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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더운물
* 1982년도 당시
오전 첫째 수업이 시작되기 바로 5분 전, 합동 강의실 안에서 일이다.
나는, 새로 맞춰 신은 구두에 진흙이 조금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등을 조금 구부려서 휴지로 닦아 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랍쇼! 이게 웬일인가?
별안간 내 코앞에 난데없는 구둣솔 한 개가 불쑥 디밀어 졌으니……. 아, 아니 웬 구둣솔이?
깜짝 놀란 내가 고개를 얼른 쳐들고 올려다보았더니 명태처럼 삐쩍 마른 웬 학생 하나가 그 구둣솔을 들고서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는 것이었다.
「어허! 구둣솔도 다 갖고 다닙니까?」
의아해 하는 내 물음에 그는 해맑은 바리톤 음성으로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하하하하……. 신사 체면에 적어도 이런 구둣솔 한 개 쯤은 갖고 다녀야죠. 이건 멋쟁이 아가씨들이 자기 핸드백 속에다가 콤팩트나 빗 따위를 집어넣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칩니다.」
라고,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그 유명하다는 친구가 바로 이 친구로구나!
가끔씩 학교에 전기곤로며 등산용 코펠 따위를 가지고 와서는, 커피도 끓이고 라면도 끓여 먹고, 경우에 따라선 수제비 같은 것도 직접 go 먹곤 한다는 그 독문과의 괴짜 학생이…….
그는, 크게 벌린 손바닥으로 꽉 움켜쥐면 한 번에 다 잡혀질 만큼 깡마르고 몹시 길쭉한 얼굴에다가 1미터 75정도 되어 보이는 가느다란 두 눈, 살짝 언덕이 진 매부리 코, 곱슬곱슬한 머리털, 가무잡잡한 피부……. 등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용모의 소유자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후줄그레해 보이는 그의 옷차림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눈으로 봐서도 범상한 인물같이 보이진 않았다.
좌우간 나는 구둣솔 한 개의 하찮은 인연으로 해서 이 괴짜 친구에 대해 남다른 호감을 느끼며 차차 접근해 보기로 했다.
함께 다방에 가서 차도 마셔 보기도 하고, 점심식사를 나누기도 하고…….
왜냐하면, 장래 유능한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개성적인 인둘들을 잘 알아두고 또 깊이 관찰해 보는 것이 크게 이로우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강창오(姜昌五)!
방위 제대를 하고 다시 복학했다는 그는, 현역 제대를 한 나보다도 2살쯤 어렸고, 학번도 아래였지만, 정말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쳐흐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의 주전공인 독일어는 물론,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따위를 자기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지껄일 줄 아는가 하면, 그 어려운 한시나 영시까지도 자기감정이 나는 대로 척척 지을 줄 아는 보기 드문 어학의 천재였다.
하지만 옥에 티랄까?
이토록 영특한 우리의 강창오군이었지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결점 한 가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즉, 이성 앞에서 만큼은 오금을 못 필정도로 너무나 비굴한 자세를 취하곤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누구라도,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려는 사람 앞에선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겠지만 이 친구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제 3자가 보더라도 거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니 탈이었다.
그 일례를 잠깐 들어 볼 것 같으면…….
비 오는 날 자기가 기껏 가져 온 우산을 딴 여학생들에게 냉큼 건네주고 자기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비를 다 맞으며 터덜터덜 돌아간다든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여학생들의 차비 전액을 자기가 몽땅 책임진다든가…….
아참! 이럴 게 아니라, 내가 그의 옆에서 진지하게 보고 느끼며 관찰했었던 일들을, 하나 둘씩 선보이듯 삽화 식으로 소개해 나가는 편이 훨씬 쉽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우리 강창오군이 우리 문과대 사학과에 다니고 있는<이 혜림>이란 아가씨를 갑자기 짝사랑하게 된 데에서부터 얘길 꺼내야겠는데…….
