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1년 <현대시> 등단
2002년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박진성-화계사
박진성-중심에 바친다
박진성-장미와 장마 사이
박진성-자작나무 앞에서
박진성-이명
박진성-야사(野史)
박진성-식탁 위의 컵라면
박진성-수궁에서 놀다
박진성-비 맞는 측백나무
박진성-물고기는 울지 않는다
박진성-론강의 별밤, 테오에게
박진성-크리스틴을 그리며, 테오에게
박진성-발작 이후, 테오에게
박진성-동백신전
박진성-나쁜피-그 겨울의 삽화
박진성-나쁜피-1996년
박진성-기억-1996년
박진성-귤
박진성-관음
박진성-고소공포증
박진성-겨울, 안면도
박진성-갑사에서 놀다
박진성-11월, 화계사
박진성-밤나무에 묻다
박진성-폐가
* 화계사 - 박진성
저 새는
아까부터 대웅전 근처를 날고 있네
삼각산의 어깨 화계사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네
해의 혓바닥 삼각산 넘어가면서
절 마당에 佛畵를 그리네
넘어가고 싶은 게 너 뿐이간디,
둥 둥 둥 둥
木魚 두들기는 소리
* 중심에 바친다 - 박진성
- 윤중로에서
은밀한 중심으로 들어가요
조무래기 벚꽃들 더 가벼워지려고
자신의 탯줄 끊고 온 힘 다해 떨어지네요
아무렴, 한 생애가 바닥에 닿기 쉬운가요
숨 가쁘게 공중제비 하는 이파리들 속에서
팝콘처럼 여기저기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무더기로 죽어야 名所가 되는 거죠
떨어지다가, 강바람 얼얼한 얼굴에
달라붙는 벚꽃 한 잎이 살갗을 긁고 있어요
한 잎의 벚꽃이
수액 빨던 힘으로 나를
삶 이쪽 편으로 내어 미네요
입술 만지다가 팔뚝에도 머물렀다가
허리춤 근처에서 미끄러지고 있네요
중심에 닿고 싶은 거죠, 접 붙고 싶다는 거
아니겠어요?
輪中路,
잔바람에 둥둥 떠올라서 이리저리 흩날리는
輪回를 보아요
아스팔트에 달라붙어서 신음 소리도 내지 않고
또 한 생애를 점화시키고 있는
여자들의 깊은 자궁 속이랍니다
* 적벽 가자 - 박진성
적벽을 일 년 품고 病의 낟알을 털어 냈다 서울서 몸 버리고, 형아 내 몸에 열이 많아서…… 적벽강의 붉음은 울분이다 서울서 떠나던 날 夕刊신문에 청계천 복원 기사 늦은 저녁 밥알처럼 서걱거렸다 이천 이년 시월의 적벽 강물은 쉽게 울분으로 水位가 높아지는데…… 청계천은 솟아오를까 …… 시 쓰던 정현이형 목매달고 그 해 겨울 언 강 깨고 그이는 氷魚로 떠올랐다
울분을 고요로 바꾸는 힘으로 자주 눈이 내렸다 後生 같은 건 없다, 라고 그이는 말했지만 오래 열어 보지 않은 이메일 속에서 진성아 적벽 가자 적벽 가자, 청계천에서 부화하고 있었던 걸까
텅 빈 물소리에 가득한 고요, 그이는 서울서 적벽 가는 길 어디에 누웠나 물빛을 죽음이라고 쓰지 말아야겠다 적벽 가자 放生 하자, 고요는 힘이 세다
* 장미와 장마 사이 - 박진성
장미가 시들면서 기온이 올라가고
습도가 높아졌다 추악하게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장미가
저기압의 구름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28번을 타보면 안다 우이동에서부터
강남 일대까지 장미 軍團이 서울을 점령했다
오월의 겨드랑이나 허벅지 같은 곳 이를테면
홍릉 수목원 버드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은 키스를 해댔다
이파리에서 가시로 점프하는 벌레, 어머니는
김치를 가방에 담아서 올라왔다 등이 굽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아이들은 철수 바보, 영순이 병신
이런 글자들을 벽에 陰刻했다 어떤 절실함도 없이
애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새벽
측백나무 뾰족한 가시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장미, 장미, 장미의 계절, 공중에서 부유하는
날벌레 떼가 가로등에 모이기 시작했다
반지하 창문 아래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어도
뿌리까지 젖지는 못했다 나무의 뿌리 깊이에서
다운받은 음악 파일을 밀어 올려도
옆집 여자는 카드 빚을 진 아들과 자꾸만 싸웠다
장마가 올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습기가 파고들겠지 어서 오시라
모든 것이 부패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
방부제처럼 나는 혼자서 싱싱하리라
