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부러워 말라
잠 24:1-9
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5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6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7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8 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
9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잠 24:1-9 / 못된 짓만 일삼아 남 짓누르고 등치고 착취하여 재산을 쌓아 올려 떵떵거리고 큰소리 치며 목에 힘주고 사는 것들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그런 자들과 함께 어울려 다닐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2) 그런 짓을 하는 것들은 마음도 거칠고 하는 말마다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이 착취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부려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3) 슬기로워야 집안을 세울 수 있고 예지가 있어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 4) 깨달음이 있어야 온갖 값진 보화가 방마다 가득차리라. 5) 슬기로운 사람이 전쟁이라면 귀신 같다는 용사보다 더 낫고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힘센 장사보다 훨씬 더 낫다. 6) 기막힌 작전을 세워 두어야 싸움이 수월하고, 예리하고 탁월한 작전 참모가 있어야 승리를 가져온다. 7) 어리숙한 숙맥은 지혜를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는 입을 열지도 못한다. 8) 어떻게든 남을 해칠 궁리만 하는 자들은 모사꾼이라고 부른다. 9) 이렇듯 못된 궁리만 하고 있으니 그러한 생각을 어찌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남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자들을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악인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결국에는 악인이 멸망하고 의인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부와 형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1-2)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아가 그들과 교제하려는 마음도 갖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겐 쉽게 돈을 벌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이 우리의 부러움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악인의 형통함은 폭력적인 마음과 무자비한 말로 얻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선한 이웃의 생존을 파괴하고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며 폭력과 속임수 자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뜻을 따르거나 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그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마시기 바랍니다(시 1:1).
진정한 부와 강함은 지혜로부터(3-6) 인생의 부는 폭력을 일삼는 악인들과 함께함으로써가 아니라, 참된 지혜와 명철을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3절의 ‘건축하다’와 ‘견고해지다’라는 단어는 건축용어로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언약에 나타나는 단어입니다(시 89:2). 하나님께서 지혜와 명철로 세상을 지었듯이(잠 8:22-31), 우리도 인생의 집을 지혜와 명철로 지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들은 지식으로 인하여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진정으로 강한 자는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전쟁이 지혜로운 모략에 달려있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성패도 지혜를 의지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참된 승리는 오직 이 세상보다 크신 이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미련한 자는 죄의 길을 걸을 뿐(7-9) 성경 시대에 ‘성문’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장소였습니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타인에게 손해를 입혀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입을 열어선 안 되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내면적으로는 생각이 죄로 가득 차 있으며, 외적으로는 거만한 자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나쁜 일을 직접 행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악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죄악입니다. 죄는 먼저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우리는 이때 그 죄를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마음속에 오래 머물게 되면 우리의 마음 전부가 더럽혀지게 됩니다. 마음의 더러움을 씻으십시오(슥 13:1).
적용: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인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그 때문에 분노하지도 말고, 곁에 있어 혜택을 보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옛날 어느 마을에 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부자가 지혜롭기로 소문난 노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르신, 마을 사람들에게 제가 죽은 뒤 전 재산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사람들은 아직 저를 구두쇠라하며 미워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부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돼지가 젖소를 찾아가 하소연했다네. 너는 우유만 주는데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는데, 나는 내 목숨을 바쳐 모든 것을 다 주는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그러자 젖소가 돼지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해주지만, 너는 죽은 뒤에 해주기 때문일 거야. 지금 작은 일을 하는 것이 나중에 큰일을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네.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지금부터 해 나가는 사람만이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다네."
< 설 교 >
결혼생활 되살리기
잠 24:3 / 정근두 목사(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강한 결혼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초가 됩니다. 올해 우리교회는 “신앙교육, 가정에서부터”라고 연간주제를 설정했습니다만 달리 표현하면 “신앙교육, 가족으로부터”인 동시에 더 정확하게 집으면 “신앙교육, 부모로부터”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다루는 “결혼생활 문제찾기”라는 주제는 신앙교육의 원천을 다루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선택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런 확신이 없습니다. 처음엔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만 지금은 너무 실망스럽고 어떤 때는 혐오스럽습니다. 사람 한 번 잘못 골라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식은 환상적이었으나 끝은 당혹스럽다고요? 하긴 그렇게 좋은 결혼이 그렇게 나쁜 결혼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질 않습니다. 서로가 환상적인 커플이라고 출발해서, 서로에 대한 적의를 품고 열심히도 싸우다가, 마침내 싸우기도 포기한 냉담한 상태로 접어듭니다.
