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영화】
소학지희(笑謔之戱)1)와 영화적 상상력
-김태웅의『이』2)와 이준익의 『왕의 남자』비교 분석-
이명진
1. 들어가며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인의 여가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체로 자리 잡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해 보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영상 매체가 현대인을 지배하는 듯한 요즘은 더욱 그러하다.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체험 해 보지 못한 세상사를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동안 우리의 인식은 폭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란 우리 인간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체험이 아닐까 싶다.
최근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 동원이란 신기록이 붙은 <왕의 남자>는 그래서 더욱 친숙하게 우리들 곁에서 회자 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준익의 영화 <왕의 남자>는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김태웅의 <이(爾 )>를 원작으로 만들어 졌다. 원작자 김태웅은 <연산군일기> 60권 22장 “배우 공길이 논어를 외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 하였다.”3)라는 기록 한 줄을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실록에 정난정이라는 여인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여인천하>라는 소설이 쓰여 졌고, 서장금이라는 여의에 관한 단편적 기록 몇 줄이 있는 것을 기초로 드라마 <대장금>을 만든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짧은 역사적 기록 하나를 밑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하여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치밀한 구성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국영화가 대중예술 역량을 발휘하게 된 데는 관객들의 수준도 한 몫을 차지하겠지만, 영화 종사자들의 끊임없는 열정과 투지 또한 간과 할 수 없음이다.
한국영화사상 또 다른 신호탄으로 1,230만 명이란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 <왕의 남자> 가 주목 받는 이유는 단지 뛰어난 흥행 성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왕의남자>는 기존의 기록을 새운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 등의 100억대 제작비에 비해 40억대의 저예산이라면 저예산일 수 있는 제작비를 가지고 당당하게 1위 자리에 올랐기에 더욱 관심을 받는 것이다. <음란선생> <스캔들> <혈의 누> 등이 흥행에 성공한 사례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극영화는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거나 적자를 면치 못했었다. 때문에 저예산의 제작비를 가지고 흥행에 성공할 수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지, 소학지희와 함께 영화적 상상력과 더불어 표현의 독창성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김태웅의 연극 이(爾 )
「이(爾)」의 작가 김태웅은 1965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예술전문사(M.F.A) 과정을 졸업했다. 1997년 연우무대 20주년 신예 작가 발굴 시리즈에서 「파리들의 곡예」를 작·연출하였고, 1999년 ‘동아신춘문예’에 희곡 「달빛유희」가 당선되었다. 2000년 「이(爾)」를 작·연출(연우무대)하여 동아 연극상 작품상, 연극협회선정 베스트5 작품상과 희곡상, 평론가협회선정 베스트3 작품상, 서울공연예술제 희곡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를 맡고 있으며, 극단 우인의 대표이기도 한 김태웅은 1998년 2학기에 사진실 교수로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과정의 ‘한국공연예술연구’시간에 공길(孔吉)·공결(孔潔)·귀석(貴石)·광문(廣文) 등 광대놀음의 유명배우들을 비롯해 궁중 공연문화 전반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그 후 궁중 광대놀음인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토대로 ‘경중우인(京中優人)’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이(爾)를 연출 하게 되었다.
당시 사진실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학생은 두 명이었고, 그중 연산군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던 김태웅씨가 있었다. 사교수는 김씨에게 조선전기 궁정배우의 존재양상과 공연활동을 소재로 한 희곡 집필을 과제물로 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60권22장의 기록에 따라 연산군 앞에서 ‘노유희(老儒戱)’(늙은 유생의 놀이)를 하며 임금을 풍자(君君, 臣臣-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했다가 곤장 맞고 귀양 간 공길이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또 사진실 교수는 김씨에게 공길의 정신적 지주이자 현실 저항적 광대로서 ‘장생’을 추천했다. 장생은 허균이 쓴 ‘장생전(蔣生傳)’의 주인공이며, 사교수는 그의 박사논문 때 ‘장생은 배우였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속 장생은 인생을 달관한 ‘거리의 예술가’였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 결과 수업시간에 발표된 작품의 제목은 ‘희희낙락(喜戱樂落)’이었다. 사교수는 김씨가 제출한 초고(草稿)에 대해 “공길과 장생, 연산군과 장녹수의 사랑과 질투,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조화, 극중극으로 재구성해 삽입한 소학지희의 공연 장면 등은 작가가 지닌 상상력의 힘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제 연구 또한 많은 연구 성과의 토대에서 가능한 것”이라며 “연구와 창작이라는 분야는 엄연히 다르지만 인문학의 성과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뒷받침할 수도 있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다”4)고 말했다.