* 자작나무 앞에서 - 박진성
동이 터 오는 새벽에
자작나무 앞에 누웠다
관례와도 같은 사랑을 지나고
내 몸에는 熱이 많았다
千變萬化의 하늘이 다만 네 심장이다
낮은 목소리의 어머니,
열어두어라 타오르고 싶지 않은 자에게 사랑은
불붙이는 법 없다
자작나무 이파리 같은 손으로
내 이마를 만졌다
나는 순결한 태양 앞에서 얼굴 붉히고 있었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내 몸 속으로
어머니 들어오셨다
땅 속에서 혼자 呻吟하시는 어머니
자장, 자장, 자작나무 내 어머니
* 이명 - 박진성
1
귓속으로 기차가 들어왔다
기차는 며칠 째 철로를 달리고 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귀,
해안선이 일제히 내 안으로 휘어진다
기차는 귓속을 뚫고 관자놀이 지나
심장까지 온다 바퀴 소리가 온 몸의 혈관을 달군다
2
정맥 어딘가에
그대의 음성이 엎질러졌을 뿐
깨어있는 것들은 모두 불안했다
아홉 번째 다리에 서 있는 기분이야
발밑으로는 강물 소리가 들려
폭죽이 터지는 하늘은 어떨까
시베리아 한 가운데를 달리고 싶어 빠리까지 말야
온갖 타악기를 태우고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3
기차가 왼쪽 심장으로 나간다
그대를 배웅하러
알프라졸람이 온 몸 으깨어서 간다
진동이 멎을 것이다 耳鳴,
열차에서 내린 그대가 다시 하행선을 탄다
귀 밖으로 멀어지는 그대
그대는 어디에서 파도를 몰고 오는가
* 알프라졸람 : 항불안제의 일종
* 야사(野史) - 박진성
응급실은 불안의 눈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빠, 유리가 눈에 박혀서… 병원 들어서기 전에 자세히 하늘을 봐뒀다 내 안 통째로 훑고 가는 나무들의 합창, 누이에게로 가는 길은 숲이었다 알 수 없는 빛깔이 쏟아져 흐르던 긴 긴 길… 누이는 나무들을 다 집어먹은 밤처럼 고요에 기대어 떨고 있었다
外傷은 없습니다 …… 오빠,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아서…… 내 또래 의사가 차트에 무언가 적어 넣었다 이 년을 정신병동에서 보낸 후 누이는 작은 나무를 닮아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숲 소리가 누이의 몸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진영아집에가자 진영아집에가자 누이의 눈두덩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환한 세계 하나 맑게 눈 뜨이는 소리, 그걸 비명이라고 적지 말자 나는, 누이를 업고 밤하늘로 짐승처럼 걸어 들어갔다
* 식탁 위의 컵라면 - 박진성
라면국물이 며칠 째 고여 있다 먹다 남긴 면발은 형체를 알 수 없이 부패했다 어떤 연대기도 없이 라면국물은 색깔 바꿔 가는가 국물의 표면은 편년체다 검은 연대로 둘러싸인 주황색 부분은 병마용 발굴된 古代 섬서성의 황토흙빛,
중세가 암흑 시대라는 해석은 부패한 면발을 옹호하기 위한 수작이다 검은 색을 통과해야만 그 다음으로 갈 수 있다 나는 얼마나 열병 같은 사랑을 부정해왔는가 밤의 한강다리 건너면서 눈 질끈 감고 흔들렸는가 마침내
마침내 푸른색의 곰팡이여 완벽하게 썩은 채로 스티로폴 그릇 속에서 푸르게 타오르고 있는 곰팡이여 썩을 수 있음의 至福을 누리고 있는, 돌아갈 수도 없는 참혹한 내 사랑이리니 네 빛깔이 여기까지 왔구나
* 수궁에서 놀다 - 박진성
할머니가 죽었다… 육십 년 전 洪水로 大平里 들이 물에 잠기고 신작로 사거리 방앗간에서 고추를 빻으셨다 천 마지기라던가 논이 순식간에 몹쓸 땅으로 변하고 할아버지의 늦은 귀가, 할머니 물빛 손이 싸전 공터로 금강의 물을 끌어왔다
오일장 끝나는 해거름에 당신은 자그마한 내 것을 씻고 또 씻으셨다 붉은 다라이 안에서 나는 물고기였다 할아버지가 다라이 통째로 엎었을 때, 나는 금강으로 나아갔다 할머니 물빛 주름이 내 몸에 찍혔다
수초 같은 나무들 사이로 할머니 작은 텃밭, 그곳에서 나는 자랐다 옥수수와 붉은 고추에게서 고요를 배웠다 열매를 밀어내는 식물 뿌리보다 더 깊은 강이 어디 있는가
할머니가 죽었다… 폐를 자르고 입을 막고 아가미로 숨을 쉬겠다 애초부터 나는 물고기였으니 저녁이여, 강이 나를 가두면 흰 고무신 속에다 水宮을 지으리니 나는 할머니가 放生한 물고기였으니
* 비 맞는 측백나무 - 박진성
술 먹고 늦게 귀가하는 길
비 맞는 측백나무를 보았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뾰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걷다가 비 맞는
