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에는 특히 복음서 안에는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과 자비가 샘물 솟듯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중죄인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모두가 포기한 말기 환우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건네는 예수님, 배신자에게도 따뜻한 위로의 시선을 보내시는 예수님...
그중에서도 제 개인적으로 가장 강도 높게 그리고 손에 잡힐 듯이 강렬하게 하느님 자비가 느껴지는 복음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8장 1~11절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여인의 ‘기막힌’ 사연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반응은 정말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과연 무엇을 쓰셨을까요? 저도 그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 무척이나 궁금해서 관련된 자료도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사신 수많은 성경학자들과 교부들도 이 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했던지 다들 연구들을 많이 하셨더군요.
대체로 학자들은 이런 것을 쓰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둘러서 있는 악한 고발자들의 이름? 아니면 그들의 죄목? 그러나 이것 역시 예수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귀신도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것을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예수님 할아버지라도 방법이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보시게들! 이 여자 불쌍하지도 않은가? 웬만하면 그냥 풀어주지.”라고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은 모세 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씀이기에 예수님을 끌고갈 판국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나도 어쩔 수 없네. 그 잘난 자네들 율법에 따라 돌로 처형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들 하게!”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간 예수님께서 펼쳐 오신 사랑의 사도직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이었기에 ‘시간벌기’ 작전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 그 여인을 살릴 지혜의 한 말씀을 찾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회심의 결정타 한방을 그들에게 날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 단 둘만 남게 됩니다. 이 순간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정말 아름다운 주석 하나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은 어찌 보면 죄인인 우리 인간과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온전히 합일하는 놀라운 은총의 순간입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엄동설한 빨갛게 달아오른 뜨거운 연탄난로 위에 눈덩이 하나를 한번 올려놔 보십시오.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눈덩이는 자취를 감추며 증발해버릴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 뵙는 순간도 마찬가지겠지요. 죄인인 우리가 뜨거운 하느님 사랑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는 순식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죄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랜 세월 안고 왔던 허물,부족함, 나약함, 갈등, 고통, 상처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살아생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중요한 평생의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한번 온 몸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체험하게 될 은총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새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관이 열릴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 순간은 어찌 보면 한 인간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한 인생이 태초의 순결한 상태를 다시 한 번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하느님의 어처구니없는 사랑, 바보 같은 사랑, 정말이지 기가 막힌 사랑을 통해 죄 많은 여인처럼 깨끗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접촉을 통해.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와 하느님과의 접촉은 오늘 우리가 집전하고 참여하게 될 성체성사를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지니 이 또한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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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럽혀질 수 있는가?>
파락호(破落戶)란 단어는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의성金씨 가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지나치게 즐겼습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쳤습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도 다 팔아 먹었습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습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이 김용환의 일대기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동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출처: ‘예화1302, 누명쓴 애국자들’, 작성자 cyjung0103)
남을 돕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난해지며 남을 돕는다면 이는 더 높은 경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에 지장보살이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덮어쓰면서까지 타인을 구제하려는 경지가 아마도 사랑의 최종점일 것입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옥에 가도 자신은 보살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최대한 남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 타인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제가먼저 서먹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이미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누구와도 편하게 대하기 위해 뒤에서 남의 말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부작용이 큽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조해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데 혼자만 가만있으면 왠지 그 험담하는 사람 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동조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 무리에서 환영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버티면 그 무리 전체가 정화될 확률도 있습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온 아는 형님이 그랬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다 그 형님에게 술을 먹이고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러기는 싫었는지 친구들에게 완강히 저항했다고 합니다. 옷도 찢기고 허리띠도 끊어졌고 안경은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다 함께 술을 한 잔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세상은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이 세상에서 외톨이 되는 십자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나무라지 않기 위해 세상과 적이 되셨습니다. 당신 손에 흙을 묻히셨습니다. 세상에서 그 여인 대신 당신이 더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인에게 던지려던 돌을 놓고 돌아갔지만 결국 그 방향을 예수님께 틀었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 여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타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그래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가 변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면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까봐 타인의 잘못까지 뒤집어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해서 누군가를 정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피 흘림입니다. 누군가를 닦아주면 그 닦아준 것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이를 감수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어야지 자신이 더 더러운 사람이라면 깨끗하게 해 준다고 하면서 더 더럽히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남의 죄를 묻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겐 세상의 때가 묻습니다. 그러나 마치 보석에 묻은 흙처럼 그때는 닦으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흘리셔야 했던 예수님의 피 흘림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녀를 씻어주지 않는 어머니가 없듯, 이웃을 씻어주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도 없습니다. 판단할 것이 많아도, 내가 더러워져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신 혼자 깨끗하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조용하게 바닥에 글을 쓰며 자신이 더럽혀지면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깨끗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십자가는 타인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석은 자신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흙이 묻어도 보석은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석이 아니고 약해서 세상 것과 섞이면 내 자신까지 더럽혀질까봐 자신을 보호하느라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동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보석임을 알 때 세상의 묻은 때를 벗겨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죄를 짊어져도 상관이 없으려면 얼마나 완벽해야 할까요? 그렇게 완벽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줄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 더러워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닦아주려면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여야 합니다.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임을 알려면 내가 보석임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이것을 믿도록 당신 보석을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셨습니다. 내가 보석임을 알 때 남의 때가 묻는 것을 견뎌낼 수 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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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 역시 지난 주일에 이어 하느님께서 용서와 자비를 통해 만들어 내시는 ‘새로움’에 관한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제1독서: 이사 43,16-21: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에게 머지않아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리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해방은 옛 출애굽의 사건들 즉 홍해를 건넘, 파라오 군대의 패퇴, 광야의 고달픈 여행에서 일어나는 기적들과 하느님의 도우심 같이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19절) 하느님의 ‘새로운’ 개입을 말씀하신다.
