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91)
(4) '금강산아, 머리를 들 수가 없구나' .
현준혁교사가 구속되어 학교를 떠난 이후 허전해진 학생들의 마음을 붙들어준 것은
김영기선생이었다. 부여 사람인 그는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문학의 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족혼도 사라지지 않는다 고 믿었다.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시조
백수를 골라 프린트를 해서 나누 어 주었다. 시조를 통해서 겨레의 영혼을 이어가려는
강의법이었다. 그 는 우리 역사 강의도 곁들여서 했다. 조용한 성격인 김영기는 박정희의
4기생들을 가르치던 어느 날, 임진왜란과 이율곡의 10만 양병론을 설명 하다가 "나라가
이러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면서 한동안 흐느꼈다. 학생들도 따라 울었다.
박정희가 3학년일 때인 1934년4월에 또 독서사건이 터졌다. 1기 선배인 4학년생중 진두현
등 여섯 학생들이 독서회를 만들어 사회주의 책들을 읽다가 퇴학당한 뒤에 구속되었다.진
두현을 유치장에 집어넣으면서 조선인 형사가 말했다.
사진설명 : 금강산 해금강에서 기념촬영한 3학년생들. 박정희는 앞에서 세번째 줄의 오른쪽에서 네번째이다.
"현이란 새끼가 뿌린 씨앗은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뿌 리째 뽑고 말
것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진두현은 조선일보에서 읽은 칼럼 한 구절이 생 각났다는 것이다.
'조선사람은 감옥살이를 2∼3년 해야만 옳은 조선사람이 될 수 있다.'.
진두현은 '나도 이젠 옳은 조선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으로써 옥살이 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진두현은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 던 카프계열의 리얼리즘 문학 작품인
한설야의 '선풍시대'와 이기영의 '고향'을 매일 읽었다. 당시는 우리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보다도 사회주 의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5월에 박정희는 3학년생들과 함께 금 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철원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내금강 입구 미 휘리역에도착하니 태평여관에서 큰 기를
가지고 나와서 여행단을 환영 해주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 여관에서는 학생들을 정성
들여 모셨 다. 조선음식도 맛 있었고 잠자리도 쾌적했다. 다음날 내금강을 구경한 뒤에
도착한 곳은 일인이 경영하는 구미산장이었다. 일본인 주인의 대 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1박3식에 돈은 태평여관보다도 세 배나 많은 2원을 받으면서 저녁은 맛 없는 일본식이교
잠자리는 흙바닥에 가마니 를 깔고 그 위에 재우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학생들은 내일
점심 도시락 은 이 여관 것으로는 먹고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고 식대는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일인 주인은 내일 도시락 반찬은 이미 준비하였으니 먹든지 안먹든 지 돈은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오기가 발동했 다.다 음 날 아침에 여관을 나설 때
여관에서 준비해둔 도시락을 아무 도 갖고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인 인솔교사가 "오늘
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지 않는다"면서 도시락을 가져갈 것
을 권해도 듣지 않았다. 학생들은 점심을 굶어가면서 외금강을 구경하 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인솔교사도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는 데 도리카이교장이 이를
알고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정명모 정헌 욱 두 사람이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하고
유만식은 무기정학, 다른 일곱명은 1주간의 근신처분을 당했다. 학교에서는 이들
학생들의 부모 를 불렀다.
학생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틀 동안 이들 부모들은 복도 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금강산 비로봉 사건'으로 불린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 정찬은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이 금강산 여행중에 들르는 상 점과 공원관리사무소에서마다
기념도장을 받아와서는 스탬프집을 만들 었다. 여기에 친구들의 한 마디를 실었는데 유독
박정희가 쓴 글이 튄 다. 맞춤법을 오늘식으로 약간 고쳐서 소개한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 너는 세계에 명산! /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 다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 들은 /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가 없다 / 금 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 희씀'.
이 글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박정희의 글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다른
동기생들은 '아! 평생에 보고싶던 우리 금강산이여! 이제 보고 나니 만시지탄이 없을 수
없네'식으로 자연을 자연으로 만보는데 박정희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열일곱 학생의 마음속에서 중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엿 보게 한다.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만든 비범한 성격은 자신의 한 을
민족의 한과 한 덩어리로 파악한 점이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한 만을 풀려고 했더라면
그는 이기적인 입신출세주의자의 길을 걸었을 것 이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시절에도
특별히 정의감이 있는 소년이었 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의감이 가르쳐지는 것인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구사범에 와서는 정의감
이 강한 학생임을 엿보게 하는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정희가 5학년 때인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박정희 의 시를 읽어본다.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 황야의 한 구석에 수 줍게 피어
있는 /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 보다 기품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 태양을 등에 지고
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 럼 / 느긋하게,
한가하게 /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싶다.이상'.
