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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목(鄭允穆)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清風子), 본관은 서원(西原)이다. 문극공(文克公) 정오(鄭䫨)의 후손이고, 정간공(貞簡公) 정탁(鄭琢)의 아들이다.
묘지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원 정씨 집안은 참으로 성대하여 알려진 현인(賢人)이 많다. 또 청풍자 선생을 평론하는 자가 만약 문장과 풍류가 고결하다고 단정하는 데 그친다면, 이는 그 터럭을 얻었으나 그 골수를 잃은 것이다. 선생에게 훌륭한 점이 있었다. 그가 계암(溪巖) 문정공(文貞公) 김령(金坽)과 시대가 같고 자취가 같으며 그 풍도와 절개가 같았으나, 다만 드러나고 가려진 경우의 다른 점이 있다.
선생은 목릉(穆陵) 신미년(1571, 선조4)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빼어나며 기이하고 깨끗하여 아름다운 봉황이요 고결한 학과 같았다. 《소학(小學)》 책을 읽고 노공(魯公) 범질(范質)이 종자(從子)를 경계한 시(詩)에 이르러 판본(板本)의 윗부분에 “큰 절의(節義)가 무너지고 말았는데 범질이 어디에서 취하였는가.”라고 썼다. 식자들은 이미 그가 범상치 않아 나이 13세도 되지 않아 경서(經書)의 대의(大義)를 통달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문사(文詞)가 또 유장하여 법도에 맞았으니, 당세의 노사숙유(老士宿儒)도 모두 감복하였다.
일찍이 정간 선생(貞簡先生)을 따라 사행(使行)을 받들었는데, 당시 19세였다. 중국 사람이 “애석하도다. 작은 나라의 위인을 어찌 이 중국 땅에 머물게 하여 크게 그 호방함을 내달리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간 선생이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서쪽으로 갔다. 이에 선생이 앞장서서 수천 리를 가면서 온갖 고생 속에서도 공손한 태도로 순종하며 주선하였으니 충심과 효성이 참으로 이미 온 세상에 우뚝하였으나, 정간 선생은 오히려 원대한 사업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과 기유년(1609)에 연이어 상(喪)을 당하였는데, 슬픔과 예식이 모두 지극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낭선(郞選)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비로소 소촌역(召村驛) 찰방으로 부임하였다. 이윽고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자 당세에는 더욱 뜻을 두지 않았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느긋하게 읊조리면서 세상 밖을 벗어나 노닐었다.
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이르러 선생이 매화를 감상하고 국화를 심는 데 전념하였다. 술에 취하여 호탕한 농부와 섞여 허공의 구름을 길이 대하고 차가운 달빛에 그림자와 어우러졌다. 이끌어 주려고 하는 자가 있었으나 또한 감히 공경(公卿)의 자리로도 더럽히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주천(酒泉 예천(醴泉))의 노곡(蘆谷 예천군 용궁(龍宮))에서 축산(竺山)의 장야평(野坪)으로 옮겨서 후생을 이끌어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재덕(才德)을 숨기어 감추었으니, 알운봉(遏雲峰)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 ‘몽촌초려(夢村草廬)’라고 이름을 붙였다.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7) 2월 27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이다. 알운봉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선생에게 산하와 영령의 기운이 모여 높고 높아 우뚝하고 맑고 맑아 깨끗하며 꼿꼿하고 꼿꼿하여 단호하였다. 그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몸은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과 더불어 광명하고 고명함을 함께 하니, 나 자신이 실로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만나게 되면 한가롭게 이리저리 거닐며 돌아다니느라 세월이 가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눈을 감상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눈이 내린 뒤에 한 마리 나귀를 타고 태백산과 소백산에 들어가 마음껏 수많은 바위의 산뜻한 빛깔을 살펴서 맑고 활달하며 대범하고 원대한 마음을 펼치고 만물의 오묘한 이치에 깊이 빠져들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놀면서 즐기고 만 것이 아니다.