이 ‘새로운’ 것은 이중적 차원으로 이해된다. 첫째는 ‘재생적 차원’으로 지나간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다시 제시되는 구원의 선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에 한결같이 충실하심에 대한 성사적 표징이 된다. 둘째로는‘창조적 차원’인데, 하느님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으시고 창조적 능력으로써 당신의 구원계획을 성취시키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것’ 안에서는 과거가 재현되고 또한 미래가 예견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 사람이 되어”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구원을 자신 안에 충만히 실현시키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그러나 누가 이 부르심을 완전히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아직 ‘묵은 사람’이다. 진정한 대탈출이 우리 자신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새로운’ 나로 변화되어가야 한다.
복음: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소식’을 계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소식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단죄하기를 바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연속성이 있다. 단지 차이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인공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시라는 것이다.(골로 1,15)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그분께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3절)를 데리고 와서 심판해 주기를 요구했다. 모세법(레위 20,10; 신명 22,22)에 의하면 그 죄는 돌로 쳐 죽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예수의 심판은 단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요구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6절). 만일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고발할 수 있을 것이고, 단죄하는 경우에는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온 예수님께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한 심판보다도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심판을 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신다. 두 번이나 땅에 ‘쓰시는’(6.8절) 행동은 간교한 속셈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법조문 자체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법의 근본정신을 읽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알아듣지 못했을까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간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때였다.(9절) 물론 그들은 간음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떠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 이웃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 6,42) 그러기에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을 해방시켜 ‘새로운’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0-11절)
예수님의 용서는 낭비적인 용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해 용서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생명을 위한 심판으로써 단죄와 죽음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르다.
특히 용서와 사랑의 심판인 파스카를 맞이할 우리는 남을 단죄하거나 서로를 단죄하는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그럼으로써 이 지상에 예루살렘을 건설하도록 하여야 한다.
제2독서: 필립 3,8-14: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의 체험이다. 하여간 그는 비록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을 계속 달려간다. 또한 더욱 빨리 달려가기 위해 ‘대탈출’의 진정한 자세로써 겉꾸미는 과거의 모든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 안에 능력을 드러내실 그분의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0-11절)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새로운 것’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사순절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신비를 재발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영역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기에 자신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9절)
이러한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께서 용서를 베푸시어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한 그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자유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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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루카(21,37-38 참조)에 따르면, 지상 생애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산에 가시어 묵곤 하셨는데,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듯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 앞에 곤혹스럽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아무도 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둘씩 모두 떠나갑니다.
