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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4.13 카트린 드 메디치 태어나다
16세기 프랑스의 왕비이자 황태후의 삶을 산 메디치가의 카트린을 ‘검은 베일 속의 백합’이라고 은유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합 세 송이와 일곱 개의 환약으로 만들어진 메디치가의 문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평민 출신이었던 피렌체의 강력한 금융가문인 메디치가의 문장은 7개의 알약만 그려져 있었다.
메디치가의 조상이 약사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백합 세 송이가 같이 그려진 것은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의 덕이다. 그는 메디치가의 가문을 높이 평가하여 146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죽자 프랑스의 카페 왕조를 상징하는 백합 세 송이를 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었다. 초라한 환약과 백합의 결합인 이 문장은 권력과 부와 명예의 가문에 걸맞은 문장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 가문에서 배출한 여걸이었다. 그녀는 메디치가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되면서 내면으로는 금융가문인 메디치가의 피를 지니고 프랑스의 백합으로서 살았다. 이 백합은 프랑스 왕족이라는 권위와 명예를 지키는 삶을 살다 갔다.
"이 아이는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
그리고 ‘검은 베일’은 의미는 이렇다. 그녀의 남편인 앙리 2세가 마상 시합을 하다가 상대방의 창이 눈을 관통하는 바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이자 왕국의 왕이 죽고 나서부터 카트린은 영원히 복상한다는 뜻으로 더 이상 화려한 색감이 있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그때부터 그녀는 “검은 왕비”로 불리게 된다.
'검은 베일 속의 백합'카트린 드 메디치(좌), 메디치가 출신인 교황 클레멘스 7세(우)
검은 베일속의 백합, 카트린은 1519년 4월 13일, 피렌체의 메디치 궁에서 ‘위대한 자 로렌초’의 손자인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와 프랑스 왕녀인 마들랭 오베르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는 즈음에 아버지는 옆방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어머니 역시 빈사상태였다. 카트린은 태어나면서부터 메디치가의 화려한 요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몰락해 가는 가문의 마지막 자식으로 부모님의 관을 준비시킨 불행한 아이였다. 카트린 역시 병약해서 아이도 곧 부모의 곁으로 갈 것 같았다. 운명의 여신은 프랑스를 위해 카트린을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메디치 가문이 신봉한 피렌체의 한 점성술사는 그녀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가지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 가다
하지만 그녀는 불행의 씨앗만을 품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그녀는 그 불행을 견뎌낼 값진 유산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책 한 권이었다.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그녀는 메디치가의 선조들이 달달 외우고 갈아 마셔 내면화시킨 마키아벨리를 가지고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을 갔다.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지고 간 영지와 재산은 이 책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혜롭고 인문적인 여인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녀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카트린의 남편, 앙리 2세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내고, 적절하게 본심을 숨기고 못 본 척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단순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상대를 어렵잖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군주는 선의와 관용, 자비심, 공정심, 그리고 정의감을 갖고 있다는 평판을 듣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는 이 모든 장점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시하기 위해서) 또한 적당한 때가 되면 그 반대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군주는 특히 새로운 군주는 평범한 인간의 모든 미덕을 아무 탈 없이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리 때문에 인간과 자비와 공정심과 종교의 법칙을 자주 위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묵했다. 그녀는 예쁘고 늘씬하지는 않았지만, 고귀하고 기품 있었다. 남편인 앙리 2세도, 박색이지만 그녀의 이러한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수많은 애첩과 뒹굴고 나선 그녀를 찾곤 했다.
16세기에는 결혼이 일종의 외교 협상과도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을 오기 전부터 몰락한 가문의 후손이 당해야 하는 온갖 굴욕과 위험을 다 감내해 냈다. 1530년 7월 19일 밤이 그 절정이었다. 카트린이 은신해 있던 수녀원에 폭동을 일으킨 피렌치 시민들이 문을 두들기면서 카트린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이라도 이 작고 연약한 새와 같은 카트린을 잡아 죽일 태세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열한 살 소녀 카트린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대처했다. 수녀들이, 분노한 시의원들과 겨우 협상을 해서 그녀는 다른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겨 살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결혼이 일종의 외교협상과도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싸움과 전쟁은 적절한 결혼관계로 화해를 하기도 하고, 영토 분배를 하기도 한다. 카트린 역시 이러한 정략결혼의 대상이었다. 16세기에는 결혼만 잘 시키면 동맹을 맺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가의 이 소중한 보물인 카트린을 데리고, 어디에 어떻게 ‘비즈니스’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여러 후보자들 중에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 오를레앙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이 결혼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권세를 누린 집안이지만 평민의 혈통이 왕족 가문에 시집 온다는 건 왕실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 왕조의 스타일을 확 구긴 결혼이었다. 그녀의 결혼은 교황과 프랑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이해타산에 의해 일종의 계약결혼으로 성사되었다.
