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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성장해 온 박정희 대통령... 어려움과 아픔의 세월을 몸소 겪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남북의 부모형제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릴 통일조국의 실현을 희구해왔습니다 박대통령의 소원은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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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건설 없이는 빈곤의 추방이란 없을 뿐 아니라, 경제건설 없이는 부정ㆍ부패의 온상이 되는 실업과 무직을 추방할 수 없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자유의 힘이 넘쳐흘러 북한의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박대통령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1ㆍ2ㆍ3ㆍ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공업입국의 터전을 튼튼히 닦아 놓았으며 바야흐로 중화학공업화 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선대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한국 중흥에 진력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의 정신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정신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우리의 정신문화와 정치제도도 떳떳하게 그 국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던 냉전의 대결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는 세계 조류에 발맞추어 27년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간에 대화의 문을 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국력배양의 가속화를 통해 번영된 통일조국을 구현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근로와 창의, 생산과 능률의 미덕을 사회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일하는 국민에게는 안정 속에 보람있는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도록, 근로자의 이익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확충해 나갔습니다 한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굳게 다지면서 세계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게끔 했습니다. 일상 생활용품까지 우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국내 경제가 자립단계에 도달했고, 소총 한 자루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던 우리나라 방위 산업을 국산 장거리 유도탄 시대의 막을 열게 함으로써 우리의 국력은 북한을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분단된 국토를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데 신명을 다 바쳤습니다. 저마다 자질과 능력을 살릴 수 있도록 사회 개발정책을 계속 확충해 모든 국민이 밝고 보람찬 생활 환경에서 고루 잘 살 수 는 사회, 온 국민이 추구하고 있는 생활의 미래상을 앞당기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켰으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고,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았습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을 살다간 박대통령은 물욕은 물론 자신의 재산에 대한 욕심도 전연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근검, 절약하고 청렴했던 박대통령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이 많습니다. 전기를 아끼려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두었는데,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고, 대신 창문을 열어두곤 했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파리를 잡기 위해 손수 파리채를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부분이 해져 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는 낡은 러닝셔츠를 입었고 몇 십년을 매었던지 두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는 허리띠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 가지려 했던 국방ㆍ경제 표어는 수없이 많습니다. 증산ㆍ수출ㆍ건설, 근검ㆍ절약ㆍ저축, 근면ㆍ자조ㆍ협동, 한 손으로 싸우고 한 손으로 건설하자, 수출입국, 조국근대화, 유비무환, 자주국방, 부국강병 등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민정신의 연구ㆍ함양ㆍ진작에 힘써왔습니다. 박대통령이야말로 혁명가ㆍ군인ㆍ교육자ㆍ행정가의 장점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로서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한일합방ㆍ남북분단, 6.25동란을 거치면서 쇠잔의 길을 걷던 우리 민족에 있어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초석을 확립한 위인으로서 주요 공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
1. 수출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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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입안할 당시, 우리 정부는 수출보다는 수입대체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수입대체산업의 공업화에 따른 외화부족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국가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용단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본 방향을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경제개발 방향의 재정비는 선진산업국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인 동시에, 우리 국민을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로 뛰어들게 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수출제일주의를 모토로 수출진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64년부터 매년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특히 1967~69년도는 수출산업육성에 중점을 두고, 1967년에는 수출산업 기반의 확대, 1968년에는 수출산업의 양산체제 확립, 1969년에는 수출 산업시설의 현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출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이런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기업 중 수출특화산업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한편, 수출지원제도 및 행정체제를 개선하고 해외시장 개척의욕을 고취하여, 업계를 수출지향적으로 정비하고 수출추진 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수출정책과 수출독려의 산실은 1966년부터 박대통령이 수출최고사령관이 되어 매월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수출진흥회위원과 정부, 학계와 연구기관을 비롯해 수출지원기관과 업계 등 유관기관 대표들 약 250여명이 참석하여 월별, 품목별, 지역별 수출동향을 점검하는 이 회의는 수출증대를 위한 모든 시책과 업계의 애로타개 등의 매월 추진상황을 점검ㆍ보고하여, 수출진흥을 위한 시책과 제도를 하나하나 정착시켜 나갔다. 1979년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 수출에 관한 최고전략회의로서 수출진흥종합시책, 수출계획, 수출촉진제도, 수출독려 등을 논의하여 최종 결정하는 장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의 수출’하면 박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수출입국에 대한 노력의 결과는 점점 가시화되었다. 1962년이래 노동집약 중심으로 한 수출공업화정책이 성과를 나타내며 수출이 급속히 신장되고 고율의 경제성장이 유도되었다. 1962년 5천만 달러이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로 급신장을 보였으며, 1968년 5억달러, 1969년 7억달러,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 구조면에서도 1차 상품과 공산품의 수출 구성비가 1960년 83.2% 대 16.8%이던 것이 1970년에는 공산품이 83.6%로 급속히 높아짐으로써 후진국의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며 박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 1,000 달러 소득‘이란 지표를 제시,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을 선언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을 육성하여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이룩했다. 특히 수출산업의 중화학공업화는 전자산업의 전략적 육성, 조선공업의 수출산업화, 기계공업의 국산화, 자동차 공업의 수출전략산업화 등에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수출용원자재의 국산화, 수출취약산업의 육성 등을 통한 수출의 질적 고도화와 종합무역상사의 육성,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설치, 외국인 투자유치, 중소기업의 수출능력 강화 등 수출산업의 저변확대에도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의 석유위기도 수출로 극복하고, 1977년 12월 22일, 당초 1980년 달성키로 한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수출입국 정책의 성공은 우리나라를 가난하고 힘겨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경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경제의 부상과 남북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세계13위 무역대국의 위상 역시 박대통령의 수출입국에서 발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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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부고속도로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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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4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선거공약으로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의 건설 및 4대강(한강ㆍ낙동강ㆍ금강ㆍ영산강)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기간중에 착수하겠다”고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고속도로건설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부정 또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까지의 우리나라 교통문제를 조사한 IBRD조사단도 교통 및 수송난을 고속도로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건의는 물론 방향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원대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가경륜의 일환으로, 19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후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검토 및 건설비산출, 용지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을 직접 지휘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사비였고 박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은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을 1967년 12월 15일 발족시키고 관련자료 검토와 분석을 거쳐 3백억 원 선이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68년 2월 5일 제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건설 재원확보계획을 확정했다. 1968년 2월 1일 원지동에서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4월 3일 오산~대전간 공구(1백 6.6㎞), 9월 11일에는 대구~부산간(1백23㎞), 마지막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간(1백 52㎞)은 1969년 1월 13일에 착공되었다. 재원확보 다음의 난제는 건설장비의 도입문제였다. 정부는 비상조치로서 미ㆍ영ㆍ불ㆍ스웨덴 등의 유명업체와 협의하여 건설회사부담의 상업차관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난공사였던 대전~대구간은 전 노선의 약 3분의 1인 1백 52㎞이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약 47%, 절토량은 약 50%, 장대교는 17개소로 60%, 그리고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재 터널공사가 가장 난공사로서 13회에 걸친 낙반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서울~부산 천리간에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는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 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박대통령 친필의 ‘고속도로 구상도’ ‘서울~부산선 축선 확정도’, ‘용지 매수계획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을 지시한 메모’ 등은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건설 시초부터 완성까지 시종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세세히 알게 해 준다.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에 당초 3백 30억원으로 예상했던 공사비는 설계변경과 물가상승 등으로 4백 29억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약 9백만명 및 장비 1백 65만대가 투입된 총 연장 4백 28㎞의 단군이래 최대토목공사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고 전국을 하루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각을 전 국민에게 일깨워 집약된 국력으로 1980년 목표했던 1백억달러 수출, 1천달러 소득을 3년이나 앞당겨 달성하는 기적을 낳게 했다. 