왜 나이 많은 자들이 먼저 떠났을까요? 나이 많은 이들이 더 나쁜 죄를 지어서, 아니면 더 현명해서일까요? 그곳에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용서의 눈길은 그녀에게 생명과 무엇보다도 개인적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태어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사람의 권리를 되찾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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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간음하다 잡힌 여자>
살다보면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고, 그럴 때에 가해자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또 죄인들은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의인들은 고난을 겪는 것을 볼 때에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나?”라고 묻기도 하고, 하느님은 불공평한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큰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 바로 천벌을 내리시지 않고,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크게 감사드릴 때가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죄를 짓거나 실수할 때마다 곧바로 천벌이 내린다면, 과연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기는 죄를 지은 적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자비와 용서보다는 정의로운 심판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느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위선자일수록 남에게 무자비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너그럽습니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압니다. 회개의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 따뜻한 자비와 용서를 더 잘 실천합니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3-9)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3장에 있는 다음 말씀의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자는 ‘세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자를 ‘작은 이’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자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는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또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를 쓰셨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쓰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나는 ‘죄 없는 자’ 라고 당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는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간 것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그냥 떠나간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0-11)
여기서 “아무도 없습니다.” 라는 말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로, 즉 “저를 심판하실 분 하느님(예수님)뿐입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여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무죄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처벌을 보류하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는 말씀은, “앞으로는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아라.” 라는 명령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회개’ 라는 말이 안 나오고, 붙잡혀 온 여자가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어떻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회개는 용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여자의 입장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의 죄를 들추어내고, 나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단죄할 때, 그런데도 지은 죄가 명백해서 변명도 못하고, 돌에 맞아 죽을 각오만 하고 있을 때, 그럴 때에도 예수님만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마태 12,20)이라는 믿음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더라도 못 본 척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타이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8,15)
우리는 죄와 악과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심판하고 단죄하는 태도가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태도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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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 이야기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이 계신다고 유대인들이 믿던 건물입니다. 예수님이 그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나자렛 출신 젊은이로서 사실은 성전에서 가르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그들이 예수님 안에 이해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고백하기 위해 각색(脚色)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신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모세의 법(신명 22,22-24)을 내세워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부인, 그들이 어디 있소? 아무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았지요?” 그 여자가 “아무도 안했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하느님의 집이라는 성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과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죽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당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을 잊어버립니다. 이 사실을 「마태오복음서」는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태 7,3)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일관성(一貫性)이 없고 단편적(斷片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웃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요한복음서」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이 경과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스도 신앙공동체가 그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대교는 율법 지킬 것을 강요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신데, 유대교는 하느님과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주신 삶의 지침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만 믿으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제일 먼저 집필된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집필하게 한 법전입니다. 그 법전이 법의 기본(基本)으로 삼고 잇는 것도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 상대가 잘못한 그만큼 앙갚음을 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가 제정하는 법들은 함무라비의 것보다는 많이 세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에는 동태복수라는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 각자가 잘못한 이에게 복수하는 대신 국가(國家)공권력(公權力)이 잘못한 이를 잘못한 그만큼 벌을 주어 복수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원칙은 예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그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받아야 한다는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질서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벌을 주고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1,4) 그 생명이 보여주는 바를 빛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으로 삶을 비추라는 말씀입니다.「요한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말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8,32)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단죄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인과응보가 요구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악순환(惡循環)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사(事)의 질서 따라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財物)을 좋아하회고, 강자(强者)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弱者) 앞에서는 강합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허세도 부리며,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것은 동물 세계가 지닌 질서(秩序)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깨달음이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 사는 동물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그것은 자비와 용서의 질서입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가해자(加害者)가 피해자(被害者)에게 주는 악(惡),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복수의 악이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악이 순환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우십니다. 그 자유를 배워 살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의 유대인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그분의 집에서 그분의 율법을 빙자하여 그들 안에 있는 악을 실현합니다. 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로 치려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잃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서, 인류 안에 자리 잡은 악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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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명재 베네딕토 신부님]
<소음과 침묵>
“대도시는 거대한 소란의 저수지 같다”.
막스삐까르는 ‘침묵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는 대형 TV가 설치되어 있고 종일 켜져 있다. 심지어 보는이 없어도 종편 TV앵커 사회자 패널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밖에 나와서도 심지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선동투의 소란은 진동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막스삐까르는 “기계가 정지해 있을 때의 조용함은 결코 침묵이 아니라 실은 진공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마친 노동자들은 진공 속에 있다. 기계의 진공이 그들 뒤를 따라온다.”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은 서로 상반된 상황을 그려준다. 소란과 침묵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붙잡아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돌을 손에 들고 소리를 지르며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간음한 여인은 돌을 던져 죽이라’는 율법에서 폭력만 보이고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협박하고 있다. 소란과 폭력으로 사랑을 죽이려 하고 있다.
영화 ‘위대한 침묵’은 프랑스의 해발 1300미터에 있는 남자 봉쇄 수도원의 일상을 보여 주는 영화이다. 162분 동안 스토리도, 음악도, 자막도, 대화도 거의 없는 ‘침묵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한 번씩 졸기도 했다.
