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는 다르게 글을 익히는 아이들의 소리로 도란도란하던 오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서율이 며칠 장이 서는 마을에 다녀온다고 했으니 한동안은 조용할 모양새였다. 마을에는 자급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 물자들이 많았다. 늘 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던 그의 빈자리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황태자 서궐의 부재는 익숙한 여백이었는데 그는 과연 커다란 공백 같았다. 고목 아래 앉아있던 그녀가 서투르게 치맛단을 털고 일어났다. 이곳에 머무른 후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이름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걸까.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실려 마른 땅에 흔적을 남겼다.
소박한 석반은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빈 원탁 위로 저녁놀이 한창인 때였다. 누군가 문간을 네 번 두드렸다. 약속된 신호에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녀의 마차를 끌던 마부가 목반을 내밀며 고개 숙였다. 누가 읽어도 상관없을 내용의 서신은 단단히 봉해졌던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봉랍으로 그 입이 꾹 다물려 왔다. 난영은 떨리는 손으로 뜯어낸 서신을 쥐었다. 뼈마디가 점점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것도 읽지 않았는데 온 말초부터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짧은 문장을 읽는 동안에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촌극은 이제 끝내도 좋다. 어떤 단어가 눈에 그대로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만들어진 무대 위에 선 그녀는 언제든 퇴장할 수 있게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승전결 어느 마디에서든 눈짓 한 번에도 이야기를 맺어버릴 수 있도록. 그래서 양난영은 지금 어느 대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가.
“당장 모시고 돌아오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해가 모두 저물었다. 떠나는 이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미리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지내온 시간이 무색하게 챙겨 온 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맥이 풀린 사람처럼 벽에 머리를 기댔다.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고 곧바로 비탈길에 진입해 마차는 몇 번이나 덜컹거렸다.
바다는 멀어져 가는데 눈을 감으면 흑이 아니라 온통 청이었다. 파랑성이 너울따라 잔잔히 맴돌았다. 물에 잠긴 듯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고 마음은 그보다도 더 무력해졌다. 유예는 끝났다. 무대는 막을 내렸다. 극의 주인공은 어둠에 흐릿해지고 시야에는 날선 안광만 또렷하게 빛났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거친 손을 가만히 쓸다 자세를 바로 했다. 힘을 주어 고개를 들고 가까스로 턱을 당겼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내 아버지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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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로 돌아온 귀공녀는 황태자의 귀환 행렬이 당도하기 전까지 온몸을 단장하는 데 매일을 보냈다. 두 사람이 그녀의 양옆으로 붙었다. 푸석해진 머리카락에 향유를 발라 당장 귀 옆에 꽂아 넣어도 손색없을 장식의 금은 빗으로 아침저녁 빗어내렸다. 능숙한 손들 이 윤기 없는 손톱을 매끈하게 다듬고 거칠어진 살결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낯설어진 오래된 일과는 겨우 하루 이틀 만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벌써 옛일이 된 장면을 떠올렸다. 마을에서는 딸을 가진 아낙들이 이가 빠진 나무 참빗으로 그녀의 머리를 빗어 땋아주곤 했었다. 아이들은 짚으로 엉성하게 만든 바구니에 이름 모를 들꽃 한 무더기를 담아왔는데 서투른 솜씨로 뜯어져 줄기가 길게 남은 꽃은 머리칼과 함께 엮였다. 모두 고사리 손으로 쥐 뜯긴 풀들이라 밤에는 머리를 빗는 내내 풀 내음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명 아닌 능라로 지은 옷을 입고, 이름 모를 꽃이 아니라 오색의 패물로 치장한 귀공녀 경채의 모습이 경대 한복판에 선명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비들은 분첩과 연지를 들고 늘어놓은 자개함에서 장신구 일체를 제 주인에게 대어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기호를 맞추거나 묻지 않았다. 아이들조차 내게 무슨 색의 꽃을 좋아하느냐 물었었는데. 당연한 삶이 깨져나간 자리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처음으로 눈에 띈 머리 장식이 있었지만 난영은 눈길만 잠깐 주고 말았을 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황자 마마께서도 환궁을 하셨다더구나.”
승전연을 준비하기 위해 새벽녘부터 분주한 등 뒤로 익숙한 그늘이 졌다. 공작은 두 손으로 딸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했다. 모두 끝맺으라 명령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가 서율을 언급한 이유가 분명했다. 공작은 커다란 면경에 비친 딸의 얼굴을 매섭게 살폈다.
양익겸은 딸이 사교계에 발 딛기 훨씬 전부터 가면으로 그린 듯 무정한 낯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참아 가까스로 당혹감에 젖은 입매를 감췄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마음을 알고 저리 말씀하시는가. 불안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을 뿐 여상스레 머리 장신구를 매만졌다. 비취로 아직 망울 터트리지 못한 꽃을 깎아 넣고 진주가 촘촘히 박힌 장식이 작게 흔들렸다. 고개를 모로 비틀자 백금 이파리가 반짝였다.
“제가 알아야하는 일인가요?”
그가 흡족한듯 입꼬리 올리며 손을 거두었다.
우리의 흑태자께서 추방이라니, 어불성설이었지요. 보십시오. 이 얼마나! ……. 어느새 과거의 진위가 중요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전부 입을 모아 찬양 일색으로 떠들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황태자는 소료의 일념인 피사 정복을 이룩하고 돌아왔다. 단 한 번도 찢긴 바 없는 승기를 황홀하게 휘날리는 행렬은 만민의 자랑이었다. 모두가 그를 칭송하는 소리에 그녀는 가만히 웃음 짓기만 했다. 몇 마디의 동조만 더하면 길게 말하지 않아도 그들과 같은 말을 하는 셈이 됐다.
