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이름의 둘레 / 이정훈
1.
회상, 고요한 들판만큼이나 단절되지 않은 서곡이 소란스럽지 않은 까닭은
허虛의 둥우리에서 흘러나오는 아련한 정수가 불안을 잠재우기 때문이다
들의 윤곽을 이룩하던 억새 사이를 총총걸음으로 걷다보면
하늘에서 기적소리가 들리는 듯 온몸이 터질듯이 뛰곤 했다
이방인을 창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몽상가들의 적의와
이어폰 너머 전자의 숲 속으로 들리던 야릇한 성당의 오르간 등
생애에서 분리될 수 없는 오만한 삼라만상들이 점차 얽히며
들의 억새는 삽시간 둘레를 만들고 내 마음의 부동성을 세심하게 떠안아주었다
서로의 모습을 들에서 찾지 못한 날이면 공연히 시름으로 환원되던 우리의 곡두
너울거리는 환상은 들판의 촉모를 거처로 삼은 듯 부질없는 헛웃음에 종부성사를 던지고
심연에 빠진 그리움은 관절을 꺾으며 다양다색한 황금빛 낱말의 물결을 산란했다
2.
길은 36.5도씨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을까
대나무는 365일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며 피어 있었다
되씹을수록, 이것은 사내의 냄새라며 길고도 곧게 퍼지는 흙의 냄새라며
당신이 밟던 나무 밑동에는 지금 버섯이 하얗게 펴 있다며 아는 체하던 그 수선스러움을
되씹을수록, 달빛이 게슴츠레 넘어 들어오던 창문 옆 엘리베이터 아래로 나있는 계단에서
너는 두유를 마시며 담배를 피곤 했지 초콜릿 한두 알 집어먹은 나는 노래를 부르며 온 세상을
되 심을수록. (지킬 수 없는 기억을 가꾸어 무엇에 쓰려 했느냐 시선 처리가 잡스러운
싸구려 정원은 어떠한 위안도 되어주지 못했다) 고뇌와 망념이 달과 밤으로 상쇄되던
비밀의 정원 위로 걸린 풍성한 달이 줄초상 나 서로의 목구멍 속으로 숨어가던 시절
카메라는 떨어진 달들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고 계단 난간의 추락 방지대는
바이올린 현으로 늘어지며 꽃잎을 재차 떨어뜨렸다 가볍게 떨어진 잎은 죽지 않지만
감나무에 걸린 달은 떨어져 으스러지고?
3.
섬광은 잠시 비추어 여름을 만들고
찢어진 지점 아래로는 석양이 흐르고 있었다
환상통은 나비효과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나. 밤은
비린내를 풍기며 들풀 사이로 숨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