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
잠 26:1-12
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5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잠 26:1-12 / [함정 파는 사람] 한여름에 내리는 눈처럼. 추수철에 내리는 비처럼 어리석은 숙맥에게는 명예가 어울리지 않는다. 2) 참새가 훌쩍 날아가 버리듯이 제비가 날쌔게 떠돌아 다니듯이 까닭 없이 퍼부어 대는 저주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3) 말에겐 채찍이, 나귀에겐 재갈이, 어리석은 자의 등짝엔 회초리가 제격이다. 4)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말을 뇌까린다 해서 그 말에 대꾸하지 말아라.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5)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말을 뇌까리거든 같은 말을 되받아 대꾸해 주어라. 그래야 자신의 미련함을 깨달으리라. 6) 미련한 숙맥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자기 발등을 내리찍는 것이요,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7)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날쌔게 뛰어갈 수 없는 것처럼 어리석은 숙맥이 잠언을 말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8) 어리석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물매에 돌을 꽉 붙들어 매는 것과 같다. 9) 어리석은 자가 잠언을 입에 담는 것은 술에 잔뜩 취한 자가 가시나무를 들고 흔드는 것과 같다. 10) 어리석은 숙맥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붙들고 일을 아뢰는 장인은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11) 개가 토해 낸 것을 다시 핥아먹듯이, 어리석은 숙맥은 어리석은 짓만 거듭거듭 저지른다. 12)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어리석은 사람이 더 나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기 위해 미련한 자에 대하여 알고 경계하며 또한 미련한 자를 상대하는데 지혜롭게 상대하기를 권면합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1-3)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와 같은 아름다운 말들이 적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영예와 같은 아름다운 말들이 어울리고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2절에서도 미련한 자의 목적 없는 저주는 이루어지지 않는 행위이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 저주는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는 새 같이 날아갈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미련한 자에게 체벌이 필요하다 합니다. 이는 그가 바른 길로 가도록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4-5) 미련한 자를 대하는 지혜로운 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대로 받아주면 자기가 지혜로운 자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옹호하고 어울리면 미련한 자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4절에 대답하지 말라는 것은 교제를 삼가라는 것이고, 5절의 대답하라는 말은 엄중히 지적해 주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게(6-12) 우편 제도가 미비했던 때는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합니다. 이 일을 미련한 자에게 맡기면 다른 내용을 전하여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힘없이 달리는 자는 시기를 놓칠 것이고 미련한 자의 잠언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타인에게 가시나무가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명예는 돌 물매가 되어 남을 해치고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하는 것이며 미련을 거듭하는 자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그보다 미련한 자보다 못하다 했습니다.
적용: 인격, 인품이 바르지 못한 자를 지도자로 세우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자가 미소 가득한 표정, 부드러운 말로 대중을 속이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법관이 취임석상에서 '나는 한 때 무신론자였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은 내 아버지의 성경 말씀과의 일관된 생활로 인해서입니다. 그 후 차츰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성경이 내 삶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라고 신조를 말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씀과 일관된 삶이 가장 큰 전도가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 설 교 >
잠언 26:1-12 / 양재천 목사
옳은 길을 따르라(1-2)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돼지에게 진주목걸이가 어울리지 않듯이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는 많은 죄를 짓고도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하여서 돌이키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악인을 말합니다. 보통 영광스러운 명예를 영예라고 하는데 본절에서는 높은 지위나 신분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에게 높은 지위나 신분, 분에 넘치는 명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하기도 실패하기도 하며 크고 작은 핸디캡과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수많은 잘못과 죄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이제는 내성이 생겨서 더 깊이 죄의 구렁텅이 가운데로 스스로를 몰아 부칩니다. 이런 미련한 자에게 높은 지위나 신분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오용하고 악용하여 더 튼 범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열대성 기후와 온대성 기후로 뚜렷하게 교체되는 계절현상을 보입니다. 연중 4월에서 10월 사이엔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계속되며,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의 겨울은 온난하고 다습한 날씨입니다. 그래서, 여름에 눈이 오는 일은 거의 없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그만큼 미련한 자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미련한 자들은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악한 마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능히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억울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선출될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고 적극적으로 투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사람들과도 친숙한 참새가 땅에 내려오거나 날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었으며, 제비가 먼 지방으로 날아갈 때도 분명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저버리고 분명한 목표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헛된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저주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헛된 것이며 오히려 자신에게 그 저주가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저주는 그 정당성의 여부와 관계없이 효력을 갖는다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본절은 이러한 생각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오히려 까닭 없이 함부로 사람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비참한 결과가 따를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고 정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저주하고 비방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악한 영에 의해 휘둘리는 인생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을 따라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이렇게 대하라(26장 3-5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말과 나귀는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과 나귀를 통제하기 위해서 채찍과 재갈을 사용합니다. 