영화 속의 수도자들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소란과 협박의 중심에 혼자 앉아 ‘침묵’을 지키고 계신다. 사람들의 소란과 협박이 거세져도 그분은 침묵을 지키신다. 그들의 소란과 협박이 극에 달할 무렵 그분은 몸을 일으키시어 마침내 말씀을 하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이 침묵 말씀은 사람들의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았다.(히브 4,12 참조)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6,9) 예수님은 자주 산에서 침묵 속에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22,39 참조)
막스 삐까르는 “침묵은 신의 본질이며, 신의 침묵은 사랑이다. 침묵의 상실만큼 인간의 본질을 변모시킨 것은 아무것도없다.”라고 말한다. 침묵 속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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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흥수 실바노 신부님]
<용서와 사랑>
우리는 누군가를 손가락질합니다. 남을 단죄하고, 흉보거나 비난할 때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하나만 남을 가리키고 있고, 세 개의 손가락은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남을 향한 모자란 사랑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가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여러 가지 부족한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머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단죄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자리를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나이가 많다고 죄가 많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단죄나 처벌을 내릴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용서받고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남에게 향해 있는 손가락보다 내게로 향해 있는 손가락이 더 많습니다. 입술로만 살지 않고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돌멩이를 내려놓고 사랑으로, 말씀으로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사순 시기에 특별히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려 놓아야할 것입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에 은총이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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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안종찬 나보르 신부님]
<사랑은 닮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신앙인의 준비는 사순시기에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가 지은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는 죄로부터 멀어질 것을 다짐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가 잘 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더욱 크게 내릴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떠나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마도 모인 사람들이 자신들도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느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 때 짓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죄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일화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간음한 한 여인을 몰아세우고는 그녀에게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한 여인이 큼직한 돌을 집어 들고 그 간음한 여자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살짝 당황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막아서며 말합니다. ‘어머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참 유머러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고해소에 앉아 있으면 가끔 이런 성모님과 같이 자신의 죄를 찾을 수가 없다는 신자를 만나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 신앙의 여정 가운데 어둠에서 빛의 삶으로 변화되는 회심의 길은 죄를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사순시기의 마지막 지금이라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합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그분의 생각과 행동 방식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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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른 아침 하느님의 집에 가기 전에>
요한 8,1-11 (간음하다 잡힌 여자)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른 아침 하느님의 집에 가기 전에>
생명의 빛이 다시 붉게 떠오르는 이른 아침에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숨을 불어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집에
밤을 보낸 사람들이 모였다네
밤새 올리브 산에서 하느님의 기운 깊이 들이마신 살림의 사람이 있다네
그 사람 곁에서 그 사람처럼 되고자 정갈하게 마음 모은 살림의 사람들도 설렘으로 함께 한다네
스스로 의로운 사람들에게 포획당하여 참혹한 죽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밤새 이미 죽은 듯 시들어가는 죄를 벗고픈 죄지은 사람이 질질 끌려왔다네
빛나는 생명의 아침을 향한 죽음 같이 고요한 밤사이 다시 올 생명을 거부하고 죄인과 더불어 살림의 사람에게마저 덧씌울 죽음의 올가미 획책하던 스스로 아쉬움 없는 사람들이 득의양양하게 밀려왔다네
그렇게 이른 아침 성전에는 함께 할 수 없는 살림과 죽임이 어설프게 공존했다네
생명의 빛이 다시 붉게 떠오르는 이른 아침이 오기 전
밤사이에 누군가는 생명을 품고 누군가는 죽임을 도모했다네
나는 새벽을 맞이하기 전에 무엇을 하는가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숨을 불어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집에 가기 전에
홀로 아니면 여럿이서 누군가는 살리기 위해 하느님과 호흡하고 누군가는 죽이기 위해 하느님을 밀쳐냈다네
나는 하느님의 집에 가기 전에 무엇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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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깊고 깊은 영성으로...>
한 후배 사제가 이런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요즘 교회가 너무나 불평과 불만이 많다.”는 것입니다. “추우면 춥다고 그러고, 더우면 덥다. 강론이 길다고, 어느 때는 강론이 짧다고...사제하고 친하면 친하다고 험담하고... 등등” 언젠가 은퇴하신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사제 생활하기가 더 하기 힘들겠다.” 이해 만땅..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젊은 청년이 사제와 면담을 하면서 늘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사제가 청년에게 소금 한 그릇과 물 한 컵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금 한 줌을 컵 속에 넣고는 그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청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마셨습니다. 사제가 청년에게 “맛이 어떠냐?”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인상을 쓰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제는 청년을 넒은 호수로 데리고 가서 소금 사발을 호수에 붓고는 그 물을 떠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청년에게 “이 물도 짭니까?” 물었습니다. 청년은 “안 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은 소금이라도 짠 맛의 정도는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생의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신부님 마음속에 고통이 있다면, 신부님이 컵이 되지 말고 호수가 되어보십시오.” 마찬가지입니다. 고운님들 마음속에 어려운 문제들이 고통으로 있다면 컵이 되지 말고 호수가 되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돌로 쳐 죽일 모습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지 않고,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를 죽이라고 했는데, 스승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려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들이 더 원했던 것은, 들고 있는 돌로 죄인인 여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던지고자 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돌로 쳐라”고 하신다면... 