무엇이 원인일까요? 거창한 출발이 비참한 결말로 치닫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에 꼭 들던 사람이 끔찍한 사람으로 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그 원인을 살피고 결혼생활 되살리기를 위한 결혼 리모델링을 시도하겠습니다.
잘 살펴보면 문제의 원인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으로 가슴 뛰던 결혼을, 가슴 쓰리게 하는 1 결혼으로 망치는 주범 세 가지를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결혼에 대한 1.1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입니다. “결혼만 하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부터 젊은 날 관람한 영화까지 우리로 하여금 결혼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갖게 합니다.
동화처럼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일은 현실 속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을 구출한 다음 석양을 배경으로 함께 사라지는 일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석양보다는 스모그를 배경으로 시작하는 삶이 더 현실적입니다.
데이트를 하고 구애를 할 땐 결혼하면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나 더 잘해 줄까하는 낭만적인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오늘 저하고 영화 한 프로 볼 수 없을까요?” “저녁에 시간되시면 함께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네요.” 이런 공손한 요청은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면,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웨딩드레스를 입을 때는 온갖 황홀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장의 신부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숲 속의 백설 공주만큼은 안 되지만 그날의 주인공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나면 신부도 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결혼생활을 하진 않습니다. 실제 삶을 시작하면, 더 이상 들러리가 좌우에 서서 시중을 들진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갑니다. 정말 좋은 곳에서 신혼의 즐거움을 상상합니다만, 거기도 여름이면 낮에는 태양이 뜨겁고, 밤에는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생소한 음식, 달라진 물 때문에, 신랑신부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설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혼생활 6개월이 후딱 지나가서 아침식탁에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대로의 머리모습을 한 새색시와, 덥수룩한 수염으로 마주 앉은 새신랑을 그려보십시오. 한껏 부푼 결혼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빨리 일상적인 모습으로 전락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결혼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고 불완전한 두 사람이 모여서 이룬 결혼이란 지극히 평범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선택한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여러분 자신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결혼이 시들해 지는 두 번째 이유는 1.2 받아드리기 어려운 차이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차이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문제는 처음에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그 다른 점 때문에 고생을 시작합니다.
매력적인 것이 좌절시킬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조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상큼한 일입니다. 언제나 정해진 틀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틀을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과서 김창선은 만화책 정근두에게 끌립니다. 아니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만화책 정근두가 교과서 김창선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겁 없이 처신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처음에야 다르다는 점이 감동적이고 매력적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서로의 차이가 그렇게 깊고 넓은지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껴서 결혼을 했지, 어느 누가 비교검토를 하고나서 결혼을 합니까?
그리고 연애할 때, 한 꺼풀 뒤집어쓰고 나면, 우린 공통점을 과대평가하고 차이점을 과소평가합니다. 연인들은 “우리는 정말 서로 잘 통해요.”라고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깨트릴 수 없어 “한 번 살아보지”하는 말이 떠오르지만 감히 아무도 내뱉질 못합니다.
엄연하고도 엄청난 차이를 무시합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은 남자이고, 다른 사람은 여자라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래도 온건합니다. 살다보면 같은 은하계에 속한 다른 행성이 아니라, 각기 전혀 다른 은하계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틀리는 것 같습니다. 사귈 때는 “우리는 서로 같아요.”라고 말하지만 살아보면 “우리는 서로 달라요”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진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차이를 받아드리고, 함께 지내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냥 참고 지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란 의미입니다. 그 차이를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그 차이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머러스하셔서 다른 유형을 서로 만나, 함께 살도록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 배합을 즐기시는 듯합니다.
아침 형과 저녁 형을 서로 만나게 하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노래하는 종달새와 밤이 깊어야 우는 부엉이를 짝 지워 주십니다. 활달하고 쾌활한 사람은 조심스럽고 꼼꼼한 사람을 만납니다. 어떤 이는 수다스러울 만큼 말하길 좋아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분은 팔을 괴고 듣기만 합니다. 돈을 풍덩풍덩 잘 쓰는 사람은 돈은 아끼는 사람과 만나곤 합니다.
어떤 이는 피부 접촉을 좋아하고, 다른 이는 다가오면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세웁니다. 일상생활도 그렇게 다를 수 없습니다. 깔끔하고 정돈되고 시간엄수를 하는 사람은 대개 유연하고 원만하고 늘 늦는 배우자를 만납니다. 그래서 함께 살다보면 속이 터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각자가 살던 가정에서 형성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결혼생활에 접어듭니다. 자라면서 가지게 된 상처를 그대로 안고 결혼을 합니다. 막상 결혼을 한다고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형성된 습관, 받아온 상처가 계속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바라보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 상대방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당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그 차이를 받아드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나하고 딱 맞는 사람과 결혼했어요.”라고 말하지만 살아보면 “언제나 딱 맞지는 안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실태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성화의 도구입니다. 서로 다르기에 서로를 성화시키는데 최선의 도구가 됩니다. 차이가 크면 클수록 성화시키는 위력이 더 큽니다.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계곡이 깊은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깊고 맑은 물이 흐릅니다.