박대통령은 京仁, 경부,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간 의 8개 고속도로를 완공시켜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기본설계의 하나인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ㆍ강릉ㆍ부산ㆍ목포를 잇는 기간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전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전 국토를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부산~마산간 고속도로는 1978년 5월에 4차선으로 착공되어 박대통령 서거 후인 1981년 9월에 준공되었다. 박대통령이 단행한 2차선 고속도로의 4차선 폭 용지확보, 접도구역의 통제, 그리고 그린벨트의 설치와 엄수는 우리나라 국토개발 백년대계와 후세를 위한 위대한 선견지명이요 영단이라 하겠다. 박대통령은 한국형 고속도로의 건설원칙, 즉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고속도로 건설의 아이디어를 착안해내고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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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마을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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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어려운 농촌, 이곳을 박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잘사는 마을로 만들자는 물결이 급속하게 전개됐으니,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 10월 전국 농어촌 3만4천6백65개 부락에 300여 부대의 시멘트와 철근1톤씩 무료로 배급되었다.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배분된 이 시멘트들은 마을진입로의 확장과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등에 사용되었는데....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정부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가져왔다. 마을 주민들은 정부에서 배분한 시멘트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투자하여 마을 공동사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차 연도의 새마을사업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근면, 자조, 협동하여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5천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의 세가지로 구분하였다. 1972년 제2차 새마을운동 때에 박대통령은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6천6백 개 마을에만 지원하고 잔여 1만 8천여 마을에는 지원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는 해묵은 농민들의 의타심을 고치고 자조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무기력하고 태만하던 농민에게 경쟁심과 협동정신을 주입시켜 노동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여,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 지속시켰다.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사업부터 시작했으나 그 저변에는 농민들의 자립ㆍ자조정신을 일깨우자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정신계발, 소득증대 등과 함께 삼위일체로 추진되었다. 특히 소득증대사업으로 농촌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은 1974년부터 도시노동자 소득을 상회할 만큼 되었고 1977년에 이미 1981년 소득목표액인 140만원에 도달하였다. 모든 마을에 자동차가 드나들게 되었고, 모든 작은 하천에 둑이 개수되었으며, 예전의 볏짚지붕은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농가에 간이상수도 시설이 설치됨은 물론이고, 전 국토 어디에서나 전기불이 들어왔으며, 모든 법정 리, 동까지 전화가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져서 그야말로 살맛 나는 농촌으로 탈바꿈하였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 10주년에 해당하는 1980년 4월까지, 정부 투입자금 2조7천5백21억원, 운동참가 연인원은 약 11억명, 새마을회관 3만5천9백50개소, 신설농로 4만4천㎞, 폭을 넓힌 마을도로 4만㎞, 신설용수로는 4천4백40㎞가 이뤄졌다. 농촌새마을운동은 더 나아가 사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도시주민들은 농촌 새마을운동이 마을의 모습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태도나 마음가짐까지 함께 달라지게 된 것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실시해 온 남녀 새마을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공직자나 사회지도급인사들에게도 확대되어, 새마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도시주민은 도시생활에 맞게,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인들은 공장새마을운동 확산, 추진에 앞장섰다. 이런 새마을운동의 물결은 기업 분위기와 농촌 여성 지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기업인들이 농민과 함께 새마을교육을 받은 후, 종업원들의 복지후생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됐으며, 농촌여성들의 발언권과 지위는 새마을운동에 의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가난의 악순환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왔던 우리 국민에게 짧은 기간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준 새마을운동...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 개인적 구상에서 범국민적으로 번진 새마을 운동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잘사는 농어민, 잘사는 내고장, 번영된 조국’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새마을사업 추진을 위한 의사결정을 주민총회에서 결정케 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의식을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는 계기조성과 함께 민주화의 기초를 닦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마을운동을 민주주의 훈련도장이라 명명한 것도 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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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치산녹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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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당시 우리의 국토는 그야말로 벌거숭이였다. 과거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헐벗은 산에는 터전을 잃은 동식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현재... 과거와 같은 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푸르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대한의 산야... 이는 박대통령의 치산녹화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림황폐는 조선조 중반부터 인구증가와 국가의 산림관리능력 상실이 그 원인(遠因)이다. 여기에 한일합방과 일제말기부터 시작된 전쟁물자의 조달, 해방 후의 인구증가, 6.25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를 위한 자재수요의 증가,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임산연료 이외에는 대체연료가 거의 없었던 사회상황이 민둥산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한 우리나라 특유의 온돌은 막대한 양의 나무를 소비한다.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우리 인간 생활은 물론 자연생태계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복구할만한 국가의 산림관리기능 실종까지 가세하여 산림자원이 더욱 황폐화되어 갔다. 해방 직후 ‘사방사업 10개년 계획(1948~57)’과 전쟁 후인 1951년에 ‘산림보호임시조치법’과 같은 복구노력이 있긴 하였지만, 재원과 기술 부족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격적인 복구노력은 1961년의 ‘산림법’을 제정하여 3공의 전신이 총력을 기울인 사방사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치산녹화 7개년계획(1965-1971)’과 ‘제1ㆍ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등이 세워져 치산치수책이 추진되었다. 봄철 식목일 외에도 가을철에 ‘육림의 날’을 휴일로 정하여 온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3년 박대통령은 녹화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농림부 산하의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킨 데 이어 연두기자회견에서 10년이내 국토녹화를 완성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식목 및 육림현장을 수시로 직접 찾아 지도 격려했다. 치산녹화과정에서 사방사업 사상 최대의 난공사이며, 단일지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영일지구 사방사업이다.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중에 실시된 영일지구는 일본에서 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할 때 관문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민둥산의 모습이 흉물스러웠던 곳이다. 그런데, 지질구조상 한번 황폐되면 복구가 어려운 곳이어서 그동안 50여회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실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번 번히 복구에 실패한 곳이었다. 2-3년 내에 완전복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량한 종자와 묘목을 선정하여 파식하고, 개량공법 등을 적용해 녹화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황폐지에 노출된 암반의 등고선으로 단을 끊고 단상에 구덩이를 파고 객토를 하여 묘목을 식재 한 후, 3년마다 한번씩 추비를 주어 사방지 사후관리도 철저히 함으로써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풀 한포기 없는 벌거벗은 4,538ha의 집단 황폐지가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성공으로 완전 복구되었다. 치산녹화사업은 제1차 계획기간에 100만ha에 21억본을 심기로 한 목표로 4년 앞당겨 108만ha에 29억본을 식재했으며, 78년에 목표량을 초과달성하여, 새로 2차계획을 수립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나무는 일부 산간오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산림녹화운동 기간에 심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어딜가도 푸른 산을 쉽게 만나볼 수 있고, 독일, 영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4대의 조림성공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최대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21세기... 치산녹화의 성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남아있다. |
5. 중화학공업육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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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공업입국ㆍ수출제일주의에 기반을 둔 경공업의 수출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근대화된 공업구조가 정착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경제개발이 단순한 5개년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1980년대 1인당 GNP 1,000달러, 수출 100억달러 달성을 경제개발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공업구조개편론”을 성안하고 1973년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추진선언과 함께 과학화운동전개를 강조했다. 1960년대의 정책이 공업입국, 수출제일주의였으며 197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한 중화학공업화였다.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위원회’와 ‘기획단’을 두고 선진 산업국으로 나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공업 등의 6개 업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화의 기본 바탕이며 중심이 된 포항종합제철, 아연ㆍ동ㆍ연ㆍ알루미늄 등 4대 전략품목을 육성할 수 있는 온산비철금속공업기지, 천혜의 기후조건과 항만, 그리고 양질의 인력을 바탕으로 한 옥포조선공업, 품질과 가격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기계류와 플랜트의 국산화에 기여한 창원기계공업기지, 반도체, 컴퓨터 산업 등의 고도정밀 전자기기 산업기지인 구미전자공업단지, 석유화학제품의 국내수요 충족과 비약적인 수출증대의 기반을 마련한 울산과 여천 석유화학단지들이 바로 당시 중화학공업 추진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종합제철 건설의 경우 경제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반대의 벽에 여러번 부딪혔으나, 박대통령의 단호한 추진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았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진행되면서 관련 과학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대덕에 업종별로 전문연구단지가 들어서고, 산업기지별 실용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장기 기초연구를 수반한 전문연구가 추진되어 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 기초 과학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이끌어 나갈 기술인력 양성 노력도 함께 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공고교육에 의한 기능사, 대학교육에 의한 기술자를 양성하고, 현장에 맞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위해서 각종 직업훈련원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우리의 방위산업을 선진국형 체제를 갖추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한방위 공약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탈피해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80년대 경제 미래상으로 제시된 1인당 GNP 1,000불과 수출 100억불을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앞당겨 1977년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세계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의 획기적인 도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현재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핵심이 바로 중화학공업이다. |