고집이 센 말이나 나귀를 통제하려면 재갈을 물리고 채찍으로 때려야 합니다. 말과 나귀는 완고하고 고집이 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미련한 자를 뜻합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막대기,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에 이릅니다. 말에게 채찍을 치는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기 위해서이며, 나귀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은 나귀가 날뛰다가 짐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과 나귀가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옳은 길을 간다면 채찍을 맞고 재갈을 물리는 아픔은 피할 수 있을 일입니다. 말과 나귀에게 채찍과 재갈을 사용하듯이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참고 인내하심으로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돌이킬 기회를 주어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완악함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매를 드십니다. 이롷게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 바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깨닫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지혜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생각은 가벼이 여기고 자신의 생각과 뜻만이 옳음을 고집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말하고 들으려고 하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심문하는 자들에게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주님은 무고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트집을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변명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미련한 자에게는 말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가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행동을 옹호하거나 따라하게 되면 어리석은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똑같이 미련한 자가 되고 맙니다. ‘근묵자흑’이라 했습니다. 미련한 자를 가까이 두면 같이 미련해지고, 같이 교만해지고, 같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행동을 경계하고 조심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4절과 5절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4절은 미련한 자와 동일한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교제를 피하라는 소극적 대처 방안의 제시라면 5절은 미련한 자의 주장에 대해 정당하고 엄중한 말로 잘못된 것을 지적함으로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할 소지를 없애라는 보다 적극적인 대처 방안을 제시하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자가 그릇된 말을 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적절한 책망과 지적을 통해서 그의 어리석음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말을 아껴야 할 때는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해야 할 때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조언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과 사람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련한 자를 가까이 두지 말라(26장 6-8절)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우편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중요한 기별은 상인이나 여행자를 통해 보내거나 특별히 사람을 고용하여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를 고용하여 소식을 전하는 책임을 맡기게 되면 소식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거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내용을 전하게 되어 곤란한 일을 겪게 됩니다. 미련한 자는 전달하려는 내용을 왜곡시켜 오해를 살만한 소식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을 베어 버린다’는 것은 큰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보다 구체적으로 활동을 제한받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인이 중요한 소식이나 일을 맡긴 자가 그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 하는 미련한 사람인 경우에, 그를 보내는 것은 두 발을 잘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미련한 자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하는 중요한 신체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다리가 힘 없이 달려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행할 바를 바르게 인도해 주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잠언도 그 가치를 모르는 미련한 자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물매’는 가죽 줄이나 기타 질긴 줄을 반으로 접어 한 쪽을 조금 길게 한 후 그 사이에 단단한 돌을 넣고 줄을 돌리다가 한 쪽 끝을 놓아 날려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소에 물매 연습을 많이 했으며, 이스라엘 군대 중에는 물매에 익숙한 군사들이 많았습니다. 물매를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돌은 적을 공격하고 자신을 지켜주는 소중한 도구입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자들은 들짐승이나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중요한 도구로 이 물매를 사용하였고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죽일 때 무기로 사용하여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물매를 사용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미련한 사람에게 물매에 돌을 매어 던지게 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물매를 사용하는 데에 능숙한 미련한 사람에게 물매에 돌을 매어 던지게 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어떠한 일을 결정하고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책과 같은 영예를 주는 것은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함이 없는 행동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영예를 얻은 미련한 자는 그러한 기회를 통해 더욱 어리석고 패역한 행동을 일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을 때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양인지, 늑대인지, 양의 탈을 쓴 늑대인지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파워가 없다면 우리는 악한 영에 의해 휘둘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말과 행동, 사고력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찾는 자들에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부어 주시기 때문에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시력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겸손한 자가 되라(26장 9-12절)
