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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관(金致寛)
자는 이율(而栗), 호는 역락재(亦樂齋),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고려 태자 첨사(太子詹事)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이고, 참봉 김응주(金應周)의 아들이다.
행장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에 공이 태어났다. 용모가 출중하고 타고난 자질이 남달리 총명하여 선친(先親)이 매우 아꼈다. 막 글자를 배울 때 종조형(從祖兄) 김치중(金致中)에게 가서 배우도록 명하였다. 글의 뜻을 잘 이해하여 번거롭게 독촉할 필요가 없었다. 종형이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사람이 되는 도리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너는 깊이 생각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한결같은 뜻으로 받아들여 응대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고, 선친 곁에 있을 때는 순종하여 뜻을 받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찍이 손수 구용(九容)과 〈사물잠(四勿箴)〉을 써서 돌이켜 살펴보는 자료로 삼았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가 되자마자 책을 지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문하에 나아갔는데, 선생이 자주 격려하였다. 괴석(怪石)에 대한 시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이 즉시 응대하였으니, 시는 다음과 같다.
기이한 형상은 천연으로 조각되어 奇形天琢成
견고하고 맑아 옥구슬에 대적하네 堅瘦敵玖瓊
여울 모래속에서 얼마나 고달펐으랴 幾困湍沙裡
지금은 그 절조 천석과 같다네 今同泉石盟
난간에 마주하니 빼어난 방장산이요 當軒方丈秀
안석에 비치니 환한 봉래산이로다 暎几蓬萊明
뒷날 만일 공물로 충당하게 되면 他日如充貢
응당 기울어진 큰 집 버티게 하리 應榰大厦傾
선생이 끊임없이 칭찬하였으며, 항상 높은 직위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로부터 아침저녁으로 직접 배우면서 뜻을 가다듬고 더욱 독실하게 수업하였다.
이윽고 모친의 병세가 위중하게 되자, 애가 타서 눈물을 쏟으며 하늘에 호소하면서 걸음걸이조차 제대로 내딛지 못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몸을 해칠 정도로 몹시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질(絰)과 대(帶)를 벗지 않았다.
일찍이 과거 공부에 힘을 써서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곧 대과에는 불리하여 그만두었다. 이어 남산의 깊은 곳에 서실(書室)을 짓고 학업하고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서애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특별히 포(布) 10필로 그 일을 도왔으며 또 서실의 이름을 써 주었으니, 이처럼 기대하는 마음이 대단하였다. 공이 날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동틀 무렵에 일어나 좌우의 도서를 굽어 읽고 우러러 생각하였으니, 날마다 지결(旨訣)을 강론하여 밝히는 것을 직분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을 만나 선친(先親)이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바쳤고, 종형과 두 형수 그리고 비복(婢僕)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재앙이 하늘에까지 닿고 시신이 언덕에 쌓였다. 공이 가슴을 치며 통곡한 뒤에도 오히려 염습(殮襲)을 예법에 맞게 하였다. 부친이 비명에 간 것을 늘 애통해하여 종신토록 근심하면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제삿날이 되면 종일 슬프고 애통하여 피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계모 권씨(權氏)를 섬기기를 생모(生母)를 섬기듯이 하였다. 곁에서 모시고 보살피느라 잠깐이라도 한가로울 때가 없었다. 편치 않아 하는 일이 있으면 공이 곧바로 직접 약을 조제하였고 비복(婢僕)에게 시키지 않았다. 뒷날 장례의 절차는 형식과 실질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모두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남산의 강소(講所)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따라 오가면서 변별하고 질정하였다. 선생이 마침 이 고을을 맡아 학문을 흥기하는 데 힘쓰고 있었는데 공을 추천하여 훈장으로 삼았다. 공이 많은 선비를 장려하고 이끌면서 효우(孝友)와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삼고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요체로 삼았다. 인륜을 밝히고 행실을 닦는 것으로 선비를 가르치고 힘써 농사일을 배우고 익혀 힘쓰도록 백성을 권면하였으니,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다. 온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따르며 가르침에 달려가니 자못 떨쳐 일어나려는 조짐이 있었다.
