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복(金知復)
자는 무회(无悔), 호는 우연(愚淵),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문평공(文平公) 괴애(乖厓) 김수온(金守溫)의 후손이고, 김각(金覺)의 아들이다.
비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충효(忠孝)와 의열(義烈)로써 안팎으로 광채를 띠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보통 아이와 달라 벌써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할 줄 알았다. 15세가 되어서는 폐백을 갖추어 나의 선조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을 찾아뵈었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여러 원로와 도의(道義)로써 서로 어울렸다. 산천서당(山川書堂)에서 은거하면서 날마다 공부할 분량을 두었으니, 몇 년 되기도 전에 문장과 덕행이 크게 진전되었고 옛사람이 말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무릇 경전(經傳)을 읽을 때는 그 뜻을 탐구하며 음미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마음을 함양해 나가고 행동을 교정해 나갔으니, 점점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자식된 분수를 따르고 상정(常情)을 따라 과거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었지만, 그 뜻은 또한 빼앗기지 않았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진사(進士)에 입격하고, 이윽고 광해조의 정사가 혼란하고 함정이 사방에서 나와서 세상이 바야흐로 동요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설 수 없었다. 공이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영남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을 참형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지었는데, 상소의 내용이 오싹하여 듣는 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인조(仁祖)가 즉위한 뒤에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경안 승(慶安丞)에 제수하였으나, 곧 파직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2) 봄에 이괄(李适)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여 임금이 남쪽으로 몽진(蒙塵)하였다. 공이 고향에 있다가 변란을 듣고 창석과 함께 군병을 부르고 군량을 모으자 군영이 안정되었다. 역적이 평정되자 곧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을축년(1625)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형조의 좌랑으로 옮겼다. 병인년(1626)에 병조로 옮겼다. 정묘년(1627)에 강홍립(姜弘立)이 노병(虜兵 청나라 병사)을 이끌고 쳐들어와 평산(平山)에 이르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호소사로 명을 받들었다. 이에 공과 창석,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 완석(浣石) 이언영(李彥英)이 후생을 격려하며 선봉장으로 의병에 나아갔다. 3월에 화친이 이루어져 군사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예조로 옮겼다가 병조의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무진년(1628)에 연이어 태복시 정(太僕寺正),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29) 겨울에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나아갔다. 정사를 펼칠 때 백성을 너그럽고 소탈하게 대하는 데 역점을 두어 아전과 백성들 모두 편안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13)에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있으면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7월에 맏아들의 상(喪)을 당하였다. 8월에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제수되어 도성에 들어가 겨우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는 병이 나서 갑자기 사예(司藝)에 전직되었다가, 병이 위중해져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임종할 때 칠언절구를 읊어 동계(桐溪)에게 부쳤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사대의 유래는 역시 공허한 법이니 四大由來亦假成
한번 죽고 사는 데 부디 놀라지 말게 一番生死不須警
다만 원하노니 상공은 힘을 기울여 但願相公爭致力
나의 유골 거두어 선영에 묻어 주길 好收吾骨到先塋
대개 죽고 사는 근원에 통달하고 선영이 멀리 있는 것을 슬퍼하였으니, 평소 마음을 알아주는 잘 맞는 벗에게 간곡하게 뜻을 전한 것에서 공의 바른 학문을 징험하기에 충분하고 그 시운(時運) 또한 알 수 있다.
아, 공의 학문은 쇄소응대(洒掃應對)를 수단으로 삼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어버이를 존중하는 것을 귀착점으로 삼았으니, 확충하고 수양하는 데 방도가 있었고 체(體)와 용(用)을 겸비하여 오직 《소학(小學)》의 내용을 따라 준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또 자처하지 않았으며 빈말하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오직 실천하는 데 힘써 착실하였다. 그러므로 임자년(1612, 광해군4)의 상소와 갑자년(1624)과 을축년(1625)에 의병을 일으킨 일이 비록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그 의리와 강상(綱常)은 모두 또한 미관말직(微官末職)이라 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혹여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70년을 전야에서 당당하였으니 경영할 재주 지녔고, 10년 동안 낭서에 있으면서 만난 처지에 따라 평소처럼 편안히 여겼다. 남들이 그 기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천명을 즐기고 천명을 아는 참됨을 얻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창석 선생이 석천(石川) 선생의 비문을 썼는데, 그 내용에 “아들 아무개는 훌륭한 명망이 있어 시종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직무를 다하였고, 군현을 다스리면 백성을 아끼는 데 힘썼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충분하니, 내가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을 붙이겠는가.