그 동안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심에 반대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공격했을 것입니다.(로마법을 어겨서 고발을 당하게 됨. 사형 집행권은 로마 관리에게만 있었음)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하신다면...스스로 모세의 율법을 어겨서 고발을 당할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시고,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혹시 죄인인 여자를 도와줄(변호해)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았을까요? 그 여자를 돌로부터 막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 도무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마을 사람들이 죄인인 여인을 모함하고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지만...그 죄인인 여인을 살려보려고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요? 예전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저도 궁금해서 희랍어 성경 원문을 자료들을 보다가, 예수님께서 글을 쓰셨다는 단어가 ‘카타 그라펜’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카타’는 ‘대항하여... 즉 굽히거나 지지 않으려고 맞서거나 버티는 것’ 이라는 뜻이고, ‘그라펜...’은 ‘글을 썼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한사람 한 사람 이름과 그들이 지은 죄를 일일이 쓰셨거나, 그 죄에 대한 율법에 심판을 쓰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쓰신 말씀을 듣고, 죄인인 여자를 죽이고자 했던 마음이 가득 찼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돌을 든 사람에게 돌을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인 여자가 입은 마음의 상처와 수치심을 치유해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랑하는 고운님들! 분명 죄인인 여자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또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돌아갔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용서받는 여자, 더 두레박 사제, 그리고 고운님들은 또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죄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매일 매순간 저희에게 일어난 일들을 통해 고운님들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말씀 앞에 서야합니다.
유다인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에 아버지가 저녁에 퇴근하더니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덥다. 창문을 열어라.” 열린 창문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모기가 들어오니 문 닫아라.” 아들은 즉각 열린 문에 모기장을 쳤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만족시키는 지혜를 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에 모기장을 달게 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두 상대방 입장이 되어 서 보면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영성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의 신발을 신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 이야기를 하지 말라.” 그런데 더 깊고 깊은 영성은 “하느님 입장이 되어보고, 하느님의 입장에 서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가 분홍색같이 붉다하여도...나의 죄악이 계곡을 차고 남는다 하여도...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눈물로 바라보며 “하느님” “하느님” 하고 부르짖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발 “내 이름을 부르며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이시여, 이제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치유가 일어났음을 믿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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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127)
♧♧ 시편 27편 1절...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은 나의 빛... 빛과 대조되는 어둠은 흔히 원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내적인 갈등과 곤경 등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빛’은 생명과 구원 및 환희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야훼 하느님은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며 또한 당신의 거룩한 자녀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 생명의 요새... ‘요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마오즈’는 ‘피난처’ 란 뜻으로 ‘산성’ ‘방패’ ‘능력’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내 생명의 요새...’라는 말은 하느님이 자신의 생명의 보호자이시며 피난처가 되심을 의미합니다.(시편 28편 8절, 46편 1절. 참조) 마침내 생명의 요새이신 야훼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곁에 계시는데 악인들이 생명을 위협하며 보잘 것 없는 무리가 법석을 부릴지라도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처럼 어떠한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한 믿음으로 굳게 선 이를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이’라고 표현합니다.(히브리서 11장 38절. 참조)
♧♧ 시편 27편 2절... “악인들이 내 몸을 집어 삼키려 달려들지라도 내 적이요 원수인 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
맹수가 먹잇감을 사로잡아 갈가리 찢어 삼키듯이 자신의 원수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달려든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다윗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한편 이 구절은 과거 시점을 나타낸 것입니다. 반면 3절은...미래 시점에 이루어질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이 2절은...과거의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고백이며, 3절은...미래에도 하느님이 똑같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 시편 27편 3절...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친가 하여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려 전쟁이 일어난다 하여도 그럴지라도 나는 안심하리라.”
2절에서 언급한바 과거의 체험에 의해 앞으로도 설령 적군이 와서 전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심령)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는 마침내 일생 동안 전쟁터에서 수많은 적군과 맞닥뜨렸던 다윗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적군을 물리치기도 하고,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 가운데서 구원받기도 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앙고백입니다.
(내일은 시편 27편 4-5절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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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부부들 모임에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부부가 함께 힘을 합쳐서 장사를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금술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이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던 한 형제님께서 묻습니다.
“함께 일을 하신다고 하는데, 함께하면서 싸우지 않으세요?”
이에 “저희는 거의 싸우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전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금술이 좋아 보이는 이 부부도 역시 싸우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지셨던 형제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럽네요.”