당시 성묘(聖廟)에 변란이 있어 선생이 마침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고 공 또한 체포되었다. 재앙이 일어날 기색이 섬뜩하였으나 공은 얼굴빛이 태연하였으며 조용히 옳고 그름을 밝히며 대답하니, 판관이 감탄하며 “도(道)를 배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봄에 다시 남산으로 가서 《심경(心經)》한 부(部)를 강학하면서 부지암(不知巖)에서 선생을 따랐으며, ‘부지(不知)’ 자(字)로 수십 구(句)를 지어 올려서 찬앙(鑽仰)의 뜻을 부쳤다.
돌아와서는 병암서실(屛巖書室)을 고쳐서 짓고 날마다 원근의 생도와 함께 성현의 경전을 암송하여 옛사람들이 즐기던 바를 추구하였다. 그 편액을 ‘역락재(亦樂齋)’라고 하였으니, 대개 곤궁한 삶도 즐겁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서쪽에는 ‘기천수(沂川水)’가 있고 동쪽에는 ‘풍영대(風詠臺)’가 있었다. 한가한 날이면 지팡이 짚고 올라가 내려다보며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으니, 황홀하게 기우(沂雩)의 기상이 있었다. 같은 시대의 신 오봉(申梧峯) 같은 제현(諸賢)과 함께 읊으면서 노래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에 많은 선비를 교궁(校宮)에 모으고 향음례(鄕飮禮)를 배설하고 오경(五經)에 대한 서로 같고 다른 이론을 강론하였다. 또 빙계서원(氷溪書院) 동주(洞主)로서 서원에 들어가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이어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강론하여 봄과 여름에 시험을 보였고 가을과 겨울에 강좌를 열어 영원히 이어질 규례로 삼았다. 이에 고을의 풍속이 크게 진작되었으니, 성대하여 볼 만한 점이 있었다.
일찍이 역도(易圖)와 예설(禮說)을 가지고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 질문하였는데 여헌 선생이 혀를 차며 탄복하여 칭찬하였다. 나재(懶齋) 신공(申公)이 감탄하여 “찬술한 여러 편(篇)은 실로 예전 사람들이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이 있다.”라고 하였고, 수암(修巖) 유공(柳公)도 “후학(後學)에게 대단히 공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부사 정양(鄭瀁)이 “선현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 군자의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당시의 사우(師友)가 이구동성으로 추앙하고 존경하였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스승의 명을 받들어 나재공과 함께 읍지(邑誌)를 찬술하여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였으니, 풍속과 교화에 도움을 주었다. 족질(族姪) 불구당(不求堂)이 족보를 편수하는 일로 인하여 널리 연원과 학파를 채집하여 덕행과 말씀을 기록한 책를 저술하였다. 전쟁으로 소실된 뒤 시조(始祖) 첨사공(詹事公)의 유적을 상고하여 분소(墳所)를 개축하여 숭배하고 보답하는 도리를 다하였으니,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일에 독실하기가 또 이와 같았다.
중부(仲父) 참봉공(參奉公)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의병으로 순절하였고 늙어서는 매우 외롭고 곤궁하였다. 공이 그를 아버지처럼 섬겨 혼정신성(昏定晨省)의 효도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맛난 음식을 빠뜨리지 않았으니 2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또 그의 아비가 없는 손자를 데려다 길러서 성취하도록 하였으니, 자기 소생과 다르지 않게 하였다.
전사한 무리의 해골이 뒤엉켜 있는 것을 다 거두어 묻어 주어 해골이 나뒹구는 근심이 없게 하였으니,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성품이 친밀한 관계로부터 소원한 관계에까지 미친 것이 아니라면 또한 어찌 이처럼 두루 미칠 수 있겠는가.
