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노는 양 / 김지명
하몽하몽 중얼거리면
무덤에 사는 할머니가 내게로 왔다
연못이 힘껏 들어올린 가시연꽃이
아이 생식기만 하게 하늘을 덮고 있다
무덤덤에 갇혀 있던 입이
시간의 내역을 소화하던 검은 잇몸이
물고기 시늉으로 가시연꽃을 따 먹고 있다
남의 손으로 아침을 받아먹던
잃어버린 손으로
없는 손 사이
내가 보였다
하 몽하 몽 말끝이 잘려 나간 꿈 조각에는
한쪽 귀와 한쪽 코 한쪽 눈썹만으로
한쪽이 된 엄마
비통한 한 조각이었는데 눈을 감아
평온한 정지
종이질로 피어 있는 목화꽃 같아
손끝만 스쳐도 찢어질 듯
아스라이 하몽하몽
새끼를 데리고 리어카를 몰고
과일 좌판을 나서는
맹목과 맹모 사이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하몽하몽 발음 속에 빠지면
공평한 석양이 지붕에 저녁을 짜 올려
유리벽도 금 간 시멘트벽도 멀리서 보면
작아서 좋은
세상이 반건조되어 말랑하였다
헤어지고 배신당해도
괜찮아
사랑, 그 정도 산책할 거리를 두면 안 되나
우리가 사는 모든 시간이 꽃봉오리라면
우리는 아직 꽃차례 위레 있다
어린 감정을 복사하고 붕대로 감아
낯꽃을 숨기고 있다
하몽하몽
● 우리가 사는 모든 시간이 꽃봉오리: 김선영,『시간을 파는 상점』에서 인용
꽃의 사서함 / 김지명
근처 어디에도 내가 없어
들판에서 혼자 그려 낸 만큼 피우고 섰다
그의 눈에 띄기 위해 그를 눈에 담기 위해
먼 길 통증도 분홍의 의지로 편입시켰다
나는 손이 시려도 잡을 수 없는 연인일지 모른다
나는 재미없는 정물이라고 풍장됐을지 모른다
익명으로 털올 바람이 배달되고
자살하지 않을 만큼 슬픔이 배달되고
나는 내 얼굴을 몰라
몸속 깊이 함의한 그가 좋아한 색깔도 몰라
의심의 꽃대궁으로 그를 기다린다
말문 트는 입술을 훔쳐 건너온
오해의 여분만큼 그를 이해할 시간
꽃잎마다 그를 앓는 편지를 쓴다
어딘지 좀 채도가 부족한 생각일까
가끔 거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갖고 싶은 사람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랄까
그가 잠시 빌려 온 남의 애인이었으면 좋겠다
나침판 없는 시계를 찼으면 좋겠다
내 희망이 바삭 구워지기 전에
매음굴이라는 말로
공작소라는 말로
누군가 내 목을 따 갔다
그건 내 아름다움을 진술한 방식
어느 꽃씨 부족을 발성하는
그가 사는 거울
그럼에도 기린 / 김지명
그럼에도 귀족입니다
새들이 물고 다니는 고독의 높이에 닿으면
부드러운 공기의 근육이 만져집니다
하늘의 연꽃이 흩날리는 마당을 가진 게 아니지만
해안선을 움켜쥔 초원을 가진 게 아니지만
온몸으로 차린 식탁은 풍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뒤축이 가벼운 그이는 이동식 성채입니다
멈추면 보이는 먼 옛날 온쉼표의 발자국들
빛나는 주변을 서성이는 부채를 예감합니다
긴 다리 사이로 흘러가는 식물들의 표정에서
입술을 털어 내려 가시를 키우는 아카시아나무에게서
고요도 소요도 우리들의 발성법
관심도 무관심도 위태로워지는 지점
나란히 그이를 들어 보세요
숨을 줄도 모르고 네 편 내 편도 모르는
이웃 같고 건달 같고 구멍달 같은
은행에 영혼까지 팔아 버려 두려울 게 없지만
따뜻한 시선 두려워 뒤만 돌아본 목 길이입니다
책 속에서 튀어나온 긴 목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를 보며
몸에 그려진 모나지 않은 네모들의 다정한 환청을 들으며
발끝으로 세상의 끝까지 걸어간 키다리 그이가
태양의 감전사라고 나대지의 바람이 들려주는 오후
누가 풀꽃을 엮어 화관을 짜 주었을까
우두커니 높이를 경배하는 시절입니다
자주색 가방 / 김지명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길을 잃어버릴 수 없는데
난민의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애초에 직각을 사랑했습니다
밟지도 밟히지도 않으려
헤르메스 지팡이를 매달았습니다
싸움 없는 싸움 놀이 없는 놀이 속에서
끓는 점 없는 억양으로
서류나 도시락, 필기구는 나란했습니다
서류 대신 뒷담화 표정을 집어넣고
도시락 대신 참회 없는 지갑을 집어넣고
궁금해 환장해 할 지퍼를 달았습니다
나를 포장한 세계는 유효기간이 적지 않아
사인하는 손들이 얼굴을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골목이 등장한 건지
얼마나 많은 손이 등장한 건지
등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배불리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직각을 넘어서면 바닥입니다
뜻밖의 나무 한 그루 신목처럼 자라도록
지팡이 꽂아두었지만
나는 왕으로 태어난 비참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의 둘레만큼 죄책감이 무성해지면
옆구리 터진 인물들
육신인지 시신인지
도무지 유배된 얼굴입니다
당신이 지나간 자리 / 김지명
내 이름 아래 내 시가 없다네
앞 페이지를 넘기고 뒤 페이지를 넘겨도
짐승이 벼린 말의 문장이 잠적했다네
글자 하나 세상에 떨어져 싹 틔울 수 없어
바람 불면 넘겨지는 모래의 책을 손에 쥐고
당신이 지나간 거라네
발자국마다 책의 글자는 사라지고
사라지며 페이지는 늘어난다네
당신은 양피지에 쓴 이야기에 덧쓰는 이야기
지워져, 기억은 예측 불허신분으로 발견된다네
다시 온다는 기별을 몰라
소멸된 책 속으로
주머니 짐승 한 마리 걸어가고 있다네
내내 상중(喪中)인 당신
[ 김지명 시인 약력 ]
* 서울에서 출생.
*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 2013년 《매일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시집으로『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 2015),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