그때는 아마도 화사한 벚꽃들이 한참 어우러져 피어대기 시작하는 봄날이었을 게다.
타 학과 학생들과 함께 합동 강의실에서 강의를 받게 되는 날이면 웬일인지 우리 강창오군운, 평소에 잘 안 입던 양복이며 넥타이까지 매 가지고 와서 되도록 그녀 근처에 자리 잡고 앉고자 애를 쓰곤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 다가가 필요 이상의 말을 자주 건넨다 싶더니만. 나중에 가선 아예 노골적으로 프러포즈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저……. 지난 번, 문화사 시간에 적으신 노트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혜림씨! 시간만 허락해 주신다면 오늘 점심은 제가 꼭 사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저에게 그런 영광 좀…….」
「뭐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웬만한 일이 있으면 저 좀 부르고 그러세요. 미력이나마 힘껏 도와 드릴 터이니…….」
이런 식으로 유치하고 미련스럽게 수작을 붙여대니 세상에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그래도 그는 집요하게 그녀 주위를 파리처럼 맴돌아댔다.
수업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강의실을 찾아 간다던가,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식으로 꾸민다던가, 되지도 않은 구실을 붙여서 만나보곤 한다던가…….
그러나 매우 거추장스럽게도 그녀에겐 그림자처럼 늘 따라 붙어 다니는 여고 동창생이자 같은 과 친구인 아가씨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양심자(梁心子)!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 양심자양은, 우리들이 소위 말하는 미인하고는 그 거기라 한참이나 멀었다.
우선 한국 여자 표준 키에 매우 미달되는 키에다가 주근깬지 여드름인지 울긋불긋 돋아난 양볼, 프로야구에 사용하는 공 한 개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만한 입…….
거기에다가 왜 하필 쌍꺼풀 수술을 애가지고 멀쩡한 눈을 딱부리 눈처럼 만들어 버렸을까?
우리 강창오군ㅢ 인물평을 잠깐 들어보자면,
이 양심자양의 얼굴은 한마디로,<날계란을 길이로 해서 눕혀 놓은 형> 이라나…….( 즉 사람의 양쪽 귀와 귀 사이의 길이가 사람 머리와 턱 끝까지의 길이보다 조금 더 길다는 뜻이겠지…….)
물론 이러한 얼굴형의 아가씨를 우리 강창오군이 좋아할 리 일겠는가?
그래서 우리 강군이 이양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일 땐, 그림자처럼 그녀 곁에 늘 붙어있는 양양을 아예 거들떠 조차 보지도 않고 무시해 버린단다.
아마도 자기가 목표로 하고 있는 이양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얘기겠지…….
이러니 우리의 양양께서 신경질이 안 나실 도리가 있을까?
커피를 끓여 갖고 오더라도 이양만은 위해 꼭꼭 한 컵씩만 갖고 오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양양은 이 강창오군에 대해 증오심을 남달리 불태우며 앙갚음해 줄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양의 뒤를 주책없이 따라오고 있는 강군을 보자 참다못한 우리의 양양이 마침내 홱 돌아서며 이렇게 톡 쏘아 붙여주고 말았다.
「강창오씨, 나 좀 봐요! 왜 우리들 뒤를 따라오시는 거죠?」
난데없는 홍두깨처럼 가슴을 콱 찔러대는 이 말을 듣자, 우리의 강군은 그 얼마나 가슴이 뜨끔해지며 당황했겠는가? 그것도 자기가 무진장 좋아하고 있는 이양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서…….
너무나 기습적으로 무안을 당해버린 강군은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해 주고 말았었단다.
「야! 누가 너보고 따라 아니냐?」
아무튼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우리의 강군과 양양은 서로 마주치게라도 되면, 거의 동시에 잡아먹을 듯 인상을 쓰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다가 타오르는 불길을 부채질 하는 듯 한 사건 하나가 그 다음 날로 또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는 우리의 강군이 영문과 K교수님을 찾아가 영시에 대해 얘기를 한참 나누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침 그 교수님께 볼 일이 있어 찾아 온 양양은 어쩔 도리 없이 복도 문 앞에서 서서 강군의 얘기가 끝마쳐지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십분, 십오 분, 이십분…….
