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탁자나 책장 같은 조선조 목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기막히게 어정쩡한 작품성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건 무르익는 모순덩어리라고 해야 하나? (…) 조선조 목기는 언제까지나 위로와 아래로가 중간에서 편안하게 겨루고 있지 않은가. 이루려는 의지와 사그라지려는 체념의 양념성이 어울려 있는 셈이다.” - 화가 이우환
소목장-맞춤의 미학, 무르익는 모순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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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목장은 나무로 전통생활가구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이다. 주로 궁궐, 사찰, 주택 등 큰 건축물을 짓는 장인은 대목장이라 한다. 소목장은 기후 자연환경 목재의 채취에 따라 살림공간과 가옥구조에 알맞게 생활가구를 제작한다. 소목가구들은 옷가지를 넣는 농과 옷걸이장, 책을 쌓아두는 책장, 선비들이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문방구류,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품 등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생활가구 기록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舞踊塚)과 안악고분(安岳古墳) 등에서 나타난다. 백제시대 때는 무녕왕릉에서 발굴된 두침과족좌 등이 있으며, 신라시대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생활용품의 목각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중상서(中尙書) 조를 보면 소목장 나전장 등의 명장이 있어 이미 전업으로 국가기관에서도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귀족들의 사랑방 꾸미기로 기품 있는 생활가구가 이들의 전횡물이 되면서 가구공예는 크게 발달했으나 이를 만드는 장인들은 천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시대 목공예들은 주로 서울과 호남평야지대, 평양지방에서 발달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경남 충무지방에서 소목장 기술이 발달되어 지금까지 ‘충무 민장롱’이라 하며 널리 이름이 나게 된다.
아버지 천철동에게 배워 일가를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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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상원 일가는 충무에서 여러 대를 이어 소목장으로 일해 자연스레 ‘장인 대가’를 이뤘다. 197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으로 지정된 천상원 선생은 집안 내림에 따라 이 길로 접어든다. 경남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수십 년째 살아온 누옥에서 천 선생은 소학교 시절 열 살 때 처음 소목일을 접한다. 아버지 천철동에게 어깨너머로 보면서 톱과 대패를 잡기 시작해 열네 살 되던 해 공방에 눌러 앉았다. 선친 밑에서 10여 년 간 소목장으로 성장해 가던 대에 태평양전쟁이 터져 징용을 피할 겸 목수일도 더 배울겸 경남 진해에 있던 군수용 목공장 공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곳 생활은 예술의지나 장인정신을 확장하는 장인의 길이 아니라 표준화된 군용 책상 따위나 만드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기능공으로서 직장일 뿐이었다.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조형성을 갖춘 조선목가구를 만들겠다는 장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런 감옥 같은 공원생활도 ‘8․15 해방’과 함께 해방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과 휴전 뒤 불어 닥친 산업화 물결은 그에겐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어려운 시절, 고가의 목가구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전승기반이 무너져 가는 흐름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통공예전승을 위한 정부정책이 세워지고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고개를 들면서 전국전승공예전에서 만들어지고, 1969년 부친이 큰 상을 받으면서 이 일에만 매달려 아버지가 작고한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천 선생이 장기를 보인 작품은 좌경 문갑 사방탁자 이층장 삼층장이었다. 그의 특기는 먹감나무 은행나무 개옻나무 등 무늬결이 아름다운 판재에 뇌문을 박은 다음 얇게 켜서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뇌문 박은 통영 목가구 전통은 그의 제자 김금철이 배우기 시작하여 1977년 전수장학생, 1982년 소목장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 보유자로는 설석철 선생과 박명배 선생이 지정되어 있으며, 전수교육조교로 김금철씨 외에 이정곤(고 송추만 계), 조화신(고 강대규 계) 등이 지정되어 잇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