이 시를 한 일본기자에게 읽어보게 하였더니 "언어감각이 참 뛰어나 고 순수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의 운율도 잘 맞아떨어져 노래 가사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박정희는 자신의 시에 다가 1, 2,3의 번호를 붙여놓아 그가 작사한 몇
가지 노래의 가사를 연 상시킨다. 마지막에 '이상'이라고 써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단정하게 딱끊어버리려는 마음이랄까. 여기에서도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박정희의 정신자세를 엿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곳하고 소박한 것에 대한 박정희의 동경이다.들 꽃과 농부로 상징되는 약자와
소박성, 거기에 대칭되는 귀부인과 영웅 사이에서 박정희는 약자편에 서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박정 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간 강자와 부자에 대한 반골의식과
소박성은 이미 대구사범 교정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5학년 때 기숙사 북료2층6실에 배치되었다. 실장은 5학년 의 우등생인 이정찬,
박정희가 부실장, 그리고 후배들이 10명이었다. 방박닥은 다다미, 방 가운데 앉은뱅이
책상들을 붙여 놓아 자습하도록 하였다. 방 입구에는 숯을 쓰는 화로가 있었고 벽을
따라서 벽장이 있 어 사물을 보관하였다. 학생들은 머리를 책상, 다리를 벽장 아래로 뻗
고 잤다.
사진설명 : 박정희(오른쪽)는 이영원(교사를 거쳐 의사.가운데) 김국진(초등학교 교장 역임)과 함께 4기생의나팔수였다.
교련을 받을 때 이 세 명은 일반 훈련은 받지 않고서 나팔 부는 연습을 했고 등교, 소등 시간 등을 알리는 신호나팔을 불었다. 이들이 메고 있는 38실 소총을 5연발이었다.
이 사진은 4기생 앨범 편집위원장을 지낸 이정찬(작고)씨 댁에 보존되어 있었다.
밤마다 빈대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이 방에서 박정희와 함께 1년을 보낸 사람들 가운데
3년 후배인 7기생 두 사람이 생존해 있다. 최영복(전 경복고등학교 교장·79)
강응구(78·전 두계 초등학교 교장). 두 사람은 박정희를, '말이 적고, 늘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던, 당찬 선배'로 기억하고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가부시키'(주식)라는 풍습이
있었다. 저녁에 공부를 하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한 사람이 10전씩 출 자하여 돈을
모은다. 그리고는 한 사람을 뽑아 기숙사 바깥으로 원정 을 보내 과자를 사오게 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기숙사비도 제때에 못 내고있을 때여서 '가부시키'에 낄 수가 없었다.
강응구의 기억에 따르 면 박정희는 '가부시키'이야기가 나오면 혼자서 슬그머니 나갔다가
일 이 끝난 뒤에 들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보기가 안쓰러워 후배들은 박 정희가 있을
때는 '가부시키'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강응구는 박정희가 하도 말이 없어 한때는 어디 병이 있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박정희의 특징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칫 솔질을 하는데 그때는 가루치분을
썼다. 박정희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칫솔질을 매우 오래 하는 것이었다. 칫솔질을
하면서도 무슨 생각인지, 다짐인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칫솔질이 끝나면 수건을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세면장으로 향하는데 꼭 결투장으로 가는 사람 같아보였다.
박정희는 방과후에는 혼자서 별채건물의 음악교실 뒤로 가서는 권투 연습을 하기도 했다.
검도와 권투 연습을 자주 한 박정희 는 '아이구치'라고 불리는 작은 칼을 갖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이 는 강응구의 증언인데, 대구사범이 대구고보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
여 1대 0으로 대구고보에 이겼다. 응원나왔던 대구고보의 주먹들이 화 가 나서 대구사범
응원부대를 혼내주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 다. 이때 박정희가 붕대로 주먹을
감더니 아이구치를 꺼내고는 '한판 붙자'고 나서자 주먹들이 물러났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친구도 말도 별로없는 꼴찌 학생이었지만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힘은 완력과 침묵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공격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남을 먼저 건드리지는 않겠 지만 상대방의 공격이
있으면 나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힘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슴도치 같은 학 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고슴도치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는 남을 침략할 수 있는 힘은 없어도 되지만 강대국
이 먹으려고 할 때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공격자세를 취할 만한 힘 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자주국방의 논리였다. 강소국을 지향했던 박정 희의 이런 자주국방 정책은 박정희의
인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으 로 보인다.
