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의 농사법 / 이상인
세들어 사는, 집주인에게 빌린
다섯 평 남짓한 텃밭
뭘 심을까 궁리하는 사이
풀들은 자라 시큰둥한 무릎을 뒤덮고
숭숭 뚫린 들깨만 멀대같이 흔들렸다.
보다못한 집주인이 낫을 들고 덤볐지만
나는 스스럼없이 들이미는
풀들의 여린 머리채를 한번 잡아보곤
그만두기로 했다.
여치며 베짱이, 귀뚜라미 어린 놈들이
우두두 뛰어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네들이 베푸는 들깻잎 알싸한
초가을 연주회에 맨 먼저 초대받아
가장 앞자리에 앉기 위해
가끔 허전함으로 생의 한 귀퉁이가
바람벽처럼 무너져 내릴 때
내 방문 앞까지 내려와 위로해줄
자연 악사들의 풀빛 악보를 그려보며
나는 빌린 땅뙈기를
미련없이 다시 빌려주었다.
둥근하늘 / 이 상인
나미 한마리가 무밭을 뒤집는다.
손바닥 푸른 손금 안에, 생각을 낳는지
소리도 없이 몇 초씩 머물면서
내 등허리 간지럽다.
문득 어깨를 들썩여보니
누란 알에서 깨어난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얼마를 아슬아슬 디디며 견디어야
둥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나
나뿌끼는 생, 몇 장 독파하고 나니
펼치는 힘찬 나비의 날갯짓
허공에 물결무늬 투명하게 새겨진다.
깊은 상처 / 이상인
배롱나무들이
울컥울컥 꽃을 토해 내고 있다.
그래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제 몸 어딘가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처절하게 아름다운 꽃을 뱉어 낸다.
우리는 누군가 오래 견디다가
아프게 뱉어 낸 꽃들이다.
도라지꽃 / 이상인
도라지꽃을 보면 왠지
쓸쓸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가난하고 안쓰러운 얼굴들이
맑은 산골 물소리처럼
내 앞을 흘러 지나간다.
뻐꾸기 울음소리도 섞여 지나간다.
그이들은 하늘로 올라가서
모두 둥그런 별자리가 되어
눈을 깜박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승에서 쓸쓸하게 살아가는 것은
죽어서 별이 되는 과정이라고,
이따금 그 별들이 잠시 내려와
도라지꽃으로 피는 거라고
가만가만 이야기해 주는 거다.
나도 문득 밤하늘에
푸른 별이 되고 싶어져서
도라지 곁에 마냥 서 있었는데
그사이에도
누군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고
몇 명의 낯익은 별로 내려와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장수 사과나무 / 이상인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주먹 불끈 쥐고 서서
할 말이 많은 자세다.
한 해를 뒤돌아보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잎 뒤에 감추어 두었던 것들
어깨에도 등에도 허리에도
주렁주렁 매달고
사각사각 바람이 한 입 베어 물어도
동그란 눈을 뚝 뜨고
단단하게 여문 세월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한 알씩 내던질 태세다.
그동안의 햇살과 바람과 빗줄기가
이 한 주먹에 다 들어 있다고
삭힌 단맛을 한번 맛보라는 듯
지나가면서 나도 두 주먹을
단단히 쥐어 본다.
나는 단맛이 살짝 들다 말았다.
욕심을 다 떨군 장수 사과나무로 서서
남은 생을 견디고 싶어진다.
[ 이상인 시인 약력 ]
* 1961년전남 담양 출생.
* 1992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 시집 『툭, 건드려주었다』 『UFO 소나무』 『연둣빛 치어들』 『해변주점』 출간. 『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등
*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 2016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우송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