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
지난밤 잠자리가 어수선하다. 여러 번 소변으로 깨다 자다 하니 감질난다. 그러다 새벽엔 멀겋게 잠이 달아난다. 어제 아내가 한 말이 새삼 스멀스멀 되살아나 어쭙잖게 걸린다. 내 딴에는 애써 잘한답시고 하는데 마뜩지 않는가 보다. 엄벙덤벙 지난날 일들이 하나하나 밟히는 모양이다. 남자는 까맣게 잊고 흘려버려 되돌아보지 않는다.
새우와 굴을 사 오면서 “지난날 많이 참았소. 벌써 다 훌훌 버리고 가야 했는데 ---.” 아내를 낮춰보고 함부로 말한 거며, 고집 피우고 잘난 체한 것이 모두 걸린단다. 오늘 김장한 데서 모임에 가지 않고 차 몰며 열심히 거드는 데도 이리 막 대놓고 나무란다. 잘못을 뉘우쳐서 미안하다거나 틀린 것을 바로잡지 않았다며 벼른다.
평등한 줄 여겼던 사이는 무엇이 겹겹이 쌓여 내려왔다. 시어머니 아래 더부살이가 고달프다. 낯 서른 집에 들어와서 고개 들지 못하고 층층시하 숨죽여 살았다. 시집살이가 청양고추 맛이다. 그리 힘들어도 남편조차 알아주지 않아서이다. 삼시세끼 밥 짓고 빨래며 집 구석구석 청소를 알뜰히 해댔다.
그뿐만 아니다. 켜켜이 밀렸다. 가장 시중에다 자녀 뒷바라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잠시 가만 있는 성미가 아니어서 줄곧 꿈지럭댄다. 하루 내내 하고도 무엇이 모자라 밤늦게까지 딸그락거린다. 싫은 걸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야 내 자리가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간간하도록 배어들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기독 믿음을 시모와 남편 자식에게 심어줬다. 맨땅에 소망의 꽃을 곳곳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걸 보고 친척도 하나둘 교회로 나간다. 그러니 힘든 일이 한 두 가지겠나. 감당하려다 지치기도 한다. 타고남이 부지런해서 그냥 가만 있질 못한다. 교회 일하랴 집안 건사가 겹쳤다.
거기다 여자들은 흙 만지는 걸 꺼리는 데도 곧잘 한다. 텃밭 일을 즐기는 게 남다르다. 삽질하는 나보다 열심이다. 얼마나 팔랑팔랑 다니는지 금방 다른 뙈기로 가고 안 보인다. 장마 때 대파와 쪽파가 잘 녹아 축축한 곳을 피해 둑을 파 길쭉하게 만들었다. 그 위에 심으려는데 아내가 벌써 꽃밭을 만들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예전 꽃들을 소복이 꽂아 놓아 그만 뺏기고 말았다. 씨 뿌려 가꾸는 게 커다란 위로이고 신명 나는 일이다.
어릴 때 꼴 베고 나무해 대느라 농사는 힘에 부친다. 갓 캔 생감자를 끙끙 지고 나르다 무거운 게 짓눌러 키가 작달막하다. 무논에 들어가 모판에 피 뽑는다고 엎디어 일했다. 발이 짓무르고 얼굴에 피가 몰려 어지러웠다. 장마에 흙모래가 논에 쓸려 들어와 쌓였다. 피부와 손톱이 닳도록 퍼냈다. 얼마나 많은지 해도 해도 끝이 없어라.
채소밭을 마지못해 따라 거들다가 외려 점점 좋아져서 먼저 서둘 때가 있다. 우물도 파고 딸기나무를 키우며 뽕나무에 진딧물도 털어내어 오디가 익도록 만들었다. 군데군데 산국과 작은 장미, 접시꽃을 심어 그럴듯하다. 배추와 무꽃 장다리가 필 땐 어우러져 근사한 둑이다. 아내가 좋다면 뭣이든 해주려 하는데도 뼈 담긴 말이 그렇다. 세월이 흘러 시들할 텐데 새록새록 피어나는가 보다. 저걸 어찌하면 좋아 두루마리 휴지처럼 술술 풀어질 수 있을까.
어디가 그리 잘못됐는가. 특히 양반 고장인 경상도 내 고향 봉화와 안동, 영주, 경주, 의성 등지는 어머니에게 낮춤말을 잘한다. 친근감이라 여긴다. 윗대에서부터 여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크게 잘못인 데도 고치질 않고 그냥 지나온 것이다. 남편에겐 ‘하세요’ 위하고, 아내에게 말할 땐 ‘해라’를 쓴다. 고약한 말씨다. 그래도 응당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참 신기하다.
“할매 저녁 묵었나.” 한 세대 부모보다 위인 두 세대나 올라가서도 낮춤말이다. 응석을 부리긴 뭐가, 아기 낳고 집안일만 하는 부엌데기로 봐서이다. 여자를 이리 깔보고서도 고스란히 비비적거린 게 놀랍다. 나처럼 일찌감치 혼쭐이 나야 마땅한데도 그렇지 않다. 아직 멀쩡한 남정네가 벌벌 다닌다.
가시나 가시나 하면서 여자들을 업신여겼다. 여자 없이 남자가 어찌 사나. 조선조에서부터 집안에만 갇혀 지나게 하고 배움과 사회활동엔 등한하게 만들었다. 왜 그리됐을까. 어디서부터 잘 못 돼 왔는가. 그게 남자들을 내몰리게 하고 있다. 처음은 새색시로 곱게 곱게 살얼음 걷듯 조용히 살다가 나이 들어선 할 말을 하고 사는 데서이다.
요즘은 교육과 사회활동이 눈부시다. 어디든 들어갈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만 따로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 여자대학교가 있다. 드넓게 열려있다. 케케묵은 남존여비나 가부장이니 하는 따위는 벌써 깨지고 팽개친 지 오래다. 그런데 나는 여태 지니고 있었는가 한 소리 들으며 사는 것 같다.
여자가 서러운 마음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이거 큰일이다. 잘해 보겠다고 애썼지만 그런 건 보이지 않는가 보다. 미움이 사그라들고 날 보는 눈빛이 따스해지길 바란다. “당신 말이 다 맞소. 내가 잘못했소이다.” 지금 와서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다 지난 일인데 거들먹거리면 뭐 하나. 산기슭에 들어가 살자고 노래하는데 어디로 갈거나 내년 봄엔 박 회장의 밀양 위 상동과 친구가 사는 낙동강 쪽 물금을 살펴보자. 아내 말을 모두 들어주려 무척 애쓴다. 무슨 말을 할라치면 ‘예, 좋아요, 그러지요, 합시다.’ 늦었지만 늙바탕을 편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지난날 허랑하고 철없어서 시답잖게 살다가 이제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런 밉살맞은 어설픔 나를 아기 다루듯 정성스레 바라지 해준다. 문지방 나설 때 마다하는데도 머리 손 빗질과 가슴 매무새를 여며주고 신발을 챙겨준다. 가족을 위해 날마다 가까운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올리고 무릎이 닳도록 집안일을 달게 하는 가여운 아내다.
첫댓글 "살아온 걸 책으로 쓰면 밤 새워 써도 다 못쓴다고." 다들 그리 말합니다 쌤
너무 흔하게 듣는 이야기 같아서 저는 절대로 그 말을 하지 말아야지...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니 저 역시도...ㅋ
하루하루가 참으로 귀한시간들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사셨을텐데...힘든세상 살아오신 분들은 후회따위는 하지 않으셔도 될거같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한해 마지막 주입니다.
잘 보내시고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