“미련한 자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는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는 무기와도 같습니다. 이렇듯 미련한 자의 입에 있는 잠언은 그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고 행함이 없는 헛된 말을 남발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고 해를 입히게 된다는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치게 하는 것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고, 낙심한 자들에게 위로의 말로 권면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장인’은 자신의 일에 숙련되어 지혜롭게 잘 처리해 나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반면 ‘지나가는 행인’은 철저한 직업의식, 책임의식, 주인의식 없이 맡겨진 일을 대충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처럼 미련한 자에게 어떤 직책을 맡기고 같이 일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성경에서 개나 돼지는 종종 진리를 알지 못하고 탐욕을 부리는 무지한 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나 돼지는 금은보화를 주어도 그것이 귀중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금은보화를 주면, 그것을 짓밟아 버립니다. 개나 돼지가 원하는 것은 오직 먹는 것밖에 없습니다. 또한 개나 돼지는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한 후에, 그 위에 다시 눕고, 자기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팔레스타인에서 개와 돼지는 진리를 모르고, 탐욕에 사로잡혀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고 완악한 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을 반복하는 개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미련합니까? 얼마나 더럽습니까? 얼마나 무지합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 하는 사람,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한 자의 삶이 바로 이렇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을 잃어버린 채 어리석고 악한 잘못과 죄악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잘못된 습관과 생활, 죄악의 모습들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착각에 빠져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 하는 교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회개의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런 교만한 자는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여기며 회개는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사랑과 경건의 능력을 잃고, 말과 입으로만 경건을 외치는 형식적인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 하고 자기착각에 빠져있는 교만한 사람보다는 자기가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이 이처럼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죄악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임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 안의 교만함을 몰아내시는 은혜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미련한 사람
잠 26:1-12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미련한 사람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잠언은 미련한 사람이란 말을 열두번이나 썼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지혜를 저장하지 않아 지혜가 바닥난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여기에 없기를 바라고 설교할 것입니다. 아니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고 설교할 것입니다. 제가 한주간 묵상해보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러한 사람은 우리 주님도 포기한 사람이 아닐까. 왜냐하면 잠언은 미련함과 게으름을 같이 놓고, 그가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미련한 사람은 인생이 반드시 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말아라가 아닙니다. 이런 미련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조심하라 했구요, 무슨 소식을 전해주는 것도 조심하라고 했구요, 무슨 칭찬을 해주기도 조심하라고 했구요, 가장 심각하게 경고한 것이 뭘까요? 10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절대로 고용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결혼 전이라면, 이런 사람과 만나 혹 결혼이나 사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지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사람을 가까이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흔한가 흔치 않은가? 놀랍게도 상당히 흔합니다.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굴까요?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내면의 성숙이 안되는 사람입니다. 성숙하기를 스스로 멈춘 사람입니다. 내면이 어린아이와 같아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아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어릴 때 어떤 훈육도 없었고, 어른이 돼서도 스스로 훈육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씨뿌리는 비유로 말하자면, 마음밭이 길가밭인데 땅속에 바위가 가득하고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가득합니다. 대부분 교회 밖에 있습니다만, 어떤 경우에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네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모두 성경에 있는 사람들, 에서, 사울, 나발, 아합,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차단합니다. 자기성찰을 할 시간이 있는데 성찰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이 말씀, 미련한 인생을 두가지로 정리해서 전하려고 합니다. 그는 어떤 기회도 차단합니다. 그는 어떤 성찰도 거부합니다. 할 수 있는 시간도 있고 기회도 있는데, 본인이 안합니다. 아니 어쩌면 하려고는 했는데 미룹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기회를 놓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에서 결국 멀어집니다.
첫째, 어떤 기회도 차단한다.
오늘 2절부터 10절까지를 읽어보면, 미련한 사람은 내면이 어린아이와 같아요. 성숙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합니다. 그래서 가장 문제가 뭔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말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숙한가 미숙한가, 그 차이는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결정됩니다. 미숙한 어린아이처럼 입만 열면 부적절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겁니다. 상황에도 안맞는 말,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말, 누가 들어도 이거 뭐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 말을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1절 보세요. 미련한 사람에게는 영예가 어울리지 않다, 영예라는 것은 뭘까요? 다른 말로 하면 존경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서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존경이 되면,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예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영예가 어울리지 않다 그래요.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 잠언은 비유법을 많이 씁니다. 한여름에 눈오는 게 안어울리는 것처럼, 추수때 비오는 것이 안어울리는 것처럼, 그러니까 미련한 인생은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2절부터 10절까지 계속 읽어보면, 문제가 다 말입니다. 모두 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 때문입니다.
자 2절을 보세요. 미련한 사람은 어떻게 말해요? 까닭없는 저주라고 했습니다. 맥락도 없이 갑자기 사람들에게 비난을 합니다. 욕하고 짜증내고 혼내고 그래요. 왜? 이 상황에서 이렇게 신경질을 내지? 듣는 사람이 놀라고 당황하는 겁니다. 이렇게 심한 말을 할 상황이 전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입에서 독하고 심한 말이 쏟아져나와요. 이게 에베소서 6장 보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랬죠. 엄마가 자녀를 혼내는데 앞뒤도 안맞고 혼낼 상황도 아닌데 마구 아이를 잡아요. 이게 까닭없는 저주입니다. 이런 부모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기도 왜 그런지 몰라요. 아무튼 화가 많이 납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거예요. 오늘 엄마가 왜 이러는지 아이들은 당황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오늘 아줌마들 사이에 있었고 화가 잔뜩 난 겁니다. 그런데 집에 오니 아이들이 숙제을 안하고 스마트폰 게임? 그때 엄마가 분노 데시벨이 올라갑니다. 너희들 때문에 엄마가 속터져 못살겠어! 빨리 숙제 안해? 갑자기 엄마가 집에 오고 집안공기 안좋아요. 이때 아이들에게 죄책감과 노여움이 쌓입니다. 2절 보면 참새가 떠도는 것 같고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다 그래요. 이 엄마는 왜 그럴까요? 어린 시절부터 쌓인 분노와 서러움, 그런데 이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않고 방치했어요. 내면이 성숙할 기회를 차단하면, 아무데서나 분노가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말이 이상해요.