측백나무에 다가갔다 굵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몸 으스스 떨고 있는
한 마리 짐승을 보았다
주먹 쥐고 측백나무를 두들기는데
알 수 없는 미움이 단단하게 미끄러졌다
낙차 큰 빗방울이 이마에 와 닿았다
비 맞는 측백나무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물고기는 울지 않는다 - 박진성
어느 날 내가 부드러운 물의 그물 속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다 나의 몸이 卵生하는 부족의 알이었음을 알았을 때 둥근 바위에 몸을 뭉개면서 큰 물 지기를 바랬다
물 속의 아득함, 물 속의 막막함, 물 속의 … 눈물 흐르기 전에 먼저 출렁이는 一波萬波의 세간 속에서 출렁거림 없는 물 밖의 세상을 꿈꾸었을 때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는데
그러나 날 때부터 우는 방법을 잃어버린 나는 우우, 물 속의 울림보다 더 큰 울음이 나의 몸 안에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느러미에 水草가 닿을 때나
물 밖의 공기 포르르 물 속으로 밀려들어올 때
부드러운 물결 눈 어루만지며 대신 출렁이고 있을 때,
물길과 물길은 행간처럼 깊어지고
울음보를 움켜쥔 나는 쉼표처럼 더듬, 더듬,
물 속으로, 없는 길 내며 갔던 것이다
* 론강의 별밤, 테오에게 - 박진성
테오,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네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 소리가 들리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男女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캔버스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어딘가로 나를 태워 갈 것 같기도 하네
테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네>* 타라스콩, 흔들리는 기차에서도 별은 빛나고 있었다네 흔들리듯 가라앉듯 자꾸만 강물 쪽으로 무언가 빨려 들어가고 있네 강변의 가로등,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다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네 나는 노란색의 집으로 가서 숨죽여야 할 테지만 별빛은 계속 빛날 테지만.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리네 테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트왈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네
* 1888년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인용
* 크리스틴을 그리며, 테오에게 - 박진성
며칠 동안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크리스틴, 테오야
그녀 몸 지나간 욕망들
어떤 빛깔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 몸 굴곡 따라가는 일은
사창가에서 나오던 새벽만큼이나
질기고 지루한 시간이 필요하단다 자꾸만
넘어지는 연필, 그녀는 끝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젖꼭지에 연필 끝 닿았을 때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뭉갰다
色을 가질 수 없는 영혼이
팔레트를 뒤엎을 것만 같다 테오야
이 여자에게 어떤 색깔을 입혀야 하나 창녀들
심장이 토해내는 듯한 홍등가의 색깔과
헤이그 노동자들 헤어진 작업복 군청색…
어떤 영혼들은 자신들 색깔을 튕겨내는 것만 같아
테오야 이제 막 그녀 손가락을 그렸다
길게 뻗은 팔목은 이 여자를 새처럼
날아가게 만들 것 같구나 저 팔목,
어떤 색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내 영혼의 빛깔이란다
내 심장이 그녀 가슴에 닿는 순간
색칠하지 못한 이 그림의 여백은
그녀 심장 속에서나 꿈틀대겠지
귓속에서 웅성거리는 소용돌이 테오야,
그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하나
* 발작 이후, 테오에게 - 박진성
- 생 레미 요양원에서