사교수에 따르면 궁정배우들의 활동은 동서양에 두루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때부터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중종, 명종, 성종, 등이 광대놀음을 크게 즐긴 임금으로 나와 있다. 조선시대의 궁중 광대놀음인 소학지희를 놀았던 배우가 바로 ‘경중우인’이다. 그들은 사서삼경 등 경전의 말씀을 비틀어가며 언어로 임금을 울리고 웃기는 지력(知力)을 갖춘 광대였다. 중앙 관청의 관노(官奴)나 세력가의 사노(私奴) 신분으로 서울 사대문 안에 거주했다. 그들이 궁궐에서 놀 때는 의금부(현재의 국정원에 해당)의 관리를 받았다. 임금과 소수 측근이 참석하는 왕실 내부의 행사이므로 왕의 신변 보호 및 보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역사적 상상력의 범주를 벗어난 부분으로 사교수는 ‘경극’ 장면을 꼽았다. 연산군 때는 중국에서 지방유희를 집대성한 경극(베이징 오페라)이 본격적으로 성립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사교수는 “우리 극 양식으로도 표현이 가능한 장면을 굳이 경극 양식을 빌려 표현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를 뿐더러 영화 ‘패왕별희’를 기억하는 외국 관객들에게 ‘왕의 남자’의 독창성을 조금 떨어뜨리는 결과로 작용할 듯하다”5)고 아쉬워했다.
그는 “대중예술·기초예술·기초학문이 그 성과를 공유하는 ‘학예산(學藝産) 협동’의 사례가 앞으로도 풍성해지기를 기대 한다”면서 “개인적으로는 연극·영화를 통해 한국 연극사 연구의 성과가 부분적이나마 대중에게 알려지는 상황을 보면서 재능 있는 작가를 만난 행운을 크게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6)
천민 광대의 신분으로 임금에게 ‘爾’라는 호칭을 받은 극중인물 ‘공길’이라는 인물은 역사상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일기 60권 22장에 나와 있는 글에서 착안하여 기발한 상상력으로 폭군 연산과 광대의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연극은 연산군이 궁중 광대극을 좋아했고, 광대 '공길'과 동성애 관계였다는 허구적 설정에서 출발한다. 또한 연산군, 공길 등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인물로 공길의 연적 '녹수'가 등장한다. 여기서 녹수는 연산을 현실로 이끌면서 공길과 갈등을 벌이는 인물이다. 공길과 갈등을 벌이는 또 하나의 존재는 장생이다. 공길은 놀이를 통한 권력과 그것을 이용한 안위를 추구하지만 장생은 권력에 야합하는 놀이가 아니라 민중들 편에 서서 그것을 고발하는 순수한 놀이로서 ‘소학지희’(笑謔之戱)를 주장한다.
극 속에서 '소학지희'(笑謔之戱)는 말 장난, 성대모사, 흉내내기, 재담, 음담패설 등 언어 유희를 이용해 시정을 풍자하고 정치적 비리를 고발하면서 등장인물의 갈등을 표출시키고 있다.
3. 퓨전 사극으로서의 성공비결
영화 <왕의 남자>는 정통 사극이 아니라 퓨전 사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퓨전 사극의 성공 확률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은 여러 각도에서 눈여겨 볼 일이다. <왕의남자>를 퓨전 사극으로 만든 것은 정통 사극의 제한된 상상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혹은 주제 전언의 필요성에 의해서라 보여 진다.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폭군으로서의 연산군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나름의 스타일 변형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조선조의 역사는 왕과 군신간의 갈등 구조로 되어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왕과 신하의 주도권잡기 싸움에서 피해자가 연산군이라는 역사적 관점이 사당패를 통한 정치 풍자로 표현되었고, 모성애의 결핍적 성향을 장녹수와의 관계로, 그리고 사당패의 꽃미남 공길과의 동성애로 표현하다보니 퓨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왕의 남자> 라는 제목 자체가 직접적인 동성애 코드를 드러내는 까닭에, 정해지기까지는 많은 우여 곡절이 있었겠지만 결국은 성공적이었다. 동성애 코드를 제목에서 드러내는 시도는 위험천만한 요소를 품고 있다. 이러한 위험천만함을 무릅쓰고 <왕의 남자>라는 이름을 선택 한 것은 동성애적 코드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회적 흐름 탓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완벽하게 동성애를 용인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것 또한 감독이 잡아낸 포인트였다고 본다. 제목에 동성애적 코드를 심어 궁금증을 유발 시킨 뒤 영화 속에서는 거부감이 들 정도의 노골적인 동성애적 코드를 배제 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동성애적 코드를 제목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영화 내에서 동성애적인 삼각관계는 그렇게 많이 드러내지 않고 있다. 