4절과 5절 보면 이 미련한 사람에게는 무슨 대답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대답 한번만 잘못하면, 너 왜 그렇게 얘기해? 내가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래? 곧바로 전쟁발발이 되기 때문에, 왠만하면 대답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5절에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 같은 말로 대응해줘라, 한마디로 그 사람과는 의미있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런 뜻입니다. 6절, 미련한 사람에게 무슨 소식 전해줄때 조심하고, 그 사람에게 무슨 소식을 전해주도록 부탁하는 것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가 그 메시지를 잘못 옮깁니다. 그 미련한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게 부탁하는 것은 내 발목을 자르는 것과 같다. 폭력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람이 무슨 소식을 전하면 항상 오해가 발생합니다. 자칫 이간질이 되고 자칫 폭력상황도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미련한 사람과 대화를 오래 할수록 손해입니다. 왜 그런가? 그는 내면이 성장할 모든 기회를 스스로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습관이 다섯, 여섯 살 어린아이 수준이예요. 어린아이는 맥락을 짚어서 말하는 실력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나요? 사람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 그랬습니다. 결국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의 수준이, 곧 우리 내면의 수준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내면은 어릴 적에 자라면서 상처를 많습니다. 어디 특정한 부분에 예민하고, 그 특정한 부분만 건드리면 아프고, 서러워지고, 무서워지고, 견딜 수가 없이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내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워야 하거든요. 사실 이 부분을 자기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교육도 받고 훈육도 받고 상담도 받고 사랑도 받아서 자기 내면을 정돈시켜 성숙해야 합니다. 나이만 먹으면 그 내면이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겠지, 하겠지만,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오늘 진단해보세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수준인가? 이거 안배우고, 훈련하지 않고, 그때 그때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말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요? 나이 먹으면 그냥 존경받는 말을 하는 어른이 자동적으로 가능할까요? 에서는 이삭의 장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 장자권을 무시했습니다. 그까짓 하나님의 복 받아서 뭐해? 나발은 자기 소유로 다윗왕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말로 하나님의 종 다윗을 사정없이 문전박대 멸시합니다. 사울은 당대 최고의 선지자 사무엘이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황금같은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고 미련한 인생이 됩니다.
둘째, 어떤 성찰도 거부한다.
11절을 보면 미련한 인생이 왜 답이 없는가? 11절 그가 사는 모습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 솔로몬이 이 모습을 보고 깊은 묵상을 한 것 같습니다. 왜 이런 비유를 들었을까요? 묵상해본 결과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그 다음에도 똑같이 하고, 그 다음도 똑같이 하고 그 미련한 일을 반복하여 되풀이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자기 성찰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해보지 않는 겁니다. 자, 두 사람이 다퉜어요. 저 사람이 왜 내게 화를 냈지? 아 내가 약속에 늦어서 그렇구나! 전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그랬네. 약속시간도 안지켰는데 늦는다고 말도 안했네, 미안한 일이네. 다음번엔 약속시간 정시에 지켜야지, 미련한 사람은 이 성찰이 없는 겁니다. 화를 낸 사람은 어때요? 아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냈지? 저 사람이 늦었을 때 그냥 어서와 반겨주는 너그러움이 없었구나! 저번에도 화냈는데 이번에 또 화를 냈네, 그래 다음번에는 늦어도 그냥 어서와, 이렇게 해야지, 난 온유함과 너그러움이 부족하구나, 이 성찰이 없는 겁입니다.
무책임한 사람은 어릴 때부터 무책임합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가는 것입니다. 언제 이 사람이 성찰을 시작해야 할까요? 인생에서 무책임으로 큰 사고 나기 전에 언젠가 시작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무책임해! 라는 비난을 들으면, 왜 나만 갖고 그래? 방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찰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는 정말 많이 봐줍니다. 하지만 직장가면 봐주는 법 없습니다. 사정없이 혼나거나 짤립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핑계대고 이리저리 둘러대는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그것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늘 핑계대로 둘러대는 사람은 예전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성찰을 안하면, 그 상황만 모면하려 합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은 자기성찰을 안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녀도 성찰이 없으면 그가 혹 진정한 회개를 할까요? 못합니다. 어림없는 일입니다. 자기성찰이 없다는 것은 내가 혹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는 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찰이 없는 사람은, 혹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너무 늦었다는 속담으로 알고 있지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소 한 마리 잃고 외양간 고치면 그 사람 정말 잘하는 거다! 대부분 소를 잃고도 외양간 문 안고쳐요. 문이 부서져서 이리가 소들을 잡아먹는구나, 이 생각 안해요. 그래서 미련한 인생은 소 잃고 외양간 안고치고 계속 소를 잃어요.
생각해보면 사울왕 아합왕 참으로 딱한 사람들입니다. 사울에게는 선지자 사무엘이 있었죠. 아합에게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그 곁에 오래 있었습니다. 여러분 곁에 사무엘이나 엘리야가 여러분 인생 멘토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일 하나님의 지혜와 옳은 길을 알려줄텐데, 그러면 여러분 내면과 영혼이 일취월장할텐데! 그렇죠? 과연 그럴까요? 아합은 자기 눈에 이상형이 이세벨입니다. 최악의 결혼인데 자기 눈에 너무 지혜롭게 보여요. 시돈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고,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 수입하여 바알신앙으로 뒤덮어버립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아합곁에 있었습니다. 미련한 인생은 지혜로운 인생길을 들어도 반응이 없어요. 어떤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세벨과 결혼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합니다.
혹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주변에 지혜를 알려주는 사무엘이나 엘리야 같은 멘토가 없다! 그런데 여러분, 고넬료를 아세요? 삭개오를 아세요? 이들도 인생 멘토를 어른 될 때까지 못만났습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베드로사도를 만납니다. 삭개오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들이 무슨 생각, 무슨 기도를 계속 했을까 생각해보셨나요? 주님 내가 답답합니다. 변화되고, 성장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방법도 길도 모릅니다. 주님 내게 길을 보여주십시오! 이런 갈망이 있었어요. 그리고 고넬료의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릅니다. 고넬료에게 가라. 삭개오의 갈망을 보시고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오십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리라. 인생에 성장할 기회를 찾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주님, 내게 길을 보여주세요. 주님 내 자녀들에게 인생멘토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성장할 기회, 내 자녀들이 성장할 기회를 주님이 주십니다.
