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임(盧景任)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안강(安康)이다. 고려 대광(大匡) 노광한(盧光漢)의 후손이고, 진사 노수성(盧守誠)의 아들이다.
비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에 공이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아버지 송암공(松菴公)이 기뻐하며 “이 아이는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크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자라서 외숙부 여헌(旅軒) 선생에게 학업을 익혀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을 수 있었으니, 뜻을 가다듬어 온갖 고생을 견디며 몹시 애를 썼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교서관(校書館)에 배치되었다가 다시 승문원(承文院)에 배치되었다.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역임하고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외직으로 나가 강원도 순찰어사가 되어 삼척 부사(三陟府使) 홍인걸(洪仁傑)이 피로인(被擄人)을 마음대로 죽이고 윗사람을 속여 공(功)을 바란 죄를 조사하여 다스리자, 여론이 시원하게 여겼다.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예조 정랑으로 옮겼다. 체찰사(體察使) 영상 이원익(李元冀)의 막부에서 보좌하였는데 판결하는 일이 물 흐르듯 하였으므로, 이 영상이 매우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옥당(玉堂)에 들어가 교리가 되었다.
무술년(1598, 선조31)에 헌납과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외직으로 나가 있었으니 예천 군수(醴泉郡守), 풍기 군수(豐基郡守), 영해 부사(寧海府使), 성주 군수(星州郡守)를 역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헌(旅軒) 선생이 일찍이 공에게 정인홍(鄭仁弘)의 명성이 높다고 하면서 공에게 가서 만나 보게 하였는데, 공이 돌아와서는 그의 심보가 간사하다고 힘을 다해 말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인홍이 소인배를 부추겨 죄명을 날조하고 탄핵하게 하여 공을 파면시켰다. 이 일로 집에서 한가로이 보낸 세월이 7,8년이었는데, 낙동강 가에 집을 짓고 속세에서 벗어나 소요하면서 삶을 마치려고 생각하였다.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감기에 걸려 10월에 선산부(善山府) 남쪽 모로촌(慕魯村)의 별장에서 생을 마쳤다. 이듬해 도리산(桃李山)에 장사지냈는데,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500여 명이었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진실하고 후덕하며 풍채가 엄연하였으니 운치가 우뚝하고 장중하였다. 서애(西厓), 여헌(旅軒) 두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집을 짓고 좌우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갖추고 늘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똑바로 앉아 먼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중용(中庸)》 , 《대학(大壑)》 등의 책을 암송한 뒤에 다른 책을 읽었다.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자경편(自警篇)》을 매우 좋아하여 비록 직무의 체모가 바쁜 중이라도 책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학문을 할 때는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니, 일찍이 <주경설(主敬說)>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평생토록 기쁨과 분노를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공을 만나는 사람은 절로 저도 모르게 삼가며 공경심이 일어났다. 내부인(內夫人)도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였으며, 일찍이 “내 평생토록 농담하고 게으른 기색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서애 선생이 아들 수암공(修巖公) 유진(柳袗)에게 “내 평생토록 만난 사람들이 많지만, 충직하고 순후하며 점잖고 미덥기가 이와 같은 사람은 있은 적이 없다. 너는 그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성품은 효성이 독실하였다. 일찍이 송암공(松菴公)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애통해하였는데 말이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모친을 섬길 때는 정성과 효성을 극진히 하였으니, 끝까지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유명(幽明)간에 애통함으로 여겼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 강개하여 때로는 오열하기까지 하였다. 관동(關東)의 순찰사가 되었을 때는 상소로 시폐(時弊)를 진달하였고, 끝내 임금의 한 마음을 나가서 다스리는 요체로 삼고 두려워하고 공경하라는 말에 더욱 정성을 들였다.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있을 때 선조(宣祖)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았고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3년을 마쳤다. 대(大)가 가고 소(小)가 오는 날에 이르러서는 관리의 직책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또 낮은 자리라 해서 스스로 게을리하려 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숭상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떠난 뒤에는 항상 거사비(去思碑)가 있었으나, 성주(星州)에서는 정인홍에게 제지당하였다.