훌륭한 손님이 이르면 손뼉을 쳐 가며 담론을 벌이고 술을 빚어 시를 지었으니, 바라보면 세상 밖의 사람 같았다. 문장을 지으면 품격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넓고 끝이 없어 마치 바람에 매가 숲을 스쳐지나 힘차게 쏜살같이 솟아 용맹을 떨쳐 날아가는 듯하고, 또 용맹스러운 장수가 백만 군사를 통솔하면서 기치가 선명하고 창과 갑옷이 번득이되 엄중한 질타와 호령이 필요 없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길고 짧은 노랫가락을 듣는 이가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났다.
필법(筆法)은 매우 분방하였다. 초서(草書)를 잘 썼는데, 용이 날아오르고 호랑이가 뛰어오르는 듯하여 움켜잡을 수가 없다. 그의 편폭(片幅)을 얻은 자는 반드시 잘 싸서 보관하고 영광으로 여겼다. 연경(燕京)에 갔을 때 한 노파가 부채를 펼쳐 놓고 팔았는데, 선생이 그중 하나를 가져와 거기에 붓을 휘둘러 썼다. 노파가 먹칠한 것에 성을 내었으나, 팔 때는 그 값이 열 배가 되자 노파가 와서 사례하였다. 대개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한 가지 기예나 한 가지 재능에 얽매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선생을 대변할 만한 것이 되겠는가.
아,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선생이 몸을 깨끗이 한 검소한 덕은 오히려 남들과 그리 다를 것은 없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에 이르러 이름 있는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은둔하는 선비가 또한 모두 갓을 털고 갓끈을 묶고서 시대에 응하여 일어났다. 더구나 선생은 이름이 통적(通籍)에서 누락되었고 한 번 찰방으로 잠시 시험하였으므로 또한 처음 벼슬하는 의리와는 차이가 있고 동강(東岡)에서 사절하였으니, 함께 중흥을 도와서 안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 홀로 구학(溝壑)에서 꿋꿋하게 이부(嫠婦)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속마음을 서로 알아주는 자는 오직 계암(溪巖 김령(金坽)) 한 분의 원로였다. 그가 지어 준 시에 “온갖 초목이 무수하다는 것을 알지만, 곧은 자품은 오직 소나무라네.[衆卉知無數, 貞姿獨有松.]”라고 하였고, 계암에게 지어 준 <길 옆 소나무[路傍松]> 시에 “여름철 초목은 온통 구별이 없는데, 굳세고 곧은 절개를 잡고 추워지길 기다리네.[夏天草木渾無別, 須把堅貞待歲寒.]”라고 하였으니, 동일한 구법(句法)이요 같은 뜻이다.
대개 그 행적을 숨기고 그 마음을 숨긴 것은 선생과 계암이 같은 점이지만 같지 않은 점도 있다. 계암은 당시 동계(桐溪 정온(鄭蘊))가 그를 지목하고 알아주어 동방의 백이(伯夷)로 인정하였다. 후세에 이르러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이를 통하여 칭송하기를 “백이의 행위는 일월보다 밝고, 선생의 뜻은 바다보다 깊다. 백이의 기풍은 드높아서 태산처럼 우러러볼 수 있고, 선생의 기개는 은은하여 송백(松柏)이 불변의 마음을 간직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대산이 살아 있다면 계암을 칭송한 것을 가지고 다시 선생에게 올렸을 것이다.