오후에 발작,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다
간호사들은 대체로 친절하지만
캔버스를 자꾸만 치운다 팔레트와 물감도
훔쳐간다 도대체
그림 그리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튜브를 먹으면서 빨간색 물감만
집요하게 빨았다 입술에 묻은 물감은
피처럼 내장으로 번지고
내 영혼이 측백나무처럼 통째로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저 나무의 뿌리라든가
보이지 않는 물관을 팽팽하게 부풀려주는 일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떠오르고 싶은 자 떠오르게 하라
죽음으로도 별에 닿을 수 없다면
내 영혼에 구멍을 내어주마
구멍 틈새로 별빛이 빛날 테고 너는 놀라서
이곳으로 달려오겠지만,
침대 밑에서 자고 싶은 자 침대 밑에서
자게 하라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벌레처럼
침대 밑을 기어다니더라도 그것은, 테오야
낮은 곳을 그리기 위해 내 영혼을 대어보는 거란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새벽에 몰래 그림 그리는 데 빗방울 사이
권총이 쇠창살로 들어오고 있었어 창문 틈으로
소용돌이치는 측백나무의 흔들림이 들린다
저 나무도 나처럼 발작,
하고 싶은 거겠지만
나도 안다 이 비 그치고 난 후에 맺혀 있을
이파리마다 맑은 물방울들.
캔버스 안에서, 낯선 사내가 나를 보고 있다
측백나무 속이란다, 테오야…
* 동백신전 - 박진성
동백은 봄의 중심으로 지면서 빛을 뿜어낸다 목이 잘리고서도 꼿꼿하게 제 몸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파르테논도 동백꽃이다 낡은 육신으로 낡은 시간 버티면서 이천 오백 년 동안 제 몸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먼 데서부터 소식 전해오겠는가 붉은 혀 같은 동백꽃잎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쯤 주워 내 입에 넣고 싶다 내 몸 속 붉은 피에 불지르고 싶다 다 타버리고 나서도 어느 날 내가 遺蹟처럼 남아 이 자리에서 꽃 한 송이 밀어내면 그게 내 사랑이다 피 흘리면서 목숨 꺾여도 봄볕에 달아오르는 내 전 생애다
* 나쁜 피 - 박진성
- 그 겨울의 삽화
그곳에서 아프지 않은 것들은 모두 추방 되요 정신병동이 슈퍼마켓보다 많은 나라, 사람들은 신경안정제 대신 자작나무 이파리를 따먹죠 모두가 흰옷을 입은 나라, 서로의 벌거벗은 심장에 총을 겨누고 울곤 하죠 그곳에서 나는 함부로 말하는 법을 배웠어요 당신 아픔은 가짜야, 우리들 어머니는 창녀야, 함부로 말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고 나는 떠나간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나 보냈어요
사람들은 신경안정제를 강으로 던졌습니다 환경청에서 수질 검사 나오고 기자는 오염실태를 고발했지요 항우울제 성분이 다량 검출되었다는데 아이들은 나무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 노인들은 강가에 모여 자신들 몸을 닦고 있었어요
첫 눈이 왔구요, 빻아 놓은 신경안정제처럼 초등학교 운동장에 쌓였어요 슬금슬금 개들이 돌아다니고 의사들이 잠입하고 있었지요 신경안정제를 눈 속에 섞어 공중에 흩뿌리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병실에 숨어서 영화를 보거나 화투를 쳤구요 나뭇가지마다 눈이 걸려 있었지만 아무도 그걸 눈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 나쁜 피 - 박진성
-1996년
그 겨울 내내 잠을 자도 羽化하지 못했다 애벌레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병실 창문으로 간신히 스며들던 햇살을 흰 옷 소매로 털어 냈다 어머니 창문 좀 닫아주세요 다알리아 화분을 입에 물고 어머니가 병실로 들어왔다 약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 날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들었다, 슬금슬금 장미 이파리 위로 기어다니는 벌레의 뒷다리, 꿈속에서, 신경 세포와 세포 사이로 추락하는 벌레의 신음 소리. 잠자지 않았는데 간호사가 아침밥을 은쟁반에 담아왔다 자기들끼리 키들거리는 간호사들, 어머니 제발 집에 가서 주무세요