그런데 딱한 상황이 12절, 너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해요? 나는 지혜롭게 살고 있다! 자뻑입니다. 그 사람 생각에는, 자기 주변사람들이 모두 어리석어요. 자기 판단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내가 어리석을까? 아니야 없어! 그럴 가능성은 없어. 나같이 상황에 적절하고 사리에 맞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 내가 혹 일을 잘못하거나 말을 잘못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리면, 그 사람 주변에,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잠언이 뭐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이런 사람을 보면 가능하면 멀리하라! 이런 사람에게는 대답도 조심하고 대응도 조심하라. 무슨 소식을 전해줄 때도 조심하고, 무슨 소식을 전하는 부탁도 조심하라. 왜 그래요? 어떤 상황도 일을 그르치니까. 어떤 상황도 결국 다툼이나 갈등으로 이어지니까!
저는 살면서 두가지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첫째 아이러니는 이겁니다. 사람들은 어릴 적 가정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미숙 때문입니다. 부모로 인하여 자녀들이 받는 상처는 사실상 너무나 많을 정도입니다. 이중성, 방치, 차별, 이랬다 저랬다 함, 무원칙, 무관심, 무대응 폭언, 폭력, 고집, 강압, 등 너무 많습니다. 울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아프고 힘들어요. 우리 엄마가 조금만 지혜롭고 성숙했다면! 너무 너무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모의 미숙함으로 힘들었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미숙한 그대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자기 문제가 뭔지 성찰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의 미숙함을 뼈아프게 겪고나서, 본인은 지금 미숙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이러니는 이겁니다.
사람들은 교회 다니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먼저 믿은 교인들이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 중직자들의 미숙한 모습에 시험이 듭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제가 30대때 가르쳤던 제자들 중에도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실 때문에 하나님 떠난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위선, 맹신, 광신, 비합리적 강요, 이중성, 등 너무 많습니다. 진정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미숙한 그대로 살고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왜 이러냐고 괴로워하면서 정작 본인도 그 상태에 있는 겁니다. 교회안에 있어도 제대로 신앙을 치열하게 배우지 않아요. 미숙한 신앙 그대로, 누군가를 섬기는 일에 낯설고 미숙한 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뭡니까? 내가 부모인데 성숙을 멈추고 미숙한 수준으로 있으면, 내 자녀들에게 원치않는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데, 신앙의 성숙을 멈추고, 그냥 있으면, 내 뒤에 오는 교회 안의 후배들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저는 미련한 사람의 두가지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교회에 한명도 없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배울 기회가 있으면 붙잡고 자기 성찰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사울과 아합은 사무엘과 엘리야가 정말 가까이 곁에 있었지만, 배울 기회, 깨달을 기회, 변화될 기회, 성숙할 기회를 차단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집 아합의 집을 끊어버리셨습니다. 사울은 시기와 열등감 문제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거부하고 이세벨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세요. 오늘 이 잠언, 이 말씀을 붙들고 애썼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모든 기회를 차단하고 모든 성찰을 차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오늘 여기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성찰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지혜로운 성도 되기 바랍니다.
미련한 사람의 삶
잠 26:1-12 / 박조준 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한마디로 미련한 사람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 는 다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동안 공부한 잠언에 보면 여러 곳에 미련한 사람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몇 곳 찾아 읽어보십시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1장 22절에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 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하였습니다. 7장 22절에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포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아십니다. 소 년이나 청년에게 가장 범하기 쉬운 성적인 함정입니다. 잠언 7장 1절 이하에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 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전에 사사 삼손이 어릴 때부터 나실 사람으로 하나님의 택한 사람으로 특별히 구별되게 키움을 받지 아니하였습니까? 나라가 어려운 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계셔서 그를 택해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훌륭한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반할 정도로 미남으로 생겼었습니다. 힘이 얼마나 센지 썩은 당나귀 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신앙적인 훌륭한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원수 나라 블레셋 여자 간첩인 들릴라에게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종래는 그의 힘의 상징인 머리를 밀리우고 하나님이 떠나버린 삼손은 아무런 힘도 없이 문자 그대로 쇠사슬 에 매어서 두 눈이 뽑히고 연자맷돌을 갈다가 정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젊은이들에게 경고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모든 여 자가 다 들릴라 같고 그 결과가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올바른 남녀관계는 얼마나 아름 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잘못된 남녀관계는 이렇게 자신을 쇠사슬로 묶어 버리는 미련한 자의 생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10장 1절을 보세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 라.
