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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도(趙亨道)
자는 경달(景達),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이고, 옥포 만호(玉浦萬戶) 조우(趙堣)의 아들이다.
유사(遺事)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총명하여 글자를 배우자마자 곧 문장을 지었으며 써낸 말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 겨울에 만호공(萬戶公)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의 나이 겨우 10세였는데 상주 노릇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안덕(安德)을 왕래하며 첨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하여 뜻을 독실하게 하고 힘써 배우며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함안(咸安) 생가(生家)로 돌아와 뵈었다. 당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지군사(知郡事)로 있으면서 고을의 수재(秀才)를 선발하여 매달 초하룻날 서당에 들어와 학문을 강마하고 재주를 시험하게 하였는데, 공이 늘 1등을 차지하니 선생이 매우 인정하였다. 이해에 향시에 입격하고, 연이어 무자년(1588)과 신묘년(1591) 과거에 합격하였다. 장시관(掌試官) 윤인함(尹仁涵)이 시제(試製)를 보고 감탄하기를 “조(趙) 아무개의 사장(詞章)은 과거 시험장에서 그칠 수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께서 서쪽으로 파천하였고, 삼경(三京)을 지키지 못하였다. 공이 막내아우 부정(副正) 조동도(趙東道)와 함께 망우당 곽재우(郭冉祐)의 진영을 따라 도와서 계획한 일이 매우 많았으니, 특별히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조정에서 과거를 시행하여 문무(文武)의 재능 있는 자를 뽑았다. 공이 이에 개연히 붓을 던지고 말하기를, “선비가 왕국(王國)에 태어나서 나라의 운명이 이와 같은데 어찌 고집하면서 군부(君父)의 어려움에 다급하게 대응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한번 시험 보아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으나, 공의 문학을 아는 자는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이해 겨울에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나랏일이 혼란하고 온갖 일이 구름처럼 쌓였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영의정으로서 여러 가지 신청(申請)과 주차(奏箚)를 한결같이 공에게 맡겼고, 공은 입으로 말하는 대로 문득 글로 받아썼다. 비록 황급하고 급작스러울 때라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반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복하였고 서애 어른께서 더욱 가상히 여겼다. 얼마 되지 않아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을미년(1595, 선조28) 7월 청하 현감(淸河縣監)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경산 현령(慶山縣令)으로 옮겼는데, 고을이 적들이 오는 요충지이므로 병화(兵禍)를 매우 혹심하게 입었다. 공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나라 창고를 채우며, 찾아오는 백성을 위로해 주어 안정시키니 유민(流民)이 사방에서 모였다. 이 때문에 명(明)나라 군대까지 소란을 피우고 사행(使行)이 줄곧 이어졌지만, 메아리처럼 신속하게 계책을 세웠으니 이웃 고을도 그 덕분에 안정되었다.
정유년(1597)에 변경의 장수 한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서 논계(論啓)에 섞여 들어갔으나, 조정에서 모두 공의 치적(治績)을 알고 마침내 정지하고 묻지 않았다.
무술년(1598) 어버이의 질병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기해년(1599) 겨울에 대부(大父) 판서공(判書公)의 상(喪)을 당하였고 이듬해 3월 유학산(留鶴山)에 장사지냈는데, 장례를 치를 때 공경히 하고 삼가서 아무 유감이 없었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북쪽에서는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였고 동쪽에서는 왜구가 변방을 침략하였는데, 임금이 병사를 뽑는다는 명을 내리자 공이 결연히 나아갔다.
병오년(1606) 가을에 고성 현령(固城縣令)에 제수되었고, 정미년(1607) 봄에 일 때문에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무신년(1608) 가을에 창원 소모장(昌原召募將)에 차출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 겨울에 본영 중군(本營中軍) 김명윤(金明胤)이 방백 강첨(姜籖)에게 공을 참소하였다. 강첨이 ‘공이 습진군(習陣軍)을 자기 집에 남겨서 역(役)을 지게 하였고, 부산성 수축군(修築軍)에게 명목마다 베[布]를 징수하였다.’라고 무함하여 아뢰었다. 이로 인해 공이 진주(晉州) 감옥에 갇혔다. 12월에 잡아 오라는 명이 있었고 이듬해 5월 공사(供辭)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다.
