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고향의 길섶에/정세훈
나를
떠나 보낸 고향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모된 기계소리 만큼만
추억을 깔고 누워라
바람 부는 길가에서
시냇물 소리
흐르지 않아도 좋아라
슬픔처럼 다듬어진
저 고향의 길섶에
다만
되밟고
돌아가야 할
내 옛 발자욱 같은 흰 눈발만
조금 조금 나리어라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정세훈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아무 쓸모없는 듯
강폭 한 가운데에
버티고 선
작은 돌섬 하나
있음으로 해서,
에돌아가는
새로운 물길 하나 생겨난 거지
거목의 역사/정세훈
타들어 오는 가뭄과
휩쓸고 가는 장마와
뿌리째 뽑아가는 폭풍과
병충해 득시글거리는
잡다한 세상에서
한 알의 작은 씨앗이
거목이 되기까지에는
감히
함부로 말해서는 아니 될
함부로 기록해선 아니 될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될
결단코
베어버릴 수
없는
역사가, 역사가, 흠뻑 배어 있는 거지
잡초/정세훈
우리는, 우리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지
거름 주고
물 대주고
솎아주고
보살펴주어야
기껏 한 철 살다 사라지는
식물이 아니지
잡초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
햇볕 좋은 양지에서
따뜻한 온기를 받아먹고 사는 것은
보온 잘된 온상에서
뿌려주는 물을 받아먹고 사는 것은
진정한 잡초가 아니지
우리는 아무 곳에서나 살아가지
응달진 음지에서
메마른 척박한 곳에서
눈보라 몰아치고
비바람 치는 광야에서
그 어디에서든 살아가지
폭풍이 불어와도
쓰러지며 꺾이며
다시 일어나 살아가지
호미 날에 찍혀도
날선 낫에 잘려도
쟁기 날에 파헤쳐져도
시퍼렇게 살아가지
사시사철 창창한 들녘을 만들지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 정세훈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잘난 꽃 되지 말고
못난 꽃 되자
함부로
남의 밥줄
끊어놓지 않는
이 세상의
가장 못난 꽃 되자
[ 정세훈 시인의 약력 ]
*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20여 년간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 등단 :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
*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장편동화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 송사리 큰눈이』, 그림동화 『훈이와 아기 제비들』,
*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동면』,
* 포엠 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 향기』,
*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등
* 현재 위기 청소년의 좋은 친구 어게인 이사, 소년 희망 센터 운영위원, 인천 민예총 이사장, 노동문학관 이사장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