전에 어거스틴이 얼마나 훌륭한 달란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었습니까? 명석한 두뇌와 감 동적인 표현력은 그 당시 많은 사람에게 인기의 절정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잘못 사용하여 육신의 정욕을 채우는 기로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편 에서 보면 미련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얼마나 근심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까! 종래는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큰 일군이 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 독교 역사상 큰 공헌을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사업 잘해서 돈 많이 모으면 그것으로 다 됩니까? 공부 많이 해서 큰 학자 가 되면 그것으로 족합니까? 세상에서 출세해서 높은 지위 차지하면 다 됩니까? 사실은 미련한 자의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이것을 잘못 사용해서 결국 미련한 자의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께 근심거리가 되는 분은 안계십 니까? 미련한 자는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다고 잠언 10장 2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남자 뿐만 아닙니다. 여자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14장 1절을 보세요.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오늘 자기 손으로 집을 허는 미련한 여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에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이(李)여인의 사건을 보세요. 우수한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요 미모까지 갖춘 여인이 그 만 세상의 사치와 허영에 빠져서 결국은 사기 행위를 거듭하다가 문자 그대로 집을 헐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 남편되는 검사는 어릴 때부터 가난과 싸우며 오늘의 검사 라는 사회적인 지위까지 확보했었는데 그만 미련한 여편네 때문에 완전히 그 집이 무너지고 말 았습니다. 미련한 여인은 그 집을 헙니다. 그런데 잠언 12장 15절을 보세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하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 행위가 언제나 바른 줄로만 알아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말하자면 미련한 사람입니 다. 자기에게 잘못된 것은 없나? 언제나 살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절(12:16)에는 뭐랬어요?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 욕을 참느니라. 수욕을 잘 참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요, 당장에 분노를 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15장 2절에 기록한대로 미련한 자의 입에서는 미련한 것만 쏟아 놓습니다. 잠언 17장 10절에서 12절까지를 보세요.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 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 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 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18장 2절에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 니라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말만 말이라고 고집하지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같은 장 6절에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하였고, 그 다음절에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 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23장 9절에는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1절에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과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미련한 사람에게 영예가 부여되 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도서 10장 6절에 보아도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는다 고 하 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건 단체건 여름에 눈이 오는 것처럼 모순되며, 자연과 계절에 큰 혼 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 악한 자가 권세를 잡으면 흔히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덕을 막고 악을 조장하는데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는 까닭없이 남을 저주하기 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이 뭐랬어요? 2절에 까닭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흥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까닭없는 저주를 낳게 합니다. 사람을 오인하거나 사실을 오해하고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선을 행한 사람을 나쁜 일을 행한 사람이라고 억 측해서 저주합니다. 악인의 세도가 당당할 때는 저주나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자기 주위의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 리고 자신의 특권인양 착각합니다. 이것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아무리 까닭없이 저주한다 하여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제비나 떠들어대 는 참새가 아무런 해를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저주는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하늘에서 빙빙 돌다가 제 집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을 봅시 다. 말에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여기서 미련한 사람 을 말과 나귀에 비유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짐승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전혀 이성을 따르지 아니하고 감정에 치우쳐 너무나 제멋대로 하기 때문에 완력과 공포가 아니면 다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라는 것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인간을 짐승으로 비교할 정도로 타락시켜 버리는 것 입니다. 시편 32편 9절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 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길들이지 아니한 말에게는 교정을 위한 채찍이 필요하고 노새에게는 길을 벗어나려 할 때 제 지하고 또 바른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자갈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이성의 인내와 억제하에 있지 아니하려는 미련한 사람에게 채찍이 내려지고 자갈이 물려진다는 말입니다. 하나 님의 따끔한 매를 맞고야 돌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지혜있는 사람은 매를 맞기 전에 잘못된 길에서 돌아옵니다. 이것이 좋습니다. 이제 4절과 5절을 읽어봅시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 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 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이 얼마나 고상한가를 보세요. 얼른 보면 모 순된 표현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미련한 사람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미련한 자와 대화할 때 어느 때 침묵을 지키고 어느 때 대 답해야 할는지를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할 만큼 자기의 분별심을 우매자의 비논리 에 동화시키지 말아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자랑한다고 너 또한 자랑하는 마음에서 대답하 지 말라. 그가 욕설을 퍼붓고 화가 나서 말하더라도 욕설에 응수하거나 같이 성내지 말라. 그가 엉터리없는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너도 뒤질세라 딴 거짓말로 둘러대지 말라. 그가 네 친구를 헐뜯더라도 너는 그의 친구를 비방하지 말라. 그가 희롱하더라도 너는 그가 쓰는 말로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와 그가 같을까 하노라.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보다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으 며 보다 분별심이 많고 보다 선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냐? 고 어떤 지혜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침묵이 네 주장의 불충분함이나 제 자신의 연약함 에 대한 표시라고 간주될 우려가 있거든 그에게 대답하라. 네 말이 바로 그 사람에게 대한 대답 이 되게 하라. 그를 그 자신의 무기로 쳐부수라. 그리하면 요령있는 대답이 될 것이다. 그가 논 쟁 비슷한 말을 꺼내면 그에게 응수하고 네 대답을 그의 경우에 맞추라. 네가 그에게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네가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대답해 주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며 승리를 자랑할까 하노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6-9절을 봅시다.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 시나무 같으니라. 미련한 자에게는 무슨 일을 맡기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심부름을 보내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마치 곰에게 애를 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 얼굴에 붙은 파리를 날릴 생각은 못하고 잡 아죽인다고 아이 얼굴을 탁 쳐서 파리도 죽었지만 잠자던 어린애도 죽었다고 합니다. 미련한 자 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리는 것 같은 손해가 오는 것입니다. 7월에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언행이 일치 하지 않은 사람의 말이란 이렇게 저는 다리처럼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그의 말은 술 취 한 사람의 손에 들리운 가시나무 같이 다른 사람을 해칩니다. 뿐만 아닙니다. 11절 말씀에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짓을 거듭 행한다 고 하였습니다. 미련 한 사람은 죄를 범하고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또 범합니다. 끝으로 12절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 물어 봅시다. 오늘 저녁 이 성경 강해를 들으시면서 어떻게 마음 속에 생각이 되십니까? 과연 그렇다. 내가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가 바로 회 개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이렇게 생각되시는 분 계십니까? 그분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런데 아, 오늘 저녁 그 성경 강해는 아무개가 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되시는 분 계십 니까? 이거 대단히 미안하지만 제 말이 아니라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대로 그보다 미련한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미련한 사람은 없습니다. 금년 일년 동안 아니 우리 일생 동안 미련하게 살지 말고 지혜있게 삽시다. 야고보 장로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늘 저녁 지혜있는 삶을 영위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십시다.