자기 부부는 툭 하면 싸운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싸우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하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하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면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싸우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싸울 때의 이유들을 듣다보면 배우자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연애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한결같은 모습, 한결같은 사랑을 원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바로 갈등과 다툼의 원인은 한결같지 못함에 있었습니다. 이는 부부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한결같지 못함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너 때문이야. 네가 잘못이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상대방의 한결같음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결같음은 상대방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도 이 한결같음을 간직하고 상대방에게 다가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하느님 앞에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큰 죄를 범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율법에서는 간음한 현행범을 남자와 여자 둘 다 돌로 쳐 죽이게 하였지요. 그런데 간음한 여인만을 데리고 와서는 죽여야 한다고 고발합니다. 분명히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 앞에 한결같지 않다고 이 여인을 고발했지만, 자신들 역시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한결같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려면 자신이 먼저 한결같이 깨끗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에 대한 재판관이 될 수 없습니다. 대신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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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죄짓지 마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떠나는 자가 됩니다.
차마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 남는 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죄인으로 붙잡혀 왔지만 끝까지 주님 곁에 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떠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 곁에 남는 사람일까요? 주님 곁에 남는 사람은 이 여인처럼 주님의 자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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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봄을 맞이하면서 서랍과 옷 정리를 하였습니다. 서랍이 깨끗해지고, 봄옷을 꺼내는 즐거움도 있지만,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을 찾을 때도 있습니다. 밭에 묻혀 있던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기쁜 일입니다. 정리하지 않았으면 찾을 수 없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성 주간이 시작되고 파스카 성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은 지난 5주간의 주일 복음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요점 정리를 잘하면 시험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순 제1주간의 핵심은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유혹하였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악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우리는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작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유혹이 있습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게으름이 있습니다. ‘남들도 그러는데’라는 자기 합리화가 있습니다. ‘나는 안돼’라는 열등감도 있습니다. 게으름, 자기 합리화, 열등감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의 유혹입니다. 커다란 댐은 작은 틈새로 흐르는 물 때문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2호선 지하철에서 한 학생의 가방을 보았습니다. 가방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Love, there may be no more tomorrow!” 짧은 글이지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지하철은 양화대교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바다로 흘러가는 한강 물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학생은 그 문구를 보고 가방을 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구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다면 가방은 그 학생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사순 제2주간의 핵심은 ‘거룩한 변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주셨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정의로운 마음입니다. 이 거룩함과 아름다움이 신화가 되었고, 역사가 되었고, 문명이 되었습니다. 거룩함과 아름다움은 시, 미술, 음악, 문학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왔으면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율법과 예언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외롭고 힘든 여정이지만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르면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영광입니다.
사순 제3주간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분들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맡겨진 일들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구원의 역사에 빛나는 별이 된 것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자신들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회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도 좋아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좋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사순 제4주간의 핵심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빛을 추구하고 그림자를 멀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사랑하고 계십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시원한 나무 그늘은 여행자들에게 더없는 휴식처가 되고,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봄날에 따뜻하게 비추는 태양의 입김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빛은 자기가 빛이라고 자랑하거나 뻐기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자기가 그림자라고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또한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둘째 아들처럼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이제라도 훌훌 털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큰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자신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그러한 오만과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순절을 더욱 뜻있게 보낼 수 있고 우리는 새로운 삶, 부활의 삶으로 초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 제5주간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뜻하는 영어는 ‘Forgive’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용서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분노와 원망 그리고 미움과 증오는 과거를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는 미래를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정한 여인의 과거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행동과 그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손에 돌을 들고 ‘욱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한때는 그녀 또한 순수한 마음이 있었고,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분들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예수님께로 돌아온다면,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그동안 내가 가졌던 명예, 자존심, 체면, 학력, 경험도 모두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의 과거를 보지 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한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내 달리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온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으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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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천국地上天國의 행복한 삶> -믿음, 사랑, 희망-
오늘은 사순 제5주일, 주님 부활의 날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무수한 봄꽃들이 주님 부활을 앞당겨 경축하는 듯합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천국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얼마전 인용했던 자작시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 하나하나 주님의 빛되어, 주님의 꽃되어 살 때 지상은 천국으로 변합니다. 우리 하나하나 주님의 밝은 빛되어, 주님의 향기로운 꽃되어 살 때 행복한 천국의 삶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오늘 강론 제목은 “지상천국의 행복한 삶–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오늘 지금 여기서 지상 천국의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행복하게 살라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도 주님이 물어 보시는 단 하나의 질문은 “너는 지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지상 천국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평화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있어도 평화가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기쁨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기쁨이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까? 역시 모든 것이 다 있어도 희망이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바로 평화가, 기쁨이, 희망이 있을 때 지상 천국의 행복한 삶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현재로부터, 또 미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잘 정리되고 정립될 때 비로소 오늘 여기서 지상천국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첫째, 과거는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과거를 믿음으로 하느님께 맡길 때 과거의 아픔은 치유되어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그러니 과거에 붙잡혀 살지 마십시오.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가 사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영혼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우리 모두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과거의 결별이 추상같이 단호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자, 주님을 아는 자라면 절대로 과거에 살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우리 모두를 향한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형제 여러분,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을 깊이 알아갈 때 과거로부터 자연스런 이탈에 자유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오늘 지금 여기를 향하게 됩니다.