306호 병실 사람들은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들었다 간호사 누나, 잠자는 주사 한 대만 놔주세요 아무 데나 쏟아져 있는 커피의 흔적, 늦게 잠자고 일찍 일어나 병원 앞마당에서 보건 체조했다 창문 틈으로 나뭇가지가 만져졌다 새벽 이슬에 몸 적시고 있는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었다 나무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옹이 박힌 다리로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나갈 수 없는 새벽, 철문으로 닫혀진 병동 끝에서 성장이 멈춘 나무가 되었다 곪아 가는 상처에 입을 대고 앉아 더 깊은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가 되었다 잠자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걸 보았다
* 기억 - 박진성
-1996년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비등점에 다다른 불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낙하한다. 낙하하면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도 하고 몸이 비틀어지는 순간의 환호성을 단말마로 내지르기도 한다.
1996년에 나는 병원에 있었고, 명백히 유폐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자처한 고립이었지만 내가 고작 나의 육신과 영혼을 방치할 수 있었던 곳은 대전에 있는 병원의 3층, 병실이었다. 간호사가 밤마다 와서 잠자는 주사를 놓아주었고 내가 잠자는 동안 어머니는 울었다. 잠 속에서, 끊기지도 않고 집요하게 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신경 속에서 어머니는 계속 울고 있었다. 어떤 단호한 다짐도 항우울제 속에서 쉽게 우울해졌고 병동 근처의 산책길, 꽃을 틔우려고 돋아나고 있는 새순들은 지옥이었다. 아버지의 어깨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고, 간신히 깨어난 아침, 간간이 들려오는 아이들의, 죽어라 악쓰며 등교하는 소리 속에서 나는 잠들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가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신의 큰아들이 원인도 모른 채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울 수도 없었다. 나는 안다. 밤의 응급실에 수시로 드나들던 아버지가, 큰아들 찾으러 오는 길마다 얼마나 핸들을 놓고 싶었는지… 동생은 조수석에 앉아서 흔들리는 핸들을 보아야했고, 아주 많이 술을 마시고 교복을 입은 채로 내 앞에 나타나서는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돼' 라고 말했다.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나도 안다. 피는 일종의 폭력이라는 것을. 나쁜 피를 가진 나는 고집스럽게, 우악스럽게, 약을 꼬박꼬박 먹어가면서 대학시험을 치뤘고 대학시험이 끝나고 3일 후에 할머니는 죽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한 공간에서 동시에 같이 울었다. 너는 울 자격도 없어, 라고 동생은 말했지만.
불행은 전염이다. 그리고 불행이 남긴 상처는 소멸하지 않는다. 이 육신과 영혼에게도 양심 같은 것이 있다면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는 것만이 사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나쁜 피가 터져 나오는 혈관이었고 자라지 말아야 할 나무였다. 나무들은 봄이 오면 그래서 비명 소리를 내는 것이다. 내가 이끌어 온 독선과 아집, 그것은 내 것이었을까. 내 기억의 부름켜 1996년, 나는 그곳에서 한발도 내딛지 못했다. 용서하시라, 나도 내 몸에 묻은 그대들의 지문 때문에 소용돌이치고 있다. 한 발도 못 내디디고 반 坪, 자그마한 감옥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다. 필사적으로 그대들과 멀어지기 위해서…
어머니, 제발 집으로 가세요… 라고 나는 아직도 말하고 있다.
