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동치미 / 임동옥
늦가을 텃밭에 무와 배추를 심었다. 시금치, 콜라비, 당근도 파종했다. 배추는 모종으로 심었고 무는 씨앗을 뿌렸다. 초보 농부의 시행착오는 좌충우돌이던가. 한 구멍에 무 씨앗을 3~4개를 묻었다. 싹이 돋고 자랄 때 하나만 남기고 속아주어야 했다. 수확기가 되니 자잘하게 총각무 크기로 자랐다. 옆집 노총각은 농을 친다. “박사면 뭐 하시나. 농사일을 해봤어야지.” 맞다 자연의 법칙은 준엄하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아니다. 작물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도 처음 수확한 무니 내겐 중요했다. 용처를 찾았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동치미가 생각났다. 아내에게 동치미를 담가달라 부탁했다.
동치미는 겨울철 제철 음식이다. 동치미는 무를 겨울에 물속에 넣어 놓은 김치, ‘동침冬沈’에 접미사 ‘이’가 붙은 ‘동침冬沈이’에서 유래했다. ‘동침이’가 ‘동치미’로 변형된 것이다. 동치미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진한 사랑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겨울밤 겨울철 별미 군고구마를 먹을 때면 어머니는 뒤뜰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살얼음이 낀 동치미를 한 양푼 퍼다 주셨다. 이 시간부터 형제들은 흰소리에 신소리를 덧댔다. 미소로 추임새를 넣어주신 어머니가 있어 훈훈한 가족애를 키웠다. 주린 배 채우는 군고구마에 곁들인 동치미는 환상의 궁합이었다. 동치미 국물은 연탄가스 중독을 해독시키는데도 명약이었다. 동치미 국물에는 유황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연탄가스 해독에는 이 국물을 마셨다. 아버님의 숙취 해소에도 한몫했다. 무 속에는 베타인 성분이 풍부해서 숙취를 해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소화나 간 건강에도 좋다.
아내가 동치미를 담아주었으면 좋으련만 보름간 외국 여행 중이다. 영하의 날씨여서 무 수확을 더는 늦출 수가 없었다. 무를 뽑았다. 옆집 노총각에게 놀러 가서 동치미를 담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자기네 김치를 담고 난 후에 동치미를 담아주겠다고 했다. 항아리에 넣을 만큼의 매끈한 무들을 골랐다. 무를 물로 깨끗하게 씻고 잔뿌리를 떼고 무청과 잎이 붙은 부위를 칼로 손질해서 옆집으로 가져갔다. 무를 배추를 절였던 소금물에 담갔다. 부재료를 요구했다. 생강과 마늘 각 1kg과 쪽파와 갓을 한 단씩 가져오라는 거였다. 갓은 밭에서 야생으로 자라고 있어 가운데 작은 잎 부위만 선별했다. 마트에서 마늘과 쪽파는 손질이 된 것을 샀고 생강은 거친 상태였다. 집에서 손질한 생강과 마늘을 옆집에 가져다주었다. 얼간이 된 무를 서너 번 행군 후 물기를 빼서 장독대로 가져왔다. 석양에 노총각이 생강과 마늘을 믹서로 갈고 풀을 쑤어 넣은 양념을 넣은 양동이와 뉴슈가를 가져왔다. 무를 항아리에 넣기 전에 다시 무 끝 부위에서 중앙까지 칼집을 낸 후 무를 단지에 가지런히 넣었다. 이어서 갓 잎과 파를 작은 묶음으로 그 위에 올렸다. 다시 무를 넣고 파와 갓 묶음을 교대로 올렸다. 다음은 큰 함지박에서 소금 한 주먹과 양념과 뉴슈가를 넣고 물을 첨가하면서 간을 보고 난 후 항아리에 부었다. 한 번 더 양념과 소금을 첨가한 물을 항아리 목 부위까지 채워주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익을 거라고 했다. 하룻밤 지나 동치미 단지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갓과 파가 동치미 국물 위로 떠 올라 있었다. 어린 시절 어깨너머로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이대를 몇 개 꺾어왔다. 잎과 줄기를 깨끗하게 씻어 댓잎을 얹고 대나무 줄기를 십자로 걸쳐놓았더니 재료가 모두 물에 잠겼다. 이제 먹을 일만 남았다.
빨리 먹으면 좋으련만 기다려야 한다. 총각은 빨리 익게 실내에 단지를 놓았다고 귀띔했다. 나는 그냥 장독대에 놓아둘 거다. 총각은 말을 보탰다. “동치미는 구정 전까지 먹어야 해요.” 두 식구이니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심 쓰라고 했다. “무가 물러지고 우거지 끼면 먹기 거북합니다.” 지당한 말씀이다. 뉴슈가가 마음에 쓰여 설탕을 넣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단맛을 내는 용도는 같아요. 설탕을 넣으면 좋겠지만 무가 물러지고 국물이 끈적거립니다. 뉴슈가는 그대로의 동치미 국물 맛을 유지한답니다.”
2주가 지나니 동치미가 잘 익었다. 크리스마스 날 개봉해서 처남 남매에게 나눠주었고 큰집에도 딸에게도 조금씩 나눠주었다. 오는 손님에게 동치미를 내놓으면 참 맛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우리가 재배하는 작물은 절기에 따라 파종하고 수확해야 한다. 그 시기를 놓친 농사는 헛수고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 식물마다 때를 맞춰 심고 너무 베면 솎아주어야 한다. 동치미는 숙성기간을 거쳐야 한다. 동치미가 안 익으면 밍밍하고 오래 묵히면 우거지가 끼어 먹을 수 없다. 바로 자연의 이치다. 어디 작물만이 그러겠는가. 정답이 없다는 인생살이에도 분명 제때가 있다. 누구나 때를 맞춰 살면서 숙련 기간을 거쳐야 전문가 소리를 듣고 삶이 편안하다.
정년하고 초보 농사꾼이 되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있다. 뭐 하나 잘 안다고 우쭐댈 게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시대정신에 따라 살면서도 분명 ‘도는 자연을 법칙으로 삼는다’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숙성된 동치미를 통해 발효된 속이 깊은 어머님의 사랑을 느끼고 호흡하고 있다.
첫댓글 동치미가 먹고 싶어지네요.
이제 모든 것이 귀찮아지면서 조금씩 사다 먹곤하지만 예전엔 동치미를 꼭 담아 먹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는데요. 동치미는 사카린을 넣어야 맛이 좋더라고요.
한때는 사카린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지금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사용 가능한 식품으로 허용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카린은 사이클라메이드라는 성분이 발암 물질이라지만
나 지금까지 건재합니다
ㅎㅎ저도 텃밭에서 키운 무로 동치미를 처음 담아봤어요. 뉴슈가는 없어서 생략하고...
그래도 최고로 맛있는
동치미를 맛보았네요~☆
동치미로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게 똑같으네요!
작가님의 농부의 삶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즈음 생활은
쉬면서 놀면서 멍 때리면서
@임동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