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소욕지족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접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실천에 대한 것이다. 글만 쓰지 말고 수행도 하라는 것이다.
매일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쓰고 있다. 가능하면 경전 문구를 곁들인 글쓰기이다. 이런 글쓰기에 대해서 어떤 이는 남의 소나 세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두 날개로 날아간다. 불교 수행자는 교학과 수행을 겸비해서 목적지에 이르고자 한다. 둘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불완전한 것이 된다.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글을 썼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글이 너무 길어서일까 제발 짧게 쓰라고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스타일대로 쓴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다 보니 글이 길어진 것이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좌선만을 말하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도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소욕지족이다.
소욕지족은 어떤 것인가? 이는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는 법구경 게송에서 확인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한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한다'라는 말과 같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온통 작은 것 투성이다. 집도 작고 차도 작다.
아파트는 스물두 평이다. 차는 구백구십구씨씨 경차이다. 그러나 사는데 불편함 없고 타는데 불편함 없다. 사람 사이즈가 작은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아끼고 절약하는 생활을 한다. 새 것보다 중고품을 활용한다. 차도 중고차이다. 아직까지 새 차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살다 보니 빚이 없다.
살다 보면 고장 날 때가 있다. 심각한 것은 전문가를 부른다. 하수도가 막히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 외 것은 직접 고친다.
며칠전 식탁이 망가졌다. 빌트인 식탁이다. 아파트 평수가 좁다 보니 바퀴식 미닫이 식탁이다. 식탁을 지지 하는 철제 다리가 무너진 것이다.
아파트는 이십년 되었다. 이사 온지는 오년 되었다. 자가이다. 연식이 있다 보니 하나 둘 고장이 난다. 몇 달 전에는 주방 서랍장을 고쳤다.
바퀴식 지지대는 오래 되어서 파손된 것이다. 스크류에 녹이 슬어 제기능 하지 못한 것이다. 일은 벌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식탁을 새로 장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식탁 놓을 공간이 없는 것이다. 바퀴식 지지대를 부착하는 것 외 다른 방법은 없다.
강력한 파워로 고정시켜야 한다. 전동드라이버가 필요 했다. 창동에서 가져 왔다. 장인이 작고 하기 전에 쓰던 것이다.
식탁은 손쉽게 원상복구 되었다. 전동드라이버를 이용해서 강력하게 고정한 것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디아이와이(DIY)라고 볼 수 있다.
아나바다, 아껴쓰고 나누어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쓰는 것이다. 새것을 사기 보다는 있는 것을 활용 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소욕지족일 것이다.
소욕지족은 수행자에게 요청되는 덕목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하루 한끼 먹어도 얼굴은 맑고 깨끗할 것이다.
수행한다고 하여 반드시 좌선이나 행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소욕지족을 실천하는 것도 수행이다.
2024-06-04
담마다사 이병욱
평범한 자의 비범한 일상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하루도 헛되이 보낼 순 없다.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글쓰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왔다. 아침 여섯 시에 나왔으니 남들보다 하루를 두세 시간 일찍 시작한다. 이런 것도 비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일찍 나온 것은 마무리작업 때문이다. 밤낮없이 주말 없이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최근 수주 받은 일감이다. 금액은 이백이십팔만원에 달한다. 평범한 일인사업자의 한달 수입에 해당된다. 모두 보시전용통장에 넣고자 한다.
어제는 아침 여섯 시 이전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작업 했다. 저녁에는 열 시 넘어서 귀가했다. 마침내 오늘 아침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고객사 담당에게 납기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일을 끝내고 나면 후련하다. 마치 숙제를 마친 것 같다. 머리 식히고자 명학공원에 갔다.
명학공원은 도심의 허파 같은 곳이다. 도심에 축구장 하나 정도 되는 넓이를 가진 공원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이 든 사람들의 놀이터나 다름 없다.
산책을 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른다. 이런 생각을 흘려 보낼 순 없다. 글로서 표현해야 한다. 평범한 자가 글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것도 매일 쓴다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글쓰기는 평범한 자의 비범한 일상이나 다름 없다.