미련한 자
잠 26:1-12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미련한 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대처와 경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런한 자’는 어떤 자를 말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찾아보니까 11절에서 단 한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는 미련한 자를 이해하기엔 부족하여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미련한 자는 어떤 자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미련한 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욥기 5장2절에서, “미련한 자는 쉽게 분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시편107편17절에서, “미련한 자는 죄악의 길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미련한 자에게 대한 것은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1장7절에서,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하였습니다.
잠10장21절에서,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는 자”라고 하였고, 23절에서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잠12장15절에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악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행위가 바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잠13장19절에서,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잠14장3절에서, “미련한 자는 교만한 자”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속이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잠18장6절, 20장3절에서, “미련한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잠24장9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만하면 미련한 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입니다. 쉽게 분노하고, 생각하는 것이 악한 것이고, 그 악한 길로 가는 것을 낙으로 삼고,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다툼을 일으키고, 자기가 행한 것을 바른 줄로 여기고 거듭 거듭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합당치 않은 것이 있습니다. 1절에서,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합당치 않음을 마치 여름에 눈이 오고 겨울에 비가 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련한 자에게 있어서 영광과 명예는 선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따라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채찍과 막대기라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라”고 하였습니다. 말과 나귀를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채찍이고 재갈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를 책망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막대기라는 것입니다. ‘채찍과 징계’가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련한 사람이 영예를 얻고,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해를 끼치고, 악을 일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을 이루고, 주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자는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지혜롭고 충성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 일꾼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수 있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주의 종들이 세움받고 쓰임받게 하소서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미련한 자를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4절을 보면,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말라는 것은 그 어리석을 따라 대답할 때에 똑같이 미련해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말과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말고, 대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똑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미련하게, 악하게, 교만하게, 무례하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 거기에 맞서서 똑같이 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과 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교제하라
잠 26:1-12
1.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 계속해서 잠언서를 보내드리는 것은, 매일 아침 새벽기도회 시간에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생활에 관한 교훈들이 가득차 있는 말씀들인데, 자칫 도덕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긴 합니다.
3. 미련한 자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생각이 모자란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깊고 넓게 생각한 후에 말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순간적인 생각으로 경솔하게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후회할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앞뒤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기분과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기에 좌충우돌하기 잘하는 사람입니다. 참을성도 모자란 사람입니다. 모든 일에는 약간의 기다림도 있어야 하고 한 동안은 두고 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참을성이 없어서 일을 망치기 잘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미련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미련함은 누구에게나 더러 경험해 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4. 비록 우리들 스스로가 저질렀던 이런 미련함 때문에 후회할 일과 좌충우돌했던 일, 그리고 망치고 말았던 쓰디쓴 경험을 하였지만, 또 다른 미련한 사람과 짝이 된다면 정말 감당치 못할 난장판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미련한 자를 경계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교훈입니다. 미련한 자를 피해 다니기만 하라는 소극적인 태도로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를 요청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지혜로운 자와 교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아니면 미련한 자의 말을 지혜로운 자의 말로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닐까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좌충우돌하지 않고 함께 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망치기는 대신에 제대로 된 열매들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5. 행복을 이마에 써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봅시다. 그들은 여러 가지 힘든 일속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원망이나 불평 같은 말은 전혀 입에 담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항상 희망을 바라보는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단단히 붙들어 주는 강한 손길을 느끼고 있습니다. 따뜻한 이웃들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짊어지고 있습니다.
6. 개척교회를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농촌 목회를 향해 떠나가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가까운 가족들을 향한 원망스러운 구석도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요사이 성도들이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보다도 쉽게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듣는 저도 답답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끝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펼쳐질 보람과 기쁨도 알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 엎드리시지요.” 저는 젊은 미국 신학생이 심어준 한 마디 말을 늘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갖는 마음 밭이 아니겠습니다. 계속해서 한숨이나 쉬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과 교제하십시다.