부디 차이점 때문에 힘들긴 해도 피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거룩하게 다듬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다듬어가는 데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혼이 무너져 내리는 세 번째 이유는 1.3 용서 못한 상처들 때문입니다. 실수는 내어놓고 용서받고 용서해야 합니다. 모두가 불완전하기에 우린 서로에게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비의도적으로 상처를 줍니다.
우린 이기적이고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처를 받고 주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매일의 음식이 되어야 결혼이 유지됩니다.
받은 상처를 마음에 가지고 풀지 않으면, 어느 때라도 마귀의 수중에 빠져듭니다. 실수를 기억하고 갚아주려고 들면, 결혼이 수렁으로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빠르게 곪아가고 더욱 악화됩니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죄악은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를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상처를 안고 뒹굴고 살면, 고통을 영속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미운 감정을 품고 살면, 가장 큰 피해는 품고 사는 자신이 입습니다.
결혼을 망치는 주범은 비현실적 기대,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것,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마치 여러분의 결혼생활을 꼬집어 말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 . . .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롬 4:17, 현대인성경) 만일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린다면 죽은 결혼도 살려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되살려내는 일에 전문가이십니다.
진단에 따른 전문가되신 하나님의 2 여섯 가지 처방을 따라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결혼생활은 하나님이 바라는 수준으로 향상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마음에 꿈꾸던 결혼생활이 될 것입니다.
결혼생활 되살리기 위해 맨 먼저 2.1 내 책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지금 드리려는 말씀은 결코 실천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힘들지만 확실한 방법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갈 6:5,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배우자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배우자의 태도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배우자로 하여금 여러분을 사랑하라고 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행동은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는 확실한 방법은 그들을 향한 여러분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달라지면 그들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결혼해서 고달프고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셔야 합니다. 또 배우자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그것은 결혼을 파괴시킵니다.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 낭비입니다.
행복이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삶이란 바로 여러분 자신의 반응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도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더 행복해 지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거기에 참된 행복이 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결혼에 대해서 나의 책임을 받아드릴 때 개선의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책임을 수용하는데 가장 큰 장벽은 서로 안 맞는 사람이라는 신화 때문입니다. 이혼을 하면서 내뱉는 변명이 “우린 성격이 맞지 않아서”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은 결코 없습니다.
성격이 틀려서 못 산다고 하는 말은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이혼을 한다는 것은 재판정에서 만들어낸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변호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격이 안 맞는다는 것은 성숙하기 거부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라고 우깁니까? 우리 모두 ‘나도 한 고집하고 너도 한 고집하는’ 모두가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린 서로 함께 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성숙하고 고집 세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함성입니다. “내비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변명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거의 모든 사람은 노력만 하면 누구하고도 맞추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라도 두 사람이 노력하면 누구라도 맞추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쉬운 문제부터 풀면서 다음 문제로 나아가고 맨 나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십시오. 결혼생활의 어떤 난제라도 여러분은 풀어갈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 되살리기 위해 둘째로 2.2 하나님께서 우리 결혼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이 어떠하더라도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미 미움을 지나 냉담한 자리에 빠져들었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절망감 밖에 남은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여러분의 결혼에 대해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냉정하게 진리를 직시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싫어하시는지, 여러분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으시는지 그 이유를 잠간 생각해 보시진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슬에 묶어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비참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속에 여러분의 최고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시는 것은 그로 인해 여러분이 입을 상처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결혼생활을 회복시키려는 것은 결혼생활이 줄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우리가 경험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결혼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인간적인 관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관점입니까? 전능자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십니다. 끝나버린 결혼도 다시 살려내십니다. 죽어버린 사랑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순종하기만 하십시오.
결혼생활 되살리기 위해 셋째로 2.3 값을 지불하기로 결단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훌륭한 결혼 생활은 노력을 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겸손과 정직, 비이기심과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지속적인 노력과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결혼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루밤새 모든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개선하는 일에 시간을 들여 보십시오.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결혼생활은 대단한 노력을 지불한 열매입니다. 하늘로부터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십시오.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요? 기분에 따라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기도하면서 순종하십시오. “기분도 아니고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삶이 복되길 원하시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바를 순종하길 원합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감정을 앞세우지 마시고 바른 행동을 하십시오. 감정이 생길 때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먼저 기도하고 순종하면 감정은 뒤따를 것입니다.
