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청지기같이
베드로전서 4:7~11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켜 왔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의 어울림 속에 있다는 뜻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초기의 공의회가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삼위일체 교리를 만든 것은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세기의 라틴 신학자인 힐라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하나님의 단일성이 다른 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한 분이지만 하나님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며,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한 분 하나님의 삶이 공동체적이었다”는 것입니다(로버트 루이스 윌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배덕만 옮김, 복있는 사람, p.119). ‘공동체적이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초월의 세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이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한 존재이십니다. 성령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던 나무들을 깨우는 봄바람처럼 불어와 하늘의 뜻을 품고 살도록 도우십니다. 다른 듯하지만 셋은 그렇게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는 사랑의 어울림 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과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 사이에서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아갑니다. 도대체 마음이 뭐길래 이렇게 마음 둘 곳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우리를 속일 때도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품은 때가 있었지만 긴 세월을 살아온 지금은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그렇게 신뢰할만하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욕망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익에 담백하지 못할 때,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할 때 매우 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또 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치권에서 연일 쏟아지는 말들, 유튜브 같은 매체나 SNS에 올라오는 말을 들으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온통 부정과 조롱과 저주의 언어가 넘칩니다. 적대감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들에 자주 노출되면 우리 속에 여백이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점점 가시 돋친 마음으로 변해 버립니다. 여백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허용되지 않는,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 세상에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의도된 합리화’ 혹은 ‘확증편향’이 사실이나 진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답답함이 제 마음을 사로잡을 때마다 칠레 출신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침묵 속에서>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제 열둘을 세면/우리 모두 침묵하자/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손도 움직이지 말자”
욕망에 이끌려 살아온 우리의 부박한 삶의 실상을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잠시 동안이라도 멈춰 설 수 있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것 같습니다.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싶은 시인의 비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어디론가 끌고가는 것에/그토록 열중하지만 않는다면/그래서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면/어쩌면 거대한 침묵이/이 슬픔을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내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그 열정에 잠시 거리를 둔다고 하면 내 이웃들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죄와 욕망으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주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우리 마음을 풍덩 던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라’는 사도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잡을 조’와 ‘마음 심’이 결합된 조심(操心)은 두리번거리며 살피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굳게 붙들라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고 새겨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조심은 마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가는 태도입니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은 거침없는 태도와 구별됩니다. 미리 속단하고 자기 추측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머물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hesitation)이라고 말합니다. 거침없이, 함부로 말하고, 속단하고 응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좀 조심스럽게,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머뭇거려야 여백이 생기는 겁니다. 함부로 말하는 이들은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성전 체제가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들을 천하보다 귀한 사람이라 여기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는 것조차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바로 그 마음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의 말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2:1)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서 환대의 공간을 만들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벧전 4:8)라고 말합니다. 죄를 덮어 준다(kalyptō)는 말은 있는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죄를 묵인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죄를 드러내 망신을 주는 일 그만두라는 말입니다. 망신 주기를 통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데 그것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가 변화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어깨에 걸친 채 뒷걸음쳐 들어가서 술에 취해 누워 있던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창9:23). 그런 삼가는 태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연대를 더욱 굳게 했습니다. 사랑은 바로 이런 것, 덮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잘 드러내는 사람은 실은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를 성찰할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사도 바울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갈6:1). 잘못을 사람들 앞에 까발려 망신을 주지 않는 것,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스스로 살피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성도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합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벧전4:9). 불평(gongysmos)은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것입니다. 불평은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한 공동체의 결속을 내적으로 허물게 마련입니다. 따뜻하게 대접하라는 말은 환대(歡待)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환대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을 찾아온 세 나그네를 정성을 다해 맞아들였습니다. 물을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고 계시면, 잡수실 것을 마련해 오겠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18:5). 자기에게 찾아온 낯선 사람을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기분이 상쾌해져서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이 마음이 환대의 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 또한 이 말씀을 상기하려고 노력합니다. 진심으로 저와 만난 사람들이 마음이 상쾌해져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낯선 두 사람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19:2).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13:1)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도 환대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세상에 있는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의 환대의 윤리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동료 인간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긍정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마음을 쓴다는 말입니다. 환대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드는 초석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성채>라는 소설에서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란 무엇보다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랑자에게 대문을 열어주고, 그의 목발과 지팡이를 한쪽에 놓아주며, 그를 평가하기 위해 춤을 춰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랑자가 길 위에 활짝 핀 봄을 이야기하면 자신 안에 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그가 자신이 떠나온 마을을 덮친 기근의 끔찍함을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기근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다.”(『생텍쥐페리의 문장들』, 신유진 엮고 옮김, 마음산책, p.48)
이런 친구가 한둘 있다면 우리 인생은 살만하지 않을까요?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읽은 두 편의 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어느 분이 미국 보스턴에 출장을 갔다가 묵었던 어느 호텔을 잊을 수 없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시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호텔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한 흑인 여성 때문입니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영화 ‘시스터 액트’에 나오는 우피 골드버그를 닮았습니다. 아침에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나긋나긋하고 그윽한 목소리로 테이블에 마련된 식기를 가지고 가서 음식을 담아오면 된다고 또박또박 말해주었습니다. 말투와 표정에 따뜻함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손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을 맞이하듯 대했습니다. 손님들도 그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체크 아웃을 하고도 그를 찾아와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공간을 따뜻한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의 일터인 동시에 성소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다음 날 호텔을 떠나면서 “당신은 이곳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그는 감동 어린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고 축복해주었습니다. 사무적일 수도 있는 한 장소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애의 장소로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충남 예산에 있는 50대의 부부 목회자가 운영하는 ‘살뤼(Salut- 친구)’라는 카페의 이야기입니다. 그 카페에는 목사님 부부가 직접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워 팔고 있습니다. 그들은 카페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첫째는 밀가루, 설탕, 버터, 치즈, 과일 등 모든 식재료를 최고 품질의 것으로 정량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들로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카페는 영업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두 분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손님들 가운데는 겸손하고 친절한 이들도 있지만 까다롭고 무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이 세운 두 가지 원칙을 기억하며 손님들을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쓸쓸한 표정의 여성 하나가 들어와 빵과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내린 커피와 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빵을 만든 과정과 커피를 내린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자 그 여인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라는 것입니다.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여성은 살아가면서 많은 서러움과 아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따뜻한 환대가 그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던 어떤 설움 혹은 얼음을 녹인 것이 아닐까요?
두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도 어루만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을 인정의 황무지로 만드는 이들도 있지만, 정성을 다해 세상을 아름다운 정원처럼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그런 환대의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자기 삶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꿈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서로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이후로 우리 꿈꿉시다. 내가 머무는 곳을 성소로 만드는 꿈 말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시가 녹아내리고 얼음이 녹아내리는 그래서 사랑과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꿈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