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많은 조선일보에 관한 글입니다. 왜 그토록 민주세력들이 싫어하시는지 약간은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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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1시께 경기 의정부시 가능동 한국갱생보호공단 서울북부지부 앞길에서 두 괴한이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벤츠 승용차를 습격했다.
괴한들은 벽돌로 방 회장 승용차 운전석 뒤쪽 유리창을 두 차례 내려치고서 근처 아파트 단지로 달아났다. 괴한들이 공격해 방회장 승용차 유리창이 깨졌지만, 방 회장과 운전기사는 다치지 않았다. 괴한들이 범행에 쓰고서 현장에 두고 간 벽돌은 하얀종이로 싸여 있었고, “민족의 적 조선일보, 근조”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인데 일단 사람이 안 다쳤다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차는 좋은차 타고 다녀야 한다고(?)하나보다. 촌놈이 벤츠 600 도 본다.어쨌든 방우영씨가 탔다가 이번 사건으로 언론에 공개된 차는 최고급 벤츠 세단형 모델인 s600이다. 난 결코 그들이 저지른 벽돌 테러에 동의하지 않는다.하지만 "민족의 적 조선일보 근조" 라는 부분은 마음으로 대부분 공감한다.
지금부터 밝히는 조선일보와 사주, 방씨 가문이 어떤 가문이고 도대체 무슨 연유로 민주,개혁,세력과 담을 쌓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가 큰 지를 밝히고자 한다!
민주개혁세력 사이에서 이 집안 방응모,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과 그들이 운영하는 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악명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선일보 100대 죄악이라는 것을 정리해 놓은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 걸작을 한번 살펴보면 조선일보 죄악은 크게 10가지로 분류가 된다.
◆ 우선 민족 정기를 짓밟은 친일행각이 조선일보 10대 죄목에 들어있다. 윤봉길 의사를 범인이라고 부르고 일본군을 아군, 황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스스로를 민족 정론지라고 말한다.
◆ 두 번째 죄악은 역사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독재정권 찬양이다. 전두환 신군부와 결탁하여 빠르게 큰 조선일보는 지금도 전사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찬양에 열을 올린다.
◆ 세 번째 죄악은 최대부수 신문권력을 악용하여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고 얼토당토한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김정남, 한완상, 최장집들을 황당한 빨갱이 여론몰이로 낙마시켰다.
◆ 네 번째 죄악은 국가안보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민족을 저버리는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위협, 공포 조장, 적대, 긴장을 일으켜 여기에 편승해 신문장사를 한다.
◆ 다섯 번째 죄악은 악랄한 지역감정 조장이다. 특히 호남인 차별이 극단이다. 그래서 민주개혁세력은 조선일보를 반호남 소굴이자 영남패권주의 본산이라고 본다.
◆ 여섯 번째 죄악은 통일을 반대하며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딴지걸기다.
◆일곱 번째 죄악은 잦은 오보와 습관이 된 곡필로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어 한국 국가상을 떨어뜨리는 짓이다. 86년 김일성사망설이 대표이다. 물론 김일성 사망설 그 내용보다는 때가 문제다. 정권이 존립할 수 없는 위기에 있을 때 대중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교묘한 공작을 조선일보는 밥먹듯이 해 왔다. 금강산 댐도 마찬가지... 서울 불바다 뻥 튀기 보도도 마찬가지...
◆ 여덟 번째 죄악은 인권유린 사건을 왜곡 보도하고 IMF 국가부도를 불러들인 책임이다. 왜곡보도로는 부천서성고문 사건이 대표이다. 또 IMF사태 "이틀"전까지 "외환위기 없다"며 되풀이 호언장담하면서 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는 놈들이 한가하게 사상논쟁이나 했다.
◆ 아홉 번째 죄악은 제왕 같은 족벌세습 경영체제를 구축한 일이다. 공공재인 신문을 사유물로 전락시키면서 편집권을 틀어쥐고 있다.