박정희가 5학년 때 어느 날 교정에서 눈을 치우던 동기생 주재정과 석광수가 말다툼을
벌였다. 주재정은 소녀처럼 얌전한 학생, 석광수는 제일 잘 나가는 주먹이었다. 석광수가
맥주병으로 주재정의 머리를 내 리쳤다.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박정희가 나서서
몽둥이로 석 광수의 다리를 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는데 다소
과장이다. 박정희는 석광수를 때리지 않았고 말로써 나무라는 데 그쳤 던 것이다.
어쨌든 쬐끄만 박정희가 무서운 석광수와 맞섰다는 점에서 친구들 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숙사에서 박정희는 실장인 동기생 이정찬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성격이 모진 박정희는
이정찬과 맞닿아 있는 자신의 책상을 일부러 떼 내어 다른쪽을 보면서 공부하기도 했다.
사감이 기숙사를 돌아다니다 가 이걸보고 지적을 하면 못마땅하다는듯이 다시 붙여놓는
것이었다.후 배 강응구는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정찬과 박정희가 치고받을 듯이
권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이정찬은 5학년에서 는 최우등생이고 앨범
편집위원장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었 다. 동북고교 교장을 지내고 작고한
이정찬에 대한 동기생들의 평은 '빈틈이 없는 전형적인 교육자'이다. 이정찬이 책임을
지고 만든 제4기 생졸업앨범은 요사이의 앨범보다도 편집이나 사진의 질이 뛰어나다. 민
족정신과 정성이 스며 있는 앨범을 보노라면 왜 이런 학생을 박정희가 싫어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꼴찌 학생이 우등생에 대해서 느낀 열 등감 때문이었을까.
후배 강응구는 박정희가 기숙사 복도에서 자신에게 역사와 야사를 가끔 들려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박정희는 역사 책을 많이 읽고 있었 다.
이 박정희에게 한번은 강응구가 수학교과서에 나온 방정식 문제를 좀 풀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박정희는 끙끙 대면서 문제를 풀었 는데 정답표와 대조하였더니
정답이었다. 박정희는 자신도 대견한듯이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모처럼 웃음을 짓더라고
한다. 워낙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박정희라 활짝 웃어보인 그때의 기억이 오래 남았다.
박정희는 성적이 꼴찌권을 맴도는 바람에 한 달에 7원씩 나오는 관 비를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 7원이면 대략 쌀 반 가마 값이었다. 반에 서 40등 이내에 드는 관비생들은
7원을 받으면 식비로 4원50전, 기타 공용으로 2원을 기숙사에 내야 했다. 기숙사의
운영은 학생들이 자치 적으로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집에서 부쳐주는 식비를 기다리다가
늦 어지면 외상밥 또는 눈치밥을 먹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 한 그는 이럴
때면 고향인 상모리로 내려가버리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조카인 박재석(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은 '월사금은 없고 돈 까지준다'는 대구사범에 다니는 삼촌이 시도 때도
없이 돈을 구하러 내 려와서는 며칠씩 놀다가 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삼촌은
이불보 퉁이와 빨래감을 갖고 와서 어머니한테 맡겨놓고는 조선일보 선산지국 을
운영하던 박상희형 집을 찾아와서는 눌어붙는 것이었다. 박상희는 박재석을 불러들인
다음 손바닥만한 메모지에 글을 써주는 것이었다. '우리 조카를 보내는데 제 동생의 학비
후원 부탁드립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이런 메모를 가지고 박재석은 구미면장,
곡물검사소장 같 은 구미면내의 유지들을 찾아다녔다.
"그 분들은 일하다가 말고 제가 드린 쪽지를 읽으시고는 돈을 봉투에 넣어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적게는 1원, 많게는 5원씩 주셨습니다. 저는 이 봉투들을 상희 삼촌에게
드리는데 그분은 열어볼 생각도 않고 서 '늬 아제 갖다 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셨 지요. 좀 골치아파했지요.".
박정희의 상모리 친구들은 나팔소리를 듣고서 그가 왔다는 것을 알 곤 했다. 뒷동산에
올라 부르는 군용나팔소리. 그것은 가난과 꼴찌, 그 리고 일제의 억압에 찌들린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하나의 몸부림이었 으리라.
대통령 박정희는 시도 쓰고 서예에도 능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운 동은 거의
만능이었고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사진설명 : 대구사범 5학년 학생들의 기념촬영.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꼴찌생 박정희이고 세번째가 우등생
이정찬이다. 박,이 두 학생은 기숙사에서도 같은 방을 썼다. 이정찬의 일기에도 박정희가 등장한다.
