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마16 :13-20]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십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민들이 나와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의미로 - 호산나를 외치면서 –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때 호산나 함성으로 인해 -온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동했다는 헬라어 ‘ἐσείσθη 에쎄이스메는 – 지축이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예루살렘 성민들의 그 함성 때문에 –예루살렘 지축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 그런데 불과 닷새 후에 – 똑같은 장소에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똑같은 사람들로 인해 - 또 한 번 - 예루살렘 지축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함성 때문이었습니다. -함성을 뜻하는 헬라어 크라우가죠 κραυγάζω는 – 있는 힘을 다해 - 소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과 닷새 전에 –예수님을 환영했던 예루살렘 성민들은 -놀랍게도 있는 힘을 다해 자신들이 그토록 환영했던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닷새 전에 –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있는 힘을 다해 – 예수님을
환영했으나 -예수님이 자신들의 세상적인 뜻을 이루어주지 않자 – 호산나를 외쳤던 입술로 -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 예수님을 죽이라고 – 외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 방법대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 결과가 나쁘면 – 제일 먼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죽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방법대로 자기 욕망대로 살다가 그 결과 나쁘면 – 거기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면서 – 신앙이 멀어집니다. - 참으로 바르지 못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 ‘세상 사람들이 - 나더러 누구라 하느냐?’ - 이에 대해 제자들이 말하기를 –
세상 사람들은 - 예수님을 - 세례요한 – 또는 엘리야 – 또는 예레미야와 같은 –
선지자 중 - 한 명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 선지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 그들은 -
제대로 입지를 못했습니다. -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의 옷은 모두 형편없었고 – 그들의 몰골은 초라하고, 수척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본다고 대답한 것은 -예수님의 몰골과 -입은 행색을 볼 때 – 그저 잘 봐줘서 – 선지자 중 하나밖에 안 되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 권세 있는 지도자 –왕족으로는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 말고, - 너희들에게 나는 누구냐? - 이때 베드로가 그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장 16절]
헬라어 원문에는 –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할 때 - 주님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 수 Συ‘- 당신은’ -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구도 아니고, 바로 당신이 메시아요, - Συ ει ο χριστος 수 에이 호 크리스토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 몰골이라면, - 그저 선지자 중 하나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보잘것없는 행색의 예수를 가리켜서 - 당신이 메시아요, - 당신이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마태복음 16장 17절]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지금 주님께서 –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 이같은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게끔 –
이 사실을 너에게 알게 해주신 분은 –너의 혈육의 아버지가 아니라 -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시라는 겁니다. -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8절]
시몬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 게바는 아람식 이고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 그리고 뜻은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여러분, 헬라어로 베드로를 -‘Πετροος, 페트로스’라고 합니다. - 그런데 페트로스는 –바위나 반석, -혹은 암석을 이루는 한 조각을 뜻합니다. - 가령, 사도들이라는
큰 바위 –사도들이라는 큰 반석 중 -한 조각 –한 사람이 -페트로스 -베드로입니다.
한 덩어리 반석을 뜻하는 헬라어는 – 페트로스가 아니라 -‘πετρα, 페트라’입니다. -페트라는 –바위나 반석, - 혹은 암석의 한 조각이 아니라 - 한 덩어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조각의 ‘페트로스’가 합쳐서 – 한 덩어리의 ‘페트라’를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페트로스’ –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는 -‘페트라’들이라면, -그 페트라에 속한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 없이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고백 위에 -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교회의 초석으로 삼으신다면, - ‘너는
페트로스 –너는 반석이라, - 내가 이 페트로스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이렇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너는 페트로스라 'Πέτρος, 너는 반석이라. - 그리고는 페트로스가 아니라, - 내가 이 페트라 πέτρα 위에 -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이 주장하듯이 –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 교회의 초석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고 – 베드로가 고백한 – 반석과도 같은 고백을 하는 페트라 위에 –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이라면, - 그가 누구이든 -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음부를 가리키는 헬라어 ἁδης 하데스는 –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말합니다. - 그리고 – 권세를 뜻하는 헬라어 πυλη 퓰레는 – 문이나, 입구를 뜻합니다. -
그러니까, 음부의 권세는 - ‘음부의 대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 음부는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는 -
너의 그 반석과도 같은 믿음의 고백 위에 – 내 교회를 세울 것인데 - 죽음의 입이 주님이 세운 교회를 - 결코 삼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 당연한 거죠.
