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주웠다 / 강서연
섬진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고라니 발자국을 주웠다
구슬은 빠져나가고 틀만 남은 브로치
강과 들녘의 풍경을 여미고 있는 이것은
길이라는 순한 눈동자의 흔적이다
질주를 탁본한 천연 주얼리이다
바람이 몸을 깎아 브로치 빈 틀에 넣어보는 오후
소나기라도 한차례 내리고 나면
머무른 고라니 발자국에도
넘칠 듯 그렁거리는 에메랄드빛 보석 알알이 박혀 들겠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둥근 기울기로 흘러
개망초도 강아지풀도 둥그런 발등으로
구례의 서쪽 끝까지 걸어가겠다
벌레집에 세 들다 / 강서연
백아산 골짜기 송이버섯 같은 집 한 채
갓 지붕 너머 낮달에서는 짙은 놋그릇 냄새
녹음이 벽지를 겹쳐 바른 이곳이 애초 벌레들의 집이었다니
그들은 날개가 있고 나는 없으니
그들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었으니
무엇을 담보로 한 계절 묵어갈까 궁리하고 있는데
도랑물 수시로 쌀 씻어 안치는 소리에 문득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했었다니,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온다
초저녁 비는 자귀꽃잎 사이사이를 적시고
벌레 먹은 배춧잎에 쌀밥 얹고 된장 한 숟갈 얹으면
그러니까 내가 사랑했던 당신을 데리고
붉은 지네 한 마리 기어 나온다
누가 이 늦은 밤에 싸릿대 질끈 묶어 마당을 쓰는가
잊어야산다 잊어야산다 뻐꾸기도 잠든 밤
주민세와 인터넷 사용료는 내가 낼 테니
전기세는 반딧불이와 정산하시게나
흙 속 어디에 길이 있어 마당을 저리 촘촘 가로지르는지
재산세는 망초바랭이명아주쇠뜨기괴싱아 푸른 잎으로 받으시고
그도 저도 난감하면 이장님 같은 산 그림자에 물리시게
소득세니 물세는 저 들이 알아서 내지 않겠는가
주세도 내가 낼 테니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받으시게
밤마다 날은 새고, 청개구리들 빈 신발 떠메고 어디까지 가려는지
우리 수일 밤을 그리 동침했으니
도란도란 슬어놓은 알들이 깨어 날 찾거든
칠월 한낮 우주의 가마솥이 펄펄 끓어 넘쳐서
이번 생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
애써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네
둥지 / 강서연
거실 소파가 서식지였던 남편은
어느 날 홀연히 베란다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세월이 뒤따라갔지만
그가 날아간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창문은 늘 열려 있었고
약병은 번번이 쓰러졌다
슬어놓은 아이들은 나무 그림자가 안고 품어서 그런지
쉽게 휘어지는 날개를 지녔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허공에 찔러놓고 자주 뒤꿈치를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깃을 세워
스스로 털을 밀어내며 사춘기를 견뎠다
얘들아, 하늘을 보렴
새를 놓친 것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란다
나뭇가지도 함부로 세를 놓지 않는 계절
미루나무 그림자가 둥지를 들고 들어와
소파에 오래 놀다 가는 날이면
철새 한 마리 베란다 주위를 돌고, 돌고, 돌다 갔다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드로잉 / 강서연
지도의 경계에 꽃을 심는다
유인된 향기의 가시거리
우발적 동선
나비 등에 적재된 풍경은 활선이다
빗금과 잔금으로 귀추가 주목되는 대기층
가로수는 가로를 은닉한다
미각을 거부한 초록
유능한 바이러스는
지표면을 세공하는 공정으로 진화한다
태양은 겨냥하는 자들의 과녁
꽃들은 겸손을 알지 못 한다
최소한 이격 거리를 갖춘
신약(新藥)의 괄호는 열려있다
흩날리는
미세먼지는 필력을 필사한다
이 계절의 퍼포먼스
마스크조차 붉은 꽃이다
판화로 모방을 퇴고하는
그늘의 농도에 물을 탄다
바람의 채찍에 폭우가 내달린다
바다 수선소 / 강서연
태풍의 바짓가랑이가 터졌다
페트병, 스트로폼, 시곗바늘, 목재, 땡볕
쏟아놓은 내장은 악취가 재질(材質)이다
텅 빈 항구
포말로 굳어진 빨간 등대의 P 턴 지점
파도의 재봉선 위에
우산으로 띄운 배 한 척
뼈째 남은 생선 조형물에
갈매기의 질감을 덧대어본다
모래톱 위
선착순으로 리폼 되는 밀물
구두 한 짝,
소라게의 고시원은 아늑하다
부식과 산화의
무성음,
갯벌을 배회하는 빈 소주병
썰물의 지느러미를 다림질하고 있다
짜깁기한 수심에 돛을 올린
노을
별들이 빛나던 자국이 상영된다
페퍼민트를 입에 문 밤바다,
또 하루가 갱신된다
[ 강서연 시인 약력 ]
* 전북 김제 출생
* 201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 2017년 대전문화재단 창작기금
* 묘사에 능한 시인.
* 시집『가로수 마네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