아직까지 한번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 반장 한번 해 보지 못했다. 분단장도 하지 못했다. 어디를 가나 중간 정도 했다. 평범하게 산 것이다.
신체에 대한 불만이 많다.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약골이다. 팔다리가 가늘다. 그러다 보니 보기가 좋지 않다. 고개가 구부정하다고 자꾸 지적 받는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우월한 것이 없다. 평균 이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늘 중간 정도 위치이다.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같다.
지난 시절을 돌아 본다. 직장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국민연금을 타기 위해서 조회 해 본 것이 있다. 국민연금 납부내역에 대한 것이다. 무려 이십 군데이다.
직장생활은 이십 년 했다. 1985년부터 2005년까지 기간이다. 이 기간 내에 열두 군데 회사를 전전했다. 직장을 옮겨 다닐 때 공백 기간이 있는데 지역가입자로 전환 되어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게 되었다. 이것 저것 다 합치니 이십 군데가 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직장도 자주 옮겨 다니는 것 같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직장에 오래 머물 것이다. 평생직장으로 알아 정년까지 갈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 기간은 다음과 같다.
1) S사: 1988.01.01-1992.12.30(4년)
2) D사: 1992.12.07-1993.05.31(1년 5개월)
3) T사: 1993.07.09-1995.01.08(1년 6개월)
4) H사: 1995.02.20-1995.08.10(6개월)
5) T사: 1995.08.01-1999.04.19(3년 8개월)
6) 지역: 1999.04.20-1999.08.31(4개월, 납부예외)
7) 지역: 1999.09.01-1999.12.19(3개월)
8) P사: 1999.12.20-1999.12.29(1개월)
9) 지역: 1999.12.30-2000.01.09(1개월)
10) S사: 2000.01.20-2000.09.25(9개월)
11) J사: 2000.10.01-2001.05.30(7개월)
12) U사: 2001.06.18-2002-08.27(1년 2개월)
13) A사: 2002.09.02-2003.04.30(8개월)
14) K사: 2003.05.06-2005.03.19(1년 8개월)
15) 지역: 2005.03.20-2006.05.02(1년 2개월, 납부예외)
16) D사: 2006.05.03-2006.10.30(5개월)
17) 지역: 2007.08.01-2012.11.18(5년 3개월)
18) P사: 2012.11.19-2013.06.30(7개월)
19) 지역: 2013.07.26-2019-12.07(6년 5개월)
20) 연금 지급: 2020.01.08-현재
첫 직장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 1985년 7월 29일부터 1992년 12월 30일까지 7년5개월 있었다. 수원에 있는 S전기로 대기업이다.
국민연금이 시행된 것은 1988년이다. 직장 생활한지 3년 지나자 연금보험료 납입이 시작되었다.
이력을 보니 마치 나의 업경대(業鏡臺)를 보는 것 같다. 직장에서 낸 것은 열 세 군데이다. 이 중에서 18번 항 P사는 이름만 빌려 준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타회사 기술고문 자격으로 이름만 올려 놓은 것이다.
납부예외가 두 번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국민연금을 내지 못한 것 같다. 6번항 4개월은 납부할 처지가 못되었던 것 같다. 15번항 1년 2개월은 실업급여 기간 9개월이 들어가 있다.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것은 14번항 K사이다. 이후는 개인사업자로서 삶을 살았다. 잠시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16번항 D사에서 5개월 일한 바 있다. 18번 항 P사는 이름만 걸어 놓았다.
사업을 시작한 것은 15번항 2005년부터이다. 사업자 등록을 해서 일인사업을 했다. 사업이 본격화 된 것은 2007년부터이다. 이후 지금까지 17년동안 개인사업자로 삶을 살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이력을 밝히지 않는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많이 배운 사람들일수록,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프라이버시를 중시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내세울 것이 없어서 밝혀도 그만이고 밝히지 않아도 그만이다.
과거이력을 보면 일년이 멀다 하고 직장이 바뀌었다. 사십대 전후 5년 동안은 격동의 시대나 다름 없다.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고 안정적 직장이 아닌 이유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업환경이다.