둘째, 오늘 여기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의 주님을 참으로 만날 때 비로소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회개와 겸손이요, 위로와 치유요, 기쁨과 평화입니다. 바로 이런 좋으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죄인들 한 복판 중심에 자리하신 주님이십니다. 제가 볼 때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물론 주님을 둘러싸고 있는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결정을 촉구하는 긴박한 장면입니다. 참 사랑없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요 간음한 여자보다 바로 큰 죄인들입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들의 덫이자 함정입니다. 말그대로 진퇴양난의 예수님이십니다. 율법대로 돌을 던지라하면 무자비한 분으로 몰릴 것이고, 돌을 던지지 말라 하면 율법을 어긴 분으로 몰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며 흥분한 죄인들이 자신을 들여다 볼 침묵의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사랑의 침묵에서 솟아난 예수님의 천상적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침묵의 사랑에서 나온 모두를 회개에로 이끄는, 모두를 살리는 참 절묘한 주님의 지혜로운 말씀에 저절로 감사, 감동, 감탄하게 됩니다. 참으로 통쾌, 유쾌, 상쾌한 말씀입니다. 주님만이 가능한, 삼감三感, 삼쾌三快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나온 모두를 회개시키고 살리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은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고, 주님을 만나 회개한 죄인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다 떠납니다. 그림처럼 선명히 마음에 와닿은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어 예수님과 여자와의 단 둘의 만남에 대화가 이어집니다. 아오스팅 성인은 ‘비참과 자비의 만남miseria et misericordia’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가련한 여자 죄인이 자비로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할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가 누굴 단죄합니까? 우리가 오늘 지금 여기서 할 일은 아무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여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갈 때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저절로 생각나는 제 자작 기도시 행복기도입니다. 아마 복음의 간음하다 잡혔다 주님을 만나 용서받아 새롭게 태어난 여자의 처지에도 잘 맞는 기도이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행복기도’를 일명 ‘예닮기도(예수님 닮기 기도)’로 바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셋째, 부활의 희망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꿈이자 비전입니다.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활의 주님께 희망을 두고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생한 목표가, 희망이 있을 때 유혹에 빠지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고 늘 활력 넘치는 정주의 삶입니다. 우리 삶은 주님을 찾아가는 ‘평생 내적 순례 여정’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하며 주님과 함께 주님을 찾는 내적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로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인생순례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비로소 지상천국의 행복한 삶입니다. 과거의 짐은 믿음으로 하느님께 맡기니 참 평화요,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하여 사랑의 주님을 만나니 참 기쁨이요, 주님과 함께 희망의 하느님을 향해 미래로나아가니 역동적 활력넘치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로 새로워진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지상천국의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절로 오늘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게 됩니다.
“주께서 과연 우리에게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못견디게- 기뻐했나이다-” 자작(시편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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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사순 제5주일 복음에는 아주 급박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이 끌려온 겁니다.
"스승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요한 8,4-5)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오고갑니다.