귀공녀는 습관처럼 가장 상석인 금좌부터 말석까지 샅샅이 눈여겨보았다. 주저 없이 매끄러운 움직임에도 찰나의 머뭇거림은 있었다. 가까이는 양재희가 비워둔 소공작의 자리가, 멀리는 서율이 채운 이황자의 자리가 그랬다. 매번 그 애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 간절한 때가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딸이 신열을 앓아도 제 자리에 서서 쓰러지는 일을 마땅하다 가르친 사람이었다. 부질없는 생각을 쉽게 접은 채로 내내 주변만 배회하던 그녀의 눈동자는 모두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릴 때가 되어서야 그들과 함께 서서히 움직였다.
“왕녀는 소자가 피사에서 획득한 가장 아름다운 전리품입니다. 소자의 몫으로 주시길 청합니다, 폐하.”
잠잠하던 주변의 기류가 일순 흐트러졌다. 그녀의 시선이 황태자에게서 황제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끌려가는 왕녀에게 가닿았다. 그게 전부였다. 온통 곁눈질로 이목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지만 구김 하나 없는 얼굴에 모두 실망한 기색으로 되돌아갔다. 난영은 단지 흘러내리길 반복하는 장신구의 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고 어느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시선 두지 않는 일에만 몰두했다.
뻐근해진 고개를 조금 기울이다 자신을 힐끔거리던 공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 의문을 겨우 억누른 그녀가 천천히 일어났다. 아아, 나는 아파야 하는구나. 공녀의 눈빛을 재빨리 이해했다. 질투는 허물이 될 테니 가져다 붙일 수 없고, 도무지 눈물은 나오지 않아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하지만 회장을 빠져나온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서율. 이황자 이원을 마음 놓고 외면할 장소가 필요했다. 황태자가 직접 왕녀의 신변을 청한 후에 노골적으로 내리 꽂혔던 시선이 떠올라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왜. 스스로에게 자문했지만 답을 도출하기가 두려웠다. 왜. 그에게 묻고 싶어졌지만 그래선 안된다는 걸 알았다. 당신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물거품 되어 흩어졌고, 내 마음은 그릇되어 깨트려야만 하는 감정이었다.
낮밤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궁등의 행렬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기민한 귓가를 간질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뒤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이 나직한 음성의 주인을 알았다. 가볍게 살랑이던 산호 빛깔 치맛단이 멈췄다. 이제 지저분하게 남은 끝매듭을 마저 정리해야 했다. 화르르 불태우던 싹둑 잘라내든간에.
귀공녀가 무릎 굽히며 황자를 향해 예를 갖췄다. 좀처럼 굽어지는 일 없는 고개와 허리가 반듯하게 숙여졌다. 느슨하게 자리 잡았던 장식이 파열음을 일으키며 떨어진 건 순간의 일이었다. 손을 끝까지 뻗기도 전에 이황자가 친히 허리를 굽혔다. 같은 자리로 향하던 두 손이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혔고 그녀는 떨리는 손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가 가까워졌다. 곧 서율의 자연스러운 손길이 귓가를 스쳤다.
그가 서투르지 않은 솜씨로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서율이 마을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은 자상함이란 사실을 알아서 멋대로 부풀던 기대를 겨우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오래된 마음은 뜻대로 다룰 수 없었다. 가슴께에 손을 얹지 않아도 알았다. 차마 질끈 감지 못한 두 눈꺼풀이 떨렸다. 영원을 가장한 찰나가 끝났을 때는 그가 뒤로 물러났다. 너무도 다정해서 익숙해지길 소원했던 온도가 빠르게 식어갔다.
“황자 마마.”
그녀가 똑같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작별 인사는 필요 없었다. 재회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다음 장면은 아버지에게 쓸모가 없었으니까. 여름날의 당신과 나를 우리로 묶어도 괜찮았다면 이제는 아니었다. 난영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더 이상 느슨하지 않게 된 장신구는 어떤 소란도 일으키지 않았다.
“먼저 물러가는 무례를 용서하세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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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 위로 서신과 상자가 놓여있었다. 황태자가 아닌 이황자에게서 온 선물을 감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황태자의 오랜 정혼자, 그의 귀환 소식에 유랑을 당장에 그만두고 돌아온 준비된 양처가 아니던가. 난영은 종들을 전부 물리고 혼자 경대 앞에 앉았다. 인장은 상해 있었지만 상자는 열려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경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율이 써 내려간 문장을 펼쳐 읽었다. 그가 또다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또다시.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해야 할 말은 소리 내어 터져 나오지 못했다. 입안에서도 맴돌지 못했으니 차마 소리로도 만들어지지 못한 생각이다. 긴 고민 끝에 열어 본 상자에는 승전연의 밤 서율의 손을 탔던 것과 엇비슷한 모양의 화잠이 있었다. 활짝 피어오른 꽃송이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그가 아끼던 고목을 떠올렸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가 바랐던 기적. 그를 따라 염원했던 내 절실한 소원.
결국 고목은 꽃을 피워냈을까.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이젠 무의미한 질문이 됐다.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으므로. 내 바람은 이제 더 이상 현실로 가져올 수 없는 꿈이었다.
“미안해요.”
어딘가 인색한 목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처음으로 손 내밀어 꽂아보고 싶었던 청옥 장신구를 손수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보드라운 모단 위에 놓인 화잠에도 세상에 없는 빛깔의 꽃이 피어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펼친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손 가까이에서 미세한 파편이 튀었다. 난영은 망설이지 않고 상자를 닫아걸었다. 부르는 소리에 밖에서 시립해있던 이가 들어와 바닥과 경대 위를 정리했다.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그가 보낸 상자를 열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당신을 향한 마음을 덮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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