중소기업은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다. 사업을 하다 잘 되지 않으면 접는 경우가 많다. 앉아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다. 능력이 되지 않아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트라우마가 된다.
종종 꿈속에서 쩔쩔 매는 꿈을 꾼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해서 쩔쩔 매는 꿈이다. 직장생활을 접은지 19년 되었음에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생활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년 했다. 개인사업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19년째 하고 있다.
개인사업을 하면서부터 나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나의 삶이 아니었다.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안정적 직장을 가지지 않으면 옮겨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옮겨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이가 사십이 넘어가면 직장 구하기 힘들다.
나이가 사십 중반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아무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개인사업을 해야 했다.
개인사업자로 산지 19년 되었다. 2005년 이후 사업자가 되면서 나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일년이 멀다 하고 옮겨 다녔다. 내사업을 하고나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 졌다.
개인사업을 하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블로그를 2005년에 만들고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평범한 자의 비범한 일상이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평범한 사람인가 비범한 사람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비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직장을 무려 열세 번 전전했다. 사업을 하고 있지만 늘 일인사업자에 머물러 있다.
2005년 이후 늘 혼자 지내고 있다. 자그마한 사무실을 직장 삼아 집과 왕래하는 삶이다. 그런데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시간부자가 되었을 때 글이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면 시간이 잘 간다. 한번 글쓰기 하면 오전이 다 지나간다. 2006년 이후 이런 세월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글이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현재 블로그에는 7,615개의 글이 있다. 2006년 이후 현재까지 18년동안 쓴 글이다. 이를 평균 내보니 일년에 423개 쓴 것이 된다. 하루 한 개 이상 글을 18년동안 쓴 것이다.
한번 쓴 글은 버리지 않는다. 귀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쓴 글이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이다. 그러나 시간이 녹아 들어가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글이다.
글을 쓴 지 18년 되었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
2017년 말에 처음으로 책을 만들었다. 문구점에 인쇄와 제본 의뢰하여 보관용으로 두 질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것이 현재 126권 되었다.
나의 삶을 돌아 본다. 인생의 변곡점은 사십대 중반이다. 2005년 더 이상 직장을 잡을 수 없었을 때 개인사업을 한 것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었다. 이전에는 남의 삶을 살았으나 사업을 하면서 내 삶을 살게 되었다.
평범한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사면 중학교에 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듯이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개인사업을 하면서 삶이 안정화 되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았지만 시간이 있었다. 시간부자가 되었을 때 글을 쓰게 되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일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매일 아침 백권당으로 간다. 2007년 말 입주한 이래 내리 한 장소에서만 17년째 앉아 있다. 세월은 강물처럼, 화살처럼 흘러 갔지만 글은 쌓이고 쌓였다.
나는 작가일까?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라고 불러 주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평범한 자의 비범한 삶이 된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할까? 생업에는 정년은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는 언제까지 글을 써야 할까? 글쓰기도 멈출 때가 있을 것이다.
세월은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쌍윳따니까야에 이런 게송이 있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자양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
지난 시절을 돌아 보니 청춘은 나를 버린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월은 중년도 버렸다. 이제 노년을 바라보고 있다.
세월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것 같다. 젊은 사람은 중년을 버리고, 중년은 노년을 버린다.
젊음에 이른 사람이 나타나면 젊음의 지위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 어쩔 수 없이 중년으로 밀려 나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년에 이른 사람이 나타나면 노년으로 밀려난다. 이렇게 자꾸 밀려 나다 보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계속 밀려 왔다. 밀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언제까지 밀릴 것인가?
흔히 인생무상을 말한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니 꿈만 같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밀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년, 중년, 노년에게 자리를 내 주다 보면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다.
더 이상 밀리는 삶을 살 수 없다. 밀리기 보다는 축적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것은 글의 축적도 될 수 있고 공덕의 축적도 될 수 있다.
지난 시절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애도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춘 시절을 회상하며 누워 있는 것이다.