여러분, 죽음을 이기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신 곳이 교회인데 – 어떻게 죽음의 입이
교회를 삼킬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죽음을 깨트리시고 이기신 분을 – 죽음이
무너트릴 수 있겠습니까? - 결코 죽음의 대문은 - 주님을 삼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전 세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 바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시고 –이 땅에 강림하신 -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합니다.
비전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도 –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 ‘주님이 그리스도시고 – 성자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교회를 이루었는데 – 그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면, - 그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 이 고백 속에 담겨있는 - 중요한 핵심을 놓쳤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핵심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6장13절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을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을 - 벳세다 벌판에서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 저 외딴곳이나, - 심산계곡에서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라는 곳에서 –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인 가이샤르를 위해서 도시를 지은 겁니다. -즉, 황제가 모든 것을 주관하는 – 황제가 신인 - 황제의 도시입니다.
2천 년 전 로마제국에서 –로마제국의 황제의 칭호나 -황제의 이름을 붙인 도시는 여럿 있었으나 -황제의 칭호나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조건들 중 하나는 – 도시어야 합니다. - 원형경기장이 있고 –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과 – 도로가 정비된 대도시이어야 합니다. - 그리고 그 대도시의 가장 높은 언덕이나 -그 대도시의 가장 중심지에는 –반드시 황제의 신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황제는 -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신이라는 겁니다. - 황제 자신도 -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 3년 동안을 이스라엘 지역을 다니시다가 –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 황제의 도시에 들어가셨을 때, - 제자들에게
물으신 겁니다. - ‘너희들한테 내가 누구냐?’
그리고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그 도심지 속에서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 ‘당신이 그리스도시오, -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저 황제의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 로마제국의 황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Συ 수 - 당신 - Συ ει ο θεος 수 에이 호 데오스 – 바로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삼권을 장악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황제가 –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 비록 초라한 옷을 입었을망정 – 몰골이 초라할망정 - Συ ει ο χριστος 수 에이 호 크리스토스 – 당신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 시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 주석을 가한다면 - 나는 -이 세상의 것 – 자기 욕망의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 황제의 길을 좇지 않고 – 나는 – 나사렛 예수 – 당신의
길만이 생명이요, 진리라는 것을 알기에 – 당신의 길만 좇겠습니다. - 이 뜻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황제의 길을 오늘까지 좇던 사람이 –황제의 길을 등지고 좀 덜 먹고, - 좀 덜 입고, - 지금보다 좀 못살게 되더라도 –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생명의 길로 알고 -나는 그 길을 좇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의 길을 등지고, - 황제의 길을 좇은 결과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회는 -이미 음부의 권세에 침범을 당한 겁니다. -여러분, 이러한 교회는 - 세상을 못 살립니다. - 교회가 생명이 없는데, - 어떻게 세상을 살립니까?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향해 분명히 고백을 했습니다. -저 황제가 인간의 신이 아니라 - Συ - 예수, 당신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그런데 이 고백을 한 직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누구인지 제자들이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당신의 구원 사역에 대해서 처음으로 밝히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거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살아날 거다.” -처음으로 밝힌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밝히시기 전에 - 베드로가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
Συ ει ο χριστος 수 에이 호 크리스토스 – 당신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이시고 -
Συ ει ο υίος θεου 수 에이 호 휘호스 데우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구원 사역을 말씀하시면 – 베드로는 수긍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 ‘네, 알겠습니다.’ 하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마자 –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 마태복음 16장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붙들다는 헬라어 프로스람바노 προσλαμβάνω는 - 본문 속에서의 뉘앙스는 – 베드로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낚아챈 것입니다.