강첨이 다시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어 또 말하기를 “조(趙) 아무개의 공사를 보니 신이 아뢴 내용이 다 터무니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자, 광해군이 또 엄한 비답을 내렸다. 그러나 의금부 당상 정광적(鄭光績)과 김상용(金尚容)이 아뢰기를, “조 아무개의 원정(原情 정상 조사서)을 보니 애초에 범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간직한 바를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본도의 수신(守臣)에게 하문해 보기를 청하였다. 당시 순사 이정신(李廷臣), 병사(兵使) 임득의(林得義), 첨사 윤정(尹正)이 모두 “진주에는 습진(習陣)한 일이 없었고, 부산에도 축성한 역(役)이 없었습니다.”라고 복계(覆啓)하였다. 광해군이 이에 깨닫고 즉시 사면하여 돌려보냈다.
공이 진주옥(晉州獄)에 있을 때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이 소촌 찰방(召村察訪)으로 있으면서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었는데, 공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우물에 빠지면 다 돌을 던지는데 下石莫非人向井
한 푼 없는 나에게 객이 찾아오네 無金渾是客過門
뒤숭숭한 세상사야 그대 말 마소 悠悠世事君休說
유독 나의 빈천지교 소촌이 있네 獨我貧交有召村
경술년(1610, 광해군2) 겨울에 본생(本生) 어머니 권씨(權氏)의 상(喪)을 당하였고, 신해년(1611)에 연이어 허씨(許氏)의 상을 당하였는데, 거상(居喪)의 예절을 권씨의 상과 똑같이 하였다. 계축년(1613)에 삼년상을 마친 뒤 동계(東溪) 가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시를 읊조렸다.
정사년(1617) 순찰사 윤훤(尹暄)이 수군을 다시 나누어 방어하는 일로 공을 발탁하여 중영(中營)에 두었다. 9월에 교활한 간신(奸臣) 이경기(李景祺)를 비로소 영천(榮川)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느 날 밤 그 무리 백여 명이 이기영을 탈출시켜 달아났다.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할 즈음, 조정에서 잘못하여 달아나게 한 영천 군수(榮川郡守) 조찬한(趙纘韓)의 죄를 용서하여 삼도(三道)의 토포사(討捕使)로 차출하고 공을 본도의 토포장(討捕將)을 겸하게 하였다. 함정을 만들어 달아난 자를 잡게 되었는데 공이 잡은 수효가 많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봄 관찰사의 포계(褒啓)로 인하여 상을 내려 위로하였다. 천계(大啓) 임술년(1622)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이해 겨울에 오랑캐가 강을 넘어 유격(遊擊) 모문룡(毛文龍)을 죽이니, 일을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순변사(巡邊使) 유비(柳斐)가 종사관(從事官)에 공을 계청(啓請)하고 또 서신을 보내 나아오도록 권하자, 공은 명을 받들어 도성으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경운궁 위장(慶運宮衛將)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공이 병사를 모집하여 올라와 궐문 밖에서 시위(侍衛)하였다. 청운군(青雲君) 심명세(沈命世)가 탑전에서 공의 바른 소견과 소신을 아뢰자,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제수하였다. 고을 풍속이 무예를 숭상하고 유가의 학술을 경시하여 학교가 황폐해진 지 매우 오래되었다. 공이 고을에 도착하여 봉록(俸祿)을 덜어내어 보태 재목을 구하여 옛 규모를 중수(重修)하고 날마다 고을의 학자를 불러 부지런히 권장하고 감독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순변사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자, 상이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 공을 본도의 중영장(中營將)을 겸하게 하니, 공이 정예병(精銳兵) 수천 명을 뽑아 호가(扈駕)하였다. 수첩장(守堞將)이 되어서는 방어책을 힘써 아뢰었는데 한두 재신(宰臣)이 공을 문무의 재능 있는 자로 힘써 천거하여 장차 크게 쓰이려 하였으나, 결국 어느 훈척(勳戚)에게 저지당하였다.