공은 아흔이 넘어서도 귀와 눈이 밝으며 고요하고 전일하며 풍채가 빼어나 멀리서 바라보면 선계(仙界)에 사는 여윈 학과 같았다. 대개 평소에 마음을 가다듬어 함양한 힘이 그렇게 보이게 한 것이다. 어느 날 밤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게 하며 독실하고 공경스럽게 하여 가법(家法)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라고 하고, 부인들에게 경계하기를 “너의 부덕(婦德)을 삼가서 너의 가정을 잘 다스리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동틀 무렵 누운 자리를 바르게 하고 유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신축년(1661, 현종2) 2월 27일이다. 현(縣) 동쪽 수봉산(守鳯山) 부간(負艮)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돈후하며 의지와 기개가 맑고 명철하였다. 올바른 도리로써 가르치는 집안에서 태어나 지혜와 재능이 일찍 드러났으며, 위대한 현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견문이 더욱 넓어졌다. 마음가짐은 효우(孝友)와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삼고 몸가짐은 청신(清愼)과 검약(儉約)을 지표로 삼았다. 학문할 때는 반드시 근본을 깊이 탐구하려 하여 도(道)를 꿰는 묘리(妙理)가 있었고, 처세할 때는 반드시 이름과 행실을 닦아 지조를 굽히는 잘못이 없었다.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을 창졸간에도 드러내지 않았고 나태한 용모나 희롱하는 얼굴빛을 혼자 있을 때도 짓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효성과 공경이 가정에서 드러났고 이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이 여항에 두루 미쳤다. 안에서는 친척이 기뻐 탄복하였고 밖에서는 향당이 보고 감동하였으니, 비록 타고난 자질의 훌륭함이 남보다 뛰어나더라도 스승의 문하에서 교화하여 인도한 힘을 또한 속일 수 없다.
아, 지금은 공이 살았던 시대와는 너무 멀어서 무릇 평소 아름다운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유집(遺集)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예설(禮說)이라고 하는 것은 《주부자가례(朱夫子家禮)》를 벼리로 삼고 고금(古今)의 상도(常道)와 권도(權道)의 일을 가려서 취하여 각각 종류대로 덧붙여 한 편의 글을 찬술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는다. 역도(易圖)라고 하는 것은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시작에서 기윤(朞閏)과 소장(消長)의 차서까지 오행(五行)이 생성되는 소이(所以)와 일원(一元)이 시작되고 끝나는 소이를 그려서 도(圖)를 만들고 지어내어 설(說)을 세웠다. 복희(伏羲) 이래 네 성인(聖人)이 남긴 뜻을 드러내어 밝혔으니, 분명하여 마치 촛불로 비추고 산가지로 셈한 듯하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사문(斯文)에 공(功)이 있어 백세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공의 후손 필화(弼華) 씨가 정성과 힘을 다하여 닳아 헐고 남은 것에서 수습하고 몇 편을 찬차(撰次)하여 족장(族丈) 정와옹(訂窩翁)에게 나아가 산정(刪正)하고, 또 행장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와 나에게 서술하기를 부탁하였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까마득한 후생인 데다 늙고 흐리멍덩하여 실로 감히 받들어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으므로 백 번 절하고 사양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또 생각건대 나는 방계의 후손 항렬에 있고 밤낮으로 경모하는 정성이 다른 사람과 자별하다. 이에 병을 앓는 여가에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삼가 이상과 같이 삼가 기록하고 붓을 잡는 이가 채택하기를 기다린다.
김도화(金道和)가 지었다
주)
구용(九容) :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걸음은 무게가 있고[足容重], 손놀림은 공손하며[手容恭], 눈길은 단정하고[目容端], 입은 다물며[口容止], 말소리는 고요하고[聲容靜], 머리 모양은 곧으며[頭容直], 기상은 엄숙하고[氣容肅], 서 있는 모양은 덕이 있으며[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色容莊]는 것이다. 《禮記 玉藻》
사물잠(四勿箴) :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라고 한 것을 토대로 정이(程頤)가 시잠(視箴)ㆍ청잠(聽箴)ㆍ언잠(言箴)ㆍ동잠(動箴)의 사물잠(四勿箴)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다. 《論語 顔淵》
그……같다네 : 송대(宋代)의 충신(忠臣) 사방득(謝枋得)의 〈창포가(菖蒲歌)〉에 “특이한 그 뿌리는 먼지와 티끌을 띠지 않고, 외로운 그 절조는 천석과 맹세하길 좋아한다오.[異根不帶塵埃氣, 孤操愛結泉石盟.]”라고 한 구절에서 온 말이다. 《古文眞寶 前集 卷8》
방장산이요……봉래산이로다 : 동해 가운데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두 산이다. 삼신산은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 봉래산(蓬萊山) 등이라고 한다. 《漢書 郊祀志》
선친(先親)이……쌓였다 : 임진왜란 때 김치관(金致寛)의 부친 김응주(金應周)가 두 형인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과 조카 김치중(金致中), 김치화(金致和), 김치윤(金致潤), 김치홍(金致弘) 등과 창의하여 건마산성(乾馬山城) 전투에서 전사한 일을 말한다.