선생이 이미 당시에 동계옹을 만나지 못하였고, 또 자처한 것은 거리낌 없이 사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 아니라 바로 대수롭지 않은 죽창거사(竹牕居士)였다. 그러므로 가령 어질고 지혜로운 동계옹을 만났더라도 또한 반드시 엿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근심이 깊고 그 생각이 원대하고 몸이 외로웠으니,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품은 뜻을 실천하였고 은은한 가운데 재능을 감추었다. 우뚝하여 대들보를 부지할 힘이 있었으나 남들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경우이니, 또 어찌 어렵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한때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 두렵더라도 만세토록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염려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 말에서 비로소 자신의 상당한 정도의 자취가 드러났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의 절개가 어찌 뿌리를 둔 바가 없겠는가. 선생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정 교육을 흠뻑 받아 다시 경전을 들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에게 나아가 질문하였다. 지극해지는 학식의 정도가 춘풍에 새싹이 힘차게 자라나듯 하여 무릇 문호(門戶)의 맥락과 공부의 절도가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항상 흥취에 의탁하여 회포를 부친 작품에는 근거할 만한 전례가 많이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쇄소’로부터 입문하여 初從洒掃入。
결국 엿보기 어려운 경지로 돌아갔네 竟歸難測窺
모두 치지 공부에 관심을 가졌으니 都留致知工
이 몸은 음양의 조화에 참여한다네 此身參兩儀。
무서워서 벌벌 떨며 다시 조심하여 戰戰復兢兢。
박빙을 밟듯 심연을 굽어보듯 하네 履薄臨深池。
다시 사특한 생각을 하지 않게 하고 更令思無邪。
또 스스로 속이지 않아야 한다네 又能毋自欺。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을 어찌 알랴 寧知老將至。
더없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네 至樂在於斯。
맑은 바람과 깨끗한 달 같은 세계는 光風霽月界。
고결하여 천고토록 영원한 생각이네 皓皓千古思。
또 다른 시는 다음과 같다.
행동거지를 어찌 엄히 하지 않겠는가 動作豈不嚴。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킨다네 十目十手指。
사나이라면 충과 효를 행할 뿐이니 男兒忠孝耳。
누가 하찮은 잔재주에 전념하겠는가 誰爲事末技。
순 임금의 무리가 되고자 한다면 欲爲舜之徒。
한밤에 일어나 부지런히 힘써야 하네 孜孜中夜起。
한 가지라도 착한 일을 행하였다면 苟能得一善。
정성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두리라 拳拳死後已。
그렇다면 선생을 보고자 한다면 평상시 학문하는 속에서 선생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 뒷날 수립한 업적은 축적된 학문이 확충되어 나온 부스러기요 겉으로 발현된 효험이 아니겠는가. 아, 선배가 선생을 위하여 지은 만사(輓詞)나 뇌사(誄詞)나 전(傳)이나 묘갈명(墓碣銘) 등은 높이 드러내어 말하기를 꺼렸다. 하옹(荷翁)은 다만 “그 뜻을 조금도 낮추려 하지 않아 구학(溝壑)에서 생을 마치면서 달갑게 여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청옹(淸翁)도 다만 “아, 그 맑은 풍도는 대체로 모두 한 가닥을 슬쩍 드러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마음이 화락하고 확 트였으며 생각과 도량이 소탈하고 대범하였다. 독서는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하였는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율력(律曆),구류(九流),백가(百家)로부터 거침없이 두루 닿아 포괄하지 않은 분야가 없어서 참으로 임금을 보좌할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를 잘못 만나 초야에 묻혔으니, 이는 다만 선생의 불행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의 맑은 풍도를 들은 자는 백이(伯夷)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고,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일어서는 공효는 길이 남을 것이다. 한때 초야에 묻힌 저 불행이 어찌 백세토록 이어질 우리나라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사림에서 선생을 정간 선생의 사당에 종향(從享)하고, 또 수양사(首陽祠)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의 큰 글씨를 선생의 별묘(別廟)에 본떠서 걸었다.
지난해 종손(宗孫) 정창운(鄭昌運)이 유고(遺稿)와 나의 벗 침랑군(寢郞君) 정필규(鄭必奎)가 지은 가장(家狀)을 안고 하산(霞山)의 내 정자에 왔는데, 유택의 일 때문이었다. 나는 다만 까마득히 늦게 태어나서 필력이 약하고 능력이 없었으나, 일에 매우 난처한 점이 있었다. 이에 감히 삼가 일어나서 승낙하고,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참람되이 부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여러 유학의 원로가 계암(溪巖) 김 문정정공(金文貞公)을 칭찬하여 서술한 것이 있다. 그 글에 “맑은 바람 높은 절개[淸風峻節]”라고 하고, “북창에 부는 맑은 바람[北牕淸風]”이라고 하고, “맑은 바람이 옛 도를 떨쳤네.[淸風振古]”라고 하였으니, 요컨대 청풍(淸風)’이란 두 글자가 한 말처럼 같은 것은 이처럼 표현하지 않으면 형용하는 데 실정이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의 자호(自號)를 보고 당시 재능을 감추었던 사실을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 선생은 만고의 맑은 바람이로다.