* 귤 - 박진성
귤 몇 개 보도블록으로 굴러 떨어진다 껍질 속 열매들의 수런거림을 나는 듣는다 노을에 녹녹하게 달궈진 귤 하나 집어들었을 때 참을 수 없어 터져 버리는 껍질 속 알맹이들의 환호를 나는 듣는다
그것들을 감추려고 귤은 보드라운 껍질 둘러매고 있었던 거다 당신 가슴 한가운데 쭈욱 찢었을 때 오래 되어서 시큼하고 맹글맹글하게 익어있는 당신 마음도 따라 온 것이다
당신의 심장 여러 개를 주워 먹었던 거다
* 관음 - 박진성
물소리는 제 수위를 넘지 않는다
수령 사백년 느티나무 가지들
일제히 계곡 쪽으로 잎 털어내고
아라리 아라리 물소리 몸에 들인다
물빛 본 적 있어요?
지루한 잔기침이 토해내는 病의 지류를 여자는
손에 담는다 물은 쉽게 쏟아져서
느티나무 뿌리에 스밀 것이다
손가락을 허공으로 쫘악 펴는데
풍경(風磬) 지느러미 파닥거린다
여자 손잡고 木魚 빈 배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물 빛 손 빛
손을 잡으면 물소리 들릴 것인가
그이의 몸에는 물고기가 산다
* 고소공포증 - 박진성
태백을 관통하는 불안은 경포호 수면에 이르러서야 고요해진다 수면 털고 일어서는 새떼들, 어떤 경계의 짐짝들을 자꾸만 파닥거리는지 해발 영 미터의 바람이 여인숙 창틈으로 불어온다 강릉 일박… 零은 불안의 높이인가 바닷바람 무늬 안고 다시 오르는 대관령,
초조의 세포들이 태백의 심장으로 혈을 내리라… 불안의 몸을 밀어올리는 건 11이거나 23 이런 숫자 아니었던가 신경증 강박증 노이로제 이런 이름 아니었던가… 급한 경사로 경포 바람 무늬 물결 무늬를 태백은 제 몸에 들인다 불안은 五十川 지나 강릉으로 흐를 것이고 초조는 송천땅 지나 남한강의 지류에 몸 섞을 것이다 대관령이여,
대관령이여 언제 자신의 높이로 흔들려본 적 있었는가 태백은 高所의 불안을 제 몸으로 들인다 들이면서 평평해진다 고위평탄면 고랭지 배추 주름 깊어지는 소리 들릴 것이다
* 겨울, 안면도 - 박진성
잠을 자지 못하는 날엔 하늘보다 먼저 소나무가 흔들렸다 海松 지나 바람 센 바닷가 걷는다 물결 대신 바람의 결 따라 안면도 일대 흔들리고 깊이 잠든 기억 몇 개 성긴 눈발 속 서성거린다 당신은 언제부터 예쁜 수련꽃을 피우기 시작했는가 침침한 시야 너머 당신 발자국 하나 둘 뒤 따라 오고 바람 속에 세운 나라들이 흔들린다 내 안 통째로 훑고 가는 바람과 성긴 눈발이 그려내는 불안한 삽화 몇 점과 안테나 잘 서지 않아 핸드폰 높이 들어야 했던 그리운 안부만 海心 같은 심장으로 자맥질해 들어온다 왜 당신의 음성은 가라앉는가 어떤 바닥을 찾아서 자꾸만 가는가 겨울 안면도, 당신의 깊은 잠결 속으로 내 발자국 따라 들어가면…… 나도 당신도 얼굴 지워지고, 나의 不眠과 당신의 安眠 사이로 눈 내린다 이 섬에서는 영원히 잠들지 못해도 좋으리
* 갑사에서 놀다 - 박진성
상수리나무가 도토리묵을 소환할 수 없듯이
내 몸은 병 以後다 11월 갑사
술 친다,
조껍데기 동동주가 조껍데기로 환원될 수 없듯이
나는 병에 대해 너무 함부로 말해 왔다
도토리를 알약에 기대지 말자
漫醉해서 대웅전 간다
상수리나무 건너 상수리나무,
대웅전이 절 안에만 있는가 오체투지로
간다 술 취하면 어째서
뿌리를 더듬게 되는가