"이 죄지은 여인을 모세 명령대로 죽일까요? 아니면 당신이 말하는 그 잘난 사랑으로 용서해 보낼까요? 후자라면 당신은 율법에 저촉이 됩니다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당신의 가르침 모두를 아우르는 답을 주시면서, 이 일을 꾸민 이들과 구경꾼들 모두를 자기 성찰의 기회로 이끄십니다.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살기 어렵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니, 누구도 타인을 단죄하고 목숨을 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상황 종료 후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처음 말을 거십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그분은 무슨 일이 있었냐고 언제 왜 그랬냐고 따져물어 그녀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네 수치를 드러내고 생명을 위협하던 이들이 곁에 있는지, 그녀가 곤혹스러워하지 않으면서 답할 수 있는 물음을 던지십니다.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 실수·실패를 단죄하는 이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잠시 손가락질을 할 수는 있어도 저마다 제 꼴과 제 삶에 바빠 남의 죄에 인생을 걸고 쫓아다니며 집요하게 단죄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자기 죄를 낱낱이 까발리면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일 겁니다. 하느님께 가는데 있어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은 분명 중요한 과정이지만 자기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시선이 빠진 성찰은 지나치면 영혼에 독이 되어 오히려 하느님과의 관계를 해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여인은 앞으로도 골백번 두렵고 수치스런 오늘의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자기가 했던 이 고백을 반복해야 할 겁니다. 마음이 스스로를 속여 어둠으로 끌고가려 해도 의지적으로라도 "아무도 없다."고 외쳐야 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11)
예수님도 그녀의 대답에 힘을 실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가 시작된 이상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음을, 그러니 누구도 서로를 단죄하지 말아야 함을 밝히신 겁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
이미 "새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우리가 온갖 우상(돈, 명예, 권력, 안전, 자기 자신)보다 하느님을 덜 사랑했던 불륜과 배신의 진홍빛 기억을 우리 힘으로는 하얗게 되돌릴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친히 나서셔야 가능합니다. 새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에 온갖 계명을 다 지키고 사랑을 실천한다 해도 신이 아닌 이상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설령 그리 한다 해도 내가 그럴듯하게 만든 "나의 의로움"(필리 3,9)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내 인생과 기억에서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부끄러운 죄악의 흉터를 겸손히 끌어안은 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필리 3,9)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죄인인 인간의 실존을 겸허히 받아 안은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희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 3,13)
비록 우리가 이미 저지른 죄 자체와 죄스런 기억과 죄로 얼그러진 자기 영혼을 자기 힘으로 되돌릴 순 없어도, 뒤의 것을 잊고 앞을 향해 내달릴 수는 있습니다. 그냥 거기에 발을 담그고 한탄과 우울 속에 살라고 시시때때로 발목을 잡는 죄와 어둠의 손길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때마다 몸을 일으켜, 예전의 일들을 기억조차 않으시는 하느님 품으로 내달려야 합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 속 여인과 함께 온 힘을 다해 고백하며 내달려야 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9)
벗님 여러분, 부활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루실 깜짝 놀랄 만한 새 일입니다. 이 부활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고한 가치를 지닌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여,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에 잘 참여하여 부활에 이르는 길을 찾는냐 하는 것입니다.(필리 3,8-11 참조) 내 안에 있는 어두움과 고통, 죄와 허물,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단죄 등을 되돌아보며 성찰합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며, 오늘 새롭게 거듭난 여인처럼 우리도 힘차게 다시 시작하는 은총을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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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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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마산교구 영산공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목 <사순 제5주일> <사순 제5주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예수님 이 말씀에 왜 사람들은 떠나갔을까? 그것도 왜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만 남겨놓고 하나씩 하나씩 모두 떠나갔을까?
그들이 예수님께로 잡아끌고 온 여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율법에 의하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 중죄인을 놓아두고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부터.
왜 그랬을까?
결론은 죄인이 죄인을 죄인이라고 판단하거나 단죄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강한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를 판단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 내가 너를 단죄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는 내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죄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따름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전에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이사43,18)
이런 하느님이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어서 너무 기쁩니다. 죄인인 나에게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셔주셔서 너무 행복합니다.
이런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주님 부활과 나의 부활에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주교님과 지역 신부님들과 신자들 모시고 축복 속에서 영산성당 사제관 축복식을 잘 끝냈습니다. 기도로 함께 해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영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신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기도의 침묵을 절대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도피나 거부의 형태로 여기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2항)
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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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4월 7일) '돌멩이를 내려놓는 행위'
요한 8장 1~11
죄 없는 사람이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을 듣고 당당하게 돌 던질 사람이 있을까요?
생계유지를 위해 몸을 팔며 사는 여성들이 쾌락이 좋아서 빠져든 것이 아니라,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된 사연을 듣다보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막아주고 보호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제 피정 동반을 하며~ 골고타 예수님 엽서를 하나씩 주고 미운 사람, 상처 준 사람, 용서가 안되는 사람 이름을 적어 봉헌하는 예식을 하였습니다
초등시절 교실에서 떠든 사람 칠판에 적는것을 하듯이 예수님께 내 속 마음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죠 누구도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돌멩이를 내려놓는 계기가 됩니다
보여지는 양상과 정도가 다를 뿐, 사랑과 선의 결핍은 모두 죄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도 모른다고 넘어갔다고 죄를 짓지 않은게 아니고 용서받지 않아도 괜찮은게 아닙니다
돌멩이를 내려놓고 내가 해야할 내가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용서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ㆍ바오로 사도처럼 그외의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기며 ‥
- 예수성심 김연희마리아 수녀 -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 11)
단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뜻을 따릅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기까지는 많은 죄악과 실패를 반복합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사는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현실을 다시 직면하게 됩니다.
나약한 우리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나약하고 부끄러운 우리들 삶 그 자리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단죄가 아닌 용서를 통해 사로잡혀 있는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순간 건강한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육신을 사랑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되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다시금 성찰하는 거룩한 사순주일 되십시오.
일으켜주시는 주님의 손을 항상 굳게 붙잡으십시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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