원작<이>에서 표현된 것과는 다르게 감독만의 재해석으로 인해 이 부분은 다소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이러한 동성애적 코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이 느끼기에 따라 재해석 될 수 있는 요소로 ‘동성애’라는 코드를 남겨 두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동성애적 코드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동성애 코드의 영화와는 다른 캐스팅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기존 동성애 코드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한 것은 그들이 극히 남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의남자는 이러한 면을 보완하기 위해 “꽃미남 배우”를 캐스팅 했다. 여자 같은 외모의 남자를 캐스팅해서 관객들이 느끼기에 ‘내가 남자라도 사랑 할 수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게끔 해서 거부감을 다소 줄일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이는 기존의 관람층 외의 여자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들였으며, 자연스럽게 관객 확대로 이어 지고,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이준기 팬클럽” 이라는 신드롬까지 만들어 냈다. 영화를 한번 본 관객들이 이준기를 보기위해 또 다시 영화를 보게 되고, 한편의 영화를 몇 번 씩 보게 되면서 1,230만이라는 흥행성적을 내는데 기대 이상의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 동성애적 코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동성애적 코드를 가진 상업영화에 비해 월등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본질은 아니지만 동성애 문제를 서양의 호모 섹슈얼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동성애를 광대들의 삶에 대한 리얼리티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표현의 방식도 어둡고 칙칙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밝게, 그리고 인간애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비호감으로 거부되지 않은 이유가 식상한 연극적 갈등 구조를 지양하고 밝은 색채로 영상미를 살렸다는 점일 것이다. 밝고 경쾌한 영상미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사당패의 연희와는 다른 중국의 ‘경극’을 뜬금없이 삽화로 집어넣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정보화 시대이며 영상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삶의 무게를 진지하고 강하게 느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쾌하고 감각적이며, 인생 문제를 가볍게 다루는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형 인간으로 이준기라는 배우는 적절하다는 이야기다. 영화에서의 성적 묘사와 정치 풍자나 인간적인 고민도, 밝고 경쾌하고 화려한 색채미로 그려냄으로 해서 21세기형 인간의 눈요기를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이준익은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배우들이 한 역할은 진정 위대한 작업이다. 연산은 역사 속에서 폭군이란 기록으로만 존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진영이라는 배우가 그 인물에 온기를 불어넣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장생 역의 감우성은 우리 역사 속의 천박한 광대라는 신분을 뜨거운 열정을 가진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이준기가 연기한 공길은 21세기형 인간이다. 20세기는 흑백논리가 만연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누구나 분명히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그런데 21세기는 개인주의가 존중받는 시대다. 개인주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모호하게 반응한다. 준기는 그 모호함의 연기를 너무 잘 해냈다. 강성연은 장녹수라는, 아주 편협 된 인간으로 치부되던 요부로서 여인의 내면을 훌륭하게 끄집어냈다. 장항선은 조선의 내시라는 존재에 역사적 존재감을 확장시켰다. 유해진은 진정한 광대로서의 순박함을 천박하지 않게 표현했다.” 며 배우들의 연기평과 함께 연출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어쨌든, 영화 ‘왕의 남자’는 여러 국면에서 성공적인 요인을 지니고 있음은 자명하다.