정묘년(1627) 1월 오랑캐 아미타(阿彌陀) 등이 강홍립(姜弘立)을 앞잡이로 삼고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함락하고 아침저녁으로 서울을 침범하려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본도의 호소사(號召使)로서 공을 불러 호소영 중군(號召營中軍)으로 삼았다. 이해에 조정에서 처음으로 각 진(鎭)에 영장(營將)을 배치하였다.
6월에 진주 영장(晋州營將)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재차 상주 영장(尙州營將)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곧바로 괴산 군수(槐山郡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속히 부임하라.”라고 하였다. 7월에 고을에 도착하여 곧바로 이인거(李仁居)의 역변(逆變) 때문에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질병이 되었고, 5차례 사직서를 올려 체직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29, 인조7)에 경주 영장(慶州營將)에 제수되어 3년 동안 정사를 행하면서 은혜와 위엄을 번갈아 써서 구제하니,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계유년(1633)에 오랑캐 김투맹(金渝盟)이 동방을 침략하려 하자, 공이 시를 지어 스스로 맹세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동해의 깊이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不知東海深幾許
골짝에는 어찌 노중련이 없겠는가 峽裏寧無魯仲連
병자년(1636, 인조14) 12월 과연 오랑캐가 대대적으로 서울로 들어와 상이 남한 산성으로 행행(行幸)하였다. 공이 변란을 듣고 즉시 떨쳐 일어나 행장을 챙기도록 재촉하였으니, 당시 70세였다. 그러므로 오랜 친구와 자제가 대부분 만류하니, 공이 “나는 열조(列朝)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때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관찰사 심연(沈演)의 충원(忠原) 진영으로 달려갔으나, 심연은 목계(木溪)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체하고 전진하지 않았다. 공이 근심과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선봉 자리를 빌려주기를 청하여 한 번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심연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또 강화(講和)하자는 최명길(崔鳴吉)의 의론을 듣고 울분으로 인하여 등창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으니, 정축년(1637) 2월 8일이었다. 부고가 알려지자 원근에서 공을 알거나 모르거나 모두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하양현(河陽縣) 본사동(本寺洞)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이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인재로서 충효와 절의(節義)의 가범(家範)을 계승하여 익혔고, 서애(西厓), 학봉(鶴峯), 한강(寒岡), 여헌(旅軒) 등 여러 스승의 가르침을 친히 받았다. 학문은 넓고 지킴이 요약되며 뜻이 크고 기개가 높으면서 화락하였으니, 엄격함과 너그러움을 알맞게 하였고 내면과 외면을 다 길렀다. 임금을 섬길 때는 변란에 임해서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다스릴 때는 학문을 권면하기를 우선으로 하였다. 문장은 경악(經幄)을 맡기에 충분하였고 지혜는 한 지역의 책임을 담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명(聖明)의 세상이 여러 번 혼란한 변란에 처하게 되었으니,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에) 왜란이 극에 달하였고 계축년(1613, 광해군5)과 갑인년(1614)에 인륜이 무너졌으며) 병자년(1636, 인조14)에 나라가 그르치게 되었다.
공이 당초 출신(出身)하여서는 대개 훌륭한 일을 할 것 같았으나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 의리의 근원을 밝히고 출처의 바름을 지켜 세속과 부침하거나 사물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으려 하였으니, 바꿀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 관직에는 오랜 기간 있은 적이 없고 지위는 그 덕(德)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평생 붙잡고 지킨 것은 다만 한(漢)나라를 부지하려는 뜻과 주(周)나라를 높이는 의리였으니 끝내 모두 학문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이 집에서 지낼 때 독서를 격물(格物)의 요체로 삼고 거경(居)을 마음을 다잡는 방도로 삼았으며,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남을 이루게 해 주는 근본이라 여겼고 학문을 권면하는 것이 후세에 남길 모범이라 여겼다. 일찍이 손수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주역(周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써서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사기(史記)ㆍ제자백가(諸子百家),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 등 현인의 책들과 우리나라 현인의 문집을 구입하여 손으로 넘기며 눈으로 읽어서 마음속으로 깊이 깨닫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는 지필(紙筆)을 잡고 즉석에서 쓰는데 호방하고 성대하였으며, 지은 시는 온후하고 담박하여 억지로 꾸민 모양이 없어 세상에 시로써 이름을 떨친 자들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예컨대 용암(龍巖) 박이장(朴而章), 성극(省克) 김홍미(金弘微), 대암(大菴) 박성(朴惺), 인재(訒齋) 최현(崔睍) 등이 늘 공과 함께 산수 사이에서 종유하며 수창(唱酬)하였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일찍이 방호정(方壺亭)에 공을 방문하고 유람하다 자하동(紫霞洞)에 이르러 각자 신선 이름을 차지하였으니, 세속에서 벗어난 높은 풍모를 상상할 수 있다.
