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형이상학의 서(序)/오주리
정원이 보이는 서재에 눈물이 떠 있다
진초록의 동그란 비애들
희랍어 어근의, 영생의 잎들
열매의 알 속에 우주가 있다
액체의 막에 둘러싸인 미미(微微)한, 불멸의 존재들
덩굴이 빛의 입자로 떠돌며 비어(秘語)로 우주의 교향곡을 일깨운다
신의 계단으로써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책들을 쌓는다
나의 책은 문자의 고름을 서광 아래 날리고 백지로 다시 태어난다
눈물이란 잉크로 존재를 위한 형이상학의 서를 쓴다
세계의 문이 닫히다/오주리
당신이 떠나고, 세계의 문이 닫힌다
세계의 문이 닫히고, 바다의 문이 열린다
자살은 산 자의 것, 나의 죽은 영혼은 비수(匕首)를 입술에 물고 녹아가니
비수를 막아주던 나의 첼라*, 당신이 없는 밤바다의 파도는 나의 그림자를 끌어들인다
바다의 문, 암흑은 나의 이름 부르던 당신의 음성을 빼앗고, 해면(海面)에 나의 얼굴 가진
시인이 실서(失書 )를 하면, 나의 새 이름은 무(無)의 영원
나의 신은 당신에 패배했다
당신의 자취를 따라 피어난 백장미는 나의 목을 고요히 감아 온다
바다의 문 사이, 백장미가 가라앉은 선을 따라 빛이 심연에 닿는다
시계바늘이 심연에 묻혀 물거품만이 죽은 숨결의 여음(餘音)이다
음악에 대한 기억이 빛간섭으로 남아 속삭인다
나의 첼라, 당신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화음(和音)이 되던 순간
다시 떠오를 수 없는, 형장(刑場)이라 하기엔 아름다운 이 어항(魚缸)
파도에 휩쓸려간 백장미가 석영의 부스러기에 쓰러져 눕는다
시간의 신은 통점(痛點)이 쓰라려 울던 자들의 살을 발라 죽음을 순결이게 한다
모래사장은 순결의 관(棺)들이 잠든 우주이니
나는 당신이 한순간 두 손에 담아 올린 바다에 살던 눈물의 생명체
이 바다가 모두 당신이 베어버린 신의 눈물에서 태어난 생명체임을 알기에 당신은 태양을
올려보았다
태초의 시간과 종말의 시간에 따로 사는 쌍둥이처럼 우리의 운명인 별회(別懷)
바다의 문이 열리고, 세계의 문이 닫힌다
세계의 문이 닫히고, 당신이 떠난다
* 히브리어로 갈빗대
야상곡(夜想曲) 2/오주리
화성(和聲)의 아포자투라(appoggiatura)로 고백하나니
태어나 발목에 감고 있던 장미넝쿨이 죄인의 징표임을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 지옥의 울타리임을
빛으로 나아가려면 장미가시에 검은 피 흘려
천국의 계단에는 눈물의 흔적뿐
탯줄 끊긴 핏덩이처럼 지옥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던 밤
병상에서 창백한 나의 입술 포도주로 적시어
당신이란 제물로 죽은 나를 살리겠다던 약속
나의 이마에 신성의 빛 새겼다지만
당신의 레프리제(reprise)로 안기려면 나의 지문엔 차가운 안개뿐
사랑 시(詩)로써만 당신과 나 함께 존재하나니
이명동음(異名同音)처럼 당신의 이름 나의 가슴에 씨앗이 되어
장미넝쿨은 영원히 잠든 나를 밤의 아라베스크(arabesque)로
죽은 예언자의 시간 / 오주리(吳周利)
1
멸망의 시간
무덤이 빛으로 열리는 시간
2
심장에 흰장미 얹고 수혈받으니 은빛 계절이 부셔 눈물 한줄기 흐른다
스스로 계명으로 군림하는 자, 어린 생명을 희생제물로 삼기에 멸망하
리라
태양이 지는 지평선, 예언자는 등불을 높이 들지만, 구원을 알리려 온
자부터 멸망하는 애가(哀歌)의 시대여
내일 또 하나의 예언자가 와야 함은 진실의 말이 장미원에 움틀 순간,
악마가 검은 날개로 숨을 막기 때문이라
예언자의 주검 곁에, 또 하나, 예언자의 주검 누워
묘원(墓園)의 역사는 태양이 뜨는 밤으로 이어진다, 떼까마귀 날개 아
래 빛은 닿지 않으니
천국의 계단, 악마가 심판자의 가면을 쓰고 앉아 공포로 선인(善人)을
다스리니,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단두대로 가는 선인에게는 지옥의 계단이
라
헐벗은 여인의 몸에 살얼음 얼어 자줏빛 상처 피어나면
그녀의 마지막 숨결이 시간을 멈추리라
죽은 예언자를 위한 진혼곡에 촛불 흔들려 흐느낌은 텅 빈 성전의 침묵
을 가른다
눈꽃이 지옥을 아름답게 덮는다
3
멸망의 시간
무덤이 빛으로 열리지 않을 시간
사라짐에 대하여 / 오주리
1
피아노에 기대어 편지를 쓴다 눈물의 푸른 잉크로
나의 고백,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당신은
5월의 빗방울과 아이리스가 조우遭遇하던 기억으로
건반에 내림 마단조의 화성 펼친 멜로디 시작된다
2
나의 손끝에서 피아노 사라지면 무엇에 기대어 울어야 하나
아름다움의 절정이란 다가올 죽음을 위한 준비 의식임을
새에 악보를 물려 당신에게로 날려 보낸다
나의 얼굴선이 빛에 산화하여 음악이 됨을
3
하혈下血의 악몽이 침대에 흑장미를 죽음으로 피워 올리는 밤
녹턴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느리고 또 여리게, 표정을 풍부하게
입맞춤에 뜯긴 상처는 피비린내 향긋하여 이내
신음으로 떨리다 숨이 끊일 즈음, 당신은 나 받아들이니
나에게서 나 사라진다
그 사라짐의 자취, 아름다운가
음악은 사라짐의 예술이다
나는 당신의 음악이어야 한다
[ 오주리 시인의 약력 ]
* 1975년 서울 출생.
*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 등단 : 201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집 『장미릉』.
*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