아, 공은 학문의 바름과 덕성의 두터움과 재주의 훌륭함이 중년에는 충분히 쌓이지 않다가 만년에 크게 구비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듯이 아니겠는가. 공의 언행(言行)에 대해서는 정중하여 다 말할 수 없고, 집안에서의 행실이 올바른 도리에 한결같이 하고 방상(方喪)에 그 예제를 다한 경우는 실로 천백세(千百世)에 한 사람뿐이다. 후세의 공론(公論)이 어찌 백년을 기다려서 정해지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안강에 자리한 노씨 가문 安康之盧
후손이 줄지어 이어지네 蟬聯胄胤
옥산의 외손이요 玉山宅相
하회의 사위라네 河回玉潤
아름다운 자취 이어받아 趾美襲芳
빼어나고 훌륭한 자질이네 英姿美質
행동거지가 아름다우니 制行之懿
안과 밖이 한결같았다네 表裏如一
시의에 맞지 못하였으니 抹摋于時
살아서 펼치지 못하였네 生不展布
덕을 아는 자 드물어서 知德者希
죽어서는 제사하지 않네 歿不俎豆
오산은 높고도 높으며 烏山巘獻
낙동강은 도도히 흐르네 洛水泱泱
명성은 산과 나란히 높고 名與齊高
도는 강물과 함께 장구하리 道與俱長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〇 선생이 차운한 시
성학에는 연원이 있으니 聖學有淵源
깊은 도리는 곧 정일이네 要言是精一
자사가 후학을 근심하여 子思憂後學
또 치곡이라 하였다네 又云當致曲
인심과 도심이라는 것은 人心與道心
하나가 닫히면 하나가 열리네 一闔還一闢
구천으로 오르는 듯하다가도 悟登九天上
천 길 구렁에 빠지는 듯하네 迷沈千丈壑
거두었다가 풀어놓는 사이에 收來放去間
성인⦁광인이 마음에서 나뉘네 聖狂分寸臆
내 늙도록 도를 깨닫지 못해 我老未聞道
마음속 생각이 날로 기우네 心念日頗側
마치 저 갈 길 잃은 사람처럼 如彼失路人
허둥지둥 갈 곳 몰라 하누나 倀倀無所適
그대처럼 한창 젊은이들이여 如君富年力
금석처럼 뜻을 독실하게 하소 篤志如金石
평소 말할 때 반드시 삼가고 庸言必加謹
평소의 행동에 더욱 신칙하소 庸行必加飭
뜻이 전일하면 기운은 따르니 志壹氣自隨
둘을 견지하여 무너지기 말기를 夾持期無斁
〇 선생이 보낸 편지
무더운 날씨에 어버이를 모시며 공부하는 일이 어떠한가? 날마다 쉬지 않고 일삼아 길이 진전되는 공효가 있고, 산림에서 얻기 어려운 세월은 헛되이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늙은이는 눈이 침침하여 책을 덮었으며 손이 떨려 글자를 쓸 수 없으니, 다만 깊은 골짝의 완고한 사람이 되었으니 가소롭습니다.
근래에 보내온 동사(東史)를 보았는데 우리나라의 문헌이 이처럼 소략하여 매우 개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기자가 봉작된 이후로 세수(歲首)에 자(子)를 쓰는가? 축(丑)을 쓰는가?’라고 물었으니, 이 또한 대단한 일인데 전기(傳記)에 나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고려 때 10도(道)로 나누었는데 ‘중원(中原)’ ‘관서(關西)’ ‘하남(河南)’ ‘강남(江南)’ ‘영남(領南)’ ‘영동(嶺東)’ ‘산남(山南)’ ‘해양(海陽)’ ‘패서(浿西)’ ‘삭방(朔方)’ 등이니, 이 또한 지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지지(輿地志)》에는 틀림없이 있을 것인데 이곳에는 책이 없어 자세히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한 번 보여 주어 고루함을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 나머지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서신을 직접 쓰는 것이 아니어서 자세히 말할 수 없고 마땅히 뒷날 만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하였다.
대(大)가……날 : 《주역》 〈비괘(否卦)〉에 “군자의 곧음이 이롭지 않으니, 대가 가고 소가 오기 때문이다.〔不利君子貞 大往小來〕”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대(大)는 군자를, 소(小)는 소인을 의미하니, 군자가 물러가고 소인이 득세하는 비색(否塞)한 시운을 말하는 것이다.
방상(方喪) : 임금의 상을 당했을 때 부모상을 당한 경우에 견주어 참최 삼년(斬衰三年)으로 복(服)을 입는 것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
옥산(玉山)의 외손 : 노경임의 어머니가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장렬(張烈)의 딸이자 장현광(張顯光)의 누나이다. 옥산(玉山)은 인동 장씨의 세거지인 구미 인동(仁同)의 옛 이름이다.
하회(河回)의 사위 : 노경임의 부인이 풍산 유씨(豐山柳氏)로, 유운룡(柳雲龍)의 딸이다. 하회는 풍산 유씨 집성촌인 안동시 하회를 가리킨다.
정일(精一) : 요(堯) 임금이 순(舜)에게 제위(帝位)를 전하면서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라고 하였는데, 순 임금이 우(禹)에게 전하면서는 이 말을 부연하여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謨》 이 말은 유가에서 도통(道統)을 전하는 심법(心法)으로 여긴다.
치곡(致曲) : 한쪽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성(誠)이 미흡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대현(大賢) 이하의 사람들도 자기의 부분적인 선단(善端)을 확대하여 지성(至聖)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3장에 “그다음은 한쪽으로 지극히 하는 것이니, 한쪽으로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고……더욱 드러나면 밝아진다.[其次致曲, 曲能有誠,……著則明.]”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