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조(金奉祖)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참판 김양진(金楊震)의 현손(玄孫)이고, 현감 김대현(金大賢)의 아들이다. 관직은 지평(持平)이다. 7명의 아우들과 함께 선생을 알현하고 오가며 학업을 익혔고, 그 뒤에 우복(愚伏) 등 제현(諸賢)과 함께 여강서원(廬江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창건하였다.
묘갈 음기(墓碣陰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曆) 임신년(1572, 선조 5)에 태어났다. 군(君)은 사람됨이 겉으로는 화평하고 후덕하였으며 안으로는 곧고 밝았으며, 말을 삼가고 행실을 조심하였다. 아우 김영조(金榮祖)와 함께 모두 영남 지방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이에 한때의 사우들이 대부분 흠모하며 의지하였으며, 논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군을 추대하여 앞장세웠다. 혹 서로 의견이 갈려 대립하는 일이 있는 경우에는 군의 형제가 중간에서 조절하여 절충하면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고서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은 일찍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려서 현자(賢者)를 비방하는 이단(異端)의 학자를 꾸짖었다. 뒤에 그 사람이 권력을 도적질하여 사림(士林)들을 무시하였고, 그 도당(徒黨)이 기세를 타고 함정을 만들어 의중에 둔 사람들을 모두 법으로 얽어 넣었다. 이에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군은 홀로 웃으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법인데, 더구나 나는 어긴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다행스럽게도 일이 중지되었다. 지조를 지키려는 단단하고 확고한 군의 심지가 대개 이와 같았다.
참판공이 생을 마쳤을 때 여러 아들이 아직 어렸는데, 군은 부지런히 동생들을 이끌고 면려하여 학업을 성취시켜 끝내 집안을 창대하게 만들었다. 또 모친을 봉양할 때는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상(喪)을 치를 때는 예법을 다하여 전후의 상에 예를 어그러뜨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경계나 편견을 두지 않고 성심을 미루어서 잘 대우하였으니, 사류나 평민들에게 잘못하는 바가 없었다. 이에 향리 사람들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참으로 장자(長者)답다고 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교유하기를 힘쓰지 않았으며, 권세가 있는 자를 피하기를 함정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 때문에 적적하기만 해 오랫동안 뒤에서 천거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마음 편안히 지내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이 뜻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단성(丹城)에서 펼친 정사가 맑고 간결하며 어질고 자애로워서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 은덕을 잊지 못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기렸다. 익산(益山)에 있을 때는 쌓인 폐단을 말끔히 척결하여 은혜와 사랑이 더욱 드러났다.
평생토록 가산(家産)을 일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가난을 참으로 면치 못할 것이라면 일을 할 때 어찌 구구하게 너무 구속당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가훈(家訓)을 지어서 근본에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도(道)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장가를 보내고 시집을 보내게 되면 그 집안의 법도가 어떠한가를 물었지, 세속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부귀한 집안과 혼사를 맺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군은 재능과 도량이 있고 재주와 지혜가 있었으니, 조용하게 나아갔다면 오히려 높은 지위에 오르고 오랜 수명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혼란한 시대에 막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통하게 된 탓에 자신의 재주를 끝까지 다 펼치지 못한 채 중도에서 죽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 이에 이상과 같이 기록한다.
김상헌(金尚憲)이 지었다.