세월에 장사 없다. 평범한 삶을 살면 세월에 지배당한다. 세월에 밀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세월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인생의 분기점은 사십대 중반이다. 이전의 삶은 직장의 삶으로서 끌려 가는 삶이었다. 이후의 삶은 주도하는 삶이었다. 세월을 묶어 두고자 하는 삶이었다. 세월을 글에 묶어 둔 것이다.
글에는 세월이 녹아 있다. 7,615개의 글에 세월을 붙들어 매 두었다. 126권에 책을 보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삶의 결실과도 같다. 이런 것도 평범한 자의 비범한 일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2024-06-04
담마다사 이병욱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아침 여섯 시에 집을 나섰다. 해가 길어서일까 대낮처럼 밝다. 배낭에 먹을 것과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넣고 걸었다.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무엇보다 상쾌한 것은 아침 일찍 일터에 간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각에 자고 있을 것이다. 홀로 깨어 있는 것 같다.
생태하천은 늘 싱그럽다. 이른 아침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안양천변은 온통 꽃밭 세상이 되었다.
생태하천은 매년 풍광이 다르다. 올해 주제는 꽃밭인 것 같다. 데이지꽃밭이 지려 하자 이제 이름 모를 꽃이 밭을 이루었다. 징검다리 건너편에는 양귀비꽃밭이 펼쳐져 있다.
물오리떼가 한가롭게 노닌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물오리떼 가족이 어디 있는지 살펴 본다. 사람을 멀리 하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징검다리 한 켠에 격렬한 파닥임이 있다. 장딴지만한 물고기들의 움직임에 물이 튄다. 짝짓기 하는 것일까?
무엇이든지 시기가 있다. 농사도 시기를 놓치면 망친다. 생명 있는 것들도 시기를 탄다. 저기 피어 있는 들꽃은 누가 보건 때가 되면 피고 지듯이, 생태하천의 유정중생들도 봄이 되면 짝짓기를 해서 새끼를 키운다.
인위적인 것은 부자연스럽다. 애완견을 볼 때마다 측은한 느낌이다. 주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목줄에 매인 삶이다.
인간에게도 목줄이 있다. 인습과 제도에 매인 삶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아관념에 매인 삶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돌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95)
쌍윳따니까야 ‘가죽끈에 묶임의 경’(S22.95)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와 다름 없는 삶임을 말한다.
공원에서 보는 애완견은 줄에 묶여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목줄이 있다는 것이다. 기둥에 묶여 있어서 줄의 길이만큼만 돌고 있다. 그것은 정신적인 목줄이다.
누구나 목줄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그는 물질에 감겨 따라 돌고, 느낌에 감겨 따라 돌고, 지각에 감겨 따라 돌고, 형성에 감겨 따라 돌고, 의식에 감겨 따라 돈다.”(S22.95)라고 했다.
이른 아침 햇살이 가득하다. 아침 햇살을 듬뿍 받으며 계속 길을 걸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일과를 시작할 곳이다.
오랜만에 오피스텔 18층 꼭대기층에 올라갔다. 동쪽 평촌방향에 해는 벌써 떴다. 이제 6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중천에 떠 있는 것 같다.
서쪽으로 가 보았다. 안양의 진산 수리산을 보기 위한 것이다. 밑변이 긴 안정적인 삼각형모양의 산이다. 아침 햇살에 산이 빛난다. 이제 연두색을 지나 녹색이 짙어지고 있다.
이른 아침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 미화원이다. 미화원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엉겁결에 “안녕하세요.”라며 따라 했다. 곧 후회가 일었다. 이럴 때는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응대 했어야 했다.
백권당 문을 열었다. 북동방향이라 아침에 짧게 해가 들어 온다. 보리수를 살펴본다. 이파리가 몇 개 밖에 되지 않는다. 무성한 보리수를 꿈꾸지만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여인초에 잎이 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감겨 있었으나 활짝 펴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
삶은 기적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기적이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 할까? 목표는 정해져 있다. 밀린 일을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큰 것을 하나 맡았다.
담당자가 다그친다. 아들 뻘 되는 담당자가 빨리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말한다. 이럴 때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한다. 원하는 날자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 밤낮없이, 주말없이 작업 해야 한다.