그렇잖아도 미워만 보이는 강군이 엿가락 눌러 붙듯 소파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으니 우리의 양양인들 기분 좋을 리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양양은 k교수님이 인터폰을 잠깐 받으러 책상에 가시는 동안, 강군이 충분히 들을 수 있을만한 볼륨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주었단다.
「어휴! 좀 빨랑빨랑 끝낼 수 없어?」
물론 못 들었으면 모르되 이 말을 아주 정확하게 전해들은 우리의 강군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양심자」양이란 걸 알자 어지간히 분하고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자기는 그래도, 여기 학교를 재수씩이나 해가지고 들어 온데다가 방위 제대까지 마친 고참 선배님인데 감히…….
그래서 면담을 끝마치자마자 우리 강군은 재빨리 복도로 뛰쳐나가 다짜고짜로 양양에게 이렇게 호통을 쳐댔었단다.
「야! 넌 오래비두 없냐? 어디다대고 반말이냐 반말이…….」
허……. 참, 그런데…….
이거, 갈수록 태산이라더니만…….
이런 일이 있었으면 서로 간에 양보도 하고 참아 보기도 할 일이지…….
계속 감정 나는 대로만 나가다가 결국 그 다음 다음 날로 우리 강군과 양양의 사이에는 거센 돌풍이 휘몰아 칠 만큼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다이너마이트 폭발하듯 터져 버리고야 말았다.
그때는 우리 문과대 학생 전부가, 계단식으로 된 합동강의실에 모여 앉아, 문화사(文化史) 강의를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그러는지, 하필 강창오군의 바로 뒷자리에 이양과 양양 두 사람이 앉아 있었을 건 또 무언가?
이 두 아가씨들은, 공동의 적(?) 강창오군이 자기들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자, 그야말로 그의 코를 납작하고 시원하게 짓밟아 응징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서로 간에 주고받는 대화식으로 강군의 약을 살살 올려대기 시작했단다.
「얘! 우리 이웃집 남자는 말이지……. 인간이 치사하고 더럽고 쩨쩨하고,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단다. 건달, 맹추, 거지, 쪼다, 멀대, 얌체……. 더욱 가관인건 말이지……. 그 주제에 여자만 봤다 하면 새우눈 만한 게 생기가 싹 돌면서 사족을 못 쓰는 거야. 원 그런 게 어떻게 해서 예비고사는 붙어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나 몰라……. 눈이 쪼그매서 컨닝하기도 아주 불편할 텐데 말이야…….」
「어머! 너의 이웃집 남자 참 못 쓰겠구나!」
「말도 말아, 말도 마! 내가 그치 생긴 걸 한번 얘기해 볼까? 키는 멀쑥하게 커 가지고, 얼굴은 말려 놓은 오이지 같은 게 멋대가리는 하나도 없구……. 숯검댕이에다가 얼굴을 문질러댔나? 왜 그리 껌어? 그리고 어디 가서 쥐어 터졌는지 입술은 왜 그리 두껍고……. 하다못해 눈이라도 좀 크면 내 말두 안 해……. 눈이라곤 어린이용 와이셔츠 단추구멍만 해 가지고 답답하게 시리……. 뺀치로 쥐어틀다가 말았는지 코는 또 매부리코야, 얘…….」
물론 훌륭한 청각신경에다 예민한 추리력까지 겸비한 우리의 강군이, 은근히 자기를 빗대어 놓고 야유해 대는 이 소리들을 제대로 못 알아 챌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왜 나를 이웃집 남잔지 뭔지에 빗대어 가지고 야비하게 흉들을 보느냐며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아예 못들은 척 인내심 좋게 꾹 참고만 있으려는데……. 이거 시간 내내 쉬지 않고 계속 사정없이 들려옵니다 그려…….