4. 표절 시비와 표현의 독창성
국내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의 표절 시비는 희곡 ’키스‘의 작가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윤영선 교수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윤영선 교수는 자신의 희곡 ‘키스’의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대사를 ‘왕의 남자’가 표절했다며 서울중앙지검에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었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사 이글픽처스의 정진완 대표는 “나와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 등을 통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윤영선 교수의 희곡 ‘키스’의 대사 차용 사실을 언급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아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설명했으며. 이어 “이번 사건으로 <왕의 남자> 전체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명했다고 보도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영화의 원작이 된 연극 ‘이 (爾)’의 연출가 김태웅도 “윤교수에 대한 오마쥬(존경) 차원에서 대사를 차용한 것이고, 연극은 물론 영화화 과정에서도 윤교수에게 사전 양해를 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법률적인 판단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왕의 남자>의 문제가 된 대사는 영화의 원작 연극에서 양해를 구하고 제작사에서도 사전에 밝혔던 만큼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문학의 표절 문제를 짚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표절(剽竊, Plagiarism)은 '다른 사람의 창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베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표절은 당연히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법적으로는 저작권법 위반'이 된다. 그리고 저작권법에 의하면, 표현의 독창성을 보호하는 것이지 아이디어나 개념을 보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은‘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스’의 한 대사를 그대로 따온 것은 분명 저작권법을 위반한 표절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하게 일치한 대사 혹은 한 구절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명백한 판단은 어려움이 많다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표현구조 중 패러디와 패스티쉬가 있다. 이 표현의 양식은 우리 문학에서도 많이 쓰고 있는 방식이다. 패러디는 모방을 하되 코믹하게 또는 풍자적으로 모방하는 방식을 말하며, 패스티쉬는 혼성모방이라 해서 다수의 기존작품을 혼합해서 모방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이 두개의 방식을 택해서 하나의 창작품을 만들었어도 표절로 보지는 않는다. 설혹 그 작품이 발상이나 아이디어, 그리고 개념에서 모방했다 해도 표절 시비에서 제외된다. 기존 작품의 한 부분을 따왔다 하더라도 인용한 원 저작물과 저작인을 명시하면 표절 시비에 휘말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모방은 했으되 원작의 문장을 그대로 설명 없이 따오지 않는 한 새로운 창작물로 인정한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뵈레스의 말을 빌어 오지 않더라도 ‘모방은 상상력에 의한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절 시비는 궁극적으로는 작가의식, 작가정신 또는 작가의 창조적인 표현 방식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작가의식이나 정신이 투철한 시인, 작가는 남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명해주기를 원하는 인간과 삶의 공통된 과제를 창의적인 자기 나름의 표현 방식으로 쓰려할 것이다. 모방은 가능하다. 그것은 인간의 창의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하지만 표절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자신만이 낼 수 있는 문장의 색깔과 맛을 만들어보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며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글로써 다루어야 할 인간 및 삶에 대한 주제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본다. 이미 먼저 쓴 분들이 남김없이 다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탐구의 시대는 지났고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표현의 문제가 중시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20세기 문학 연구가들은 하나같이 힘주어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와 연결시킬 때 결국 표절의 문제는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것도 문학 작품에서의 표절 시비는 ‘문장 베끼기’에서 발생한다. 이 점을 우리는 영화 ‘왕의 남자’의 표절 시비에서 새롭게 배운다. 종합예술인 영화는 표절이 성공 요인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대사가 이 영화의 성공과는 긴밀한 연관성도 또 작품으로도 중요한 모티프는 아니라는 것이 그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표절 시비는 이 영화가 성공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며 원작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때문에 생긴 문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이를 계기로 표현의 독창성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5. 연극「이」와 영화 「왕의 남자」에서의 변별성 찾기
5-1 연극의 줄거리
공길은 천민 출신 궁중 광대로 연산의 충실한 ‘노리개’다. 웃음을 팔고 몸을 바쳐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희락원의 대봉인 우두머리가 되며, 종4품 벼슬까지 오른다. 공길에게 왕의 관심을 빼앗겼다고 느낀 장녹수는 이러한 공길에 대한 질투심에 휩싸여 홍 내관과 짜고 그의 필체를 모필 하여 연산과 자신을 비방한 비방서를 작성하였다. 연산은 화가나 범인을 찾으라 명하고, 결국 공길은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이때 평소 진심으로 공길을 사랑하던 동료 광대 장생이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공길을 대신해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해 눈을 뽑히고 얼마 뒤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계기로 공길은 진정한 광대의 삶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면서 마지막으로 연산을 비웃는 놀이 한판을 마음껏 펼친 뒤 자결한다.
극의 처음과 끝은 광대들의 벽사의식, 즉 프롤로그와 12장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은 현실과 꿈의 대립과 갈등으로 전개된다. 등장인물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듯이 공길과 장생의 대립을 살펴보면, 공길은 왕의 사랑을 받아 더 이상은 떠돌이 인생이 아닌 궁궐에서의 안위와 권력을 추구하며, 반면 장생은 공길에게 광대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촉구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연산도 나라의 정세는 살피지 않고 궁궐에서의 놀이만을 즐기기를 원하며, 이에 반해 녹수는 질투심이 많고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극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바로 각 인물들 간의 갈등이다. 첫 번째로 공길에게 왕의 사랑을 빼앗겨 질투심에 계략까지 짜는 녹수를 볼 수 있다. 이 갈등은 공길에 대한 연산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다른 갈등은 광대의 본연의 모습에 대해 공길과 장생사이의 갈등으로 초반엔 공길이 권력을 추구하다 진정한 광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요소 이다.