〇 선생에 대한 제문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恭惟先生。
하늘이 낸 영재로서 天挺英材。
심학에 날로 새로웠네 日新心學。
집안에 전하는 충효는 家傳忠孝。
연원이 정자와 주자라네 道泝濂洛。
의지하여 돌아갈 곳으로 依歸有所。
더더욱 절차탁마하였네 益加磨琢。
오랫동안 함양하였으니 涵養旣久。
독실한 실천가였다네 踐履斯篤。
담박하게 수행한 덕이요 清修之德。
간결하고 바른 지조라네 簡正之操。
부차적으로 한 문장도 餘事文章。
조예가 매우 탁월하였네 卓爾所造。
독선은 바람이 아니고 獨善非願。
함께 이루는 도가 있었네 兼濟有道。
나이 스무 살에 상소하여 弱冠封疏。
이단을 물리친 공 크다네 功茂闢異。
원대한 앞길에 올라서는 逮登鵬程。
태평한 정치에 간절하였네 志切致治。
한림원에서 노닐었으며 翺翔翰苑。
대각에 출입하였다네 出入臺閣。
나랏일 본 지 몇 해던가 幾歲帷幄。
한마음으로 계옥하였네 一心啓沃。
중년에 사명을 받들어 中年奉使。
황제의 위엄이 지척이었네 咫尺皇威。
대궐 뜰에 우뚝 서서 特立彤庭。
조정 위의에 맞섰다네 抗論朝儀。
동료가 몹시 찬탄하였고 同僚竦歎。
예부에서도 탄식하였네 禮部興咨。
동호에서 휴식하면서도 東湖休暇。
북궐 향해 헌체하였네 北闕獻替。
수많은 관원의 본보기이니 千官矜式。
모든 벼슬아치를 면려하였네 百揆勉勵。
매각에는 교화가 융성하고 化隆梅閣。
감당나무엔 칭송이 드높네 頌騰棠陰。
명성은 높은 산처럼 높고 名高喬嶽。
명망은 남금처럼 소중하네 望重南金。
한 손에 문형을 잡아서는 手握文衡。
무너진 기풍을 진작하였네 振起頹風。
장수와 재상을 겸한 몸으로 身都將相。
인재의 임용에 공정하였네 用舍惟公。
소인들은 꺼려하였고 小人所憚。
군자는 의지한 분이라네 君子攸倚。
나라의 안위가 얽매인 몸 安危繫身。
흥망성쇠가 자신에 달렸네 消長由己。
왕실이 무함을 당할 때는 璿源被誣。
나라의 치욕을 설욕하였네 昭雪國恥。
사림이 사화를 당하자 士林遭禍。
간악한 계략 말없이 뺏었네 默奪邪議。
정성은 찬양하리 만큼 깊고 誠深贊揚。
다스림은 문명을 이루었다네 治擬文明。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乾心不弔。
큰 변란에 문득 태어났도다 大亂俄生。
국정이 홍수처럼 문란한데 洪流板蕩。
구제해 주는 이 누구이던가 拯濟何人。
오직 공이 의를 떨쳐 일어나 惟公奮義。
일으켜 세우려 맹서하였네 誓心扶顚。
사방에서 경영할 때는 經營四方。
어려움에도 절조가 한결같았네 夷險一節。
중흥을 이룬 큰 공로 重興洪伐。
무엇인들 공의 힘 아니던가 孰非公力。
백성은 복이 없어 蒼生無祿。
두견새가 천진교 위에 있네 杜宇天津。
쓸쓸한 한 칸 오두막 蕭然一室。
낙동강 가에 있네 洛江之濱。
당세에는 본보기가 되어 規模當世。
후학의 선도자가 되었네 指南後學。
수많은 다른 주장에도 紛紛楚咻。
어찌 공의 덕을 손상하랴 詎損公德。
행여 공이 다시 일어나면 謂公再起。
무수한 사람이 공경하리 萬手加額。
하늘이 어찌 홀연 앗아갔나 天胡遽奪。
백 사람하고도 못 바꾸리라 百身莫贖。
높고 밝은 학문을 이루었고 高明之學。
나라의 중임을 맡은 자태라네 棟樑之姿。
이제는 모두 끝나 버렸으니 今其已矣。
울부짖으며 사모한들 어쩌랴 號慕曷追。
임금 사랑하는 간절한 충정 愛君忠懇。
나라 근심하는 우뚝한 정성 憂國危忱。
임종 때도 드러내었으니 臨終有表。
공의 마음 더욱 상상하겠네 益想公心。
비루하고 용렬한 미천한 몸 鯫生庸陋。
선생의 문하에서 모셨다네 獲近門墻。
앙모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 鑽仰徒勤。
학문하는 방도 알지 못하네 學未知方。
지난 겨울에 찾아 뵈었더니 前冬展謁。
정성스럽게 인도해 주셨네 誘掖丁寧。
‘우리 선사’라고 하는 분은 曰我先師。
우리나라의 고정이라네 海東考亭。
사문이 아직 망하지 않아 斯文未喪。
큰 모임 그래도 이루어졌네 大集雖成。
한 글자도 모두 기록하니 隻字盡錄。
끝이 없어 읽기 어려워라 汗漫難讀。
요점만 골라 취하고자 하여 思將撮要。
별도로 한 질을 편찬하였네 別纂一帙。
거듭 가르쳐 주시면서 申申誨誘。
봄에 올 것으로 기약하셨네 春以爲期。
하신 말씀 귀에 쟁쟁한데 言猶在耳。
공 홀로 어디로 돌아가셨나 公獨何歸。
도가 지금 땅에 떨어졌으니 道今墜地。
하늘조차 믿기 어렵구나 天亦難諶。
재상에 오를 인물이 없어 無人黃閣。
유생들은 눈물을 흘렸네 有淚青衿。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흘러 日月流邁。
장례가 이미 임박하였다네 襄事巳臨。
삼가 제수 차려 전 올리오니 謹薦菲薄。
이로써 진실한 정을 담아내네 用寓衷情。
정령께서는 어둡지 않으리니 精靈不昧。
하찮은 이 정성을 받아주소서 冀歆微誠。
주)