그리고 항변하다를 가리키는 헬라어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는 – 꾸짖는다는 겁니다. 야단 친다는 겁니다. 훈계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을 야단 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 예수님의 옷자락을 낚아채면서 – 야단을 치기
시작한 겁니다. - 여러분, -제자가 스승을 야단칠 수 있겠습니까? - 더더구나 지금 베드로는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야단을 칩니다. - 야단 친 내용이 무엇인가? -
여러분, 지금 이 말은 –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있으니까, -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존댓말로 한 것처럼 되어있으나 - 헬라어에는 존댓말과 반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 이 경우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을 하려면, - 반말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반말로 한 겁니다. - 예수님의 옷자락을 낚아채면서 - 이렇게 야단을 친
겁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 어떻게 너한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왜 베드로가 이랬을까요? - 입으로는 당신이 그리스도시오,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는 은혜는 입었는데 – 마음은 여전히 - 황제의 논리로 차 있는 겁니다.
황제의 논리 입장에서 볼 때 –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난을 받고 – 못 박혀서 죽어? 그것은 말도 안돼. -그러니까 너한테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나. -그러니까, 그런 소리하지마.‘ - 이러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흔드는 겁니다. - 마태복음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세상 적인 논리인 - 황제의 논리로 예수님을 꾸짖으면서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야단치는 베드로를 향해 –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 교회는 항상 - 주님의 제자와 - 사탄의 경계선에 있을 수 있습니다. -
내가 입으로는 - 주님이 주인이라고 고백할 때에는 – 교회의 일원인 것 같은데 –
그 고백한 입을 가지고 – 황제의 논리를 좇아갈 때에는 – 세상이 전부인 양 하고 살아갈 때에는 -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 사탄이라고 질타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헬라어로는 스캔달론 σκανδαλον 이라고 하는데 – 우리말로 하면, 올가미라는 의미입니다. -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사람을 - 사탄의 덫에 빠지게 하는 올가미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 이런 뜻이 됩니다. - “네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 사람의 일을 마음에 두는구나.”
지금 이 본문 속에서 –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 예수의 길을 좇는 겁니다. - 그렇다면, 사람의 길은 무엇입니까? - 황제의 길을 좇는 겁니다.
여러분, 황제의 논리를 좇는 것은 - 내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좇는 것은 – 자기희생과 - 자기 헌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된다면, - 삶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 지금보다
못 살 수도 있습니다. -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습니다. - 이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만이 –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자리 – 좀 더 힘이 있는 자리에 있으면, - 아래 사람들에게
군림하려고 합니다. - 예수님께서 지금 이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걷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황제의 법칙은 -높은 사람이 위에서 군림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생명의 법칙은 – 강한 사람이 - 약한 사람을 품고, 섬겨주는 겁니다. - 이것이 생명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기를 품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일입니다. -베드로가 멀찍이에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드로에게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저렇게 무기력하게 잡혀가셔도, -마지막에는 신통술을 부리시겠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시고 –마귀도 쫓고 – 태풍도 멈추게 하신 분이 – 분명히 가만 안 놔두실 거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뜰에 들어가셨을 때 –뺨도 맞고, 침 뱉음도 당했는데도 신통술을 부리시지 않으셨습니다. - 황제의 논리 속에 있는 베드로가 생각할 때 –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겁니다. - 예수님에 대한 희망도, 소망도 없어진 겁니다.
그때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에게 - ’너, 저 예수하고 같은 패거리지.‘ 하고 묻자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 두 번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부인했다가 - 세 번째에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 모른다고 맹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황제의 논리로 볼 때 – 희망도, 소망도 없기에 -끝났다고 생각한 겁니다. -저렇게 힘이 없고 –저렇게 무기력해 가지고서 – 무슨 구원자냐는 겁니다. -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 그 결정적인 순간에는 –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황제의 법칙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불안전한 모습은 이것 뿐이 아닙니다. - 요한복음 마지막 장 – 마지막
단락이 이렇습니다. - 요한복음 21장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 이제 네가 두 팔을 벌리면, - 다른 사람이 네 허리띠를
동여 메우고, - 네 의지하고는 상관 없이 – 너를 끌고 갈 거라는 말은 – 베드로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 주님을 위해 순교할 거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 주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 순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자 –고개를 돌려 요한을 주목하여 보면서 – 이렇게 물었습니다. - 요한복음 21장 21절을 보면,
’예수님, 제가 순교 당해야 하면, -요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며 죽어야 한다면, -요한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죽겠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 ”베드로야, 내가 재림할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한들 –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니? - 그것은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 그러니까, 나를 따라와.“
21장 23절을 보면, -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 ’내가 요한을 재림할 때까지 살려둔다 할지라도‘ - 가정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이 – 삽시간에 제자들 사이에서 – 요한은 안 죽는다고
소문이 퍼진 겁니다. - 여러분,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 거짓 소문이 퍼진 겁니다.