5-2. 원작과 영화의 서로 다른 변별성 찾기
영화에서 신인 이준기를 일약 스타로 만든 역할은 바로 여자처럼 예쁘장한 광대 ‘공길’ 이다. 하지만 공길은 영화보다 연극에서 비중이 훨씬 크다. 영화에서는 감우성이 연기한 장생이 주인공이지만, 연극에서는 장생의 비중은 작고 공길과 연산군이 주인공이다. 공길의 성격도 차이가 크다. 연극에서 공길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천출임에도 종4품 대봉 벼슬을 받은 뒤, 동료 광대들에게 “나를 대봉으로 부르라”고 하는 권력욕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감초 역의 조연들 중에서 ‘칠득이’와 ‘팔복이’는 연극‘이’에서 다른 역할을 맡았다. ‘칠득이’역의 정석용은 연극에서 장녹수의 복수심을 부추기는 홍 내관으로, ‘팔복이’를 맡은 이승훈은 연극에서 장생역을 맡는다. 또 영화와 연극에는 각각 ‘극중극’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광대들의 줄타기나 대규모 연희와 화려한 경극이 등장한다. 반면 연극 무대에서는 광대들이 말로써 정치 행태나 비리를 우회적으로 꼬집는 ‘소학지희’가 마당극처럼 펼쳐진다.
영화는 장생이 공길과 궁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전반부에 펼쳐 놓으며 크게 네 가지의 놀이마당으로 궁에서의 굴곡 있는 삶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영화의 전반부와는 달리 궁에서 연산의 생활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영화에서 첫 번째는 왕을 가지고 놀아보자,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 개나 소나 입만 열면 왕 얘긴데, 좀 노는 게 뭐가 대수야?” 두 번째는 죽기 살기로 한 번 놀아 보세,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 보이겠소!” “왕께서 보고도 웃지 않으시면 네놈들의 목을 칠 것이다” 세 번째는 누군가의 목숨을 걸고 한 판 놀아라, “소극을 할 때마다 누가 작살이 나니 살 떨려서 하겠어 어디?” 네 번째는 징한 놈의 세상,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광대 짓을 할 때는 어느 광대 놈과 짝 맞추어 노는 게 어찌나 신이 나던지, 그 신명에 눈이 멀고, 얼떨결에 궁에 들어와서는, 그렇게 눈이 멀어 볼 걸 못 보고,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가는 것을 못 보고, 그건 그렇고, 이렇게 눈이 멀어 아래를 못 보니 그저 허공이네 그려, 난 광대로 다시 태어날란다!”로 진행 된다.7)
이 작품은 권력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절대 권력자 연산도 가지지 못한 자유로움을 지닌 광대 ‘장생’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주축으로 삶의 본질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라는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 했다. 또한 연극에서는 표현할 수 없었던 화려하고 웅장한 영상미는 광대들의 신명난 해학과 함께 감동의 깊이를 더 해 주었다.
6. 중재자로서의 처선 영감과 공길
이 작품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주연의 자리를 빛나게 하는 조연의 역할뿐 아니라 또 다른 중재자로서의 처선 영감(장항선 분)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만날 수 없을 계급에 속한 연산과 장생의 만남을 주선하는 인물이 '방울 소리를 낼 수 없는' 내시 처선 영감이다. 방울 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중신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연산군의 유일한 참모인 처선은 장생의 광대패를 궁으로 불러들여 멍석을 깔아준다. 그러나 처선이 두 남자의 이례적인 만남을 주선하고 중재하는 목적은 왠지 모호하다. 그의 입으로 밝히는 이유는 "간신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처선은 부패한 중신에 대한 풍자극이 그들에 대한 단죄로 이어질 것임을, 즉 풍자의 정치적 선동 효과뿐만 아니라 왕의 심리적 반응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가 장생의 광대패에 내민 첫 과제는 임금을 웃기라는 것이었다. 궁중의 첫 공연에서 광대패는 기생 출신 후궁과 음탕한 놀이에 열중한 왕을 풍자하는 것이었다. 처선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불경한 풍자가 왕을 웃게 할 수 있음을 실험했다. 처선의 가장 놀라운 지식은 그가 장생에게 경극을 주문할 때 드러난다. 연산군 모친의 비극적 죽음을 재현하려 할 때 한국 가면극의 희극성이 그 서사에 부적합하며 중국의 경극이 적합하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처선은 또한 많은 걸 놓치고 있었다. 왕의 공길에 대한 사랑을 예상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왕이 선왕(성종)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 할 때 왕에게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왕이, 재현된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하면서 미쳐갈 것임도 예상하지 못했다.