그는 균형감각을 가진 교양인이었다. 이런 인격의 틀이 잡힌 것은 대 구사범의 이른바
'사반교육'을 통해서였다. '사반'은 일본어로 읽으면 '사범'과 같은 '시항'이다.
대구사범 학생들은 '반쯤 죽이는 교육'이라 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우선 학과목이
엄청 많았다. 박정희의 성적표 를 보면 26개 과목이다. 이를 세분하면 38개 과목이 된다.
수신, 교육원 리,교육사, 각과 교수법, 심리, 논리, 관리법, 교육연구, 법제경제, 국
어(일본어=강독 표출 습자), 조선어(강독 표출), 한문(강독 표출), 영어 (강독 표출),
지리, 역사, 수학(산술 대수 기하 삼각법), 박물,물리, 화 학, 농업(학과 실습), 상업,
공업, 도화, 수공, 음악, 체조(교련, 체조, 경기, 무도). 이 많은 과목을 소화하기
위해서 대구사범 학생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했다. 6시15분에 조례, 7시에 아침식사,
8시5분에 등교, 12시30분에 점심, 오후4시에 입욕, 오후6시에 저녁식사 후 밤9시30분까
지 기숙사에서 공부, 점호후 밤10시에 소등. 여름 방학 때는 2주일씩 대 구주둔 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3학기로 편성된 한 학년 과정에서 시험은 최소한 여섯 번.
'반쯤 죽이는 교육'을 위한 시설은 60년 뒤인 요사이 우리 교실 형편 보다도 훨씬
나았다. 일제는 이 모든 교육을 실용정신에 입각하여 가르 쳤다. 실기, 실습, 실험 위주.
즉, '가르치려면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공실에서
대패질도 하고 농장에서는 농 사를 지었으며 연병장에서는 총검술, 음악실에선
바이올린도 켰다. '반 쯤 죽이는 교육'이 물론 정치적으로는 조선사람들의 혼을 빼앗아
충실한 황민으로 개조하기 위한 첨병을 양성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런 교도의
자질을 갖춘 인격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덕체합일의 전인교육을 실시해야 했고 이것이
박정희형의 사람들을 배출한 것이다.
대구사범의 황민화 교육은 실패했지만 전인교육은 성공했다. 신입생 들중 평균 약30%가
항일활동이나 사회주의서적을 읽은 이유로 퇴학을 당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압제가 심한
만큼 반발도 거세진 것을 뜻한다. '반 쯤죽이는 교육'을 통해서 대구사범, 그리고
경성사범 평양사범 학생들이 자신들의 살과 뼈로서 받아들인 것은 동양적 가치관에
기초한 전인교육 이었다.
이 일제 사범학교출신들이 광복 뒤 우리나라의 초등 중등 교육을 주 도하게 되었다.
이들이 길러낸 인재들이 박정희가 이끈 근대화혁명의 선 두에 서게 되었다. 단련된
교사들에 의하여 양성된 단련된 인력이 1960- 70년대의 한국사회를 밀어 올렸다.
기자는 박정희가 이 5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 료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정찬의 일기이다. 이정찬은 5학년 때는 박정희와 같은
2조(조=반)였을 뿐만 아니라 기숙사에서도 같 은 호실을 써 하루 24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이다. 이정찬은 박정희보다 나이가 한 살 위였다. 청주에서 난 그는 열일곱 살이던
2학년때 고향 처 녀 정태인과 결혼하였다. 대구사범에서는 재학중 결혼을 못하게 하였으
나 박정희를 포함한 상당수 학생들은 부모들의 강권에 따라 방학을 이용 하여 몰래
결혼을 해놓고는 시치미를 딱 떼고 다녔다. 이정찬은 서울 동 북고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교육계에 바쳤다. 5년 전에 7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의
대구사범 일기는 부인 정씨가 보존 하고 있다. 그의 일기에 나온 이정찬의 체험중
상당부분은 박정희의 체 험이기도 하다. 기자는 그의 일기중에서 동기생이자 기숙사 한
방 친구 인 박정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가 싶어서 다 읽어보았다. 딱 한번 박정 희가
등장했다.
'1936년11월10일(5학년 때): 오늘 아침은 4시에 일어났다. 그래서 청 소용구를 준비해서
대구신사에 모여 참배후 경내 미화작업을 하고 돌아 왔다. 방과 후에 또 작업을 하고
해가 서산에 기울어져서 해산했다. 박 군(박정희)이 돌아오지 않아 엽서를
띄웠다.(학기고사도 발표되었으니 까)'.