특히 째어지는 듯 한 목소리를 가진 저 양심자양이, 제철을 만난 개구리마냥 아주 신이 나서 떠벌이는 꼴이란 정말…….
더 이상 자제하기조차 힘이 든 지경에까지 다다른 우리의 강군은, 마침내 쥐고 있던 볼펜을 책상 바닥에다 부욱 그으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었다.
「어휴! 꼭 찐고구마 밟아 놓은 것 같이 생긴 게…….」
물론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의 양양께서도 이런 험악한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잖은가…….
양심자양도 대뜸 노기가 등등하여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뜸 대꾸를 해 줬단다.
「어휴! 자기는 꼭 꼴뚜기 외삼촌같이 생겨 먹은 자식이…….」
좌우간 이러저러한 몇 가지 사건들이 줄 이어서 계속 터지고 난 다음부터는, 우리의 강군과 양양 사이는 도저히 풀어질래야 풀어질 수 없는 원수 비슷한 관계, 즉, 문자 좀 써서 표현한다면, 견원지간이니 불구대천 등등……. 하는 관계로 까지 마침내 확고히 다져지고야 말았다.
그래서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양양이 만일 <찬물>이라면 우리의 강군은<더운물>이요, 강군이 만일 <여름>이라면 양양은<겨울>이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우리들 사이에 금(金)과 은(銀) 같은 명언처럼 소개되어지곤 하였는데…….그 중 몇 가지만 추려내어 간단히 소개해 보면,
「아니……. 계집애가 못 생겼으면 자중을 할 줄 알아야지 자중을……. 원, 저렇게 깐죽대서야 어디…….」
「흥! 아무리 사내 얼굴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생기고 봐야 될 게 아니니? 저 따위 무말랭이 같은 낯짝 가지고는 출세하긴 다 틀렸다 얘……. 세상에 어느 놈의 직장 면접시험에서 붙여 준다든?」
「어휴! 도대체 저렇게 생긴 걸 누가 데려간다지?」
「우리 한번 솔직히 말해보자꾸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여자라면 누가 저 따위 남자를 택하겠니?」
「요즈음 귀신들은 도대체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 저런걸. 안 잡아가고…….」
「저 남자 제발 외국 여행이나 안 나갔으면 좋겠어! 우리나라 남자들이 모두 저렇게 생겼는줄 알거 아냐.」
「저런 게 시집을 가면 또 얼마나 못 생긴 2세를 낳을까?」
「큰일 났어! 저런 머저리 같은 사내한테 중매라도 들어오면 어쩌니?」
「우리 관광 한국을 위해서라도 저 여잔 제발 마스크 좀 쓰고 다녔으면…….」
「원, 생긴 것도 재수 없게 생겨서…….」
「저, 수수팥떡같이 생긴 여자…….」
「저, 쥐새끼 닮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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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정말 우리들의 귀가 이상해지고 머리가 빙빙 돌아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강군과 양양간의 오고가는 설전을 더욱더욱 거칠어져만 갔다.
그리고 어느새 이러한 소문은 성능 좋은 단파 방송처럼 학교 내에는 물론 외부에 이르기까지 자꾸만 자꾸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 오죽했으면 우리 학교 정문 앞에 있는 분식센터 주인아줌마가, 우동 사 먹으러 들어 온 우리 강군에게, 도대체 강창오란 학생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냐고 까지 물어봤었을까!
그리고 무슨 싸움에 공연이 무슨 등까지 터진다는 격으로 이 두 철없는 남녀가 티격태격 서로 싸우는 통에, 애꿎은 나까지도 덩달아 망신을 당해버린, 웃지 못 할 촌극까지도 벌어졌었다.
그때가 아마도 5월 중근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을 게다.