6. 자주국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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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력으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의 군사도발과 위협은 극심하였다. 북의 남침 위협을 저지하고, 무력침공 야욕을 근원적으로 포기케 하기 위해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리에겐 절실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계획의 일차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에 부심한 기간이었다. 당시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화포와 대포, 군함, 잠수함까지도 생산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소총 한자루 못 만드는 실정이었다. 북한에 병기산업이 뒤져있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무기생산을 계획하고, 무기생산의 소재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더욱 육성시키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여하한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여하한 무기도 규격의 소재를 설계대로 정확히 가공해서 결합하면 소정의 성능과 호환성을 갖출 수 있다‘는 소신 아래 무기의 부품별, 뭉치별로 82개의 생산공장을 지정하되 평상시에는 그 공장능력의 80%는 민수용으로, 20%만 방산용에 충당토록 하여 평시 경제성을 제고시키고 유사시에는 전 능력을 방산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79년말에는 최신 첨단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군의 기본 병기인 155mm 곡사포, 20mm 대공발칸포, 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등 각족 화기와 5백MD 다목적 헬리콥터와 산악전용 경장갑차, 그리고 각종 실ㆍ포탄류의 양산체제가 갖추어졌다. 특히 1978년에 들어와서는 미탱크와 동일한 화력과 기동력을 지닌 전차를 양산하고, 마침내 9월에는 평양까지 도달하는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을 개발, 시험발사에도 성공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도병기 등 각종 고도정밀병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독자적인 한국형 무기체계의 개발과 무기성능의 개량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방위세 신설ㆍ향토 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 병기개발위원회를 통한 국산신무기개발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우리 군은 역사상 최초로 해외파병을 단행했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국군의 사기와 긍지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 증강과 국가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미군 철수 문제를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1978년 한ㆍ미 연합사령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ㆍ미간의 긴밀한 협력 하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재임기간 중 미군 철수와 호전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를 정책의 최상목표로 설정하고 자주국방을 적극 추진했다. 오직 자주국방의 일념으로부터 출발한 방위산업의 기반은 이제는 오히려 해외에 기술과 제품을 역수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안보와 국방에 대한 집념은 오늘날 막강한 국군 육성으로 국가안보의 초석과 토대가 되고 있다. |
7.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 창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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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한 나라와 민족의 뿌리이며 정신이다.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그 힘은 무엇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민족의 저력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과 해답이 박대통령의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었다. 1ㆍ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민소득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국가재정에 여유가 좀 생기자 박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의 유산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호국과 관련된 유적을 보수ㆍ정화하였다. 그 속에 어려있는 호국자주정신을 계발, 우리 국민들이 자주자립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함이었다. 다음, 신라의 삼국통일정신이 앞으로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통일전을 조성하고 전국 각지 선열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상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온 선현들의 유적도 보수ㆍ정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화 유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ㆍ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족 사상의 뿌리를 일깨우고 정립한 선현들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여 우리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자주성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인 전통문화유적에 대한 보수ㆍ정화와 보존전승사업도 함께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바탕 위에서 외래 문물을 수용, 이를 독창적으로 창조발전시킨 전통문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선사시대와 신라ㆍ백제 문화의 연구ㆍ조사ㆍ발굴ㆍ보존사업들은 그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의 문화사를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새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문화보존을 위한 각종 사업과 함께 민족문화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문화시설도 건립하였는데, 경주ㆍ공주ㆍ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극장들도 모두 이 시기에 탄생된 것들이다. 1962년엔 ‘문화재보호법’이 처음 제정되면서, 음악, 연극, 춤 등의 무형문화재와 민속문화재를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하고 법으로 지정해 보호받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유적총람>을 작성, 오늘날 문화재관리행정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호국정신의 계승이라는 연장선상에서 국적있는 교육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국적있는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적 가치관의 정립과 체계화를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 <민족문화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국적있는 교육은 곧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마을운동과 연계되면서 국민적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국가개발지도이념으로 발전돼 나갔다. 그밖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민속박물관 개설, 1979년에는 해외공보관 산하 해외한국문화원을 일본, 미국, 프랑스의 수도에 각각 설치해 일찍부터 한국문화의 해외선양, 보급에 힘썼다. 찬란했던 전통문화를 하루속히 복원해 국민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일깨워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겠다는 박대통령의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이념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살아가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으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 치적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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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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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력 발족(1961. 7. 1, 1982. 1. 1 한국전력공사로 개칭) ▷ 섬진강 수력발전소 재 기공(1961. 8. 19, 준공 : 1965. 12. 20) ▷ 수출조합법 공포(1961. 9. 9) ▷ 춘천 수력발전소 기공(1961. 9. 21, 준공 : 1965. 2. 10) ▷ 공업표준화법 제정(1961. 9. 30) ▷ 전원개발 5개년 계획 발표(1961. 11. 24) ▷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 발표(1962. 1. 13) ▷ 울산을 중화학공업 우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 결정 공포(1962. 1. 27) ▷ 기술진흥 5개년 계획 발표(1962. 2. 2) ▷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1962. 2. 3) ▷ 의암댐 착공(1962. 3. 1, 준공 : 1967. 8. 1) ▷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 공포(1962. 3. 17) ▷ 남강 다목적댐 착공(1962.4, 준공 : 1970. 7) ▷ 대한무역진흥공사 발족(1962. 6) ▷ 남양송신소 준공(1962. 9. 10, 기공 : 1960. 12. 31) ▷ 선암댐 착공(1962. 9, 준공 : 1964. 12) ▷ 사연댐 착공(1962. 9, 준공 : 1965. 12) ▷ 해운센터 착공(1962. 10. 10) ▷ 새나라자동차 생산개시(1962. 11, 1963. 5월까지 조립 생산함) ▷ 광주 내연 준공(1962. 11. 15) ▷ 금성사 라디오 첫 수출(1962. 11. 28, 62대/$594) ▷ 제2비료(호남비료) 나주공장 준공(1962. 12. 28, 현 L/G화학 나주공장) ▷ 희야댐 착공(1962년, 준공 : 1964년) ▷ 보리와 밀 품종개발에 성공(1963. 1. 25) ▷ 울산정유공장 착공(1963. 3. 12, 준공 : 1964. 5. 7) ▷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포(1963. 4. 17) ▷ 직업재활원 개원(1963. 9. 25) ▷ 서독 광부 1진 123명 취업(1963. 12. 21) ▷ 쌍용시멘트 영월공장 준공(1964. 4, 기공 : 1962. 9. 7) ▷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준공(1964. 6. 20, 기공 : 62. 11. 20) ▷ 현대시멘트 단양공장 준공(1964. 6) ▷ 부산 감천 화력발전소 준공(1964. 8. 20, 기공 : 1961. 2, 132천㎾) ▷ 식량증산 7개년(1965~71) 계획 발표(1964. 8) ▷ 한국수출산업공단 설립(1964. 8, 서울디지털, 부평, 주안, 남동, 북평국가산업단지 관리) ▷ 공업품 표준 규격 제정과 KS 표시 허가제 실시(1964. 8) ▷ 제3비료(영남화학) 울산공장 기공(1964.11.29, 준공 :1967.3.14, 현, 동부한농화학) ▷ 1억불 달성 제1회 수출의 날 제정(1964.11.30, 기념식 :1964.12.5) ▷ 서울 구로지역 수출산업공업단지(1~6공단) 착공(1965.3.12, 준공:1974.11.5) ▷ 경제 각의, 잠업증산 5개년 계획 의결(1965. 3. 18) ▷ 제4비료(진해화학)공장 기공(1965. 5. 2, 준공 : 1967. 1. 7) ▷ 영월 화력발전소 1,2호기 준공(1965. 9. 1, 기공 : 1962. 5) ▷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1965. 11. 3) ▷ 군산화력발전소 기공(1965. 12. 1, 준공 : 1968. 10. 31) ▷ 국내 텔렉스 400회선 개통(1965. 12. 16) ▷ 비인공업단지 조성(1966. 4. 29) ▷ 팔당댐 기공(1966. 6. 8, 준공 : 1973. 12. 31)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1967~1971) 계획 발표(1966. 7. 29) ▷ 울릉도 추산수력발전소 준공(1966. 8. 1, 착공 : 1964. 4. 4) ▷ 아세아시멘트 제천공장 준공(1966. 12. 13) ▷ 광주공업단지 착공(1966. 12. 16) ▷ 아시아개발은행 가입(1966. 12. 17)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 여수 제2정유공장 기공(1967. 2. 20, 준공 : 1969. 6. 3) ▷ 전주 제1공업단지 기공(1967. 3. 22) ▷ 대구 3공업단지 기공(1967. 3. 31) ▷ 속초 수산센터 준공(1967. 4. 14) ▷ 소양강 다목적댐 기공(1967.4.15, 담수 :1972.11.25, 준공 : 1973.10.15) ▷ 제5비료(한국비료) 울산공장 준공(1967. 4. 20, 현 삼성정밀화학) ▷ 동양시멘트 삼척공장 준공(1967. 4. 24) ▷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1967. 4, 준공 : 1970. 12. 28) ▷ GATT 가입(1967. 4. 15) ▷ 부산 연합철강 준공(1967. 9. 29) ▷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식(1970. 4. 1, 제1기 설비종합 준공 : 1973. 7. 3) ▷ 서울-부산간 장거리 자동전화 개통(1971. 3. 31) ▷ 의암수력발전소 1,2호기 준공(1967. 11) ▷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 발표(1968. 1. 5) ▷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 기공식(1968. 3. 22, 준공 : 1972. 10. 31) ▷ 대암댐 기공(1968. 6, 준공 : 1969. 12) ▷ 화천수력발전소 4호기 준공(1968. 6) ▷ 축산개발 4개년 계획 확정(1968. 7. 