만년에 수립한 것은 특히 대의(大義)를 부지하고 깊은 수치를 씻는 데 있었으니, 정묘년(1627) 사격(辭檄)의 상소와 병자년(1636) 화친을 물리치는 시(詩)에서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뉘우치지 않아 결국 공을 등창병이 나서 죽도록 하였으니, 다만 천고토록 지사(志士)의 감회를 더할 뿐이었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거의 300년이니, 당시에 주고받은 서신과 이력(履歴)이 실린 조지(朝旨)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다행히 상자 속에 간직된 공의 시집을 공의 5세손 윤창(胤昌)과 응창(應昌) 씨가 덕욱(德煜), 승규(升奎), 항규(漢奎), 기철(基喆)과 함께 4책을 베껴 만들었으나 판각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동욱(東煜) 씨가 오래되면 될수록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나에게 수습하고 편찬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보건대 못난 내가 어찌 감히 이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마는, 외람되이 방계 후손의 항렬에 있으니 동욱 씨의 마음과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이에 감히 주제넘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그 전말을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조기영(趙基永)이 지었다.
주)
민추(閔樞):1526~1604. 자는 천극(天極), 호는 명지재(明智齋),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청송(靑松)에 거주하였다. 김성일(金誠一)과 신지제(申之悌)와 교유하였다. 저서로 「덕문정로(德門正路)」‧「안인의인론(安仁義仁論)」 등이 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생가(生家) : 조형도(趙亨道)의 생부는 조우(趙堣)의 아우 조지(趙址)이다.
우물에……던지는데 :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등을 돌리거나 도리어 해치는 세상 인심을 꼬집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志銘)〉에 “어느 날 이해를 다투게 되면 터럭만한 작은 이해에 대해서도 얼굴을 바꾸어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고, 함정에 빠지면 손을 내밀어 구하지 않고 도리어 떠밀고 또 돌을 던지기까지 하는 자들이 모두 이런 사람들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강홍립(姜弘立) : 1560~1627.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가 항복하였다. 이에 대해 광해군이 명나라가 패배할 것을 짐작하고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명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정묘호란 때에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난후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 뒤에 복관되었다.
이인거(李仁居) : ?~1627.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익찬(翊贊)을 지냈다. 강원도 횡성에 거주하다가 1627년 후금과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을 처단하고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병을 모아 난을 일으켜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하고 서울로 침범하려 하였는데, 원주 목사(原州牧使) 홍보(洪寶)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골짝에는……없겠는가 : 노중련(魯仲連)이 진(秦)나라를 황제로 섬기자고 주장한 신원연(新垣衍)에게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가 되어 천하를 다스린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하니, 제후들이 이 말을 듣고 연합하여 진나라 군대를 패퇴시켰다. 《史記 魯仲連列傳》
계축년과……무너졌으며 : 계축년과 갑인년에 잇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고,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모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려던 옥사가 발생하였다.
방호정(方壺亭) : 조형도의 아우 조준도(趙遵道)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 지은 정자로, 어머니의 묘를 돌보기 위해 지었다. 정자가 있는 곳의 경치가 빼어나,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方丈山)과 흡사하다고 하여 정자의 이름을 방호정이라고 하였다.
자하동(紫霞洞) :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정자가 있는 근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인지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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