일이 있으면 활력이 넘친다. 일을 손에 잡고 있으면 든든하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렇다면 일을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오늘은 오월 끝자락이다. 올해도 반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어떤 성과를 이루어 냈는가?
해마다 오월이 되면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합소득세를 내는 것이다. 너무 복잡해서 회계사무소에 맡긴다. 십만원을 주면 해결해 준다. 내가 계산하는 것보다 절세 효과가 있다.
종합소득세는 일년 성적표와 같다. 작년 얼마나 벌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세금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올해 종합소득세는 십만원 가량이다. 늘 이정도 금액이다. 중소기업 신입연봉 정도 되는 성적표이다.
소득이 높으면 세금도 높아진다. 세금을 적게 내면 소득이 낮은 것이다. 그럼에도 세금을 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아직도 일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내년이면 지공거사가 되지만 나는 아직도 현역인 것이다.
오늘 아침 일찍 나온 것은 이유가 있다. 밀린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농부가 뜨거운 낮을 피해 이른 아침에 김을 매는 것과 같다. 이번 일감에 대하여 달리 처리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일터로 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때 되면 월급을 받는다. 이렇게 십년, 이십년, 삼십년 살다 보면 생활의 노예가 된다.
사업하는 사람은 일감에 달려 있다. 일감이 겹치기로 있으면 행복한 상태가 된다. 나중을 위해서 가능하면 축적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돈은 발이 달린 것 같다. 자신의 시간을 투입해서 번 돈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이럴 때 허(虛)와 무(無)를 느낀다.
돈벌기에 올인 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돈은 사라지고 없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잘 버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잘 쓰는 것이다. 벌기만 하고 쓰지도 못한다면 삶의 노예, 일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된다.
노예의 삶을 살 수 없다.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주체적인 삶이다. 목줄에 묶여 있는 삶이 아니라 목줄을 끊어 버리는 삶이다.
이번에 수주한 일감을 모두 보시통장에 넣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한다. 단지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한다면 서글퍼진다. 그러나 자기실현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가짐이 달라진다.
두 달 전에 보시전용통장을 만들었다. 큰 일감을 하나 맡았는데 새로 보시통장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현재 보시통장에는 158만원이 있다. 두 달 전에 288만원을 입금했었다. 그 사이에 130만원 가량 쓴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관련 보시가 많다. 밀린디팡하 출간 후원도 했다. 총 12건이다
세상에 가장 재미 있는 것은 돈 버는 일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보시통장을 만들어 놓고 보니 이 세상에서 최고로 재미 있는 것은 돈 쓰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쓴다. 자신의 감각을 즐기는데 돈 쓰는 것은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은 마치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대단히 인색하다.
삶을 살아 오면서 남을 위해 돈을 써 본적은 별로 없다. 불교를 만나기 이전에는 보시개념이 없었다. 직장과 집을 왕래는 삶만 살았다. 용돈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돈 쓸 일이 없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본다.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노후에 대한 것이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을 때 노후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노후를 편하게 보내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자 했다.
어떤 일이든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연히 돈도 뜻대로 벌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욕망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노후를 대비해서 축적하고자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노후를 대비하여 축적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평생 축적만 하고 산다면 삶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된다.
직장생활은 사십대 중반에 끝났다. 사오정이 된 것이다. 이후 사업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사업자의 삶은 예측할 수 없다. 고정수입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일감은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다.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택시 운전사가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일이 없을 때가 있다.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초조해진다. 이주일 이상 일감이 없으면 앉아 있을 수 없다. 전화라도 돌려야 한다. 그런데 일감이 있을 때는 겹치기로 있다는 것이다.
사업은 운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어떤 일이 걸릴지 모른다. 오늘 하루 공칠 수도 있다. 운에 맡기는 것이다. 가능하면 행운이 찾아 오길 바란다.
행운이 하나 찾아 왔다. 이번에 수주한 것은 230만원짜리이다. 어떤 이에게 이 금액은 적을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큰 금액일 수 있다. 그러나 종합소득세 10만원 내는 사업자 입장에서 본다면 큰 것이다. 이 금액을 보시통장에 넣기로 했다.