예리하게 절 마당을 자르는 불빛 한 칼
엎드려 구토,
病이여,
네가 해탈하겠느냐 내가 해탈하겠느냐
토사물이 은행잎에 섞여
지장보살의 병을 받아내리라
상수리나무 거기 있는 이유 알겠다
칠 년 간 몸에 쌓았던 알약,
물관에 섞여 잎을 물들인다
상수리 상수리 독경 소리,
부처다
* 11월, 화계사 - 박진성
11월이네, 보헤미안처럼 떠돌다 나는
華溪寺로 가지 우우, 비가 왔으면 좋겠어
11월에 비가 내리면
November Rain*, 너에게
장미 한 다발을 안겨줘야 할 지
권총을 들이밀어야 할 지 제발
떠나지만 마, 우우, 28번 버스 타고
화계사 가네
수유여중 학생들 겔포스처럼 언덕으로 흘러내리고 있어
낙엽 토해내고 있는 은행나무 지나
冥府殿,
지장보살에게 한 번 절하고
무독귀왕에게 한 번 절하고
염라대왕에게 한 번 절하고
수상한 마음들일랑 죽음 쪽에 눕게 하고
명부전 나와 일주문 나와
화계사를 빠져나가네
교복 입은 아이
느티나무에 기대어
經典처럼 핸드폰을 더듬고 있네
저 여학생, 화계사에 부려놓고 온 내 사랑을 읽고 있나
수유 일대 갑자기 비,
빗속에서 사람들 몸 구부리거나
11월처럼 두 팔 올려 벌받는 자세네
핸드폰을 접고 여자 아이
느티나무에 기대어 울기 시작하네
* November Rain : Guns N Roses의 노래
* 밤나무에 묻다 - 박진성
절름발이 명수 아버지는 간암 선고받고 목매달았다 신촌리 윗말 밤나무에 매달려 밤이 되었다 어린 내 볼에 그가 얼굴 부비면 밤송이처럼 환하게 열리던 공포, 한쪽 다리에 월남 원시림 품고 그이는 금강으로 갔다
가난은 울음이 아니다. 江心으로 나아가는 배는 침묵을 싣고 무거워진다 다리뼈 하나만큼 안개 절뚝이며 살갗에 닿는다 나는 흐린 시야에 기대어 뻣뻣한 다리를 만지작거린다 윗말 명수네 우물 속 밤송이 몇개 제힘으로 열리고 있으리라
가난한 밤나무가 금강 물줄기를 끌오올리는가
배가 먼 산에 매달리고 있었다
* 폐가 - 박진성
제 몸 뒤집은 밤나무 한그루 뿌리를 만지는데 무너진 토담 사이 뱀들이 기어다닌다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울울창창 밤나무숲, 유월의 밤나무숲은 弔花다 솟아오르려는 듯 흰 꽃 매달고 서 있는, 유월의 밤나무숲은 성가대다
밤나무 패서 만든 장작은 잘 말라 쉽게 불타오를 것이다 끝내 이 집에서 내려오지 않던 할머니가 쌓아둔 장작더미, 외할머니 다리처럼 死後强直오는지 뻣뻣한 침묵으로 집을 떠받치고 있다 광목천 걷어올리고 당신 몸만지다 배꼽 근처 옹이처럼 돋아난 종기를 보았다 이제 뿌리는 수액을 밀어올리지 않는다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잔솔가지 위에 밤나무 장작을 얹는다 밤나무는 저리 쉽게 전화되기 위해 자신의 육체 말리고 있었던 거다 마른 장작 타닥타닥 불티 뿜어내고 耳鳴처럼 그레고리안 성가 들린다 밤나무숲은 머지않아 이 집으로 내려올 것이다
폐가는 음악처럼 타오른다
첫댓글 넘어가고 싶은것이 너 뿐이간디!!!!!!!!!!!!!!
자장, 자장, 자작나무 내 어머니 --ㅎㅎ 언제 이 시인 어머니 되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