그녀는 권력자 앞에 서서 상냥하고 겸손하며 공손하게 행동했다
이 정략결혼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역사가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카트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 왕궁의 두 여인을 이야기해야 한다. 아름다운 독사와 같은 여인들이었다. 한 명은 카트린의 시아버지인 프랑수와 1세의 애첩 안느였다. 다른 여자는 자신의 남편 앙리 2세의 애첩 디안이었다. 프랑스 왕실은 이 두 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두 여인의 치마폭에서 놀아났다. 피렌체의 시골뜨기 카트린은 그녀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디안은 카트린의 남편보다 20년이나 연상인 귀부인으로 앙리가 이미 9살 무렵에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 이른바 운명의 여인이었다. 앙리가 장성하고 디안의 남편이 죽자 그녀는 자신에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젊은 왕자를 받아들여 정말 ‘잘나가는 인생’을 손에 쥐었다.
카트린의 아들 프랑수와 2세
아버지와 아들, 즉 프랑스의 왕과 왕자는 애첩과 더불어 아름다운 여성들과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면서도 요상하게도 이 두 여자에게는 꼼짝 못하는 사내들이었다. 이 두 여인이 서로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암투가 프랑스를 어지럽혔다. 카트린은 이 모든 상황을 그야말로 납작 엎드린 자세로 지켜보았다. 여인으로서의 치욕, 모멸감, 권위상실을 다 견뎌냈다. 납작 엎드려서 말이다. 장 오리와는 이렇게 쓴다.
“그녀(카트린) 역시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이야말로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반면, 메디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장점, 즉 탁월한 판단력과 유연성, 본심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신중함이 자신의 무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키아벨리의 제자였다. 그녀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상대를 칭찬하고 호의를 표시하는 일에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권력자 앞에 서서 상냥하고 겸손하며 공손하게 행동했다. 만약 왕자비라면서 오만하게 굴었더라면 그녀의 운명은 백팔십도 달라졌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왕들께서 해야 될 일을 창녀들이 좌지우지해왔군요."
카트린 아들 샤를 9세.
온화한 인물이었으나, 호흡을 깊이 하지 못하는 등 몸이 약했다.
대신 그녀는 왕들의 애첩들이 사랑을 받는 동안에 10명의 아이를 낳았다. 11년에 걸려서였다. 훗날 자신이 섭정할 왕이 될 왕자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왕국을 지배할 초석을 튼튼히 쌓아두는 동안 이 두 잘 난 여인의 운명은 왕들의 죽음과 함께 비극적으로 끝났다. 안느에게는 프랑수와 1세가 지정해준 허수아비 남편 에탕트 공작이 있었다. 그녀는 왕이 서거하자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 있던 왕자의 애첩 디안의 승리였다. 왕자가 왕위에 오르고, 디안이 왕의 애첩이 되면, 안느는 분명 처형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탕트 공작부인(안느)은 두려웠다. 하지만 디안은 ‘나이든 여자’ 답게 행동했다. 에탕트 공작부인은 가톨릭에 대항하는 루터파이고, 이단을 행했으며, 이교도들에게 도움까지도 주었다. 왕의 애첩으로서 사리사욕을 채워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어도 구교도들에게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하지만 디안은 안느가 선물 받은 왕가의 보석들만 쏙 빼앗았다. 나머지는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 다 알아서 했다. 남편 에탕트 공작은 그녀가 왕에게서 받은 모든 재산을 압수했다. 그리고 그녀를 먼 성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18년 동안 감금당한 채 살다가 죽게 했다.
에탕트 부인이 사라진 자리에 디안이 들어섰다. 디안은 에탕트 부인보다 한 술 더 뜬다. 이 늙고 농염한 여자의 탐욕에는 끝이 없었다. 국고의 막대한 돈이 디안의 지갑 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일단 세금 착복에 눈을 뜬 디안의 탐욕은 끝없이 발휘되어 그녀는 종(鍾)에도 특별세가 붙는다는 사실을 알아내, 그 세금 전부를 챙겼다. 오죽하면 라블레가 “왕이 왕국의 모든 종들을 자기 암말의 목에 매달았다”라고 썼을까. 물론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문제는 그때문에 국고가 텅 비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 카트린에게 디안이 무슨 책이냐고 묻자, 카트린은 “이 왕국의 역사가들이 쓴 책을 읽고 있답니다. 부인, 그런데 제가 보니 예나 지금이나 왕들께서 해야 될 일들을 창녀들이 좌지우지해왔군요”라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디안은 이미 왕족들만 소유할 수 있는 발렌티누아 봉토를 차지하고 발렌티누아 공작부인이라는 허명으로 살고 있었다. 백성들의 비난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앙리 2세가 사고로 죽자 카트린은 디안에 대해 복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복수 대신에 자신이 정말 사랑한 왕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검은 베일을 쓰고 고통과 야심으로 무장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왕비와 왕의 어머니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다.