26) ▷ 안계댐 기공(1968. 8, 준공 : 1971. 12) ▷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1968. 9. 9~10. 20) ▷ 청평수력발전소 4호기 준공(1968. 9, 기공 : 1966. 9) ▷ 쌍용시멘트 동해공장 준공(1968. 10. 31) ▷ 한국투자개발공사 발족(1968. 12. 16) ▷ 한국수출품포장센터 발족(1969. 2. 8) ▷ 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 발표(1969. 2)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 발표(1969. 4. 2) ▷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기공(1969. 5. 15, 준공 : 1970. 6. 22, 제2위성통신지구국 준공 : 1977. 8. 25) ▷ 부산화력발전소 3,4호기 준공(1969. 6. 4, 기공 : 1967. 7) ▷ 알루미늄제련공장 울산공업단지에 준공(1969. 7. 3) ▷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 결정(1969.9.3, 착공 :1970. 5, 준공 : 1973년 초) ▷ 경기도 안성군 한독낙농목장 준공(1969. 10. 11) ▷ 부평단지 준공(1969. 10. 31) ▷ 관악산 기상레이더 설치(1969. 11. 29) ▷ 철강공업육성법 공포(1970. 1. 1) ▷ 수출정보센터 개관(1970. 2. 7) ▷ 마산 수출자유지역 관리청 개청(1970. 4. 3) ▷ 인천화력발전소 제1호기 준공(1970. 5. 29) ▷ 관세청 개청(1970. 8. 21) ▷ 수출 10억달러 달성(1970년)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발표(1971. 2. 9) ▷ 당인리 화력발전소 준공(1971.4.10, 착공 : 1966.8.3, 현 서울화력발전소) ▷ 안동다목적댐 기공(1971. 4, 준공 : 1976. 10) ▷ 중부산업단지관리공단 설립(1971. 5, 구미국가산업단지 관리) ▷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1971. 10. 25) ▷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 확정(1972. 1. 27) ▷ 녹색혁명추진(1972. 2. 9, 통일벼 개발) ▷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 발표(1972. 8. 3) ▷ 중화학공업정책 육성 선언(1973. 1. 12) ▷ 공업진흥청 신설(1973. 1. 12) ▷ 현대울산조선소 기공(1973. 3. 25, 제1호선 진수 : 1974. 2. 15) ▷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 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1973. 3. 26) ▷ 춘천, 대전, 원주, 청주, 전주, 이리, 광주, 목포 등을 지방공업개발 장려 지구로 지정(1973. 5. 4) ▷ 중화학공업(포항-철강,여천-석유화학,온산-비철금속,창원-기계,옥포-조선,구미-전자) 건설계획 확정(1973. 5. 24) ▷ 서울 부산에서 처음으로 가격표시제 실시(1973. 6. 1) ▷ 기능공 양성정책 수립(1973. 7. 10) ▷ 주안단지(5공업단지) 준공(1973. 7. 15) ▷ 정수직업훈련원 개원(1973. 7. 18, 현 서울정수기능대학) ▷ 호남종합화학기지 내 에틸렌계열공장 4개, 프로필렌계열 2개, 기타 7개 총 13개 공장건설계획 확정(1973. 8. 2) ▷ 구미전자공업 1단지 조성 완료(1973. 10. 5) ▷ 옥포조선소 기공(1973. 10. 1, 준공 : 1981. 10. 17) ▷ 이리 수출자유지역 착공(1973. 10. 17, 준공 : 1974. 12) ▷ 충주 제6비료공장 준공(1973. 10. 26) ▷ 수출국 1961년 25개국에서 163개국으로 확대(1979년) ▷ 국산자동차 포니 첫 수출(1976. 6) ▷ 특별소비세법 제정(1976. 12. 22) ▷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창원, 온산, 옥포, 죽도, 안정, 여천 지정 (1974. 3. 27, 창원 : 종합기계공업기지, 온산 : 석유정제ㆍ비철금속 공업기지, 옥포ㆍ죽도ㆍ안정 : 조선공업기지, 여천 : 종합화학공업기지) ▷ 동남산업단지관리공단 설립(1974. 4, 창원, 울산, 온산, 안정국가 산업단지 관리) ▷ 창원기계공업단지 조성(1974. 4) ▷ 죽도조선소 기공(1974. 4, 준공 : 1980. 12. 5) ▷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풍토 조성을 위한 박 대통령 특별지시 발표(1974. 5. 29) ▷ 주안단지(6공업단지) 준공(1974. 11. 5) ▷ 대청다목적댐 기공(1975. 3. 27, 준공 : 1981. 6. 30) ▷ 여천석유화학단지 합동 기공(1975. 11. 10, 준공 : 1980. 1. 29) ▷ 통일벼보다 질이 좋고 다수확품종인 밀양21호와 23호를 개발하여 77년부터 통일벼를 없애고 신품종으로 대체할 방침을 수립(1975. 11. 20) ▷ 청평 양수댐 기공(1975년, 준공 : 1980. 12. 18) ▷ 근로자 재산 형성 저축제 실시(1976. 1. 19) ▷ 한국기술검정공단법안 마련(1976. 5. 18, 기술인력관리, 자격, 검정의 일원화) ▷ 포항제철 제2기 확장공사 준공(1976. 5. 31) ▷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발표(1976. 6. 18) ▷ 반월 신도시 건설 발표(1976. 10. 2, 기공 : 1977. 3. 30) ▷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1976. 10. 12) ▷ 초고압송변전시설 준공(1977. 4. 30) ▷ 월성 원자력 1호기 기공(1977. 5. 15, 준공 : 1982. 3. 10) ▷ 여수화력 2호기 준공(1977. 6. 30) ▷ 부가가치세 시행(1977. 7. 1) ▷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우승(1977. 7. 10) ▷ 여수 제7비료공장(남해화학) 준공(1977. 8. 4, 기공 : 1973. 10) ▷ 서부산업단지관리공단 설립(1977. 11, 반월, 시화, 아산, 석문국가 산업단지 및 천안 외국인전용단지 관리) ▷ 연초댐 기공(1977. 11, 준공 : 1979. 12) ▷ 수출 100억 달러 기념식(1977. 12. 22) ▷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1977년) ▷ 종합행정정보망 구성키 위해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마련(1978. 2. 20) ▷ 전 국토의 토양정밀조사 완료(1978. 2. 23) ▷ 고리 원자력발전소 준공(1978. 4, 기공 : 1971년) ▷ 충주 다목적댐 기공(1978. 6. 3, 준공 : 1986. 10) ▷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개막(1978. 8. 30, 부산) ▷ 주요 도시간 자동공중전화개통(1978. 12. 31) ▷ 쌀 4천만 섬 수확(1977년) ▷ 인천화력발전소 3, 4호기 준공(1979. 4, 착공 : 75. 5) ▷ 고리원자력 3, 4호기 기공(1979. 4. 9) ▷ 원자력발전소 9, 10호기 울진에 건설키로 확정(1979. 6. 12) ▷온산 동제련소 준공(1979. 12. 11) ▷ 공산댐 기공(1979년, 준공 : 1981년) ▷ 삼량진 양수댐 기공(1979년, 준공 : 1985년) |
2. 국토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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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토건설단 창단식(1962. 2. 10) ▷ 동해북부선 개통(2차 공사 : 옥계 → 경포대 착공 : 1962. 4. 26, 개통 : 1962. 10. 31) ▷ 동진강지역종합개발공사 착공(1963.3. 5, 준공 : 1972.12.31, 김제 부안) ▷ 황지선 개통(1963.5.30, 황지지선 착공 : 1961.8.10, 개통 : 1962.11.30 황지본선 착공 : 1961. 8. 12, 개통 : 1963. 5. 30) ▷ 능의선(서울교외선) 개통(1963.8.20, 1차 능곡 → 가릉 착공 : 1959.10.14, 개통 : 1961.7.10, 2차 가릉 → 의정부 착공 : 1963.4.27, 개통 : 1963.8.20) ▷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준공(1965. 1. 25, 착공 : 1962. 6. 20, 신교 착공 : 1979.1.4 / 준공 : 1982.2.2) ▷ 전남지구 6천여 정보 간척공사 기공(1965. 5. 18) ▷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 계획 수립(1965. 6. 30) ▷ 경인복선 개통(1965. 9. 18, 주안~영등포) ▷ 진삼선 개통(1965. 12. 7, 사천~삼천포, 착공 : 1964. 4. 29) ▷ 고한선 개통(1966.1.19, 증산 → 고한, 고한 → 황지 개통 : 1973.10.16) ▷ 인천항(제2도크) 착공(1966. 6. 1, 준공 : 1974. 5. 10) ▷ 경북선 개통(1966. 10. 10, 점촌→영주) ▷ 한남대교 착공(1966. 1. 19, 준공 : 1969. 12. 25) ▷ 정선선 개통(1967. 1. 20) ▷ 대도시 그린벨트설정 공포(1967. 2. 10, 서울, 부산 등) ▷ 충남 예당 전천후개발사업 15년만에 준공(1967. 4. 28) ▷ 한강변 제1로 개통(1967. 9. 23, 제1한강교 → 영등포 입구) ▷ 한국수자원개발공사 발족(1967. 11. 23) ▷ 정선선 개통(1968년, 착공 : 1962. 5. 10) ▷ 경인고속도로 개통(1968. 12. 21 가좌I/C까지 23.4㎞, 전선 29.5㎞ 개통 : 69. 7. 21) ▷ 경수고속도로 개통(1968. 12. 21 신갈 I/C까지 31.3㎞, 착공 : 1968. 2. 1) ▷ 경전선 개통(1968. 2. 7) ▷ 한강변 2로 개통(1968. 6. 27) ▷ 경부고속도로 전 노선 확정(1968. 9. 12) ▷ 포항항 건설(68~73) ▷ 한국도로공사 발족(1969. 2. 15) ▷ 지하수개발공사 발족(1969. 2. 15) ▷ 3ㆍ1 고가도로 개통(1969. 3) ▷ 언양 - 울산 고속도로 착공(1969. 6. 20, 개통 : 1969. 12. 28) ▷ 전남 고흥 간척사업 완공(1969. 7. 15) ▷ 서울 신도시건설 착수(1969. 7. 29, 한강이남 여의도) ▷ 중앙, 태백, 영동선 등 산업선 전철화 기공(1969. 9. 12, 청량리~북평 320.8㎞ 준공 : 1975. 12) ▷ 호남 야산개발단지 준공(1969. 10. 6) ▷ 천안~ 대전 고속도로 개통(1969. 12. 10) ▷ 제3한강대교 개통(1969. 12. 26, 현 한남대교) ▷ 대구~부산 고속도로 개통(1969. 12. 29, 착공 : 1968. 9. 11) ▷ 문경지선 개통(1969. 6. 10, 문경~진남) ▷ 호남고속도로 착공(1970. 4. 15, 개통 : 1973. 11. 14) ▷ 서울대교 개통(1970. 5. 16, 착공 : 1968. 2, 현 마포대교) ▷ 경부고속도로 준공식(1970.7.7, 서울~부산 428㎞, 기공 : 1968.2.1) ▷ 남산 1호 터널 개통(1970. 8. 15, 착공 : 1969년) ▷ 수도권 지하철 전철사업 발표(1970. 10. 22) ▷ 남산 2호 터널 개통(1970. 12. 4, 착공 : 1969년) ▷ 4대강(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유역 종합개발 계획(1970. 12. 17) ▷ 강변4로 개통(1970. 12. 24) ▷ 제주도 일주도로 준공(1971. 1. 31) ▷ 영동고속도로 착공(1971. 3. 13, 개통 : 1975. 10. 13) ▷ 남해고속도로 착공(1972. 1. 10, 개통 : 1973. 11. 14) ▷ 거제대교 건설(1971. 4. 8) ▷ 서울 지하철 1호선 기공(1971. 4. 12, 개통 : 1974. 8. 15) ▷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1971. 9. 7) ▷ 통일로(서울~문산) 개통(1971. 12. 18) ▷ 전국을 10대 관광권으로 하는 관광개발 5개년 계획 확정(1972. 1. 20) ▷ 수도권 상수도 취수구 팔당으로 이전 결정(1972. 5. 26) ▷ 전국 702개 도서를 72년부터 76년까지 개발키로 확정(1972.6.26) ▷ 부산, 인천, 묵호, 군산 등 4개항을 집중 개발하겠다고 언명(1972. 11. 24) ▷ 지리산, 설악산, 낙동강 하류 철새보호지역으로 지정(1972. 12. 11) ▷ 제주도 일원에 그린벨트 설정(1973. 3. 8) ▷ 중앙선전철 개통(1973. 6. 20, 청량리~제천) ▷ 남해대교 개통(1973. 6. 22) ▷ 태백선 개통(1973. 10, 제천~태백) ▷ 동해고속도로 착공(1974. 3. 26, 개통 : 1975. 10. 14) ▷ 영동선 전철 개통(1975. 12. 5) ▷ 영동ㆍ동해안 종합개발계획 확정(1976. 3. 24) ▷ 천호대로ㆍ천호대교 개통(1976. 7. 5) ▷ 잠수교 개통(1976. 7. 15) ▷ 구마고속도로 준공(1977. 12. 17, 기공 : 1976. 6. 24) ▷ 성산대교 기공(1977, 준공 : 1980. 6. 30) ▷ 호남선 복선 준공(1978. 3. 30, 대전~이리) ▷ 남해지선 신설 및 남해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 착공(1978. 5. 22, 개통 : 1981. 9) ▷ 낙동강유역 종합개발사업 기공(1978. 7. 2) ▷ 지하철 2호선 강북구간 착공(1979. 3. 17) ▷ 한국토지개발공사 발족(1979. 3. 27) ▷ 성수대교 개통(1979. 10. 16) |
3. 새마을운동과 농촌근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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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어촌개발공사 창립(1967. 12. 1) ▷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 확정(1969. 2. 22) ▷ 농어촌근대화촉진법 승인(1969. 11. 1) ▷ 새마을가꾸기운동 제창(1970. 4. 22) ▷ 권농일 기념행사 참석하여 “자조정신” 강조(1970. 6. 10) ▷ 전국 읍면장에게 새마을가꾸기 교육 실시(1970. 10. 5~8) ▷ 수원 벼베기 행사에 참석하여 “농민의 자조정신과 자발적 노력은 농촌부흥과 근대화의 근본요소”라고 언명, 전남 광주에서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촉진대회(1970. 11. 11) ▷ 금강, 평택지구 다목적 농업개발사업 기공(1971. 3. 23) ▷ 내 집 앞 쓸기운동 제창, 청와대 직원들과 거리 청소(1971. 3. 24) ▷ 제3회 어민의 날 치사에서 자조, 자립정신 강조(1971. 4. 1) ▷ 충북 음성 지원유세에서 “나의 소망은 농촌의 가난을 없애는 일” 이라고 말함(1971. 5. 18) ▷ 월간경제동향보고에서 경남 거창군 관내 일원 우수새마을 보고 ▷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근면과 검소, 농어민의 소득증대와 증산에 도정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고 강조(1971. 7. 30) ▷ 내무부에 새마을 전담 부서(지역개발담당관, 도시개발관, 농촌개발관, 주택개량관) 신설(1971. 8. 19)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에서 “성실한 지도자, 협동정신, 농민도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1971. 9. 7) ▷ 경북 영일군 기계면 문성동의 새마을가꾸기 모범부락과 포항제철 시찰(1971. 9. 17) ▷ 새마을정신을 「근면, 자조, 협동」으로 규정(1971. 9. 29) ▷ 1972년 새마을가꾸기 대상 16,600개 마을 선정 완료(1971.10.30) ▷ 농협중앙회에 독농가연수원 설치(1972.1.14, 새마을지도자교육 실시) ▷ 새마을지도자교육 기본방침 대통령 재가(1972. 1. 21, 교육장소 : 1972년도는 경기도 고양군 소재 농협대학에서 1973년 이후는 수원시 소재 농민회관, 교육기간 : 2주간, 교과편성 : 새마 을 정신 30% 전문과목(성공사례, 실기) 70%) ▷ 전북도 순시에서 “자조정신이 없는 농민은 도울 수 없으며 농어촌의 투자는 해마다 늘려 갈 것이다”라고 강조(1972. 2. 3) ▷ 경북도 순시에서 “농촌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자조정신 함양과 협동봉사하는 정열을 불태워야 한다”라고 강조(1972.2.7) ▷ 독농가연수원 순시(1972. 2. 24) ▷ 전국 부락세 조사(1972. 3. 1~5. 15) ▷ 대통령령 제6104호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규정 제정(1972. 3. 7) ▷ 지방장관회의 유시에서 “금년도의 최 중점사업은 새마을운동이며 새마을정신을 범국민화하라”고 지시(1972. 3. 7) ▷ 서울시 방배동의 새마을 현장 시찰하고 전국의 임야에 유실수를 심어 식량화 방안 강구하라고 관계관에 지시(1972. 3. 24) ▷ 서울 동대문구 중화동민들이 새마을운동으로 도로확장사업을 하고 있는 현장 방문 격려(1972. 3. 30) ▷ 경기 가평군 가평읍 개곡리 새마을 시찰(1972. 4. 3) ▷ 진해시 풍호동 새마을사업장 시찰(1972. 4. 7) ▷ 경상남도의 새마을사업 현장 두루 시찰(1972. 4. 8) ▷ 청와대 국무회의 주재하고 새마을운동의 추진방법 논의(1972. 4. 