이야순(李野淳)이 지었다
주)
동강(東岡) : 동쪽 산비탈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곳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권53 〈주섭열전(周燮列傳)〉의 “선세(先世)로부터 훈총(勳寵)이 줄을 이었는데 그대만 어찌 유독 동강의 비탈을 지키는가?”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이부(嫠婦)의 지조 : 자신의 일은 잊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4년의 “과부가 베 짜는 북실이 끊어질 것은 걱정하지 않고서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가 망할 것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그 재앙이 자기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여겨서이다.〔嫠不恤其緯, 而憂宗周之隕, 爲將及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온갖……소나무라네 : 《청음자집(淸風子集)》 권1 시(詩)○오언율시(五言律詩) <증김계암(贈金溪巖)>의 일부이다.
여름철……기다리네 : 《계암집(溪巖集)》 권3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노방송(路傍松)>의 일부이다.
백이의……같다 : 《대산집(大山集)》 권43 서(序) <계암김선생문집서(溪巖金先生文集序)>의 내용이다.
강호산인(江湖散人) : 당(唐)나라의 은사이자 시인인 육귀몽(陸龜蒙)의 호인데, 그는 일찍부터 속인(俗人)들과 교유하지 않고 배 한 척을 마련하여 거기에다 항상 서책, 다조(茶竈), 필상(筆牀), 조구(釣具) 등을 싣고 강호(江湖) 사이를 이리저리 유람하며 지냈다. 《新唐書 卷196 隱逸列傳 陸龜蒙》 여기서는 김령(金坽)이 육귀몽의 지취를 추구한 삶을 비유한 듯하다.
죽창거사(竹牕居士) : 정윤목(鄭允穆)의 또 다른 호이다.
쇄소(灑掃) : 옛적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예절 가운데 하나이다. 《소학집주(小學集註)》 〈소학서제(小學書題)〉에 “옛날에 소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되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하는 방도로써 하였으니, 이는 모두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공평하게 다스리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古者小學, 敎人以灑掃應對進退之節、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 皆所以爲脩身齊家治國平天下之本.]”라고 하였다.
무서워서……하여 : 매사에 근신하면서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경》 〈소민(小旻)〉에 “매우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라는 말이 있다.
다시……한다네 : 《논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시경에 나오는 삼백여 편의 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고 할 수 있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라고 하였고, 《대학장구》 전 6장에,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라고 하였다.
맑은……세계는 : 원문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은 비가 갠 뒤의 맑은 바람과 깨끗한 달을 말하는데, 전하여 인품이 고결하고 흉금이 툭 트인 것을 비유한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 땅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가슴속이 쇄락하기가 마치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깨끗한 달과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열……가리킨다네 : 모든 사람이 삼엄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대학장구》 전(傳) 6장에 “증자가 말하기를 ‘열 개의 눈이 지켜보는 바이고 열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얼마나 삼엄한가.’ 하였다.[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하옹(荷翁) : 권두인(權斗寅, 1643~1719)으로, 호가 하당(荷塘)이다. 자는 춘경(春卿)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권벌(權橃)의 후손으로,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하당집(荷塘集)》이 있다.
청옹(淸翁) : 권상일(權相一, 1679~1759)로, 호가 청대(淸臺)이다. 자는 태중(台仲),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710년(숙종36) 문과에 급제해 대사간,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청대집》, 《초학지남(初學指南)》 등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근암서원(近嵒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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