정치적 게임에 증오처럼 나쁜 패는 없다. 위엄을 지키려면 관용이 필요하다
장 오리와는 카트린에 대해 다음처럼 썼다.
“그녀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계산적이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증오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했다. 오늘의 적이 어쩌면 내일은 없어서는 안 되는 동지가 될 수 있다. 금융가의 딸인 카트린은 이길 가망이 없는 게임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게임을 하는 데 증오처럼 나쁜 패는 없었다. 그녀는 왕비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대함’을 발휘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관대함을 발휘했다. ‘관용’은 마키아벨리의 딸에게는 하나의 무기였다.”
카트린의 아들 앙리 3세. 통치보다는 종교적 신앙에 관심이 컸다.
이후 카트린은 프랑스 왕들이 된 세 아들이 그녀가 ‘창녀’라고 지칭했던 여인들의 손에서 놀아나지 않기 위해 30년 간이나 섭정을 했다. 첫 아들 프랑수와 2세의 섭정을 하던 그녀는 병약한 아들인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노스트라다무스를 불러 비밀스러운 의식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점쳤다. 그 자리에는 황태후인 카트린, 메리 스튜어트, 로렌 제후가 참석했다.
유대인으로 신비술에 통달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신비스러운 의식을 통해 프랑수와가 1년, 동생인 샤를 9세가 14년, 앙리 3세가 15년, 모두 30년이 그녀의 섭정 시대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그녀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구교 갈등, 남편이 숨진 후 커진 종교전쟁의 피 비린내를 현장에서 코를 대고 맡았다. 반란과 형벌, 내란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카트린이라는 한 여인의 인내심과 정치력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내전 상태를 막기 위해 그녀는 온갖 애를 다 썼다. 천수를 누리면서 탁월하고도 노회하다고 할 수 있는 ‘협상’으로 때론 상대를 분통 터지게 하기도 했다.
피 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프랑스를 30년 간이나 지켜낸 여인
“카트린은 전쟁의 위력을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모든 폭력은 그녀의 본성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녀는 무력으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전쟁에서 승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이는 곧 휴머니스트의 금과옥조였다. 전쟁을 피하려고 했던 그녀는 중무장한 적들 앞에서 거의 늘 패배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전투방식으로 그들에게서 최후의 승리를 빼앗곤 했다. 그것은 바로 협상, 외교, 화해라는 전술이었다. 그녀는 이 패들을 써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한 승리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칠순의 나이로 늙은 황태후 카트린은 지병으로 쓰러지는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앙리 3세가 평생 경쟁자이면서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파리의 왕’ 기즈 공작을 암살하자 처참한 심경이 되었다. 그리고는 유언장을 작성한 후 1589년 1월 5일 숨을 거뒀다. 그녀는 남편인 앙리 2세의 곁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교회 밑바닥에 방치되어 묻혔다가 20년이 지난 후에야 생드니 대성당으로 시신을 운구하여 앙리 2세의 곁에 묻힐 수 있었다. 그녀가 유지하고 싶었던 피투성이의 프랑스는 가톨릭과 루터파의 싸움으로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입장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양쪽을 다 만족시킬 것이다. “그 분의 삶은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종교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가혹하다. 피렌체에서 건너온 메디치 가의 한 여인이 지켜낸 30년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버티게 한 버팀목이었다. 그 누가 나선들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시대의 걸작이자 공과가 분명했던 이 여걸에 대해 묘비명과 같은 시 한편을 인용한다.
‘여기 누워 있는 왕비는 악마이자 천사라네
한편으론 비난 받고 또 한편으로는 칭송 받는
왕비는 국가를 떠받치고 국가를 쓰러뜨렸네
왕비는 수많은 협약을 맺고 수많은 토론을 벌였네
왕비는 세 명의 왕을 낳고, 다섯 번의 내전을 일으켰네
왕비는 성을 쌓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네
훌륭한 법을 제정하고 나쁜 칙령을 발표했다네
자, 그녀가 지옥과 천당에 가길 바라자.’
카트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젊고 현명한 신부의 초상화이다. 얼핏 보기에는 박색이다. 온 몸을 장식한 보석들이 없다면 그녀는 과연 한 시절 프랑스의 절대 권력자였다는 설명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맹아이다. 조금 더 집중해서 바라본다. 주위가 조용해서인지 묘한 일이 벌어진다. 그녀의 장식품들이 사라지고 눈과 코 입이 조화롭게 다가온다. 그녀가 말한다.
“신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원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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