보시통장은 내 것이 아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로 갈 것이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다. 아니 나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하는 의미를 찾았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시인의 글을 보았다. 가난한 시인의 삶에 대한 글을 읽으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번호를 알려 주었다. 보시할 기회를 준 것이다. 적선할 기회, 공덕 쌓을 기회를 준 것이다. 시인은 책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재미 있는 것은 돈 세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 장사가 끝나고 금고에서 돈을 꺼내 돈을 셀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 세는 재미보다 더 재미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누는 재미이다.
사업을 처음 했을 때 생계를 위해서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노후를 위해서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축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돈 모으는 재미가 있다. 매월 일정금액 적금 했을 때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일년이 지나면 목돈이 된다. 이 목돈을 정기예금하면 이자가 붙는다. 축적되는 삶이다.
돈을 모은다고 하여 투기를 하지 않는다. 누구나 손 대는 주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욕망에서 이길 수 없다. 욕망에 지배되었을 때 결국 다 털리고 만다.
저축을 해서 돈을 모은다. 매월 적금 부었을 때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공덕의 적금도 있다는 것이다.
미얀마 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미얀마 사람들은 보시를 잘한다는 것이다. 보시가 생활화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놀라운 말을 들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보시를 하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해왔다. 노후를 대비해서 일을 해왔다. 모두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 생각이 바뀌었다. 미얀마 사람들처럼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것이다. 공덕 쌓은 삶을 살고자 한다.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 일찍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납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일을 하는 의미를 찾았다는 것이다. 모두 보시통장으로 들어가는 일감이다. 나도 보시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2024-05-31
담마다사 이병욱
서탑(書塔)에 책 하나 더 올려 놓고
일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오늘 이 만큼 해 놓으면 내일 발판이 된다. 내일 또 저 만큼 해 놓으면 진전된다. 이렇게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해 놓으면 어느 날 다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삶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생업과 자기계발을 말한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한다. 일이 없으면 글을 쓴다. 요즘에는 책도 만든다. 과거 써 놓은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정리해서 만드는 것이다.
나의 본업은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이다. 고객으로부터 회로도를 받아서 도면대로 그려 주는 것이다. 이를 업계에서는 아트워크(artwork)라고 한다. 마치 예술작품 만들듯이 작업하는 것이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로 인하여 자기실현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생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고객들은 언제나 급하기 때문에 납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 당연히 다른 것은 후순위가 된다. 먼저 일을 처리하고 난 다음에 글도 쓰고 책도 만들고 경전도 읽는다.
일은 본업이다. 부업은 글쓰기, 책 만들기, 경전읽기 등이 된다. 돈이 되는 것은 본업이고 돈이 되지 않는 부업이다. 당연히 자기계발에 대한 것은 부업이 된다.
이 일에는 정년이 없다. 일감이 있는 한 계속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있는 것은 삶에 활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일을 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도 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하는 것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 된다. 일을 함으로써 이 사회에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사업보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문보국(作文報國)도 있다. 글을 씀으로 인하여 이 사회에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책 만들기도 보국이 된다. 이를 서책(書冊報國)이라 해야 할 것이다. 책을 만듦으로 인하여 이 사회에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 하면 훌륭한 일이 된다. 청소부가 거리를 청소할 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이 세상을 깨끗이 하는 것이 된다.
일을 하는 것, 글을 쓰는 것, 책을 만드는 것은 보국이다. 이 사회에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을 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오늘 책을 한권 만들어야 한다. 틈만 나면 시간만 나면 책을 만든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 만들기는 여러 날 걸린다. 먼저 과거 글을 수집한다. 블로그에 있는 글을 가져 오는 것이다. 시기별로 카테고리 별로 분류하는 것이 일차작업이다.
책 만들기 2단계는 목차 만드는 것이다. 목차를 만들 때 글의 제목을 달리 붙이기도 한다. 마치 기사에서 제목을 바꾸어 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용은 건드리지 않는다.