독선(獨善)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나랏일 본 지 : 원문의 ‘유악(帷幄)’은 왕이 정책을 결정하는 곳이나 대장이 작전 계획을 세우는 막부(幕府)를 말한다. 즉 나라의 중대사를 논하는 곳을 의미한다.
계옥(啓沃) : 내 마음을 열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인도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을 적셔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헌체(獻替) :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한다는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중대한 국사를 조정에서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매각(梅閣) : 양(梁)나라 하손(何遜)이 양주 자사(揚州刺使)로 있을 때 동각(東閣)의 매화를 관상하였다는 데서 지방 수령의 별칭으로 쓰인다.
감당나무엔 칭송이 드높네 : 원문의 ‘당음(棠陰)’은 감당 나무의 그늘이라는 말로,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비유한다. 《시경》 〈소남(召南) 감당〉에 “우거진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마라. 소백께서 초막으로 삼으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하였다.
남금(南金) : 남방에서 생산되는 황금으로 값이 일반 황금의 두 배가 된다. 옛날 회이(淮夷)가 노 희공(魯僖公)에게 남금을 조공(朝貢)으로 바친 일이 있다.
두견새가……있네 :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아 나라가 혼란스럽게 되었다는 말이다. 송 영종(宋英宗) 연간에 낙양(洛陽)의 천진교 위에서 두견새 울음소리가 들리자, 소옹(邵雍)이 몹시 안 좋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2년이 못 가서 남쪽 선비가 재상이 되어 남쪽 사람들이 조정에 많이 들어가게 되리니, 천하가 이때부터 일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그 연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천하가 다스려지려면 지기(地氣)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고, 천하가 혼란해지려면 지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법인데, 지금 남방(南方)의 지기가 이르렀다. 새는 지기를 가장 먼저 느끼는데, 이것이 온 것으로 알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뒤에 남쪽 사람인 여혜경(呂惠卿)이 재상이 되어 천하가 크게 혼란해졌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5》
다른 주장 : 원문의 ‘초휴(楚咻)’는 거센 이론(異論)을 말한다. 《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제나라 사람 한 명이 가르치고 많은 초나라 사람이 떠들어 대면 매일 매를 때리면서 제나라 말을 습득하게 하더라도 될 수 없을 것이다.〔一齊人傅之 衆楚人咻之 雖日撻而求其齊也 不可得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경하리 : 원문의 ‘가액(加額)’은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매우 인망(人望)이 높은 재상을 공경하는 것을 뜻한다.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 사는 15년 동안 예궐(詣闕)할 때마다 위사(衛士)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고정(考亭) : 주희(朱熹)를 말한다. 주희가 만년에 여기에 거주하며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웠는데, 송나라 이종(理宗)이 주자를 숭사(崇祀)하기 위하여 고정서원(考亭書院)이라 사명(賜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