형식과 실질 : 원문의 ‘척이(戚易)’는 상례(喪禮)의 형식적인 예법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애통함을 이르는 말로, 《논어(論語)》 <팔일(八佾)>의 “예를 행할 때에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해야 하고, 상을 당했을 때에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속으로 애통한 심정을 가져야 한다.[禮與其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부지암(不知巖) : 장현광이 강학하던 곳으로, 1610년(광해군2)에 세웠다. 처음에는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였다가 1655(효종6)년에 ‘부지암서원(不知巖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장현광의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에 동락서원(東洛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찬앙(鑽仰)의 뜻 : 안연(顔淵)이 일찍이 공자의 도(道)가 한없이 깊고 큼을 감탄하여 “우러러볼수록 높기만 하고, 뚫을수록 견고하기만 하네.[仰之彌高, 鑽之彌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여기서는 김치관이 장현광을 흠모하는 마음을 말한다.
기우(沂雩) : 산수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물음에 “능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동 대여섯 명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신 오봉(申梧峯) : 신지제(申之悌, 1562~1624)로,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ㆍ오재(梧齋),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1589년(선조22)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자시강원 문학, 성균관 직강, 창원 부사 등을 지냈다.
나재(懶齋) 신공(申公) : 신열도(申悅道, 1589~1659)이다. 자는 진보(晋甫), 호는 나재, 본관은 아주(鵝州)이다. 의성(義城)에 거주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39) 식년시 2등으로 진사에 입격하고, 1624년(인조2) 증광시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서장관‧예조 정랑‧사간원 정언‧울진 현감(蔚珍縣監)‧능주 목사(綾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수암(修巖) 유공(柳公) : 유진(柳袗, 1582~1635)이다.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류성룡(柳成龍)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2)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합천 군수, 청도 군수, 형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정양(鄭瀁):1602~1668. 자는 안숙(晏叔), 호는 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봉화(奉化)에 거주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갔으나 성이 함락되니 자결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금부 도사‧주부‧수군 판관 등을 역임하고, 지방 수령을 나갔다가 치적이 있어 장령에 올랐다. 유집이 전한다.
불구당(不求堂) : 김왕(金迬, 1606~1681)의 호이다. 자는 여정(汝定)이고, 예천(醴泉)에 거주하였다. 1633년(인조11) 생원에 입격하고, 163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연안 현감(延安縣監)·양산 군수(梁山郡守)·함평 군수(咸平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청나라의 강압으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론자로 지목되어 청나라에 끌려가다가 조정의 공론으로 풀려났다.
올바른……집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자식을 사랑한다면 바른 도리로 가르쳐서 삿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于邪.]”라고 위 장공(衛莊公)에게 충간한 명언이 나온다.
네 성인(聖人) : 복희(伏羲)ㆍ문왕(文王)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를 말한다. 복희는 역의 괘(卦)를 그렸고, 문왕은 괘사(卦辭)를 썼고, 주공은 상(象)을 썼고, 공자는 십익(十翼)을 달았다.
정와옹(訂窩翁) : 김대진(金垈鎭, 1800~1871)이다. 자는 태수(泰叟), 호는 정와, 본관은 의성이다. 7세에 백형(伯兄)을 따라 김화(金華), 김홍규(金弘規) 등에게 글을 배워 13세에 사서(四書)를 마쳤다. 뒤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저서로 《정와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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