책 만들기 3단계는 사진 사이즈 조정하는 작업이다. 이 단계가 가장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매일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 날 된 것을 알게 된다.
책 만들기 4단계는 서문을 쓰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은 서문에 대한 것이다. 책 소개 위주로 쓴다. 그러나 현재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쓰기도 한다. 항상 현재 것을 쓴다.
이번에 만든 책은 2022년 담마에 대하여 쓴 것이다. 이를 ‘127 담마의 거울 2022’라고 이름 붙였다. 127번째 책으로 목차에는 59개의 글이 있다. 종이 사이즈는 B5(18.2X25.7mm)이고 폰트 사이즈는 10이다. 총 319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는 다음과 같다.
(목차)
1. 오염된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2. 우문우답과 우문현답
3. 내가 회의론자에게 답하지 않는 이유
4. 어리석은 자가 명성을 얻으면
5. 죽음이 두려운 것은
6.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7. 머리맡 경전으로 맛지마니까야를
8. 밤에는 맛지마 낮에는 디가
9.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10. 이것을 말하지만 이것의 실체를 알았으니
11. 물질문명은 정신문명보다 우월한가?
12.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이려면
13.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열반
14. 마음이 윤회한다고 하는데
15.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 느껴지지 않는 행복
16.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잠자기 전 성찰
17. 늘 학인(學人)의 자세로 배우고자
18. 정법이 변질되면 나타나는 현상
19.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20. 경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을 때
21. 사랑도 미움도
22. 이혼한 전처 보듯 현상을 관찰하면
23. 굼실굼실 무섭게 흐르는 안양천을 보면서
24. 오후불식하면 어떤 이익이
25. 사랑하는 자로부터 슬픔이
26. 그 사람은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
27. 오온의 배후에는 초자아가 있다는데
28. 어떤 존재로도 형성되지 않기 위하여
29. 스승과 제자는 우정의 관계
30. 사람의 목숨은 옹기와 같아서
31. 나는 싸우지 않는다
32. 후진불가 전륜왕의 사군과 부처님의 사성제
33. 공부하다 죽으라는데
34. 천사(天使)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3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
36. 시간투자해서 먹고 사는데
37. 고귀한 우정에 대하여
38. 맛지마니까야 완독 대장정을 마치고
39. 내가 경전읽기 하는 것은
40. 진실을 고백하여 힘을 불러오는 진실선언
41. 심청정이면 중생청정
42. 슬퍼하지 마라, 무엇을 근심하는가?
43. 말 때문에 망한 사람은 열 가지 통치자의 원리를 몰라서
44.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45. 주기만 하는 사람과 받기만 하는 사람
46.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47. 영원한 저 세상과 자아가 있다는데
48.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49. 부처님은 발을 어떻게 씻었을까?
50.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과 무심도인
51.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 께밧다의 경(D11)
52. 내가 사람을 호칭할 때 "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53. 산냐(相)의 척파에 대하여
54. 어떻게 해야 타인을 감동케 할 수 있을까?
55. 유년시절 순수의 시대로
56. 나는 세상의 창조자이자 파괴자
57. 과거칠불의 증명이 되어준 정거천
58.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 이유는?
59. 법의 맛을 알면
글을 쓰면서 배운다. 매일매일 글을 쓰면 엄청나게 축적된다. 그것은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전 문구를 인용하여 글을 쓰기 때문에 지혜라고도 볼 수 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머리로 이해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지혜는 몸으로 체득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을 읽어서 이해하는 것은 지식에 해당되고 수행을 해서 체득된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경전에는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깨달은 자가 말한 것은 모두 진실된 것이다. 그러나 몸으로 체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몸으로 체득된 것 못지 않다. 이런 것도 지혜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 수행승과 교학승이 있다. 서로 다투고 있다. 수행승은 교학승에 대하여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만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A6.46)라고 비난했다.
교학승은 수행승을 비난했다. 교학승은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A6.46)라며 비난했다.
교학승은 경전적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깊게 수행을 하지 않어서 선정의 맛은 모른다. 수행승은 선정의 맛은 알지만 경전적 지식은 부족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 그 사람 단점만 본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럴 때는 그 사람 장점만 보고 가야 한다.