◆열 번째 죄악은 "나는 너를 비판해도 너는 나를 비판할 수 없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한국 사회 마지막 성역으로 언론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일이다. 이런 특권을 가졌다는 발상이 오만방자한 권력을 행사하고 불법을 자행하게 하는 근원이라 할만한 요인이다.
이상 큼직큼직한 조선일보 죄악을 열 가지로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무책임한 반민주, 반민족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오죽하면 노대통령이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다."<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정상 언론기관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집단입니다. 대한민국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배하고 싶어하는 정치 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언론행위라는 것을 빙자해서 사실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죠. 내용은 정치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면 '언론에게 왜 탓을 하고 왜 탄압하려고 하느냐, 언론은 본디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인데, 왜 우리를 정치로 공격하느냐'고 나옵니다. 이것은 언론 행위가 아니죠." - 2005. 8. 31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쯤 해두고 우선 신문재벌 방씨일가 중시조로 일컫는 계초 방응모를 알아보자. 본래 방응모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맨손으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운 좋게 금맥을 발견, 떼돈을 벌었다. 1932년에 방응모가 거머쥔 돈이 135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1350억원이다.
1350억원을 거머쥔 방응모는 광산사업을 그만두고, 20만원, 지금 돈 200억원을 들여 조선일보를 산다. 또 12만원, 지금돈 120억원으로 태평로 일대에 땅 1400평을 사서 그때 초고층 빌딩인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방응모는 사업가다운 면모가 있었나 보다. 그 후 50만원, 지금 돈 500억원을 들여 새로운 윤전기를 도입하며 시설투자를 했다. 또 50만원을 투입하여 경기도 수원에 97만평 규모로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놀라운 일은 함경남도 일대에서 무려 3천 2백만평 규모로 조림사업을 하였다는 거다. 장차 신문용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헐...
그 때로서는 파격이라 할만한 판매 기법을 도입하고, 중량급 인사들을 주필로 끌어들이고, 조선일보 이외에 월간지, 여성지, 소년지를 또 창간하였다.
물론 친일행각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가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발행허가가 나고, 친일악덕지주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하고, 친일상공인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했으며(1920년), 이후 대표격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했던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이것을 방응모가 사들여 운영한다.
예종석과 조진태는 일본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율 소작료를 적용하여 고혈을 짜낸 악질 인간들이다. 또한송병준이 누구냐? 이완용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진회 중심회원이요 최고 매국노다.
이런 조선일보를 사서 방응모 또한 부끄러운 친일행각에 나서게 된다. 1934년 당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하루 - 방응모씨"라는 글에는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재벌과 대관 집을 찾기도 하고... 가와시마군사령관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월간지에 발행인 방응모 이름으로 스스로 기고한 글을 봐도 친일파 방응모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일본제국 2천 6백년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정신과 팔굉일우 이상으로써 닦아놓은 성업은 일계직통 천황어능위를 봉하여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 희열을 느끼고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방응모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장사꾼이다.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장사꾼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제 이익을 위해 시기마다 변화에 편승하였다.
반도 최고 갑부라는 방응모가 먹고 살려고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어서 적극 친일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 좀 가엾기는 하다. 방응모가 해방이 되고서 조선일보를 속간하면서 쓴 속간사를 보면 "우리는 입을 가졌으나 생벙어리행세를 하여야 하였으며 할 말은 많았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없이 죽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놓여있었다."고 써 있다. 물론 변명과는 달리 방응모 친일은 자기방어 한계를 넘는 행위였다.
부패와 타락이 그 본질인 사회에서 깨끗한 사람은 좀 거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김남주 시인이 쓴 시도 있지만 어쨌든 방응모가 겪었던 시대 상황에 내가 처해보지 않았으니 그보다 도덕에서 우위에 서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방응모 자신과 그 일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더욱 통렬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암울한 시대 배경속에서 정도를 걸어야 할 사회 양식 표상인 언론 이름으로 했던 비겁함과 한계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된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철저하게 반성하고 고민을 하는 모습을 조선일보가 보여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당하는 조선일보가 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오늘날 조선일보가 그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변명하고, 미화하고, 굴절시키고, 은폐하려고 하는 일은 방응모 친일행각보다도 더한 퇴영하는 결과를 낳기에 더욱 그렇다.