11) ▷ 정부여당연석회의에서 “지금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마을운동의 기풍을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 운동은 어느 정권적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민족번영의 추진운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1972. 4. 14) ▷ 경인화력발전소 준공식에 참석하여 치사를 통해 “농어촌 구석구석 까지 송ㆍ배전시설을 갖추어 전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고 밝힘(1972. 4. 17) ▷ 새마을노래 작사 작곡(1972. 4. 21) ▷ 새마을운동 촉진대회에서 “자신과 의욕이 없는 민족은 비록 아무리 좋 은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이것을 보충할 줄 모르고 이용하지 못한다”라고 강조(1972. 5. 8) ▷ 광주 새마을소득증대 촉진대회 치사에서 “새마을운동은 한국근대화의 행동철학이므로 문화인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한다”라고 강조(1972. 5. 18) ▷ 국도 변 소 도읍 가꾸기 운동 전개(1972. 5. 20) ▷ 제7대 대통령 취임 1주년, 지난 1년간 230회 출장으로 전국의 새마을현장을 시찰(1972. 7. 1) ▷ 전국시장회의 시 도시공한지 전개, 국도 변 도읍 가꾸기, 도시새마을운동 지침 시달(1972. 7. 22) ▷ 상공부에 농가공산품 개발위원회 설치(1972. 7. 31) ▷ 8.3 재정조치를 계기로 기업인도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1972. 8. 12) ▷ 서울지구 수해복구 작업을 시찰하고 수해복구에 새마을정신을 발휘 하도록 하라고 당부(1972. 8. 21) ▷ 충남 연기 벼 베기 대회 치사에서 “스스로 돕는 자는 정부도 돕고 남도 돕고 이웃도 돕고 하늘도 돕는다”라고 강조(1972. 9. 29) ▷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운동을 농한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하라”고 지시(1972. 10. 13) ▷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하여 “새마을운동을 국가시책의 최우선 과업으로 추진” 천명(1972. 10. 17) ▷ 충남 연기 벼베기대회에서 “수해를 이겨 낸 불굴의 정신으로 새마을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당부(1972. 10. 29) ▷ 국무회의에서 “전 국토를 연중 작업장화 하라”고 지시(1972. 11. 3) ▷ 모범 새마을에 농어촌의 소규모 공장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1972. 11. 15) ▷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운동으로 국력을 배양해 가자고 당부(1972. 12. 8) ▷ 농어촌지붕개량촉진법 개정(1972. 12. 26, 지붕개량업무를 농수산부에서 내무부로 이관) ▷ 연두기자회견 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추진” 강조(1973. 1. 12) ▷ 새마을 총람 발간(1973. 1. 15) ▷ 내무부 새마을 직제 개정(1973. 1. 16, 지역개발담당관을 새마을담당관으로 개칭, 새마을계획분석관 신설, 도시농촌주택개량관을 폐지하고 지방국에 새마을지도과ㆍ도시지도과ㆍ주택지도과 신설) ▷ 상훈법에 새마을훈장을 추가(1973. 1. 25) ▷ 시도, 시군구에 새마을 부서 신설(1973. 2. 1) ▷ 전라북도 순시에서 “새마을사업은 겉치레보다 소득증대에 힘써야 한다”라고 강조(1973. 2. 7) ▷ 독농가연수원, 수원농민회관으로 이전(1973. 4. 8)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새마을 유공자에게 훈장 수여(1973. 5. 7) ▷ 경기 화성군의 대우실업 새마을공장 시찰(1973. 5. 22) ▷ 독농가연수원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명칭 변경(1973. 5. 31) ▷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3. 9. 13) ▷ 공장새마을운동에 관한 종합추진방안 협의(1973. 9. 21) ▷ 전남 광주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3. 11. 22) ▷ 공장새마을운동중앙추진위원회 운영요강 작성(1973. 11. 30) ▷ 새마을지도자 육성지침 시달(1974. 1. 10) ▷ 충청북도 순시에서 “모든 사업은 사전에 경제성과 기술성의 문제를 치밀하게 검토하되 그 정신적 기조는 새마을운동에 두라”고 지시(1974. 2. 8) ▷ 공장새마을운동중앙추진회 및 실무위원회 구성(1974. 2. 20) ▷ 공장새마을운동 시범업체 1차 200개 공장 지정(1974. 3. 2) ▷ 상공부 새마을연수원 개원, 전국 새마을증산대회 수상자 39명을 접견하고 소득증대에 이바지해 달라고 당부(1974. 3. 18) ▷ 데구, 울산, 목포 도시새마을 평가보고회 최초 개최(1974. 4. 30) ▷ 도시녹화운동 전개(1974. 5. 2) ▷ 새마을운동론을 공무원 시험과목으로 설정(1974. 5. 4) ▷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사업은 도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라고 강조(1974. 5. 7) ▷ 아산 남양방조제 준공(1974. 5. 22, 착공 : 1971. 3) ▷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사업은 환경을 꾸미기보다 생산에 역점을 두라고 지시(1974. 6. 7) ▷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4. 7. 10, 장ㆍ차관도 새마을교육 받도록 지시) ▷ 장ㆍ차관 새마을교육(1974. 7. 22) ▷ 철도변가꾸기운동 전개(1974. 9. 8) ▷ 전국직장새마을지도자협의회 신설(1974. 11. 14) ▷ 청와대에서 새마을유공자 67명에게 직접 서훈(1974. 12. 17) ▷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4. 12. 18) ▷ 전국 138개 군에 새마을담당 부군수제 신설(1975. 1. 1) ▷ 내무부 새마을직제 개정(1975. 1. 1, 새마을계획분석관을 새마을기획과로 개칭하고 주택지도과를 폐지 새마을교육과를 신설) ▷ 제주도 축산개발연구소, 감귤냉동공장, 남제주군 남북면 신례리 새마을사업현장 시찰(1975. 1. 5) ▷ 농촌지역 상수도시설 5개년 계획 마련(1975. 1. 21, 절대농지 논의 80%까지 확대키로 결정) ▷ 대단위농업개발사업계획 발표(1975. 2. 1, 경주, 삽교천, 계화도 등) ▷ 시도단위 민간단체 새마을운동협의회 구성(1975. 3. 21~6. 30) ▷ 나의 조국 작사 작곡(1975. 5. 10) ▷ 새마을모자 제정(1975. 5. 14) ▷ 상공부 공장새마을운동 제2연수원 개원(1975. 7. 7, 수출산업공단)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 참석, 새마을운동의 확대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 새마을지도자에게 훈장 수여(1975. 7. 12) ▷ 국토가꾸기 기동순찰반 발대식(1975. 8. 24) ▷ 새마을 일제 총열 실시(1975. 11. 5~11. 20) ▷ 제1회 새마을운동 연구발표회(1975. 11. 27~28) ▷ 경북 대구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5. 12. 10) ▷ 직장단체 새마을운동 비교평가회(1975. 12. 26) ▷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근로자 처우개선으로 생산성 향상, 물자절약, 수출상품의 품질향상, 공장새마을운동을 활발히 전개(1976.1.28) ▷ 도시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3대 질서확립운동 전개(1976. 2. 16) ▷ 새마을운동 특별기념우표 발행(1976. 4. 15, 총 5종 1,000만개) ▷ 수원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6. 5. 11) ▷ 우수마을 특별지원사업 충열 실시(1976. 5. 22~6. 5) ▷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저소득층 의료혜택, 수출업체 경쟁력 강화, 농어촌의 구조개선방안 등을 반영하라고 지시(1976. 6. 15) ▷ 새마을금고 육성지침 시달(1976. 6. 18) ▷ 공장새마을운동 추진요강 제정(1976. 7. 2) ▷ 수원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6. 7. 6, 성공사례청취)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 참석, 주곡의 자급자족, 농수축산물의 증산운동 지시, 새마을지도자들과 밤의 가공처리, 한발대책, 농협의 유통구조개선 등에 대한 의견 교환(1976. 7. 12) ▷ 정부 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근로자들 야간중학에 다닐 수 있도록 조치, 각 기업체의 후생시설 확충, 야간학급 및 산업체 부설학급에는 정부지원 등을 지시(1976. 7. 23)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새마을운동이 국민의 의식개혁뿐만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1976. 8. 25) ▷ 영산강유역농업개발 제1단계사업 준공식에 참여하여 “영농근대화로 식량증산의 가속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강조(1976. 10. 14) ▷ 시도별 공장새마을운동 비교평가회 개최(1976. 11. 3~5) ▷ 민간단체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 창립총회(1976. 11. 10) ▷ 충남 대전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6. 12. 10) ▷ 제주도 새마을부락 시찰(1977. 1. 1) ▷ 농수산부와 건설부 순시에서 농촌주택을 문화주택으로 전환, 어선의 대형화 및 동력화 추진을 지시(1977. 1. 21) ▷ 상공부 순시에서 모든 기업의 공장새마을운동 참여와 에너지 10% 절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지시(1977. 1. 22) ▷ 민간단체 새마을운동전진대회(1977. 2. 25) ▷ 근로자의 날을 맞이하여 노총간부들을 접견하고 공장새마을운동은 노동조합에서 적극 앞장 서 달라고 당부(1977. 3. 10) ▷ 우수새마을지도자 일본 시찰(1977. 3. 14~21) ▷ 제1회 공장새마을전진대회 개최(1977. 3. 20) ▷ 공장새마을추진본부 설치(1977. 3. 21) ▷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 대방여자중학교의 근로자 야간학교 수업상황 시찰(1977. 4. 19)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을 중소기업에 확대시키는 한편 신바람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라고 강조(1977. 5. 10) ▷ 새마을기술봉사단 활동사례발표회(1977. 8. 26) ▷ 정부종합청사 5층에 새마을상황실 개실(1977. 9. 1) ▷ 도시새마을운동 비교평가회 개최 및 농촌불량주택 조사(1977. 9. 20) ▷ 제4차 중소기업 국제회의 서울대회 치사에서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인 상부상조의 정신을 되살려 오늘의 기업윤리 및 근로윤리로 정립시켜 가려는것이 공장새마을운동이다”라고 강조(1977.10.11) ▷ 전국직장단체 대항 새마을합창경연대회 개최(1977. 10. 12) ▷ 전북 전주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7. 12. 9) ▷ 대구시에서 중소기업 공장새마을운동 촉진대회 개최(1977. 12. 13) ▷ 농촌주택 55만동 개량촉진대회 개최(1978. 1. 6) ▷ 영산강유역농업개발 2단계사업 착공(1978. 1. 20, 준공 : 1983년) ▷ 범국민 3대질서운동촉진대회 개최(1978. 1. 23) ▷ 상공부 순시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제경쟁력을 키우라고 지시(1978. 1. 26) ▷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실에 농촌주택개량과 신설(1978. 3. 1) ▷ 농촌주택개량사업촉진대회 개최(1978. 3. 17) ▷ 공장새마을 주안연수원 개원(1978. 4. 25, 여성지도자 교육) ▷ 경기도 새마을운동 농촌주택 개량사업현장 시찰(1978. 5. 2) ▷ 1978 주택개량마을 입주식 거행(1978. 7. 4) ▷ 조선일보 기자와의 좌담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민정신과 문화계발을 촉진해 간다는 신념을 밝힘(1978. 7. 6) ▷ 논산지구 농업개발사업 완료(1978. 7. 21) ▷ 3대질서운동 비교평가회 개최(1978. 9. 26) ▷ 대구시에서 전국중소기업 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8. 10. 13) ▷ 제1회 전국공장새마을운동 분임활동 경진대회 개최(1978. 11. 3) ▷ 공장새마을 부산연수원 개원(1978. 11. 6) ▷ 제1회 공장새마을운동 추진 종합평가대회(1978. 11. 20) ▷ 전남 광주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8. 12. 6) ▷ 새마을운동 연구논문집에 「새마을운동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도장」 이라는 책자 휘호 씀(1978. 12. 8) ▷ 범국민 3대질서운동 총열 실시(1978. 12. 17~23) ▷ 농촌주택개량 총열(1979. 1. 10~14) ▷ 도시새마을운동 10 중요구심사업 설정(1979. 2. 21) ▷ 상공의 날 및 공장새마을전진대회 개최(1989. 3. 20) ▷ 월간경제동향보고회에서 서민생활의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새마을지도자 표창(1979. 4. 13) ▷ 자영마을 신설 운용(1979. 4. 18) ▷ 직장여성 소비절약결의대회 개최(1979. 7. 4) ▷ 공장새마을운동 총열(1979. 7. 1~25) ▷ 전국 137개군에 새마을과 설치(1979. 7. 16) ▷ 공장새마을운동 촉진결의대회 개최(1979. 8. 31) ▷ 새마을금고 중앙교육원 신축기공(1979. 9. 20) ▷ 삽교천 방조제 준공(1979. 10. 26, 착공 : 1977년) ▷ 전국직장새마을운동 비교평가대회 개최(1979. 11. 7) ▷ 미호천 1단계 사업 준공(1979. 11. 12) ▷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9. 12. 28, 시도별 개최) ▷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설치법 공포(1979. 12. 28, 법률 제3171호) |
4. 치산녹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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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법 제정(1961. 12. 27) ▷ 국토녹화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공포(1963. 2. 8) ▷ 치산 녹화 7개년 계획(1965~1971) 성안(1965. 4. 1) ▷ 산림청 개청(1967. 1. 9) ▷ 수계별 산림복구종합계획(1967~1976) 확정 ▷ 치산녹화사업 10개년 계획 확정 발표(1973. 3. 10) ▷ 영일지구 사방사업(1973~1977) ▷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일대를 자연학습도장으로 개발 결정(1977. 1. 18) ▷ 자연보호에 대한 전 국민운동의 전개를 위해 민간단체를 조직하여 운영하라고 관계부서에 지시(1977. 10. 5) ▷ 육림의 날 선포(1977. 10. 7) ▷ 자연보호협의회 창립총회(1977. 10. 28) ▷ 자연보호 범국민궐기대회에 참석하여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강조(1977. 11. 5) ▷ 서울 미아1동 자연보호회와 어머니회 회원들과 우이동 등산로에서 자연보호운동 전개(1978. 9. 23) ▷ 자연보호헌장 선포(1978. 10. 5) ▷ 청와대에서 자연보호 회의 주재(1978. 10. 13) ▷ 북한산 계곡에서 비서실 직원들과 자연보호운동 실시(1979. 10. 8) ▷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1979년) 확정 |