북료6실의 동거생인 박정희가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고향에 내 려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2학기 기말고사 일정이 발표되어 연락을 취했다는 뜻이다. 박정희는 5학년
때 이런 일로 41일간이나 장기결석을 했으니 모범생인 이정찬의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을
것이다. 박정희가 5학년이었을 때의 이정찬 일기중에서 주요 대목을 뽑아 보았다.
'*1936년2월27일: 동경에서는 무엇인가 시끄러운 게 있는 것 같은데 호외도 없으므로
무엇인지 모른다.
*3월4일: '코노에 후미마로에게 대명이 내림'이라는 호외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육군과의 관계는. 육군이 대단히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 것처럼 보인다.
*3월5일: 체육장을 일구고 있을 때 호외. 오늘 아침 신문에 의하면 코노에 공이 사임하고
히로타 외상이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 들 의외라고 한다. 그 사람은 러시아에
정통하고 있다고 한다(편집자 주:이는 2월26일 도쿄에서 발생한 청년장교들의 쿠데타
기도를 가리킨 다. 이들은 곧 진압되었는데 박정희는 나중에 2·26사건을 연구하여
5·16거사 때 참고했다).
*3월9일: 분열식 연습 이후 아리카와 중좌가 봉천전에 대하여 강화 를 했다.
*3월25일: 종업식. 봄 방학시작.
박정희는 봄방학 때 선산으로 내려가 4월1일에 세 살 아래인 열일 곱 처녀 김호남과
결혼식을 올렸다. 김호남은 선산군 도개면에 사는 선 산 김씨 김세호-이말렬부부
사이에서 난 4남매 가운데 큰딸이었다. 김 씨의 외가가 상모리 아랫 동네에서 살았는데
박성빈에게 김호남을 중매 했던 것이다. 김호남은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던 2년제
간이학교를 졸 업한,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처녀였다. 박성빈이 막내 정희의 결혼 이
야기를 꺼냈을 때 장남 동희와 상희는 반대했다. 앓고 있던 박성빈은 생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것을 꼭 보아야겠다고 우겼다. 박상희는 동생 이 졸업하여 교사로 취직을 했을
때 결혼을 시켜도 늦지 않다고 아버지 를 달랬으나 황소고집인 박성빈은 듣지 않고 화만
냈다. 일방적으로 혼인날짜까지 받아버렸다. 박정희는 펄펄 뛰었다. 혼인날짜는 다가오는
데 박정희가 집에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박상희가 대구로 올라가서
박정희를 달랬다. 상희형에게 잡혀오다시피하여 내려온 박정 희는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혼식 날에 달아날 궁리'까지 했다('이 락선비망록'). 5학년 신학기가
시작되는 날 내키지 않은 결혼식을 올린 박정희는 아내를 상모리 오막살이에 데려다
놓고는 달아나다시피 대구 로 올라왔다. 다시 이정찬의 일기.
*4월2일: 오늘 밤 방바꿈이 있었다. 다행히도 북쪽 기숙사 6호실 - 조용한 곳에
배당되었다.
*4월6일: 신입생 입학식. 밤에는 신입생을 위한 간단한 환영회를 열 었으나 사양하느라고
분위기가 어색했다. 그러나 너희들도 멀지 않아 여우가 될것이다.
*4월18일: 주군의 조난에 대해서 전율을 느낀다. 현장은 보지 못했 지만 남산병원에
문병하러 갔다. 석군도 와 있었다. 원인이 어찌 됐든 사람 손의 흔적이!(주-얌전한
주재정의 머리를 석광수가 맥주병으로 때 린 사건. 주먹장이 석광수가 깨진 맥주병을
들고 설쳐도 겁먹은 동급생 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가 나서서 석광수를
호통쳐 흉기 를 버리게 함으로써 두고 두고 화제가 되었다)'.
1936년 5월7일 대구사범 육상대회에서 박정희는 8백m달리기 3조에 출 전하여 2등을
했다. 1등의 기록만 적혀 있는데 2분21초1. 그달 20일 박 정희를 포함한 5년생들은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날 부산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항에 닿았다.
그들은 열이틀간 히로시마-오사 카-나라-도쿄-가마쿠라-닛코 등지를 돌아다녔다.
학생들이 가장 놀란 것 은 숲이었다. 이정찬의 일기 .
'5월21일 : 히로시마에서 오사카로. 수목이 울창하여 한층 원만한 빛 이 보인다.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너그러운 것이다. 아카시 효고 오사카… 거의 한
도시처럼 붙어있다. 감격할 따름이다. 거칠어진 고향과 비교하여 이 얼마나 여유가
있는가.'.