7. 바울 사도는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축복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야 하고 마음을 터놓고 교제할 가장 가까운 친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을 사랑하는 그 분의 제자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들이 그 분 안에서 가능한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감격이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맛보게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미련한 자의 생애
잠 26:1-12 / 민병석 목사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여기서 얻는 삶의 지혜는 우리의 생활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 1장에서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 할 것이요 명철한 자에게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에 대하여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대개의 경우, 자기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은 달라서 다른 사람을 지혜롭게 생각하기보다는 미련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미련한 사람인가? 잠언의 말씀을 따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잠언1: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 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들려주려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 자신의 지혜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지혜를 받아 드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이나 행동에 결국은 미련한 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훈계도 늘 자기가 다른 사람을 훈계해 줄 입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훈계를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사랑하고 훈계를 들을 만한 입장에 있다면 이미 미련한 사람의 자리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보겠습니다.
(2) 잠언 12:16절 말씀을 보면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사귀다 보면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렇지 이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구나’고 생각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에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곰처럼 우직하고 양보를 모르고 자기 고집만 세우는 사람을 보고 미련하다고 판단하지만 모든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당장에 그 분을 나타내는 사람과는 결코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미련한 일이 자기에게 해로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슬기로운 사람은 수욕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은 밸도 없나? 그럴 때 한번 따끔하게 대들지 않고, 그런 창피를 당하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어? 자리를 걷어차고 나올 일이지, 그러나 이렇게 자기감정을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보다 수욕이나 자신에게 오는 창피를 참는 사람이 슬기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에서는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슬기로운 사람이란 말을 들으려면 수욕을 당할 때 상대방과 싸우지 말고 그 수욕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욕하고 그 사람과 싸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참는 일은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분내는 일이 미련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분은 좌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시 4:4절에서 ‘너희는 분 내어 범죄치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딛 1:7절에서도 ‘급히 분내는 사람은 감독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3) 세 번째로 미련한 자의 특성이 잠18:2절에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여러 층의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 교제하지 않아도 누가 미련한 사람인지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지 곧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쉴 새 없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다른 사람이 말을 하려고 하면 중간에 그 말을 가로채서 자기 견해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거든 아, 저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좌중에 앉아 있다면 이런 사람과 말다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입을 봉하고 가만히 있어야 망신을 당하지 않습니다. 함께 입을 열면 똑같이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잠 23:9절에서 교훈해 주시기를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4) 다음에 잠 20:3절에서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했습니다. 다툼은 언제나 미련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어떤 모임에서도 다툼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툼을 멀리하고 언제나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툼을 쉬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5) 잠 28:26절에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고전 3: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따라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단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백배나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6) 잠언 29:20절 말씀에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더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을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발설하는 사람에 대하여 경종하신 말씀입니다. 말을 참지 못하고 들은 말을 빨리 옮기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한마디 실수라도 하면 그 사람은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이 조급하다는 말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이런 버릇 가진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당신만 알라는 식으로 비밀한 말을 했다 간 몇 시간이 안 되어 그 소문이 확 퍼지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좀 언짢은 말을 들으면 당장에 그 사람을 찾아가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을 성경에서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미련한 사람은 그 미련함을 고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 27:22절에서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나온 본문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에게는 ? 나귀에게는 ? 미련한 자의 등에는 ? 막대기라고 했습니다. 왜 미련한 자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미련한 자의 특징은 지혜를 싫어하고 훈계를 멀리하기 때문에 고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한 자가 가지고 있는 소유는 무엇입니까? 잠14: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 미련한 자에게 있는 일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예란 영광스러운 직책이나 명예 또는 권세나 권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미련한 자들이 그들이 가져서는 안 될 명예나 권력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련한 자가 한 나라의 권력을 잡거나 명예로운 자리에 앉는다면 그 불행이 사회 전반에 미칠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세계 평화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주만을 공격하여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도조 같은 자는 참으로 미련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이 자의 미련한 생각과 행동이 전 세계에 전쟁을 가져 왔고 이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존재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하여 그가 죽어라고 해 놓는 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되어 자신에게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자가 세상에 가장 비극적인 미련한 일을 행하는 일이 계9장에 계시되어 있는데 이 자에 의해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고 세계가 폐허화되는 유브라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는 붙잡혀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들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일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남에게 까닭 없는 저주를 잘 합니다. 성경에서는 남에게 축복을 해 주면 자기가 복을 받고 남에게 저주를 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미련한 사람들과 상대할 때 우리는 그 말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혜로운 사람들만 상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련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불가피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적당할 때에 침묵하고 적당할 때에 말을 해야지 이런 일에 지혜를 쓰지 못하면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가까이하는 사람들과 사귈 때 미련한 사람이 말을 걸어와도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질문에 지혜로운 답변을 해도 그 답변 역시 어리석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답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으로 자기가 지혜자로 잘못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대답할 말과 대답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별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미련한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나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뒤쫓아 죽이려던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 소문을 어느 아멜렉 소년에게서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사울 왕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왕이 자기를 죽이라고 명하기로 그가 살아날 것 같지 않으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머리에 씌어 있던 왕의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 왕에게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에게 가장 좋은 소식인 줄로 알아 왕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보상을 받을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멜렉 소년은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식은 결국 자기의 생명을 죽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마치 자기의 발을 배어 버리는 것 같은 해를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과연 이 미련한 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들어서 바른 행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그 지혜로 지혜로운 삶을 살아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