공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서울과 시골의 벗들이 주선해 주었으며, 만사(輓詞)와 뇌사(誄詞) 등 애도하는 작품은 대부분 조정 거공(鉅公)들의 글이었다. 동계옹(桐溪翁)의 만사는 다음과 같다.
문장으로 일찍부터 서로를 지기로 인정하니 文章早歲許相知
물처럼 담박한 우정 노년에도 쇠하지 않았네 淡水交情老不衰
나는 단정하고 두터운 그대 자질 사랑하였고 我愛君姿端且厚
그대는 소박하고 어눌한 나의 성품 아꼈다네 君憐我性朴而痴
맞댄 책상은 비 오는 밤 마음 토로한 곳이요 連床夜雨論心處
서리 내린 아침은 회 쳐서 술잔 잡을 때였네 斫膾朝霜把酒時
임종할 때 지은 시구에 참으로 비통하였더니 臨終詩語誠悲意
상여를 선영으로 돌린 것은 성상의 자애라네 廻櫬松邱是聖慈
동계옹이 남한산성에서 자결하려 했던 일이 공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있었으니, 정묘년(1627, 인조5) 이후로 북쪽 오랑캐의 근심으로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은 상황이 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공은 비바람 치는 한밤중에 근심으로 마음 아플 때면 강개한 의론이 다만 어찌 이에 있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고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지만, 맑고 담백하여 전할 만하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 5월에 태어났다. 숭정(崇禎) 을해년(1635, 선조13) 10월 11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68세이다. 동계가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이 삼도(三道)의 감사(監司)에게 공의 영구가 가는 길을 호송하게 하도록 명을 내렸으니 특별한 예우이다. 아, 이듬해 병자년(1636) 3월에 추산(錘山) 선영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14년이 지난 뒤 무자년(1648, 인조26)에 일찍이 소무 공신(昭武功臣)에 녹훈된 일로 공에게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추증하였다.
지금 220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현양하는 시를 지어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후손 김병수(金秉秀) 씨와 종예손(從裔孫) 김곤수(金昆秀)가 직접 쓴 가장(家狀)을 보내 나에게 부탁하기를 “묘소에 비석이 없어 후손에게 보일 수 없으니, 그대는 생각해 달라.”라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삼가 가장을 살펴 서술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통한 지식으로 由學而知
끝내 스승이 되었도다 以歸之師
몸소 실천이 이에 있어 躬行在斯
소학이 그 기반이라네 小學攸基
손을 써서 부지한 것은 出手扶持
장차 떨어지려는 이륜 將墜之彝
이에 지휘하여 정비하니 爰整鼓麾
시련을 어찌 사양하였으랴 風雨何辭
산천은 무너지지 않으니 山川不隳
나의 말에서 증명되리라 可質我詞
유주목(柳疇睦)이 지었다
주)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하였다.
동계(桐溪) :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자는 휘원(輝遠), 또 다른 호는 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기도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저서로 《동계문집》이 있다.
사대의……법이니 : 사대(四大)는 불교에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체를 비롯하여 온 세상의 물질이 이것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분리되면 끝내 공허함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이다.
석천(石川) : 김각(金覺, 1536~1610)의 호이다. 자는 경성(景惺), 상주(尙州)에 거주하였으며, 김지복(金知復)의 부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에 제수되었다. 1596년(선조29) 왜적이 용궁현을 공격하자 용궁 현감(龍宮縣監)에 제수되었거, 1604년 온성 판관(穩城判官)을 지냈다.
서리……때였네 : 서리 내린 뒤 석 자 미만의 농어[鱸魚]를 잡아 회를 뜬 뒤 향기롭고 부드러운 화엽(花葉)을 잘게 썰어서 묻혀 먹는 것으로, 예로부터 훌륭한 음식으로 일컬어지는 시어(詩語)이다.
소무 공신(昭武功臣) : 1627년(인조5)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이다.
첫댓글 영산김씨 족보를 보니 문평공 김수온의 후손이 아니고 문평공 아우 김수화의 후손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