실패한 중재자로서의 처선의 지식과 빗나간 예견은 왕과 장생이 자멸의 길에 이르는 서사의 경로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동원된다. 처선은 하나의 주체라기보다, 개연성 없는 서사의 핑계(즉, 난데없는 경극을 등장시킬 때)로 동원되는 또 다른 중재자이다.
처선이 정치학으로 두 남자를 중재한다면, 공길은 연행과 육체로 왕과 장생을 중재한다. 그런데 공길의 주체도 불투명하다. 그는 대상으로서만 투명하다. 그는 아름답고 다정다감하며 유능한 광대다. 그는 자기 몸을 탐하는 양반을 거부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가련한 두 남자를 연민한다. 그는 늘 남자들이 원하는 자리에 가 있다.
각각의 방식으로 개인사를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는 연산과 장생과는 달리, 처선과 공길은 이 서사 안에서 자기 욕망을 말하지 못하는 존재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인데도 남근이 없다는 점이다. 물리적으로는 있지만 기능하지 않는다. 처선은 그 기능을 박탈당했고, 공길은 그 기능을 원치 않는다. 남근이 없는 한 그는 역사적 주체로 나서지 못한다. 그들의 기능은 남근들의 조력자다. <왕의 남자>에서 서사가 그들의 주체성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남근적 세계관의 반영이다라고 할 수 있다. 남근은 광대놀이에서 거대한 호리병으로 둔갑해 오줌을 갈겨대며 놀이판을 휘젓는다. 그리고 왕은 실제로 가장 큰 남근의 소유자로 공인된다("임금님의 물건이라면 그 정도는 커야 되지 않나 싶어서", "왕의 물건이 워낙 커 궁이 시녀들의 자지러지는 소리로 가득했고"). 이 서사 안에서 남근 없이 자기 존재를 승인받기 위해선 자기 완결적인 주체가 아니라 거대 남근의 제1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왕의 남자 즉, 처선은 연산의 남자였고, 공길은 장생의 남자였다. 문제는 공길이 연산의 남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발생한다. 처선은 왕의 절대적 동지로서 남근이 없는 대신 노련한 정치학이 있었고, 그것으로 왕에게 봉사한다. 그는 단 한번 왕에게 반항한다. 공길에게 종4품 벼슬을 내리자 처선은 왕에게 "광대 한명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불경한 진언을 올린다. 심지어 중신들의 언어인 "죽어도 선왕을 뵐 낯이 없다"는 표현까지 동원한다. 왕이 아버지의 율법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 증오를 이용해 구파 중신들을 처단하는데 이용한 처선에게 그것은 왕과의 결별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왕도 처선을 용서치 않는다 ("네가 정녕 미친 게로구나"). 그는 네 번째 왕을 모시자는 반란세력의 권유를 거절한다. 세 명의 왕을 모셨으므로 그는 이미 절개를 지킨 신하가 아니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절개나 종묘사직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웃음을 보고 싶었던 한 남자 곧 연산에 대한 애정이며 공길에 대한 질투다. 그의 정치학을 실패로 몰고 간 것은 이 애정과 질투다. 왕의 남자 되기를 실패하자 그도 정치학을 포기하고 자살한다.
7. 경극 패왕별희와 의상의 조화
<왕의 남자>는 연산과 장생으로 대변되는 권력과 예술의 대립 서사이기도 하다. 표면상으로는 왕과 광대의 대결에서 광대의 영혼 곧 예술이 승리한다. 장생은 "다시 태어나면 왕으로도 싫다. 양반도 싫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 장생은 더 큰 판에서 더 강한 대상을 놀려먹는 것이 광대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광대패의 풍자는 공격적 선언이나 비웃음이기 이전에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양식이다. 이 영화에서는 뛰어난 광대를 그리면서도 그 수련과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장생과 공길이 한양으로 가는 길 위에서 저들 홀로 벌이는 장님 공연은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장면을 연상시켰고, 경극 출현은 <패왕별희>를 상기시켜 주었다.
