아 있을 테니 점을 보러 왔다고 하고 한 一 字를 하나 쓰게. 반드시 한 一字여야 하네"
그리하여 권람은 수양대군이 시키는대로 홍무관에게 가서 한 一 字를 쓰며 자신의 운명을 물어 보았다.
"오늘은 한 일자를 쓰는 손님이 두 명째 오셨습니다"
"손님이 쓰신 일(一)자는 生字終劃이요 死字始劃( 산다는 글자 生의 마지막 획이요, 죽는다는 글자 死의 첫획)이니 당신을 낳으신 분이 돌아 가시겠습니다"
권람은 깜짝놀라 황급히 고항으로 내려가 보았으나,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하직한 후였다.
喪을 치르느라 권람은 다음날의 거사 (계유정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첫댓글 命은 누구라도 조금만 공부 하면 주저리 주저리 떠들 수도 있지만 占은 참 어렵지요!일가를 이뤄야만 정확한 答을 낼수가 있으니까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명을 알려면 일단 책을 다 읽어 學通을 이룬 후 靈通을 해야 가능하지만,
점은 靈通만으로 가능하지요.
해서 靈通者는 늘 靈을 맑게 유지해야는데 돈알고. 재물알고. 명예 알게 되면서 거울에 때가 끼어서 엉터리로 보지만, 學通者는 령에 때가 끼드라도 學으로 기본은 볼수있으니 주저리주저리 말할수 있으나 맞출확률은 60%정도 밖에 안되니 맞기도 하고 안맞기도 하지만 靈에 때가 끼어전혀 보이지 않는 영통자와는 차이가 있기하나 크게 보면 도찐개찐이지요.
감사합니다.
늘 좋은 날 되세요
@심산(深山) 심산님은 어렴풋이 나마 아시는가 봄니다.학통 영통 하셨나 봄니다.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심산(深山) 역은 스승이 제자 에게 구전심수 한다고 들은바가 있습니다.책에는 일부분이 실려 있고 다는 아니라고 합니다.또 일부 역은 사람같지 않은 자에게는 단 한자도 알려 주지 않는다고도 하고요!
또 스승을 모시고 공부한 사람이 스승을 모시지 않고 무사 자통 했다고 하는 사람을 이르기를 스승 에게 두시간 배울 양도 평생 해도 못 깨우친다는 말도 들은적 있습니다.
아무튼 역은 무척이나 심오하고 신비로운것 같습니다.
@심산(深山) 심산님은 꼭 한번 찾아 뵙고 싶습니다.기회를 주십시오 선생님.
@다된다(양구) 易과 推命은 둘다 미래의 변화를 본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조금 달라요.
하지만. 이 둘다 學으로 볼수있는건 최대 65%까지고 나머진 靈通을 해야만 100%까지 볼수있어요. 그래서 心眼이 필요한거지요.
근데 일반인들이 앞날을 알아봤자 별 필요가 없기에 굳이 알 필요는 없기도 합니다.
춘추시대 鬼谷子부터 시작된 음양학은 그 갈래가 수백가지나 되지만 결국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들듯이 딱 한지 靈通을 해야 하는 바, 부단한 수련과 전생의 인연이 필요하지요.
나는 문화센터서 동양오학을 가르키는 강사들만 가르키는 선생입니다.
개중에는 현재 개업하고 있는 아주 유영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이들에게 늘 이야기 합니다.
"당신들이 학통으로 알수있는건 전체의 60%밖에 안되니 마음을 맑게 해서 영통을 한 후에 봐주라"고.
사람은 인연이 닿으면 절로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언제 시간이 됨 한번 뵙지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