5. 자주국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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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작전사령부(K-55) 창설(1961. 7. 1) ▷ 공군작전사 발족(1961. 9. 15) ▷ 해양경찰대 발족(1962. 5. 1) ▷ 공군 항공창 준공(1962. 5. 29) ▷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 환송식(1964.8.24) ▷ 국무회의, 비전투요원 2,000명 파월 의결(1965. 1. 8) ▷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결단(1965. 2. 5, 파월 : 1965.2.19) ▷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 창설(1965. 3. 19) ▷ 초음속 F-5 제트 전투기 도입(1965. 4. 3) ▷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1965. 9. 25, 서울 필동) ▷ 맹호부대/청룡부대/십자성부대 파월(1965. 10) ▷ 육군 1개 사단과 해병 1개 여단 창설 발표하고 국군 62만명으로 증강하겠다고 언명(1966. 5. 19) ▷ 한국군 장비현대화에 대하여 공동성명(1966. 6. 22) ▷ 백마부대 파월(1966. 9. 16) ▷ 해병 제5여단 창단(1966. 11. 23, 포항) ▷ 동해안 2개 지역 공군기지 건설(1967. 2. 26) ▷ 최대의 공군 광주기지 준공(1967. 5. 25) ▷ 치안국에 대간첩 사령부 설치(1967. 6. 21) ▷ 국방부 종합청사 신축(1967. 6. 23) ▷ 전투경찰대 발족(1967. 8. 26) ▷ 대간첩작전본부 발족(1968. 1. 22) ▷ 육군 기동타격대 창설(1968. 1. 27) ▷ 향토예비군 창설식(1968. 4. 1, 대전) ▷ 공군레이다방공망 준공(1968. 6. 13) ▷ 방위산업정비 전투태세완비 3개년 계획 확정(1968. 7. 5) ▷ 유엔군으로부터 작전권 대폭 이양 받았다고 발표(1968. 7. 8) ▷ 제3훈련비행단 창설(1968. 7. 23) ▷ 7개 시의 고교,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 결정(1969. 1. 9) ▷ 제3사관학교 개교(1969. 3. 18) ▷ 공군 F-4 팬텀기전투비행부대 창설(1969. 9. 23) ▷ 청소년에 1일 승공교육 실시키로 결정(1970. 1. 15) ▷ 국방과학연구소 설립(1970. 8. 6) ▷ 한국군 현대화와 주한 미군 감축에 합의(1971. 2. 6) ▷ 155마일 전선방위 국군이 전담키로 했다고 발표(1971. 2. 7) ▷ 병기공장(M-16 소총) 건설에 관한 한미간 계약 체결(1971. 3. 31, 착공 : 1971. 4, 준공 : 1972) ▷ 한미합동 제1군단 창설(1971. 7. 3) ▷ 박격포 고사포 등 중화기의 국내생산계획 추진 발표(1971. 11. 14) ▷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 실시(1971. 12. 10) ▷ 국산병기 시제품(카빈소총, 기관총, 60밀리 박격포, 3.5인치 로켓발사기) 전시(1971. 12. 16) ▷ 국방과학연구소 60ㆍ81밀리 박격포 개발 착수(1972. 4. 30) ▷ 경인지구 예비군 고사포부대 배치 완료(1972. 6. 30) ▷ 4.2인치 박격포 및 105밀리 곡사포 개발 착수(1972. 8. 1) ▷ 국방과학연구소 지뢰탐지기 개발 착수(1973. 7. 10) ▷ M16 소총 양산 체제로 전환(1974. 2. 1) ▷ 국방과학연구소 106밀리 대전차포탄 개발(1974. 2. 10) ▷ M48전차를 M48A5 전차로 개조사업 착수(1974. 6. 20) ▷ 국방과학연구소 105밀리 곡사포 연막탄 개발(1975. 4. 2) ▷ 전투상비군부대 창설(1975. 6. 30) ▷ 국방과학연구소 155밀리 곡사포탄 개발(1975. 7. 2) ▷ 방위세법 공포(1975. 7. 16) ▷ 민방위기본법 제정(1975. 7. 25, 민방위대 발대식 : 1975. 9. 22) ▷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 성공(1975. 11. 7) ▷ 국방과학연구소 전신?전화단말기 KAN/TCC-29 개발 착수(1976. 1. 15) ▷ 국군현대화 5개년 계획 77년에 완료된다고 발표(1976. 1. 21) ▷ 한국군수산업진흥회 발족(1976. 3. 5, 현 한국방위산업진흥회) ▷ M48A1 전차를 M48A5, M48A3 전차로 개조하는 사업 착수(1976. 5. 20, 생산 : 1978. 4. 6, 자유진영에서 9번째로 전차생산국) ▷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형 기관단총 개발 착수(1976. 10. 2) ▷ 대전 기계창 준공(1976. 12. 2) ▷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1977. 1. 28) ▷ 미군 철수에 대해 선 보완 후 철군 강조(1977. 5. 25) ▷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형 소총 XB-7형 개발 착수(1977. 6. 1) ▷ 첫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 개최(1977. 6. 17) ▷ 북한의 200해리 경제수역 및 해상 군사경계선 인정하지 않는다고 성명(1977. 8. 1) ▷ 국방과학연구소 8인치 곡사포 고폭탄 개발(1977. 8. 30) ▷ 군수산업 육성(1978. 1. 18, 헬기,대포,탄약,장갑차,함정,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산업과 특수전차개발에 착수) ▷ 국산장거리 지대지유도탄,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케트 시험 발사에 성공(1978. 9. 26, 세계 7번째) ▷ 한미연합사령부 발족(1978. 11. 7) ▷ 국방과학연구소 대형 함정용 전자장비(KDJ-25) 개발 착수(1979. 1. 30) |
6. 외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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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이케다 수상과 회담(1차 회담 : 1961. 11. 11, 한일 관계 전반에 대해 토의, 2차 회담 : 1961.11.12, 재산청구권 및 평화선문제 토의) ▷ 방미 케네디 대통령 공동성명 발표(1961.11.14, 케네디 대통령과 2차 회담 : 1961.11.15) ▷ 방미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1963. 11. 25,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참석) ▷ 국제의회연맹(IPU) 가입(1964. 8. 19) ▷ 서독 방문(1964.12.6~15,12 8 뤼브게 대통령, 12.9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 ▷ 서독과 차관협정 조인(1964.12.7,재정 1,350만달러 상업 2,625만달러) ▷ 이동원 외무장관, 시이나 일본 외상과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1965. 2. 20) ▷ 라만 말레이시아 수상 내한(1965. 4. 28) ▷ 방미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1965. 5. 17~19, 월남지원 등) ▷ 한일협정 정식 조인(1965. 6. 22, 동경, 국교정상화) ▷ 월남 쿠엔카오키 수상 내한(1965. 11. 8) ▷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1965. 12. 18, 서울) ▷ 험프리 미 부통령 내한(1966. 1. 1, 경제원조 및 월남지원문제 협의) ▷ 동남아순방(1966.2.7~18, 말레이시아, 태국, 자유중국) ▷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 추진(1966. 4. 22) ▷ 제1차 아시아 태평양지구 각료회의 개최(1966. 6. 14~16, 서울, 10개국) ▷ 한미행정협정조인, 재판관할권을 제한하고 광범위한 외교 특권 허용(1966. 7. 9) ▷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1966.10.24, 한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월남) ▷ 미국 존슨 대통령 내한(1966. 10. 31, 정상회담 : 1966. 11. 2) ▷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제12차 총회 개막(1966. 11. 3, 서울) ▷ 국제통신위성기구에 56번째로 가입(1967. 2. 24) ▷ 뤼브게 서독 대통령 내한(1967. 3. 2~3. 6) ▷ 티놈 태국 수상 내한(1967. 4. 2~4. 3) ▷ 홀트 호주 수상 내한(1967. 4. 6) ▷ 한, 미, 일, 자유중국 4개국 수뇌회담(1967. 7. 2, 서울) ▷ 박 대통령 호주 캔버라에서 미 존슨 대통령과 회담(1967. 12. 22) ▷ 미 대통령 특사 벤스 내한(1968. 2. 11, 회담 : 1968. 2. 12) ▷ 미 존슨대통령과 정상회담(1968. 4. 17~4. 18, 호놀롤루, 한미안보문제) ▷ 셀라시 이디오피아 황제 내한(1968. 5. 18~5. 21) ▷ 대양주 순방 외교(1968. 9. 15~9. 25) ▷ 홀리오크 뉴질랜드 수상과 정상회담(1968. 10. 23) ▷ 말레이시아 국왕 내한(1969. 4. 29~5. 3) ▷ 티우 월남 대통령 내한(1969. 5. 27~30) ▷ 닉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1차 :1969.8.21, 2차 : 1969.8.22) ▷ 니제르 하마니 대통령과 정상회담(1969. 10. 30) ▷ 비적성 공산권 국가와의 교역을 허용하도록 무역거래법 개정 결정(1970. 5. 28) ▷ 중동분쟁에 대한 입장으로 유엔헌장정신과 유엔관계 제의결에 입각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천명(1970. 8. 3) ▷ 에그뉴 미국 부통령 내한(1970. 8. 23, 회담 : 1970. 8. 24) ▷ 한일대륙붕 공동개발에 완전 합의(1973. 7. 4) ▷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한미간 협조문제 논의(1973. 11. 16) ▷ 이스라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1973. 12. 15) ▷ 포드 대통령 내한(1974. 11. 22~11. 23, 한미방위 확인) ▷ 가봉 봉고 대통령 내한(1975. 7. 5~7. 8) ▷ 제3세계에 대한 외교활동 강화(1976. 1. 23) ▷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 결정(1976. 2. 6) ▷ 멀둔 뉴질랜드 수상 내한(1976. 4. 18~4. 22) ▷ 아시아의원연맹 총회 개최(1977. 11. 8, 서울) ▷ 상고르 세네갈 대통령 내한(1979. 4. 22~4. 25) ▷ 미국 카터 대통령 내한(1979. 6. 29~7. 1, 철군문제협의) ▷ 한, 미, 북한 회의 제의(1979. 7. 1) ▷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내한(1979. 10. 16) ▷ 수교 국가 117개국으로 증가(1979. 11. 30 외무부 발표) |
7.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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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교부 외국으로 문화재관리국 설치(1961. 10. 2) ▷ 문화재보호법 제정 공포(1962. 1. 10) ▷ 남대문 중수 공사 준공(1963. 5. 14) ▷ 동대문 개축 준공(1963. 9. 5) ▷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 수립(1963. 9. 10) ▷ 팔의사 창의탑 준공(1963. 11. 5) ▷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신축 및 보수(1963~1977) ▷ 경주 석굴암 복원공사 준공(1964.7.1, 보고서 작성 : 1961.7.17) ▷ 무형문화재, 기능 및 예능보유자 인정 전승사업 시작(1964년) ▷ 석가탑 사리함에서 세계 최고 목판 인쇄 다라니경문 발견(1966. 10. 14) ▷ 국립중앙박물관 착공(1966. 11. 16, 준공 : 1972. 8. 25) ▷ 밀양 영남루 보수(1966. 11. 30) ▷ 서울 문묘 보수(1966. 11. 30) ▷ 부여 정림사지 정비(1966. 12. 6) ▷ 법주사 대웅전 보수(1966. 12. 18) ▷ 종합민족문화센터 기공(1967. 4. 25) ▷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1967. 4. 26) ▷ 국립묘지정화사업 현충탑 건립(1967. 10. 1) ▷ 세종로에 이충무공 동상 제막식(1968. 4. 27) ▷ 소수서원 해체 복원(1968. 12. 2) ▷ 광화문 복원공사 준공식(1968. 12. 11) ▷ 현충사 성역화 중건 준공(1969.4.28, 착공 : 1966년,조경공사 : 1972~1974년) ▷ 범어사 대웅전 보수(1969. 8. 19) ▷ 월정사 대웅전 준공식(1969. 10. 14) ▷ 유관순 유적지 착공(1969. 10, 준공 : 1973. 3) ▷ 금산사 대적광릉 해체 복원(1970. 2. 29) ▷ 행주산성 보수 준공(1970.11.10, 착공 : 1969년, 행주대첩비 건립 :1963년) ▷ 세종대왕기념관 기공(1970.11.19, 준공 : 1973.10) ▷ 도산서원 보수 준공(1970. 12. 8, 착공 : 1969. 10. 6) ▷ 화엄사 대웅전 보수(1970. 12. 25) ▷ 남원 광한루 보수(1970. 12. 31) ▷ 진주성 보수 준공(1970년, 착공 : 1969년) ▷ 남한산성 보수정비사업 착공(1970년) ▷ 금산 칠백의총 정화사업 준공(1차 :1971.4.13, 2차 : 1976.9.20) ▷ 무령왕릉 발굴(1971. 7. 8) ▷ 속리산 법주사 사천왕문 복원(1971. 8. 30) ▷ 국립부여박물관 부소산 신관 개관(1971. 9. 1, 기공 : 1965. 9. 14)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1972. 3. 10) ▷ 육산리 고분군 정화(1972. 11. 4) ▷ 경주 155호 고분(천마총) 발굴 착수(1973. 4. 6) ▷ 불국사 복원 준공(1973. 7. 5, 착공 : 1970. 11. 3)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개원식(1973. 10. 17, 현판식 : 1974. 10. 11) ▷ 문예중흥 5개년 계획 발표(1973. 10. 19) ▷ 해미 읍성 복원정비(1973~1977) ▷ 낙성대 준공(1974. 6. 10, 착공 : 1973. 11) ▷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1974. 12. 10) ▷ 문경 관문 해체 복원(1974년, 제1관문 성벽 보수 준공 : 1975년, 제2관문 문루복원 및 성곽보수 준공 : 1975년, 제4관문 홍예성곽보 수 준공:1976년,제3관문 문루복원 및 제1관문 단청 준공:1977년) ▷ 황남대총(98호 고분) 발굴(1974~1975년) ▷ 서울 성곽 복원?보수계획(1975~1978년) ▷ 중앙민속박물관 개관(1975. 4. 11) ▷ 수원 성곽 복원 착공(1975. 5. 30) ▷ 경주박물관 개관(1975. 7. 2) ▷ 광희문 복원공사 준공(1975년) ▷ 경주 용담정 천도교 유적지 정비(1975년) ▷ 옥산서원 보수작업(1976. 1. 20) ▷ 한국 미술 5천년전(1976. 2. 23~7. 25, 일본 도쿄, 교토, 나라) ▷ 밀양 표충사 정화사업(1976. 4. 10) ▷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준공(1976. 5. 7, 착공 : 1975. 10) ▷ 유적지 및 전적지개발 위한 특별법 제정(1976. 6. 24) ▷ 한산도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1976.10.20, 착공 : 1975.1) ▷ 신안 해저문화재 발굴(1976년부터) ▷ 예산 추사고택 보수정비 준공(1977. 6. 27, 기공 : 1976. 7. 4) ▷ 경주 통일전 준공(1977. 7. 30, 착공 : 1976. 4. 22) ▷ 여주 영릉 보수정비 사업 준공(1977. 10. 9) ▷ 부석사 정화사업 기공(1977. 10, 준공 : 1979년) ▷ 강화전적지 정화사업 준공(1977. 10. 28, 착공 : 1976. 8) ▷ 고창 읍성 복원정비(1977. 12. 30, 착공 : 1975년) ▷ 내장사 정화사업 준공(1977년, 착공 : 1974년) ▷ 안동 하회마을 영모각 보수 준공(1977년, 유성룡장군 유물보관) ▷ 홍지문 준공(1977년) ▷ 월정사 복원 공사 착공(1978. 5. 3) ▷ 제주 황파두리 항몽유적지 정비 준공(1978. 6. 2) ▷ 금오산 채미정 정화사업 착공(1978. 6. 25)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1978. 6. 30) ▷ 해남 표충사 보수사업 착공(1978. 8. 15) ▷ 김천 직지사 정화사업 준공(1978. 10. 30, 착공 : 1977년) ▷ 곽재우장군 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착공(1978. 11. 22) ▷ 충주 충렬사 정화사업 준공(1978. 11. 23) ▷ 국립광주박물관 개관(1978. 11. 28, 착공 : 1977년) ▷ 광산 고경명장군 포충사 보수사업 준공(1978년) ▷ 부산 충렬사 보수 준공(1978년, 착공 : 1976년) ▷ 예산 윤봉길의사 충의사 보수 정화사업 준공(1978년) ▷ 경주 보문관광단지 개장(1979. 4. 6) ▷ 한국 미술 5천년전 개막(1979. 5. 1,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보스턴, 클리블랜드, 뉴욕, 캔자스시티, 위싱턴, 시애틀) ▷ 남원 만인의총 정화사업 준공(1979. 10. 5) ▷ 광주 충장사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 준공(1979년,기공 : 1974.4.4) ▷ 충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 준공(1979년) ▷ 춘천 유인석 의병장 유적 정비보수 준공(1979년) |