연극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왕의 명으로 광대들이 경극을 공연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관객들이 패왕별희를 보았기에 우미인으로 분장한 배우 장국영이 얼마나 예뻤는지 기억하고 있을 터다. 냉정하게 말해서 배우 이준기는 장국영 만큼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준기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길이 우희와는 다른 성격이기 때문이다. 패왕별희의 데이(장국영 분)는 여성 역할에 몰입하여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여성으로 인식하게 된 사람이지만, 공길은 그저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이었다. 공길이 놀이판에서 허리를 돌리며 엉덩이를 과장되게 흔드는 장면은 유연한 허리 곡선과 더불어 감탄이 나올 만큼 매혹적이었다. 왕 앞에서 인형극을 보여줄 때도,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말을 할 때도 공길은 아름답다. 하지만 공길은 여성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여인의 역할을 맡은, 조금 더 고운 남성일 뿐이었다. 감우성(장생 역)이 줄광대를 연기하기 위해 줄타기 연습을 대단히 많이 했다는 사실도 칭찬할 만 하고, 이준기(공길 역)와의 아찔한(?) 장면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연한 정진영(연산군 역)의 연기도 훌륭했다. 거기에 강성연(장녹수 역)의 연기도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경극 공연 부분은 언문도 익히지 못한(공길만 언문을 알고 있음) 조선의 지방 광대패가 중국 경극 교본만으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패왕별희>의 경극 배우들은 어릴 때부터 가혹한 수련을 거친다) 발성은 촌스럽지만 거의 완벽한 분장과 무대 배경 및 공연을 만들어냄으로서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해 준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이 해왔던 놀이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경극은 반대로 비극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경극에 사용된 의상도 화려함이 우리의 사당패와는 거리가 멀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화려한 색보다는 백색과 무색의 의상을 주로 입었었다.
조선역사에서 태조 이성계만 파란 색의 용포를 입었던 사실적 근거에 준한다면 연산의 의상은 문제일 수 있다. 청색의 용포를 입는 의미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는 뜻을 기리기 위해서 였다. 청색은 동쪽, 백색은 서쪽, 적색은 남쪽, 흑색은 북쪽, 황색은 중앙을 나타낸다는 음양오행설의 사상을 따라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고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의미 였다. 그 후 조선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색 곤룡포를 입었었고, 다른 왕들은 모두 적색 곤룡포를 입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중국 천자들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란 의미에서 황색의 의복을 입었고, 우리나라의 왕은 천자를 상징하는 황색을 피해 적색의 용포를 입었던 것이다. 적색의 의미는 태양이나 불, 피 등 강력한 생명력을 표현하고 양기의 충만함을 의미함으로 왕이 입기에 더없이 좋은 색이라 여겼기에 태조를 제외한 다른 왕들의 영정은 붉은 색의 용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에서 연산군의 청색용포는 실제로는 입을 수도 없고 입지도 않았던 의상인 셈이다.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스타일리스트가 연산군의 곤룡포를 청색으로 한 이유는 연산군의 차가운 이미지와 슬픈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라고 답했다. 연산군이 홍색 용포를 입는 모습보다는 청색의 용포를 입었을 때 풍기는 차갑고 서늘하면서 폐비윤씨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더 잘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광대들은 민가에서는 소박한 전통미를 살린 자연주의 의상을, 궁중에서는 화려함이 살아있는 궁중의상을 선보이며 그 신명을 더해간다. 특히 궁중연회를 배경으로 하는 광대놀이에서 사용된 '종이의상'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새로운 시도로 주목 받았다고 한다. '종이의상'은 중국 경극 공연 때 실제 사용되던 옷으로, 영화 속에서 광대들이 경극 공연시 한국적으로 변형시켜 입은 옷이다. 천을 안감으로 삼고, 한지로 겉감을 대는 것을 기본으로 한 종이의상은 <혈의 누>에서 한차례 선보인바 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겉감이 되는 종이 마다 전체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독특한 한지의 질감은 물론, 그림이 걷고 있는 듯한 독특한 미를 발산한다. 배우들은 단 한 벌뿐인 귀한 종이의상을 입은 덕분에 옷이 상할까 극도로 신경을 쓰며 연기에 임해야 했으며 스탭들은 한 여름 무더위 속에서 종이의상이 땀에 젖을까 배우 곁에서 부채질을 해대며 의상 보호작전에 나서는 등 종이의상은 배우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다. 종이의상은 제작에만 한 벌당 3명이 꼬박 한 달 밤낮을 들여 완성해낸 땀과 열정의 산물로 가격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 한편 장녹수의 녹색 치마에 다홍 저고리는 비단 원단 전체에 봉황 문양의 자수를 입혀 화려하면서도 권위감을 드러내는 의상으로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희대의 요부라 불린 장녹수는 팔색조를 연상시킬 만큼 화려한 색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각각의 색감이 어우러지도록 저채도 저명도로 색감을 조정하는 등 고증과 영화적 상상력의 조화는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한층 돋보이게 해준다.
