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백수

[바람]

가수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를 속으로 불러 본다. 낯익은 가사라 노래방에 가면 대충은 따라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어느 수필가의 책을 받아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읽어 보니 글 중에 대학입시에 떨어진 딸이 불렀다는 노래다. 그 실망스러운 날에 이런 노래를 불렀다니 나이 쉰이 훌쩍 넘은 난 반성 좀 해야겠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면서도 그게 쉽지 않았는데 이 노래를 새기며 더 힘 좀 내야겠다. 행복한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자신도 행복해지고 내가 행복하면 주위도 행복해진다지 않는가. 요즘 난 백수라서 자칫 위축될까 두려워서 이렇게 마음을 다질 일이다. 백수 심정을 내 딴엔 시라고 적어 봤는데 실은 이게 시가 되는지는 스스로 의문이라 아는 시인에게 물어볼 참이다.

"뜨겁고도 추운"

백수 된 지 한 달, 세상에서 툭

튕겨난 것 같아 시린 가슴 이기려

뜨끈한 여름을 걷는다.

하기 좋은 말로 추억 여행이다.

수십 년 전 영세받았던 명동 성당에 가서

몽당연필만 한 기도를 하고

어릴 때 학교길인 인사동에서 낮술 대신

국화차 한잔하며 신문 보다가

새 물길 생긴 청계천을 지나 제대 후

첫 직장이 있던 시청 근처로 세계적 도시라는

서울의 심장을 배부른 사자처럼 어슬렁거린다.

막을 자 없으니 온 땅이 내 것인데

서울광장 잔디밭에 큰 대자로 누워 있는

노숙자가 더 주인이다. 한때 나뭇잎 뒤에서

도시를 호령했을 매미 한 마리

덕수궁 돌담길에 널브러져 있다.

열흘 전인가 작품 합평회가 곤지암에 있는 유명도예가의 공방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수필동호회에서 듣고 바로 참가 신청을 했다. 두 풍경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으니 백수에게는 좋은 기회다. 합평회나 도예방을 언젠가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터라 미지의 여행처럼 설렜다. 합평회가 끝나면 도예방에서 자고 갈 사람은 편한 대로 하라는 이야기를 내심 바랬었다. 목구멍에 풀칠하기 급급한 백수에게 사치인 줄 알지만, 팍팍한 도시를 떠나 호젓한 곳에서 글로만 만났던 작가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어 보고 다음날엔 도자기 빚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일에 목숨을 걸라는데 이제라도 그런 방법은 없을까. 밥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나도 글을 공부하든 미술이나 도예를 배우든 예술 분야에 몰입해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고 싶은 일엔 밤을 새워도 즐거울 테니. 물론 하고 싶은 일에 충심을 다하면 금전은 부수적으로 따라온다지만 예술분야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가난을 두려워한다면 일찍이 예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바둑을 좋아하지만 지금 독을 품고 공부해도 프로 기사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된다고 해도 그걸로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 쓰는 도예가의 집은 역시 예술가다운 운치가 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정겨운 곳으로 널찍한 마당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평상이 여유롭고 시원한 물소리와 새소리가 만나는 울창한 숲이다. 주인의 연륜과 철학이 깊이 스며든 건물이다. 아니 작품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다. 겉모양은 현대식이나 내부는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다가 기품 있는 도자기들이 사방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고급 화랑에 온 듯하다. 처음 들어 보는 합평은 멋진 경험이었다. 수필가도 아닌 내겐 검정 고무신 신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색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것도 복이다. 합평 후의 음식은 도예가의 또 다른 수필이다. 어릴 때 시골 잔칫집 같은 정취로 얼음 띄운 콩국수에 옥수수와 떡, 깊은맛의 김치에는 주인의 정성이 가득 배어 있다. 살맛 나는 일이다. 값비싼 뷔페 저리 가라 다.

지난주에는 우연히 어느 가구 디자이너의 공방에 갔었는데 거기도 참 좋았다. 개성 있는 가구들이 즐비했고 음악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도 갖춰 있었다. 아무 때나 놀러 오라는 주인의 넉넉한 마음에 내 가슴도 넓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며 서글프기도 했는데 요즘은 철이 조금 들었는지 좋은 사람, 좋은 곳을 보면 든든한 친구를 얻은 것처럼 반갑고 기쁘다. 그래서라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를 제대로 배워야겠다. 늦은 밤, 가사가 기억나는 대로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뿌듯한데 양쪽 어깨가 근질근질하다. 곤지암 모기 맛이 엄청 매우니 자연에 다녀온 흔적이리라.

[김태조]

공감이 많이 가네요. 한 때 도시를 호령했을 매미 한 마리와 나...새로운 세계를 기웃거리는 ...

[바람]

그저 어떤 언저리에 두리번거릴 뿐입니다.

[돈오(이재선)]

몇 달 전 등산 같이 갈 때만 해도 백수가 아니었는데 정말 바람처럼 자유롭군요. 백수 과로사라는 말을 듣고 웃었지요.

[바람]

듣는 바람 춥습니다. ㅎㅎ 행복한 백수라 생각하는 것도 하늘에 고마운 일이지요.

[green120]

행복한 백수가 되고 싶기에 얼른 클릭했는데... ...여전히 생계는 발목 잡는 놈이군요

[바람]

제충전의 기회로 삼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