8. 남북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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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토통일원 개원(1969. 3. 1) ▷ 8. 15 평화통일정책구상 선언(1970. 8. 15) ▷ 한국적십자 남북가족찾기회담 제안(1971. 8. 12) ▷ 남북 첫 전화 개통(1971. 9. 22) ▷ 남북적십자회담 첫 실무회의 개최(1972. 2. 21) ▷ 남북공동성명발표(1972. 7. 4) ▷ 남북적십자 첫 본 회담(1972. 7. 30, 평양) ▷ 남북적십자회담용 직통 전화 20회선 개통(1972. 8. 17) ▷ 남북적십자 2차 본 회담(1972. 9. 13, 서울) ▷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1차 회의(1972. 10. 12, 판문점) ▷ 남북적십자 3차 본 회담(1972. 10. 24, 평양) ▷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2차 회의(1972. 11. 2, 평양) ▷ 남북적십자 4차 본 회담(1972.11.22, 대한적십자 회담사무국 회의실) ▷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3차 회의(1972. 11. 30, 서울) ▷ 남북조절위원장 회의(1972. 12. 12) ▷ 서울-평양 직통전화 개통(1973년) ▷ 남북조절위원회 제2차 회의 개최(1973. 3. 14, 평양) ▷ 남북적십자 5차 본 회담(1973. 3. 21, 평양) ▷ 남북적십자 6차 본 회담(1973. 5. 8, 서울) ▷ 남북조절위원회 제3차 회의 개최(1973. 6. 12, 서울) ▷ 평화통일 외교정책 7개항 발표(1973. 6. 23) ▷ 남북적십자 7차 본 회담(1973. 7. 11, 평양) ▷ 연두회견에서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1974. 1. 18) ▷ 남북한 이산가족재결합 촉구(1974. 6. 15) ▷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발표(1974. 8. 15) ▷ 남북문화교류 및 공동학술연구 제의(1976. 4. 12) ▷ 북한에 식량 원조 제의 및 남북불가침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명(1977. 1. 12) ▷ 남북한 민간경제협력기구 구성 제의(1978. 6. 23) ▷ 남북한 당국 무조건 대화 제의(1979. 1. 19) |
9. 과학기술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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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력연구소 원자로에 첫 점화(1962. 3. 19) ▷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1962. 11. 18) ▷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 수립(1966. 2. 1)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발족(1966. 2. 4)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재단법인 설립(1966. 2. 10) ▷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와 기술교류협정 체결(1966. 6. 10)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1966. 10. 6, 준공 : 1969. 10. 23) ▷ 과학기술처 신설(1967. 4. 12, 개청 : 4. 21) ▷ 제1회 과학의 날(1968. 4. 21) ▷ KAIST 발족(1971. 2. 7) ▷ 대덕연구단지 착공(1973. 6. 23) ▷ 선박연구소 및 해양연구소 설립(1973. 10. 30) ▷ 한국표준연구원 설립(1975. 12. 24, 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 한국자원개발연구소 설립(1976. 5) ▷ 한국화학연구소 설립(1976. 9, 현 한국화학연구원) ▷ 한국핵연료개발공단 설립(1976. 12. 1) ▷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설립(1976. 12. 26, 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설립(1976. 12. 29, 현 한국전기연구원) ▷ 한국기계금속연구소 설립(1976. 12. 30, 현 한국기계연구원) ▷ 한국통신기술연구소 설립(1976. 12) ▷ 한국과학재단 발족(1977. 5. 18) ▷ 한국열관리시험연구소 설립(1977. 8, 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 해양개발연구소 설립(1978. 4) ▷ 고려인삼연구소 설립(1978. 5) ▷ 한국연초연구소 설립(1978. 5) ▷ 태양에너지연구소 발족(1978. 6. 5) ▷ 한국선박연구소 설립(1978. 11) |
10.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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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1961. 5. 19) ▷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공포(1961. 6. 6) ▷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취임(1961. 7. 3, 내각 수반 : 송요찬) ▷ 반공법 공포(1961. 7. 3) ▷ 박정희 의장 정권이양시기, 정부형태, 국회구성 등 중대성명 발표(1961. 8. 12) ▷ 박정희 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1962. 3. 24) ▷ 박정희 의장 내각 수반 겸임(1962. 6. 16) ▷ 국민투표법 공포(1962. 10. 12) ▷ 헌법개정안 국민투표 실시(12. 17)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1963. 1. 21) ▷ 민주공화당 창당(1963. 2. 26) ▷ 박정희 의장 4년간 군정 연장안 국민투표로 결정하겠다고 발표(1963. 3. 16) ▷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박정희 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1963. 5. 27, 지명수락 : 1963. 8. 31) ▷ 제5대 대통령 투표(1963. 10. 15, 총 4,692,644표를 얻어 당선) ▷ 최고회의 해체(1963. 12. 16) ▷ 제5대 대통령 취임 및 국회 개원(1963. 12. 17) ▷ 언론윤리위원회법 통과(1964. 8. 2, 공포 : 5일) ▷ 대일청구권자금 제1차년도 사용안 9천5백93만3천달러 국회 통과(1966. 3. 6) ▷ 제6대 대통령 선거 실시(1967. 5. 3, 취임식 : 1967. 7. 1) ▷ 지방행정제도 개편(1967. 7. 13) ▷ 3선 개헌안 및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임 국민투표 실시(1969. 10. 17, 찬성 : 755만 3,655명) ▷ 제7대 대통령 선거 실시(1971. 4. 27, 총 6,342,828표 얻어 당선) ▷ 제7대 대통령 취임(1971. 7. 1) ▷ 헌법개정안 공고(1972. 10. 27) ▷ 유신헌법안 국민투표 실시(1972. 11. 21) ▷ 제8대 대통령 취임 및 유신헌법 공포(1972. 12. 27) ▷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1975. 2. 12, 73.11% 찬성) ▷ 서정쇄신 추진(1975. 11. 20, 부조리척결) ▷ 임시 행정수도 건설 구상 피력(1977. 2. 10) ▷ 제9대 대통령 취임(1978. 12. 27) |
11. 사회ㆍ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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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국제방송국 개국(1961. 7. 1) ▷ 서울 텔레비젼 방송국(KBS-TV) 개국(1961. 12. 31) ▷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1962. 1. 1) ▷ 장충체육관 개관(1963. 2. 1) ▷ 민간방송 동아방송국 개국(1963. 4. 25) ▷ 가족계획사업 추진(1963. 9. 17) ▷ 동양방송(라디오 서울) 개국(1964. 5. 9) ▷ 5▷16 민족상 제정(1966. 3. 15) ▷ 인구센서스 실시(1966. 10. 1) ▷ 주민등록법 개정(1968. 5. 29, 시?도민증 없애고 주민등록증으로 갱신 :1968.11.21, 주민등록증 휴대 의무화 : 1969.4.22, 18세 이상 휴대 의무화 : 1970.2.2) ▷ 가정의례준칙 선포(1969.3.3, 새 가정의례준칙 시행 : 1973.6.1) ▷ 남산 어린이회관 기공(1969. 5. 5, 준공 : 1970. 7. 25) ▷ MBC 텔레비젼 방송 개국(1969. 8. 8) ▷ 사회정화운동 전개(1970. 1. 15, 호화주택, 분묘 등 규제) ▷ 우편번호제 실시(1970. 7. 1) ▷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1971. 9. 25) ▷ 여의도 5▷16광장 준공(1971. 9. 29) ▷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 개막(1972. 6. 16) ▷ 어린이대공원 개원(1973. 5. 5) ▷ 새로 제정한 첫 어버이 날(1973. 5. 8) ▷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1973. 10. 17, 착공 : 1967. 10. 25) ▷ 국민복지연금법 제정(1973. 12. 24) ▷ 한국근로복지공사 설립(1974. 8. 8) ▷ 정립회관 개관(1975. 10. 30, 장애인보호육성) ▷ 전국에서 첫 반상회 실시(1976. 5. 31) ▷ 직장의료보험제도 실시(1977. 7. 1) ▷ 잠실올림픽경기장 기공(1977. 11, 준공 : 1984. 9. 29) ▷ 세종문화회관 준공(1978. 4. 14, 기공 : 1974년) ▷ 남서울대공원 착공(1978. 10. 30, 준공 : 1984. 5) ▷ 잠실체육관 건립(1979. 4. 18) ▷ 한국종합전시장 개관(1979. 7) ▷ 국제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1979. 10. 12, 제60회 전국체전 치사에서) |
12.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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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사자격 국가고시 첫 실시(1961. 12. 22) ▷ 문맹자 퇴치운동 전개(1961. 12~1962. 4) ▷ 5ㆍ16 장학회 설립(1962. 7. 14, (재)정수장학회로 변경 : 1982. 1. 14) ▷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 수립 추진(1962년, 제2차 :1967~1971년) ▷ 사립학교법 공포(1963. 6. 26) ▷ 국사교육 통일방안 확정(1963. 8. 8) ▷ 도 단위 교육자치제 실시(1964. 1. 4) ▷ 4ㆍ19도서관 개관(1964. 9. 1) ▷ 6-6-4 학제를 66학년도부터 실시 발표(1965. 9. 15) ▷ 천체과학관 개관(1967. 4. 29) ▷ 박 대통령 서울대 신축 10개년 계획 지시(1967. 11. 6) ▷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 전폐 등 입시개혁 발표(1968. 7. 15) ▷ 대학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한다고 발표(1968. 10. 14) ▷ 국민교육헌장 선포(1968. 12. 5) ▷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 확정(1969. 1. 6) ▷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입학 첫 추첨 실시(1969. 2. 5) ▷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 발표(1969. 2. 10) ▷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키로 결정(1969. 11. 11) ▷ 전국 10개 도시 중학 무시험 진학 추첨 실시(1970. 2. 3) ▷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 마련(3. 22, 86년까지 단계적 실시, 의무교육 9년으로 연장, 교육세 신설) ▷ 국민윤리 교과 신설(1971. 2. 19) ▷ 종합교육센터 기공(1971. 4. 14) ▷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 발표(1971. 10. 15) ▷ 경찰대학 4년제로 승격(1972. 2. 11) ▷ 교육용 한자 1,781자 선정 발표(1972. 6. 7, 중학 888자, 고교 893자) ▷ 전국 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 계획 발표(1973. 7. 10) ▷ 체육고 신설 결정(1973. 9. 5) ▷ 서울, 인천, 대구, 부산, 광주 고교평준화 작업 1단계 완료(1974. 11. 20) ▷ 어린이 독서 헌장 선포식(1976. 5. 2) ▷ 국비 유학제도 신설(1976. 5. 20) ▷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 지시(1976. 7. 23) ▷ 정독도서관 개관(1977. 1. 4) ▷ 산업체 근로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특별학급 설치 기준령 의결(1977. 2. 15) ▷ 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교생에 교과서 무상 지급키로 확정(1977.12.2) | |
이력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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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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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3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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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3. 20 |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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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3. 23 |
만주군관학교 예과 수석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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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4. 20 |
일본 육사 본과 57기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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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12. 14 |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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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3. 20 |
육군대학 졸업 |
2. 군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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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12. 14 |
조선국방경비대 소위 임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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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4. 1 |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 제4소대장으로 38선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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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7. 21 |