결혼생활 되살리기 위해 넷째로 2.4 풀지 못한 상처를 해결하십시오.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용서를 구하고 다음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의로운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큰 능력과 놀라운 효과를 가져옵니다.”(약 5:16, 현대어성경)
잘못한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는 열심이 지나쳐서 힘들게 한 것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리십시오.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면 충분합니다. 이 말들은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놀라운 효력이 있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베푸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골 3:13, 현대어성경)
매일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제대로 결혼은 자라질 않습니다. 30주년 결혼기념 여행을 해도 용서를 구할 일은 생깁니다. 아니면 휴가에서 돌아와서도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두고도 다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일용할 용서도 구해야 합니다.
서로 다르기에 사물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잘못 말할 수도 있고 상처 주는 일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매일 구하는 것은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데 필수적입니다.
“다신 용서하나 봐라”고 말하는 것을 결혼을 위기로 몰아넣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으면 기뻐하는 이는 마귀입니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에 용서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결혼을 망치려면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름답게 가꾸려면 서로 용서하십시오.
결혼생활 되살리기 위해 다섯째로 2.5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드리십시오. 혼자서 씨름하지 마십시오. 후원자를 확보하십시오. 여러분의 결혼관계를 튼실하게 만드는 일에 관심과 사랑을 갖는 사람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집은 지혜로 지어지고, 명철로 튼튼해진다.”(잠 24:3, 표준새번역) 또 말합니다.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 들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지혜롭게 된다.”(잠 19:20, 표준새번역)
우리 교회는 그래서 상담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부부세미나도 하고 상담학교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제주도 새생명훈련에도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혹 문제가 생길 때 혼자서 씨름하지 마십시오. 필요한 도움과 지원을 찾으십시오.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강하고 성숙한 결혼을 위해서 구역이나 교회의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결혼생활 되살리기 위해 여섯째로 2.6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표준새번역)
우리 삶과 믿음의 시작은 그리고 완성은 예수님이십니다. 초점을 잃지 마십시오. 결혼은 제대로 서려면 세 다리로 된 의자와 같다고 합니다. 두 다리로는 안정되게 설 수가 없습니다.
결혼은 나와 배우자 두 사람만으로 꾸려가도록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배우자,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빌2:13, 현대어성경)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랑하질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선택입니다. 누굴 사랑하고, 누굴 사랑하질 않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사랑의 감정은 뒤따를 것입니다.
조금도 그럴 마음이 없다고 강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약속합니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변화된 새 마음을 주고, 또 새 정신을 불어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돌처럼 단단해진 마음을 들어내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겠다.”(겔 11:19, 현대어성경)
잘못된 사람과 결혼했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단지 잘못된 방법으로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한 평생 길이 사랑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 때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그 어떤 때에도 존중히 여기며 도와주고 부부의 신의와 순결을 굳게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합니까?” 아직도 배우자가 곁에 있는 분이라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서약을 지키도록 하실 것입니다. 아멘
전략으로 싸우라
잠언 24:3-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시 31:6).”
나쁜 믿음은 다른 대안이 없어서다. 두렵기도 하고, 살면서 종교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도 같고, 하나님을 믿는 게 안 믿는 것보다 나을 것도 같아서. 혹은 실용적으로 경험에 비춰볼 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또는 주관적으로 다만 내 의지에 따른 나의 선택을 신뢰하니까. 이처럼 나쁜 믿음은 믿음이 아닌 걸 믿음이라고 믿고 사는 경우다.
확실한 믿음이 아닌 변질된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자신이 규정하고 단정 짓는 상대주의, 보다 나은 쪽을 택하려는 실용주의, 그에 따른 자기 확신의 주관주의가 얼마나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지 모른다. 이 모두는 우상이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사 44:9).” 이는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18).”
단순한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곧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사느라 이 땅에 사는 게 전부라면 이를 ‘집을 건축하는 일’로 비유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그러느라 드는 시간적, 물질적, 정신적 비용은 가치 있다. 오늘은 영원을 준비하는 노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전략으로 싸우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2).”