영웅숭배의 기질이 있던 박정희는 아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이 있는 닛코의
동조궁에서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박정희 일행이 5월31일에 학교로 돌 아오자 기분나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숙사생 23명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비상 방역체제였다. 6월29일부터는
5학년생들이 농촌학교 위탁 실습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농촌지역 보통학교에 가서
농사도 지어보 고 농촌의 문제점도 깨닫도록 한 것이었다. 우가키 조선총독은 사회주의
자들의 농촌침투를 막을 목적도 겸하여 농업진흥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제는
교사들에게도 농촌지도의 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경 남 사천군에 있는
사남보통학교에 배치되었다. 그가 나중에 새마을운동 을 추진할 때 이 실습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 농촌실습은 7월12일까지 계속되었다.
7월18일에는 이와무라 시학관이 대 구사범에 와서 농촌진흥운동과 농촌갱생정책에
대해서 여섯 시간의 강연 을 했다. 7월20일 대구사범은 1학기 종업식을 갖고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30분 간 기숙사 청소, 그리고 30분간 담임교사로부터 주의말씀을 들은 뒤에
학생들은 고향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상모리에서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에 접했을 것이다. 이정 찬의 일기에서 그때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8월10일 :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마라손에서 1,3등을 했다. 무엇 이라 축하해야
하나. 8월11일 : 싫증이 날 정도로 비가 내린다. 손기정 선수에 대한 호외는 계속
뿌려진다. 전국 방방곡곡 환희로 가득 찼다.라 디오에서는 이 군중을 보라, 수많은
환영군중 속에서 세계의 위인으로 지목되고 있다고 한다. 독일 총통 히틀러와 역사적
광경을 배경으로 악 수.'.
박정희는 8월22일 대구사범으로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것이다. 학우들은 모두
건재하였다. 기숙사의 빈대도 건재하였다. 22, 23일 밤, 북료6실의 동거생인 박정희와
열한 명의 학생들은 빈대와의 전쟁을 벌이 느라고 잠을 설쳤다. 실장인 이정찬은
일기에서 '대열을 지어 쳐들어오 는 빈대와의 싸움'이라 표현했다. 대구사범
4,5학년생들은 24일 대구80 연대에 입소했다. 지난해에 이은 2주간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완전한 군 사훈련이었다.
25일 박정희는 새벽 5시반에 일어났다. 점호, 침상정리, 아침식사를 번개처럼 해치운
뒤에 7시반부터 훈련에 참여했다. 저녁 6시부터는 야간 연습이 있었다. 다음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각개전투훈련을 받았다. 27 일에는 비가 내려 박정희는 실내에서
내무반근무요령에 대한 교육을 받 았다. 오후에는 사격예행연습을 했다. 이미 명사수로
정평이 나있던 박 정희에게 있어서는 즐거운 연습이었다. 저녁에는 학생들이 주보로
몰려 가 군것질을 했다. 단팥죽 한 그릇을 사먹기 위해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밤에는 폭풍우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연병장에 나가니 죽은 참새 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런 참새들을 주워모으니 세 양동이나 되었다. 오 전에 사격연습, 오후에는
사격, 밤에는 만화영화 상영이 있었다.
9월1일에는 대구사범의 교련주임인 아리카와(유천주일) 중좌가 '군인 칙유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다음날에도 아리카와는 '스페 인 반란의 진상'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아리카와 중좌는 육군사관 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장교였다.
직급이 정6위 훈4등(정육위 훈사등)으로서 교장 바로 아래였다. 그는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사람들 을 경멸하는 말들을 조선인 학생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했다. 일본인 교
사들도 아리카와를 두려워했다. 그는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민족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리카와는 박정 희를 "보쿠세이키,
보쿠세이키"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했다. 총검술을 가 르칠 때는 박정희를 시범조교로
불러내었다. 박정희가 보여주는 모범동 작은 직업군인 수준이었다. 그의 차려자세는
말뚝을 박아놓은 것 같았다. 학과시간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박정희이지만 교련시간만
되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3학년 때는 소대장에 임명되기도 했고, 그
뒤에는 나팔수를 지원하였다.