방응모 친일행각은 6.25가 일어나 북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는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압록강변 겨울-납북요인들 삶과 통일 한>이라는 책을 보면 방응모는 납북 도중 이회창 고향으로 유명한 황해도 서흥군 부근에서 미군 공습을 받고 죽었다.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노근리 유족처럼 민간인인 방응모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북한 정무원 부부장까지 지낸 신경완이라는 사람이 한 말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을 지낸 이태호씨가 쓴 아주 신뢰할 만한, 자료가치가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책인데, 조선일보는 사주가 무차별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
역사는 좀 있는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홍구 교수 말이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 전기도 납북장면에서 그냥 끝나고 만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납북해 간 인민군만 죽일 놈이고 정작 할아버지 목숨을 앗아간 미군이 민간인에게 저지른 무차별 폭격은 전쟁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어서 그랬을까?"
하여튼 방응모 납북되고서 방일영 시대가 온다.
방일영은 방응모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 친형 방응곤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았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죽었다. 그런데 1943년, 골 때리게 방응모가 환갑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생물학 순리를 거역하면 불가피하게 심각한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
방응모가 환갑에 아들을 낳았을 때 이미 손자 방일영은 스무살이 되어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게 되었다. 방응모가 낳은 아들 방재선이 일곱 살이 되던 시점에서 방응모가 납북되었다. 당시 방재선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가 하던 조선일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조선일보 경영권 분쟁을 싹뜨게 했다. 글쎄,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조선일보를 방씨 일가 모두가 포기하고 시민에게 돌려주었으면 싶다.^^
방응모에 이어 조선일보를 승계한 방일영은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모양이다. 방일영 회고록을 보면3748평 흑석동 대저택에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고서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거기서 기생들을 불러놓고 질펀하게 놀았나보다.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방일영을 무지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망치는 인간으로 보았다.
왜 박정희는 대통령 체면을 벗어던지고 방일영 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을까?
그때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전 MBC 사장 황용주 말을 들어보면 오직 "천하의 주도 방일영"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일영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는 소리다.
카*노 황제 전낙원은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으로 쓴 헌사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권번출신 기생들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미는 다들 아실 것이다.
방일영 동생 방우영 또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방일영은 박정희를 비롯해 서정귀, 이후락들과도 상당히 어울리면서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다. 방우영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씨(박정희 대통령 대구사범동창)들을 데리고방일영 사장과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서 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란스런 도가니가 펼쳐졌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술로써 맺은 의리가 가장 끈끈하다.
명문가문 이후락 편에서 말했듯이 신진자동차 김창원, 극동건설 김용산, 대농 박용학, 한국화약 김종희, 호남정유 서정귀들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 별 볼 일 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 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방일영 삼촌인 방재선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런 대화가 바깥에까지 들려서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속뜻은 요정정치에 데뷔해보니 항상 엄청난 화술과 주량으로 밤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방일영이라는 말이다. 박정희는 "이 세상에서 팔자 제일 좋은 사람이 방일영이다."하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여간 술과 여자를 매개로 한 이런 요정정치로 거대한 이권과 권력을 거래하고, 정치와 언론이 비정상으로 유착하는 정점에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이 있었다.
사주가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형님, 아우하는 조선일보는 언론사에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구국의 영단”( 1 2 월 2 8 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하며 언론사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런 방일영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봤더니 웃음도 안 나왔다. 무슨 임금님이라도 승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초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대나 뭐래나...