수행승에게 없는 것이 교학승에게 있다. 교학승에게 없는 것이 수행승에게 있다. 서로서로 장점을 칭찬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여기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선정에 드는 수행승이다. 선정의 비중이 높아서 수행승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행승에 대해서는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한 부류가 있다. 선정에 들면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수행승을 말한다. 교학의 비중이 높아서 교학승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학승에 대해서는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수행만 하는 사람은 경전공부나 교리공부하는 것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자만이다.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으나 지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경전공부만 하는 사람이 있다. 좌선이나 경행 등 수행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심오한 경지를 모른다. 다만 경전이나 논서에서 이론으로만 접할 뿐이다.
경전공부만 하면 비난 받기 쉽다. 헤엄 치는 법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한다. 먹어 보아야 맛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행도 하게 되어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글쓰기 하다 보면 비난 받을 때가 있다. 글만 쓰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비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행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수행한 사람에 대하여 비난한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책 읽은 자를 비난한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경전 읽는 사람을 비난한다. 글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이 글 쓰는 사람을 쓰기를 비난한다. 자신이 직접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으로 본다. 마치 신통에 대하여 황당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초기경전을 보면 여러 가지 신통이 있다. 신통에 대한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어떤 이는 이를 보고서 초기경전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통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말한다.
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생각한다.왜 그런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통을 부정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럴 때는 “사선정에 들어가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것 같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또한 자신이 인식하는 것만 믿는다. 그러다 보니 경전에서의 초월적인 가르침이나 신화적인 가르침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이 보지 않은 것, 자신이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비난한다. 수행해 보지 않은 자가 수행을 비난하고,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가 경전을 비난 하는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들 대부분은 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해 본 사람이라면 격려할 것이다.
어떤 이는 경전 보는 것에 대하여 탐탁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경전 보는 것에 대하여 집착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경전을 보지 않은 것 같다. 경전을 보았다면 수희찬탄(隨喜讚嘆)했을 것이다.
매일 경전을 읽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어깃장 놓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 경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경전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새긴다. 이럴 때 법의 맛(法味)을 느낀다.
반드시 수행을 해야 법의 맛을 아는 것은 아니다. 교학을 공부하고 경전을 읽어도 법의 맛은 안다. 더 좋은 것은 수행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는다.”라고 했다.
글쓰기 십칠년 되었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이다. 일상에 대한 글도 경전 문구 하나 넣어서 쓴다. 이렇게 쓰다 보니 하나의 탑(塔)이 되었다. 글자의 탑(文字塔)이다. 이제 책으로 만든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누군가 글 쓰는 것에 대하여 실천이 없다고 해도 게으치 않는다. 누군가 경전 보는 것에 대하여 남의 소 센다고 말해도 게으치 않는다. 이럴 때 테라와다 수행승들을 떠 올린다.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pariyatti)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paṭipatti) 괴로움에서 벗어나(paṭivedha)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 puññakkhetta)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기 때문이다.”(M.1.446)
오늘날 빠알리 삼장이 전승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테라와다 수행승들의 역할이 크다. 아공법공 등을 말하면서 소승이라고 폄하하건 말건 자신의 할 바를 다한 수행승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테라와다 수행승들은 대승불교와 같은 새로운 사조에 물들지 않았다. 세 가지, 즉 교학(pariyatti)과 실천(paṭipatti) 과 증득(paṭivedha)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정법(正法)이 이어져 왔다.
오늘도 내일도 쓴다. 매일매일 십칠년 동안 써 왔다. 비난도 많이 받았다. 수행은 하지 않고 글만 쓴다는 것이다. 경전을 인용하면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오늘 책 한권 만들었다. 한권한권 만들다 보니 이제 127권이 되었다. 틈 날 때 마다 만들다 보니 이런 성과를 내었다.
책을 쌓아 놓으면 하나의 탑이 된다. 이를 서탑(書塔)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탑에 책 하나 더 올려 놓았다.
2024-05-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