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의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대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피 속엔 더 강한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 숲을
이순신(李舜臣) 같이, 나폴레옹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죽음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서쪽새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오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 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江)과 산(山)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시베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 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 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내 땅에 한 줌 흙이 되길
소원하노라.
♤ 모윤숙(毛允淑, 1910~1990)
호는 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고, 1931년 현 이화여자
대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