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을 통해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을 꾀하다
이렇게 창립된 흥사단의 목적은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하며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또한 흥사단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지혜, 도덕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는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 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가는 심신 훈련 단체인 것이다. 그래서 흥사단에서 설정한 ‘수양(修養)’이란 뜻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발전을 전망하는 대의(大意)를 내포하고 있다. 즉 흥사단의 인격수양은 단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이를 바탕으로 단결하여 혁명사업과 사회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흥사단보>에 실린 다음과 같은 논설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돈 몇 원만 모으면 큰 부자의 행세를 하며 책 몇 권만 보면 큰 학자의 체통을 찾으며, 연설 몇 마디만 하면 큰 정치가의 자격을 가진 척하여 그 도량이 좁은지라 어찌 크고 깊은데 이르리오. 그 바람이 적은지라 어찌 높고 먼 것을 이룰 수 있으리오.
한편 도산 안창호의 활동도 개인적 차원의 행적이라기 보다 이러한 흥사단 조직과 단원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흥사단 미주본부를 이끌다
흥사단은 1913년 창단 이후 1920년까지 8년 간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하였고 1921년부터 이사부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다. 선생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이사부장을 맡았고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안창호의 부재 시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어 갔다. 흥사단은 미주지역에서 창단되었으나 중국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와 국내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결성되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창립자인 도산 안창호는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노동협판 등 정부요인으로 활동하였으므로, 흥사단 미주본부의 사무는 선생의 주재 하에 이루어졌다. 선생은 흥사단 활동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도산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는 등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선생은 중국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을 위해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워 재정 확충에도 힘썼다. 주식회사를 통해 적립된 자본으로 중국에 은행을 세워 독립운동 자금을 항시적으로 확보하고 국제간의 신용을 높인다는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벼농사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이후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 미주지역의 주요 단체에서도 활동하지만 그 기반과 정신적 근원은 모두 흥사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평생을 흥사단에 헌신하면서 흥사단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한편 이러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낮에는 백인의 집에서 품을 팔아 그의 동지를 보양하며 밤에는 서류를 만들어 단원들의 향단심(向團心)과 애국심을 일으키기에 힘썼다. 흥사단의 단기(團旗)에 대한 선생의 시는 이러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둑서 바람에 날리고/장하다 네 빛 네 정신아/기러기 펄펄 일어나고/둥그럼 훨훨 지어온 바 우러러 네게 경례하며/갖추어 내가 노래하며/높고 깊은 근심 걱정이/한 없이 절로 위로되네 백두산 바라는 남녀야/황홍백남 자랑하오/기초준비 튼튼히 기해/한길로 나아 나아 가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