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申撤)
자는 언함(彦涵),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고려 태사(高麗太師)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고, 주부(主簿) 신홍제(申弘濟)의 아들이다.
행장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융경(隆慶) 임신년(1572, 선조5)에 공이 삼근리(三近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총명하여 무리에서 뛰어났다. 성장하여서는 폐백을 갖추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찾아뵙고 귀의처로 삼았다. 경서의 뜻을 강구(講究)하다가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성현이 될 바탕이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항상 《맹자》〈진심 상(盡心上)〉의 ‘빈궁해도 의를 잃지 않고, 영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외우면서 평생토록 몸을 단속하는 법도로 삼았다. 종제(從弟) 경호(鏡湖) 신호(申灝) 공과 함께 동당(同堂)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주부공과 숙부 운계공(雲溪公)을 모시고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의 막부에 달려갔다. 곽공(郭公)이 보고 그들을 기특하게 여겨 “바닷가에 열장부(烈丈夫)가 있었구나.”라고 하고, 기봉(岐峯) 유복기(柳復起)가 탄식하기를 “한 가문에서 일제히 달려가 사람을 깨우쳐 일으켰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음직(蔭職)으로 선무랑(宣務郞)과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에 보직(補職)되었고, 관직이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이르렀다. 천계(天啓)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50세이다. 주산(周山)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이 영민한 자태로 태평한 시대에 태어나 가슴 속에 품은 재주로는 의당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만하였고, 일찌감치 도(道)가 있는 분의 문하에 나아가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구분을 잘 알았다. 산림에서 은거하여 오직 경전을 읽고 도를 즐기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욕심을 내려놓고 세상일을 잊었다. 그러나 나라가 난리를 만난 때 적에게 저항하는 의기가 웅어(熊魚)를 취하고 버리는 사이에서 판가름이 나서 드러났다. 대개 평소 강구하여 밝혔던 것이 성명(性命)과 이륜(彝倫)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바른 문로(門路)와 고명한 학문에 대해서는 만에 하나라도 찾아 미루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위대한 말과 실질적인 자취는 화재를 두 번이나 겪어서 남김없이 없어졌으니, 남은 자손들의 끝없는 한은 한갓 보통의 추모를 가지고 비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가승(家乘)에서 전해 들은 것을 이상과 같이 모아서 병필가(秉筆家)에게 알리니 헤아려 채택하기 바란다.
후손 이병주(李炳周)가 지었다
운계공(雲溪公) : 신경제(申經濟, 1555~1614)로, 운계는 호이다. 자는 경열(景說), 본관은 평산이다. 영덕(盈德)에 거주하였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화왕산성 의진에 참가한 공로로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선교랑(宣敎郞)에 제수되었다. 김난서(金鸞瑞)‧바긴걸(朴仁傑) 등과 남강서원(南岡書院)을 창건하였다.
기봉(岐峯) 유복기(柳復起):1555~1617. 자는 성서(聖瑞), 호는 지봉,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안동(安東)에 거주하였고,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배용길(裵龍吉)과 함께 창의하였다. 정유재란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팔공산과 화왕산 등지에서 적을 막았다. 임진왜란에 이바지한 공으로 예빈시 정(禮賓寺正)‧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웅어(熊魚)를……사이 :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분별력을 가진 훌륭한 사람의 자세를 말한다. 《맹자》 〈고자(告子) 상〉에,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