기타 인물들은 각각의 주인공 캐릭터에 맞춰 주연배우들은 물론 궁인에서 저잣거리의 군중 의상까지 손수 제작하는데 장장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6백 여벌의 의상을 완성해냈다고 한다.
8. 연산군을 위한 변명 -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연산군은 진정 폭군인가?
최근 일부 소장 학자들이 연산군 치세의 제반 정책과 통치 이념 등을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 고조와 이에 부응키 위한 소장학자들의 활발한 연구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다 할 수 있겠다. 그동안 폭군으로만 알려져 온 백제의 의자왕과 고려의 궁예, 조선의 광해군 등은 이들 소장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이미 상당수준 복권된 상태다.8)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산군에 대해서는 기존의 ‘폭군설’을 반박할 만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기존의 사료를 중시하는 학계의 전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산군 일기>는 연산군에 대한 악의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산군과 관련한 <중종실록>의 기록 역시 별반 차이가 없다. 만약 실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연산군은 미치광이이며 폭군이라는 지탄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승리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 않을까.
반정세력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엄연히 그의 신하들이었다. 신하가 주군을 몰아내는 것은 결코 칭찬 받을 일은 아니다. 반전 세력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군을 극악무도한 폭군으로 몰아세웠을 개연성이 크다. 그렇다면 중종반정이 진정한 반정인지, 아니면 반정의 가면을 쓴 반역인지를 확인해 보려면 <연산군 일기>와 <중종실록>을 정밀하게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왕보다 제왕의 풍류를 즐겼고, 왕권 강화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는 점과 연산군의 폐위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9. 나가는 말
국사가 결정되는 권력의 최정점인 동시에 정치적 음모와 암투의 중심지였던 조선시대 궁궐. <왕의 남자>는 궁에 기거하면서 왕이 爾(이: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호칭)라 부르며 아꼈던 조선최초 궁중광대를 주인공으로 중신들의 비리, 조정과 왕의 힘겨루기 등 화려한 궁궐 이면에 감춰진 권력의 양면성을 천한 광대들의 놀이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왕의 남자>가 보여주는 궁궐은 일반 백성보다 미천한 신분인 광대들이 넘볼 수 없는 성역이자 광대들보다 자유롭지 못한 인간군상의 집합소다. 화려한 연회에서도 왕과 중신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중신들 사이에서도 권력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다. 궁중에서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오로지 광대들뿐이었고, 그들은 현대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인간상이 아닐까 싶다.
허공 위의 외줄에서 천하를 얻은 것보다 자유로웠던 광대 장생과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하늘같은 절대 권력자 왕, 연산. 신분은 물론 모든 것이 전혀 다르지만 자유를 열망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광대와 왕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흥미로운 긴장감을 더하고, 권력의 음모와 암투 속에 펼쳐지는 탄탄한 드라마는 강한 울림과 메세지를 전한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는 상반된 인간 내면의 본성과 욕망이 충돌하는 갈등구조를 시대극의 옷을 빌어 이야기하는 <왕의 남자>는 사극이면서도 현대인들이 가장 고민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인물들의 팽팽한 갈등구조 속에서 전해지는 영화적 긴장감 끝에 <왕의 남자>가 선택한 화려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비극적인 결말은 관객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재위기간 1494~1506년)은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후 1506년 병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희대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은 자기 손으로 성종의 후궁을 죽이고, 조모 인수대비를 구타하는 등 패악적인 행동으로 역사의 지탄을 받아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실록으로 전해지는 위에서 열거한 연산의 행동을 자신의 생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의 후궁들에 대한 분노의 결과로 그리고 있다. 연산은 왕으로 즉위한 후 폐위된 생모의 신원을 모색하고자 하지만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자신의 분노를 광대들을 이용해 표출한다. 그리고 왕을 내세워 권력을 휘둘렀던 요부로 알려진 연산의 애첩, 녹수는 <왕의 남자>에서 왕의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여자’로 그려진다.
이들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운명에 순응하고 부딪히며 삶을 영위한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왕이 아닌 천한 광대로 태어나겠노라 고백하는 장생의 외줄타는 장면은 광대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왕, 왕을 바라보는 한 여자를 주축으로 역사와 허구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흥행 기록과 함께 한국 영화사에 오래도록 회자 될 일이다.
<참고 자료>
1. 원안영화 <왕의 남자>, 김현정, 예담, 2006
2. 희곡집 <이>, 김태웅, 평민사, 2006
3. 한국 연극사 연구, 사진실, 태학사, 1997
4. 연산군을 위한 변명, 신동준, 지식산업사, 2006
5. 기타 인터넷 자료 및 경향신문, 2006.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