제8연대 작전참모대리로 춘천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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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8. 14 |
제1연대 중대장으로 승진, 곧 조선경비사관학교 교관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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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9. 27 |
소위에서 대위로 진급, 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 대장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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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8. 1 |
소령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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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12. 28 |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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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5. 10 |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정보과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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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 30 |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직무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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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7. 14 |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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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9. 15 |
중령 진급, 육군본부 수송작전 지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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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25 |
제9사단장 참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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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4. 15 |
대령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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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5. 25 |
육군정보학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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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2. 10 |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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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2. 16 |
제2군단 포병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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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5. 9 |
제3군단 포병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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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11. 25 |
준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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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1. 17~6. 27 |
미국 육군포병학교 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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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7. 1 2 |
군단 포병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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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9. 18 |
육군포병학교장 겸 교육총본부 포병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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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7. 1 |
제5사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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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3. 30 |
6군단 부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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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5. 5 |
6군단장 직무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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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9. 1 |
제7사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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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3. 1 |
소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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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6. 17 |
1군 참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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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7. 1 |
6관구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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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1. 21 |
군수기지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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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 30 |
제1관구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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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9. 3 |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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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12. 15 |
2군 부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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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8. 10 |
중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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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11. 1 |
대장 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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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8. 30 |
전역 |
3. 군 이외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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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4. 1~1939. 3. 30 |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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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7. 3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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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3. 24 |
대통령 권한 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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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6. 16 |
내각수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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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2. 17 |
제5대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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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7. 1 |
제6대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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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7. 1 |
제7대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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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11. 27 |
제8대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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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12. 27 |
제9대 대통령 |
4. 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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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30 |
금성충무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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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2. 5 |
화랑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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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5. 8 |
충무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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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12. 25 |
은성충무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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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1. 15 |
은성을지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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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7. 5 |
금성을지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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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9. 4 |
충무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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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2. 17 |
무궁화대훈장 및 일등보국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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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12. 17 |
태극무공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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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11. 20 |
수교훈장광화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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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1. 3 |
건국훈장대한민국장 | | | | | |
첫댓글 정말 말로 다 할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하셨지요.....
이런 업적을 남길 분이 있니요 이 모든 것을 경험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