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 무저갱 (3)
육신의 피로에 어둠의 공포와 절망을 잊을 만치 깊이 잠들었던 낭자들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놀라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켰고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낭자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데 또다시 몇 번의 굉음이 울려왔다. 일시에 굳어진 낭자들의 표정은 굴이 무너지고 있다는 하나였다.
남궁상화가 얼른 바닥에 귀를 대고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하자 낭자들 모두 같은 자세로 엎드려 귀를 바닥에 대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 작은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이어지는 굉음에 놀라 몸을 일으키고 서로를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갔다.
남궁상화만이 계속 귀를 기울였고 굉음이 이어지고 그치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굉음은 바닥에 귀를 대지 않아도 절로 들릴 만큼 컸지만 연이어 들리는 소리에 모두가 질려 갈 때 남궁상화는 귀를 떼고 일어나며 말했다.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바위가 구르고 무너지는 소리는 분명하니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남궁 언니,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면 누군가 일부러 내는 소리라는 말씀이십니까?"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드린 것은 소리가 자연스럽지 않아 드린 말씀이에요. 산사태가 일어날 때를 생각해보면 바위가 구르는 소리는 점차로 빨라지고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들리는 소리는 무너지거나 구른다기보다는 퉁기는 듯한 느낌이 강한 것을 보면 마치 누군가 장법이나 권법으로 두드리는 것 같이 느껴져 드린 말씀이에요."
남궁상화의 말에 낭자들은 스스로 들은 소리를 생각해 보고 남궁상화의 말이 맞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하지만 제대로 가문의 무공을 익힌 남궁상화 외에 다른 낭자들은 무공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고, 팽영로의 경우에도 팽가에서 의무적으로 전수하는 몇 가지 기초를 익히고 있을 뿐이어서 사실 무인이라 부르기에는 맞지 않았다.
송화가 그나마 남궁상화의 말을 이해하고 물었다.
"권법과 장법으로 바위를 쳐 저런 소리를 낼 사람이 있을까요?"
남궁상화는 송화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강호의 이인들 가운데는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많으니 바위를 깨트리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있을 테지만, 이곳이 동굴임을 감안한다 해도 우리가 들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는 장담하기 어렵지요. 소매 역시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을 만나보지 못해 자신하지는 못해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무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되어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팽영로와 붙어 앉아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 설청청이 두렵다는 듯 말했다.
"남궁 언니 말씀대로라면 무공의 강약을 차지하고라도 누군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차라리 동굴이 무너져 수치를 당하지 않고 죽는 것이 났겠군요."
"혹시 우리를 이곳에 밀어 넣으라 지시하던 사람이 아닐까요?"
대사령 척장도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었는지 초롱이 묻자 모두들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남궁상화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자는 아니라 생각해요. 그들은 이곳을 무저갱이라 불렀고 혈도도 대충 잡은 채 밀어 넣었어요. 이곳에 들여놓은 순간 죽은 목숨이라 여기는 것 같았으니 그들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지금 소리를 만든 무인은 최소한 그들과 같거나 더 강한 무인이 분명해요."
설청청은 다시 남궁상화의 말에 의문을 갖고 물었다.
"언니 말씀대로 그런 강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들에게 져서 이곳에 빠졌다는 말씀이에요?"
"강호에는 온갖 계교가 판치고 있으니 숨겨진 과정은 몰라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요. 부디 그 사람이 사내가 아니거나 선한 사람이기를 바래야 하겠지요."
남궁상화는 걱정을 덜기 위해 말하면서도 장법이든 권법이든 간에 결코 여인의 몸에서 나올 수 없는 웅혼함이 있었다는 것은 감추었다.
초롱이 눈에 힘을 주고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먼저 숨을 곳이나 나갈 곳이 있는지 찾아봐요. 아가씨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누군지는 몰라도 어둠 속에서 바위에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머지않아 이곳으로 오지 않겠어요."
팽영로는 초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청청의 손을 이끌고 물이 흐르는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말 한마디 상의 없이 움직이는 두 낭자에게서 고개를 돌린 송화가 남궁상화를 바라보자 남궁상화는 세 낭자에게 지시하듯 강하게 말했다.
"송화 언니가 초롱이와 안쪽을 살펴주세요. 소매는 사월이와 물길을 따라 아래쪽을 살피도록 하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송화가 초롱과 함께 안쪽을 살피러 움직였다. 송화는 어둠이 두려워 깊은 곳을 살피지 않았지만, 이제는 숨을 곳을 찾아야 하고 혼자가 아니어서 용기를 내었다.
송화와 초롱은 어두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가 더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뒤돌아서서 어둠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며 살폈다. 동굴은 터무니없이 넓기만 했고 몸을 숨길만 한 구석이나 작은 굴은 얼마든지 곳곳에 널려있었다.
초롱은 어둠 속으로 들어와서는 다시 두려워진 것인지 송화의 뒤만 따랐고 한마디도 스스로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숨을 곳을 찾자 하던 그 당찬 모습은 어디에 둔 것인지 송화는 초롱을 탓하기는커녕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었기에 좋았다.
한 시진 정도를 돌아보다가 송화는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빛의 가장자리는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고, 사실 멀리 움직인 듯해도 그리 넓은 곳을 보지도 않았는데 한 시진이나 걸린 것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가며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려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 초롱은 또 무엇이 불안한지 송화를 바라봤다. 송화는 초롱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모두가 원해서 둘러보기는 했지만 아마도 나갈 길은 없을 거예요. 소매가 살펴봤는데 이곳에 온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라고 왜 나갈 길을 찾지 않았겠어요. 어쩌면 나갈 길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거예요."