그렇다면 이 거짓 소문의 최초 발설자가 누구입니까? - 베드로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교훈입니까? -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사도행전의 막이 오릅니다. -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항상 - 경쟁하고, 모함하고, - 질투하고, 시기하고 – 거짓 소문이 나기 쉬운 집이니까, 조심하라는 겁니다. - 이 교훈을 주고, - 사도행전의 막이 오릅니다.
이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요,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 몸과 마음은 황제의 논리를 쫓고 – 서로가 자기 잘났다고 다투고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줄행랑 치고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도 – 요한과 베드로 간의 경쟁 구도가 생기고 – 삽시간에 거짓 소문이 퍼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하던 사람들이 – 언제부터 예수님을 좇는 -참된 교회를 이룰 수 있었는가?
사도행전 2장에서 –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 그 사람들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쫓을 때 –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 자기들을 부인하고,-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면서 – 참된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교회를 세우는데 – 이분들이 교회를 세울 때에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 은혜 가운데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세운 모든 교회가 – 예수님이 걸었던 길을 쫓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가 무엇입니까? -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에 대한 - 지적과 해답을 준 편지가 고린도서입니다.
그때 고린도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 음행 – 불륜이죠? - 파벌 다툼 – 바울파 – 아볼로파 – 게바파 – 거기에, 주님께서 거저 주신 은사를 놓고, -
내가 영적으로 더 크다며, - 서로 자기를 과시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나를 부인하고, -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문제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 열심을 다하고 있는데 – 그런데 우리가 모여있는 한국교회는 -왜 세상으로부터 –
질타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는가?
우리의 머리와 입으로는 – 주는 그리스도시오,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 황제의 논리를 쫓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삶이 180도 돌아서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명의 통로가 아니라 – 음부의 권세에 짓눌려 살아가는 겁니다.
습관적 신앙 속에서 - 황제의 길 – 세속화 된 길을 걸어간다면, - 주님의 뜻은
여러분과 멀어지는 겁니다.
디모데후서는 -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쓴 – 이 땅에 남긴 바울의 마지막
글입니다. - 디모데후서 4장 7절을 통해 –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선한 싸움이 무슨 싸움입니까? - 바울은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했습니다. - 그것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길이 무슨 길이겠습니까? -황제의 길을 등지고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그 길을 마쳤다는 겁니다. - 예수의 길을 걷는 그 믿음을 지켰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의 삶으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
우리 각자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주님이 세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며 –주님이 세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이 땅에서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는 – 닷새 후에도 변함 없이 –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환영하고 – 주님을 의지하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 2418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박았네 ...
==========================[기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 말씀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 우리는 모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 그래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주님, 이 시간 이후로 – 우리가 머리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 우리의 삶으로 이런 고백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때로 황제의 길을 좇아가려는 우리의 마음을 -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 단호하게 자기부인 하게 해주시고 –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 – 십자가의 길을 과감하게 걸어 나아가게 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비록 – 우리가 덜 먹고, 덜 입는 길이라 할지라도 – 그 길을 통해서만 –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 우리의 삶을 통해 터득하고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2천 년 전 –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 자기 뜻이 이루저지지 않자 - 호산나를 외쳤던 입술로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지만, - 우리는 끝까지 – 어떤 상황 속에서든 – 호산나를 삶으로 외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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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어떤 상황 속에서든 – 우리의 바른 삶으로 -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를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과 비전교회 위에 –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