9월30일은 추석이었다. 학교에서는 무슨 심술이 났는지 이날에도 학생 들을 쉬게 해주지
않았다. 오전엔 단기강습과정 수료식과 두 시간의 교 련이 있었다. 오후에는 기숙사의
대청소를 시키는 것이었다. 온건한 이 정찬까지도 일기장에다 '외출할 수 없도록
대청소를 시킨 것이 아닌가. 추석은 어디까지나 추석이다'고 불평했다. 10월19일
박정희는 학교부설 수성농장에 가서 벼베기 실습을 했다. 그날 저녁 사감회의에서는
9월분 기숙사비 미납자들에 대한 제재가 결정되었다. 오는 25일까지 미납상태 가
계속되는 학생은 집으로 가서 돈을 마련해 오라는 결정이었다. 며칠 뒤 박정희는 구미로
내려갔다.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네 번째의 추방 같 은 귀향이었다. 그가 학교를 비운
사이 학생들은 학과 외의 일로 시달리 고 있었다. 10월24일부터는 교육칙어
제정기념주간 행사가 시작되었다. 첫날엔 칙어봉독식과 암송모임, 마직막 날인 30일에는
학생들이 5시반에 일어났다. 7시반까지 대구신사에 모여 참배하고 학교로 돌아와서는 또
국기게양식과 교장의 훈화.
이어서 교련.
11월12일에 박정희는 상모리에서 기숙사 실장인 이정찬이 보낸 엽서 를 받았다.
11월24일부터 기말시험이 있을 예정이니 빨리 돌아오라는 재 촉이었다. 며칠 뒤
박정희는 기숙사비를 마련하여 구미역을 떠났다. 박 정희는, 4학년 때는 73명 중 73등,
5학년때는 70명 중 69등이었으나 유 급은 되지 않았다. 시험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
쳤고 평균점수가 61점 이었기 때문이다.
5학년 때만 장기결석을 41일이나 하고도 이 정도 점수를 받았다는 것 은 그의 머리가
좋다는 증거가 되었다.
12월7일부터 박정희는 동급생들과 함께 대구수창보통학교에 교생으로 배치되어
교사실습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오후에 기숙사로 돌아오니 수 색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정찬의 일기 .
'12월8일 : 오늘은 어두운 뒤에 돌아왔다. 도중 강습과생을 만났는데 기숙사에서는
무엇인지 시끄럽다. 우선 식당에 들어가 보니 친구들 중에 는 무엇무엇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럼 나도 하고 조사해 보았더니 저 '스크랩 북'이 없었다. 이코마 선생이
조사했다고 한다.
12월10일 : 저녁식사 후 교안을 만들고 있을 때 급사가 와서 기시 담 임선생이 부른다고
한다. 스크랩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무엇인가 있어 호출되고 있다. 그것은 3년
전의일이다. 그래도 효력이 있는지. 저 러한 것을 무엇인가의 증거로 보관이라도 하면
곤란하다. 내용보다도 표 면의 사안을 갖고 다스리려고 하니까.'.
박정희가 5학년일 때의 담임은 기시 요네사쿠였다. 수신, 공민과목을 담당했던 그는 당시
44세였다. 시즈오카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8년 대구사범에 부임하였다. 부드러운
학자의 분위기를 지닌 기시는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호평을 많이 받던 일인 교사였다.
이른바 '대정 데모크 라시'를 호흡하면서 학창생활을 보낸 때문인지 그는 조선인
학생들을 인 격적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김제여고교장을 거쳐 광복 뒤에 일본에 돌아
가서도 교육계서 일했던 그는 '유전 교육60년'이란 회고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대구사범 교사 시절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진설명 : 박정희의 5학년 때 담임이었던 기시 선생. '대정데모크라시' 세대로서 자유주의자란 평을 받았던
그는 조선인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1975년 청와대를 방문하여 제자인 대통령과 재회했다.
기시가 대구사범에 부임했을 때 교장이 맨 처음 준 주의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절대로
'조센진'이란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그는 반항 기 조선학생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대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교육을 열심히 시키면 시킬 수록 교사의 의도와는 반대로 항일 이 일의 방향으로
빗나가고 순종이나 소박함을 잃어버리는 학생들을 보고는 식민지 교육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5·15사건, 국제연맹 탈퇴, 2·26사 건이 잇따르면서 생도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라는 지침이 시달되었다. 교 사에게까지도 국민복에 전투모, 머리 짧게 깎기 등이
권장되었다. 현역 배속장교가 눈을 부라리는 분위기 아래서 교육은 지도에서 훈련으로,
훈 련에서 단련으로 엄격해져 가기만 했다. 학생들이 등교하고 없는 기숙사 를, 사감을
동원하여 뒤져서 사상관계책이나 조선어 노트를 조사하는 등 특고 경찰과 같은 행동도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이 흩어진 책 들을 보고서 분노와 반항심을 가질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의 성적표를 보면 하나 재미 있는 점이 발견된다. 5학년 때 담임교사 기시는
박정희의 품행 평가란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비워 두었 다. 1-4학년까지의 담임선생들은
'불활발''불성실''빈곤한듯' 식으로 나 쁜 평을 써넣었는데 기시만은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꼴찌 권의 이 학생이 지닌 그릇이 간단치 않음을 알았을까. 기시는
1975년9월 에 대구사범 출신 제자들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달
26일오전, 그는 청와대로 초청되어 가서 집무실에서 왕년의 제자 박정희 를 만났다.