우초 정신을 이어받아 질펀한 광란스런 술자리를 열라는 건가? 껄껄
민족언론 명맥을 유지하며 조선일보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언론으로 키워낸 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전문으로 올라온 문교부 장관을 지낸 권이혁이 쓴 방일영 조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우초 형 일생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형 일생은 민족 언론 전통을 이어받은 선두주자로서 이름 있는 언론인과 문화인을 길러낸 일생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값진 활약을 하고 있는 인재를 양성한 일생입니다.그렇기에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슬픔을 뛰어넘어 인간 방일영을 재평가하는 장이라고 믿습니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비록 형 몸은 갑니다만 방일영 정신·방일영 인간성은 우리와 우리 자손, 그리고 이 땅에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니 계속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줘야 하는 의무와 소임을 다하셔야 한다는 부탁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읽다가 까딱 잘못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방일영이 맡았고, 그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두환 비위를 맞추는 역할은 방일영 동생 방우영이 맡았다. 나치정권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던 전두환 심복 허문도를 도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하여희대 언론통제 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일보가 살인마 전두환을 민족 영웅이며, 구국 지도자로 둔갑하게 하였다.
광주학살이 끝나고서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국군이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 일부를 보호하려고 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 정리를 끝으로 끝도 없는 방씨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만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이 저지른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권력이 저지른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하다 하며, 권력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서 저지른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를 지키는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인사들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스런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하다고 말하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소위‘언론사’와 ‘언론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해 왔다. 범죄를 저지르는 권력과 공범자가 되었다. 그 대가로 소위 ‘언론사(주)’는살찌고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은 그 직장 안과 밖에서 화려한 승진과 영달 사다리를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부정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언론권력은 한 몸뚱이가 되어갔다.”(리영희, <말> 1996.3)
방일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 방상훈은 조선일보 대표이사로서 현재 사주다. 숭문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작은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호텔 대표이사다.
방일영 장남 방상훈 부인은 윤순명이다. 윤순명 아버지가 윤영구다. 그러니까 방상훈 장인이다. 윤영구 아버지가 윤영선이다.윤영선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 아들이다. 결론으로 말해서 방상훈 부인 윤순명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 증손녀다. 이런 부분은 조선일보에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방상훈 부인이 윤순명이고 그 증조부 윤치호 친일행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대한민국 한복판에 99칸짜리 고택을 지어놓고 명문가문 운운하는 바로 그 집안이다. 윤치호 사촌형이 중추원 의관을 지낸 친일파 윤치소다. 그 윤치소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윤보선이다.
이 윤씨 명문가문은 앞으로 새로운 장에서 주의깊게 살펴보겠다. 아주 골 때리니까 기대하시라.
방상훈 장인 윤영구는 교통부 관광국장, 육운국장을 거쳐 메트로 항공사 회장을 지냈다. 윤영구 동생 윤승구는 윤보선 비서를 지내고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요즘은 충남 아산에 윤치호 고택을 지키고 있다.
윤영구 작은아버지 윤광선은 6.25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 물론 아버지 윤치호 친일행적 때문이다. 이 윤광선이 딸 하나가 시집을 잘 갔다. 서울대 약대 학장, 대한 약학회 회장을 지낸 채동규가 윤광선 사위다.
채동규는 아들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의 의사, 교수로 키웠다. 절반은 미국물을 먹고 있고, 절반은 한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채동규 가지들 가운데 채영문 연대 보건대 교수, 채기준 이대 전산과 교수들이 대표다.
현재 연세대 이사장으로 있는 일민 방우영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아들 방성훈이 현재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중이다. 방우영 아들 방성훈 장인은 영풍그룹 주력사인 고려아연 부회장 최창근이다.
나는 최창근을 전문경영인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뒷조사를 해보니까 신기하게도 영풍그룹 창업자인 장병희와 고향이 똑같다. 똑같이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뭐가 있는게 분명하다. 역시 개천에서 용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껄껄.