우리는 집을 짓는 자들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저 막연하여서 한 번 살다가는 인생으로 취급되는 것이라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나. 또는 유행하는 것처럼 뭐로든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면 돌고 도는 것일 뿐 굳이 뭐 그리 대수이겠나. 성경을 알자. 하나님을 바로 알자. 우리에게 두신 이 땅에서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자.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주먹구구식으로 지을 수는 없다. 글쓰기를 앞서 개요작성을 하는 까닭도 집을 짓기 전에 설계를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명철하다는 건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하고 철저하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남들처럼 따라하지 않는다. 그 기준이 분명하다. 기준은 진리다.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건 하나님의 세계 곧 창조질서를 안다는 일인데, 거기다 성소수자가 어떠니, 인권이 어떻다느니 하는 소릴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을 ‘집을 짓는 일’로 비유할 때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된다. 그것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사리분별이 분명할 때이다. 곧 성결은 성별된 삶이다. 다 그래도 나는 안 그런 일이다. 그 뚜렷함이 견고함이다.
둘째,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 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17).” 방방마다 곧 삶의 날들마다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를 채우신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능력은, ① 교훈: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생활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신다. ② 책망: 잘못된 것을 꾸짖어 나무라고 바로잡게 하신다. ③ 바름: 말씀에 따른 올바른 규범과 도리에 맞게 살도록 하신다. ④ 의로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신다. ⑤ 온전함: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삶이 실현되게 하신다. ⑥ 선함: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삶을 선하신 뜻대로 살게 하신다.
셋째,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는 인위적인 게 아니다. 꾸며서 억지로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게 성품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내가 안다면 이미 아는 부분에 대하여 어떤 의도가 가미되기 때문에 동시에 외식하는 자가 된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곧 나의 성품이다. 이는 얼굴과 같아서 자신만 볼 수 없는 게 자신의 얼굴이다. 거울을 통해서 또는 남의 진술을 통해서 안다.
이에 나의 지혜는 나를 얼마나 아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앎이다. 그 지식은 힘이 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 아니라, 내가 안다! 하는 지식은 그러므로 거짓이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믿음이고, 지식이란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지식이다.
넷째,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허무한 것에 대하여 바로 알자. 우리는 지난 주일 허무한 것에 대한 세 가지 특징을 살폈다. 첫째 식탐에 대하여.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잠 23:2-3).” 욕구에 따른 삶의 허무함에 대하여. 둘째, 부자가 되려는 것에 대하여.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4).” 이는 우리의 욕망에 대한 허무함이고. 셋째, 사사로운 것에 대하여.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잠 23:4, 9).” 욕심(마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를 함축하여 게으름으로 비유한다(잠 24:30-34).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30-31).” 보면 늘 부산하다. 사연이 많다. 이유와 변명이 끊이지 않는다. 무척 바쁜 것 같지만 저의 두서없음은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게으름의 특징이다. 하고 싶은 걸 먼저 하는 것이다. ‘가시덤불이 덮였고, 풀이 무성하며, 돌담이 무너졌다.’ 우후죽순 제멋대로 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경계의 돌담이 없다.
저의 원인은 무엇인가?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32).” 첫째, 저는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33)” 안이함이다. 태만한 것이다. 설마, 하는 중이다. 어떤 경고도 무시한다. 둘째, 저는 피폐하다. 곧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34).” 이런 경고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왜냐하면 ‘아직은’ 괜찮은 것이다. ‘다 그렇지 뭐’ 한다. 곧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7).”
나오는 말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3-14).” 말씀을 읽고 붙들자. 먹고 힘을 더하자. 묵상하여 삶에 적용하자. 그러할 때 나타는 증거들이다.
첫째,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1).” 왜냐한면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2).” 곧 “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8).” 저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9).” 그러므로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10).”
둘째, 몰랐다고 변명하지 말라.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11).”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나만 좋다고 구는 삶이 아니다. 우린 소금이다. 빛이다. 산 위의 동네다. 이는 감출 수 없이 드러난다. 내가 티를 내는 게 아니라 그리들 안다. 알게 돼 있다. 우린 저들을 위한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는 안 되니까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기를 위해 간구한다. 도고다. 중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12).”
셋째, 의인은 일어선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16).” 의인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넷째, 적당하다는 것이다.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26).” 당연히 불만이 또 원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인데, 의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그 입에 적당한 말을 담을 수 있어서이다. 하면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28).” 다 모른다 해도,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29).”
그러므로 우리의 전략은 주를 경외함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게 진리다. 앎으로 온전함을 사모한다. 사모할수록 내 의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안다. 앎으로 주를 바란다.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내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뼈저리게 느낀다. 이를 잘 앎으로 전략으로 싸운다. 이 이김은 여호와께 있어서 말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