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된 조형물은 높이 10미터가량의 스테인리스 재질이다. 영화관 지붕 밑에 있는 구름다리에 서서 바라본 조각상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여인으로 보인다. 마치 아름다운 아테나 여신이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듯 하다. 호기심에 가까이 보려고 광장으로 내려갔다.
거대한 높이의 작품이라 좀 떨어진 위치에서 올려다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표지에는 작품명과 작가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재직했던 독일 작가 랠프 산다, 교수의 ‘여인—새 변신’의 작품이다. 독일 조각가는 눈길을 빨아들이는 환상적인 신비함을 마음의 각도에 담아서 조각으로 표현한 것 같다. 단단한 철에서 나타난 부드러움은 작가만의 기법이라 여겨진다. 바라보는 내내 그의 예술성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동안은 조각공원에서나 건물 앞에 설치된 조형물을 건성으로 보았던 터다. 거울 같은 금속 면에서 수영강 물이 흘러간다. 물살 따라 흐르는 햇살도 눈 부시다. 스테인리스가 풍겨내는 차가운 금속이 따뜻한 자연의 풍경을 섬세하게 담아내었다. 해 질 녘 석양과도 조화를 이루어 오묘한 빛을 발산한다. 웅장하고 화려하다. 탄성의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형태는 달라진다. 우아한 여인이었다가 옆으로 비켜서면 한순간 갈매기로 변신한다. 또 다른 방향에서는 활짝 펼친 새의 날개가 백색 한복 소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어느 한복디자이너가 세계 패션 무대에서 독특하게 디자인하여 발표했던 개량 한복 드레스가 떠오른다. 그때 보았던 우아한 한복의 선과 새의 웅장한 비상을 조각에 그대로 담아 녹여낸 것처럼 보인다. 한국 여인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했지 싶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남성의 신체적 역동성을 살렸다면 랠프 산다는 화려한 여인이 또 다른 생의 변신을 꿈꾸는 마음을 스테인리스로 나타내었다.
예부터 갈매기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땅과 바다를 연결해주는 동물이기도 하다.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은 여인의 보편적 꿈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매체 또한 인간의 마음과 잇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영화를 본 후일까, 시각의 비밀을 가진 미술 장식품이 더욱 발길을 붙잡게 한다.
작품은 영화의 전당의 특이한 건축미와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누구라도 이 건축물을 본다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뛰어난 조형성과 해체 주와의 건축 미학이 표현되어 건축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부산 예술작품의 하나라 한다. 이처럼 광 장에 설치된 스테인리스 조각 작품도 영화의 전당에 걸맞은 상징이 될 미술 장식품이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간혹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스테인리스는 일반 강철에 비해 쉽게 변하지 않는다.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해 위생적이며 관리가 쉬워 주방 기구로 많이 쓰인다. 깨어지지 않는 강한 재질이라 산업용 재료나 자동차 부속품과 건축 재료로 사용된다. 내구성이 좋아 미려한 제품 표면의 고급화에 기여한다. 조각가들은 작품 소재로 금속이나 석재와 나무 등을 사용하지만 그중 스테인리스는 깔끔하고 오랜 시간에도 변형되지 않으며, 녹슬 염려가 없어 야외 상징 조형물로 선호한다.
오래전이다. 종가인 큰집에는 모양을 달리하는 놋그릇이 많았다. 제삿날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큰어머니와 엄마는 반닫이에 보관했던 색이 약간 변한 누런 놋그릇을 마당 덕석 위에 늘어놓았다. 그 시절 자주 다가오는 제사 준비로 놋그릇 닦기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먼저 깨어진 기왓장을 빻아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어 물에 으깬다. 그리고 볏짚을 뭉쳐 기와 가루를 묻혀 놋그릇을 닦기 시작한다. 잘 닦아진 놋그릇이 반질반질 빛나는 광택은 황금보다 더 찬란했다.
요즘 어느 가정이라도 스테인리스 주방 기구 몇 개쯤은 부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싶다. 지금은 스테인리스라 부르지만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스텐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릇 장수가 마을에 왔다. 닦지 않아도 물로만 씻으면 한결 반짝이며 녹이 슬거나 변하지도 깨어지지 않는다는 스테인리스 그릇 장사의 입담에 동네 아줌마들이 혹하고 말았다. 긴 세월 그릇 닦기에 지친 온 동네 아줌마들이 그릇 장사에게 놋그릇을 내어주고 변하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과 바꿔버렸다. 큰엄마와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큰엄마는 결혼할 때 통영에서 유명한 명인에게 특별히 주문했다는 멋진 삼층장에 부착된 나비 장석까지 떼어주고 스테인리스 장석으로 갈아 끼웠다. 그 시절 흔치 않은 모양의 귀한 놋 장석이었다.
조각 작품에 표현된 갈매기는 부산광역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가 있어 유행가 가사에도 부산갈매기로 구성지게 불리는 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연결해주는 갈매기의 이미지가 더욱 돋보인다. 영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조각 작품이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듯,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 세계와 인간의 마음을 연결하게 해 주듯, 그런 점에서 둘은 공통점이 있다.
제주 한라산 윗세오름에 올랐을 때다. 백록담 외벽 사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계곡을 자유롭게 나는 새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마도 독수리로 짐작했다. 그 순간 나도 새로 변신하여 날개를 활짝 펼쳐서 거침없이 창공을 훨훨 날고 싶었다. 살다 보면 지치고 힘겹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던 순간들은 셀 수 없었다. 하지만 던진다고 벗어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삶이 아니다.
영화관 광장 조각상 앞에 선다. 스테인리스 조각 작품에 수영강 변의 저녁 풍경이 걸린다. 그 속에 한 마리 새가 황혼빛에 반사되어 날개를 퍼덕인다.
첫댓글
데이빗님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