각설하고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방우영이 연세대학교 이사장인가? 돈 주고 산 것인가? 무슨 학문적 업적을남겼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연세대학교 이사장이 된 건가? 거참 희한하다. 귀신이 곡할 사연은 연대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본부 자료를 참조하시길..
어쨌든 이 방우영 딸 방혜성이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 큰아들 서영배와 결혼하였다.
방우영 딸이 시집간 이 서씨 집안 혼맥이 화려하다. 서성환 큰딸 서송숙은 서강대학교 상경대학장 박내희와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소위 서강학파 정점에 있는 건가?
서성환 둘째 딸 서혜숙은 김의광과 결혼하였다. 김의광은 현재 태평양 계열사 회장이다. 김의광 아버지는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국방부 차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한전 사장을 지낸 김일환이다.
김일환은 대한민국에서 군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재향군인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군으로 있다가 한국에서 군생활 5년남짓하고는, 재향군인회에서 영향력 행사하는 것은 50년 세월이다. 껄껄. 김일환은 경흥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 세째 딸 서은숙은 고려대 의대 교수 최상룡과 결혼하였다. 최상룡 아버지는 박정희정권에서 국회의원,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다. 부산 동성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 네째 딸 서미숙은 부도난 우성그룹 부회장 최승진과 결혼하였다. 서미숙은 리베라 호텔 고문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비록 회사가 망했지만 굶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는 잘 살겠지.
서성환 둘째 아들 서경배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동생인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 딸 신윤경과 결혼하였다. 이로서 조선일보는 막강한 롯데패밀리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역시 조선일보 혼맥의 백미는 방상훈 장남 방준오와 LG 공동 창업자 허정구 손녀 허유정이 결혼한 일이다. 지난 번에 말했듯이 이로써 조선일보는 김동조가문과 결합되면서 방준오는 정몽준 처조카사위가 된다.
이 GS는 LG와 연결이 되어있고, LG는 한진과 연결이 되고, 한진은 롯데와 연결이 되고, 롯데는 농심과 연결이 되고, 농심은 태평양
과, 태평양은 조선일보와 다시 연결이 된다.
덧붙이는글: 이정도면 조선일보와 방씨 가문은 대한민국을 쥐고 뒤흔드는 수구 거대 언론권력이요,신문재벌이다, 이런 와중에 터진테러사건을 보면서 친일에, 군부독재자 앞잡이인, 수구꼴통언론, 조선일보와 방씨 일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에선 구제불능이다라고 봐야한다. 조선일보는 이나라 역사와 민족을 철저히 왜곡하고 능멸했다. 조선일보는 이점을 분명히 반성하고 사죄해야한다.(아직은 그럴수가 전무하고 이런 신문을 뭘 모르고 맹신하는 사람들이 이나라에 수두룩하다는 게 더 큰 문제지만 그래서 더 한심스럽고 이 나라 장래가 걱정스럽다!)
마지막으로 조선일보 방응모 편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어서 보충한다. 방우영 세째 딸방혜신이 대양산업 회장인 정연욱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정연욱 아버지가 신한국당, 한나라당 간판으로 울산 동구에서국회의원을 한 그 유명한 정재문이다. 정재문 부인 박영애 동생 박애자가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 아들 이두용과 결혼하였고,이 이재형 동생, 그러니까 이두용 작은 아버지가 대림그룹을 창업한 이재준이다. 이재준을 계승한 현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이75년생 세째 며느리 최영윤 아버지가 삼환기업 회장 최용권이다.
"더러운 역사라고 빨리 망각하고 일부러 지워버리면 민족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합니다"
조선일보 대표 방상훈 체중 과다 병역 면제
스포츠 조선 부사장 방성훈 심장병 병역면제
첫댓글 제가 대통령된다면 가장먼저 하고 싶은게... 조중동 척결 -ㅅ-... (어떻게 돼든)
대기업 기득권층들이 저렇게 다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한국에서 인맥 없이 사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인맥이 없으면 처참하게 다구리당하는 나라... 물론 푼돈 만지는 사업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