"송화 언니 그러면 우리도 그 사람들과 같이 죽어야 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좀 더 희망이 있어요. 지금 우리는 한 사람이 아니고 여섯 사람이 함께 있으니 아무래도 조금은 낫지 않겠어요."
초롱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어떻게든 돌아가고 싶어요. 팔려 왔으니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살아있다는 소식이나마 전하고 싶어요."
"기다릴 사람이 있군요?"
초롱은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송화는 초롱의 그런 모습이 부럽고 보는 내내 마음이 훈훈해졌다. 꼭 나갈 수 있어서 초롱이 소망하고 초롱을 기다리는 누군가와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어두워져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보며 빌었다.
남궁상화와 사월이 돌아오고 송화가 두 사람의 뒤를 보자 사월이 얼른 말했다.
"두 분 아가씨는 따로 계시겠데요."
남궁상화는 사월을 힐긋 돌아보고 송화에게 눈길을 주었다. 송화도 남궁상화가 무엇이 궁금한지 알기에 얼른 말했다.
"멀리 가지는 않았지만 쉬거나 몸을 숨길만 한 곳은 많았어요. 특별히 넓은 곳은 찾지 못해 모두가 함께 들지는 못해도 두 사람 정도 들 만한 곳은 얼마든지 곳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어요."
"음~, 이곳은 아무래도 누가 오면 바로 노출되니 우선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군요. 소란을 피우던 사람과 먼저 만나서 좋을 일은 없을 듯하니까."
송화는 말을 하며 바라보는 남궁상화의 눈길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누가 되었든지 알몸의 여인이 남자 앞에 드러나 보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무공의 고수가 분명 할진대 부처가 아니고서야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다.
"너무 어두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늘 밤은 이곳에 머물고 밝은 뒤에 옮겨가시지요."
남궁상화는 누가 되었든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여기고 한쪽으로 가 좌선에 들었다.
사월이 얼른 남궁상화를 따라 옮기려 하자 송화가 잡으며 말렸다.
"사월낭자, 남궁 언니께서는 좌선에 들었으니 건드리면 안 돼요."
사월은 송화의 말에 남궁상화가 좌선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초롱이 곁에 웅크리고 누웠다. 무저갱의 깊고 긴 밤은 그렇게 또 시작되었다.
*
허인회는 혈영기가 나가고 들어오는 동안 점점 강해지며 다스리기가 어려워지자 혈영기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몸 주변을 돌게 두고서 보리바라밀밀진경을 다시 살폈다.
오히려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힘들었지만 이대로 끝없이 강해진 혈영기를 받아들이다가는 언제고 혈영기의 폭주에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최대한 들고 나는 것을 늦추며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다.
허인회가 보리바라밀밀진경을 되뇌며 밀경상의 여러 해석을 적용했지만 허인회를 감싸고 도는 혈영기의 기세는 늦춰지지 않았다.
혜원 큰스님께서 세상을 위해 늘 외우시던 신묘장구대다라니 경문도 살피고, 무수히 많은 도경과 불경, 유학의 경전들이 허인회의 머리를 스쳐 갔다.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 어둠과 관계없이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추었고 허인회의 사념만이 남아 그 많은 경전을 하나둘 버려 나갈 때 허인회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허인회의 몸을 감싸고 돌던 혈영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붉기만 하던 기가 푸른 기를 만나 더욱 어두워지고 어느 순간 밝은 빛이 스며들어 빛을 띤 구름처럼 보이다가 붉은 기운과 서롤 섞이지 않고 길게 가늘게 늘어져 고리를 만들었다.
붉은 고리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그 위로 푸른 고리가 올라서며 돌았다. 붉고 푸른 고리가 손가락만큼 굵은 환을 이룬 데 반해 빛의 고리는 실처럼 가는 고리를 만드는 데 그쳤다.
어느 순간 황금색 누런 고리가 생겨나 빛의 고리 위에서 움직이자 붉고 푸른 고리가 엮여지며 더욱 굵어지고 진해진 채 위로 솟구쳐 올랐지만 실처럼 가는 빛의 고리를 넘지는 못했고, 누런 황금색을 띤 고리도 아래로 밀려들었지만 그 역시 밝은 빛 선을 넘지 못하고 퉁겨졌다.
허인회의 몸은 몸속의 모든 기를 내보내자 혈영기를 받아들여 부풀어 올랐던 때와는 달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얼굴은 붉은색을 띤 채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허인회는 끝없이 좌선으로 기들을 잡아둘 수가 없었기에 다시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참혹하리만치 고통의 연속이었다.
몸 안으로 다시 들어선 기들은 모두가 주인이라는 듯 허인회의 몸을 아니 기경팔맥을 차지하려 들었고 서로가 곳곳에서 부딪쳤다. 몸통은 다시 부풀어 올랐고 기들의 기세 싸움에 허인회의 고통이 가중되자 몸은 스스로 움직여 권장자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바위고 물이고 가리지 않고 부딪쳐갔다.
허인회의 몸통이 부딪치는 곳마다 바위는 가루가 되어 날리고 동굴은 곧 무너지려는 듯 굉음에 굉음을 더해갔다. 허인회는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 못했다. 커다란 붉은 돼지 오줌보가 마치 격구를 보듯 퉁겨졌고 허인회는 주화입마의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허인회의 몸은 전해지는 고통에 경악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허인회는 고통의 순간마다 잠시 찾아오는 이성에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찾아야 한다고 외쳐댔지만 무엇을 더 더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