박정희는 스승을 반갑게 맞더니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하 고 일본어로 말문을 뗐다.
"70을 넘겼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아주 젊게 보입니다. 사범학교 시절에는 올백을
한 머리가 새까만 선생님이셨는데.".
대통령은 양해를 구했다.
"선생님, 저의 일본어는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관저에서 는 일본사람들을
공적으로 만나게 되므로 일본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 나 일본어를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안심하시고 말씀해 주 십시오.".
기시가 들어보니 박정희의 일본어는 정확무비하였다. 그는 박정희와 의 대화에서
'일본육사에서 단련된 정확, 신속, 실천, 과감한 기풍을 느 낄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시를 안내해온 대구사범 출신 인사 두 사람이 박대통령에게 한국말로 설명을 하는
바람에 잠시 기시는 대화에서 소외 되었다. 이를 눈치챈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다시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갔 다.
기시는 '대담한 결단과 세심한 배려를 공유한' 지도자상을 느낄 수 있었다. 기시는 종전
후 미국이 일본에 이식시킨 6-3-3의 교육제도가 혼 란을 가져왔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와 보니 건국의 이상이 초-중-고등 학교에 잘 침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감동했다고 말했 다. 대통령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다음 세대에 기대를 걸고 교육에 힘쓰고 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 는군요. 대학에서는
되도 않는 옷차림에다가 장발과 엉터리 민주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반대만
하려고 하니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30분이 지나서 기시가 일어서려고 했더니 대통령은 붙들었다.
"좀 더 말씀을 나누시죠. 비서관에게 지시해놓겠습니다.".
대통령은 커피를 권하면서 담소를 계속했다. 기시가 붓글씨를 부탁하 자 대통령이
부끄럼을 타면서 극구 사양하는 것이었다.
"저는 원래 글씨가 나쁩니다. 선생님에게 드릴 만한 글씨를 쓸 수가 없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대통령의 활력에 넘치는 글씨를 보고서 감탄했습 니다." "어디서요?"
"옛 대구사범을 찾았을 때 교장실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은
곤란합니다.선생님께서 일본으로 돌아가신 뒤 에 저도 연습을 해서 한 자
써보내겠습니다.".
기시는 화제를 '일본문화의 뿌리'로 돌렸다. 중국문화가 한반도를 거 쳐 일본으로 건너간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자 박정희는 인사치레의 말로 넘기고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수한 민족성의 기반이 있 습니다. 한반도에서
문화인과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여 이들 이 또 독자적인 일본 문화를
만들었지요. 유교로 말할 것 같으면 본산인 중국에서는 쇠퇴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했 지만 여기서도 형해화하고 말았고 유독 일본에서만
일본유학으로서 대성 하였습니다. 한국의 불교는 공자묘 등 각지에 형식상 남아 있기는
하지 만 본질은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대구사범시대에 배운 이야기 가운데 지 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도의 학숙에서 공맹의 가르침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야마자키라는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만약 공 자 맹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침략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 은 대답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자키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즉시 공맹을 맞아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가르 침이다'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란 것은 이렇게 살려가지 않으면 안됩니
다.일본에서는 공자 맹자가 살아서 대성하였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의 주체적인 외래사상 선별 수용과 한국의 사대적인 외 래사상 추종을
비교한 것이다. 50분이 지났다. 박대통령은 5학년때의 담 임 기시가 시간을 너무
빼앗는다고 미안해 하니까 "선생님 우리 나가서 기념사진이라도…"라고 했다. 집무실의
작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니 초가을의 햇볕이 좋았다. 박정희는 관저를 삥 두르고
있는 국화 화분을 가리키면서 "저는 국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지금은 국화의 계절,
일본의 국화도 아름답지요. 국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하는데 한국과 일본에 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기시를 배 웅하기 위해서 본관
현관을 내려오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쿠데타의 지휘자로서 이 곳을 무혈점령한 제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에서 운명의
불가사의를 느낍니다. 그러한 내가 언제 살해될지 모른다 는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담담한 술회에 기시는 입에는 차마 올리지못하고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을 했다.
"영부인의 일은 참으로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대신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시는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는 차중에서 '바싹 마른 체구의 대통령, 그러한 그의 어디에
결사적인 우국의 투지가 숨어있는가 하고 깊은 생각 에 잠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