라일락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캠퍼스 여기저기에 솔솔 풍겨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아침나절에 조금 쏟아진 비 때문에 그 빛깔이며 모습들이 더더욱 푸릇푸릇하고 싱싱해만 보이는 캠퍼스의 경치들을, 나는 시계탑이 마주 보이는 돌 벤치에 앉아 지긋이 감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지 미모의 이혜림양이 빙긋빙긋 미소 지으며 내게 바짝 다가왔다.
「아우……. 형!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으러 다녔는데…….」
그녀는 피아노 위의 하얀 건반들처럼 가지런하게 고른 치아들을 내게 환히 내보이면서,
「저……. 이것 좀 써 주실래요?」
그녀가 불쑥 내게 내민 메모지 한 장에 나는 두 눈을 번쩍 치켜 떴다. 그것은 깨알같이 수많은 글씨들로 적혀진 이를테면 설문지(說問紙)같은 것이었다.
「이, 이게 뭐지?」
「호호. 그건 말이죠. 저희 여학생회에서 만들어 본 대남학생용(對男學生用) 설문지예요. 이번 저의 여학생회에서 발간되는 회지에 어쩌면……. 시리즈가 신설되거든요.」
「어쩌면……. 시리즈라니?」
「호호. 일종의 탐방기사 같은 건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어쩌면 그 남학생은 공부를 그리 잘 할 까? 어쩌면 그 남학생은 그림을 그리 잘 그릴까? 하는 궁금증들을 가지고 직접 그 당사자 되는 남학생을 찾아가 설문지를 건네주고 답을 달게 해서 속 시원한 답들을 얻어 내게 되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죠?」
「글쎄…….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나야 뭐 해당되는 사항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어머! 형 참 겸손하네요. 있잖아요. 왜? 어쩌면 그 남자는 그토록 미남일까? 하는 거 말예요.」
「뭐? 뭐라고? 아니, 그, 그럼……. 내, 내가, 미 미남이란 말이야?」
나는 너무나 끔찍(?)한 소리를 들었기에 하마터면 그때 앉아 있던 벤치 위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하였다.
그러자 혜림이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는데 뭘 그러느냐는 식으로 두 눈을 곱게 흘기면서,
「어머머……. 괜히 시치미를 다 떼신다. 솔직히 말해서 형만한 미남자가 어디 그리 흔해요? 채이는게 모두 그런 남자들뿐인데. 자, 아무튼 꼭 쓰셔서 내일 아침까지 저의 과에 갖다 주셔야 해요. 빨리 편집해야 되니까요. 참, 그리고 말이죠…….」
그녀는 한쪽 손에 쥐고 있던 책 속에서 이와 똑같은 설문지 한 장을 더 꺼내 주고는, 우리 강창오군도 이것을 쓰게끔 얘기해 달라며 재삼재사 부탁하는 것이었다.
뭐, 미남이 아닌 보통 남자와 비교해 보기 위함이라나?
아무튼 그녀가 돌아간 다음 잠시만이라도 난 행복한 기분 속에 젖어 들을 수 있었다.
허허……. 내가 미남이야?
망측하게 원 별소리를 다 들어보는구먼.
솔직히 난 뭐 잘 난 곳이라고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린 여학생들 사이에 그런 식으로 소문이 다 났단 말인가?
원, 꽃같이 피어나던 나의 십대 후반에는 농담이라도 이런 소린 도통 못 들어보고 지냈었는데…….
좌우간 미남, 미남이라.
아무리 들어보고 조용히 뇌까려 봐도 과히 싫증나지 않는 낱말인 걸……. 나는 아주 만족스런 기분으로 방금 받았던 설문지를 차근차근 훑어보기 시작했다.
〇 여드름은 언제부터 짜기 시작?
〇 첫사랑은 언제쯤?
〇 짝사랑은 언제쯤?
〇 결혼은 언제쯤?
〇 아기였을 때 먹은 건 모유? 분유?
〇 가장 좋아하는 음식?
〇 가장 싫어하는 음식?
〇 하루 식사 중 가장 즐거운 때?
〇 목욕 이발은 한 달에 몇 번?
〇 즐겨 쓰시는 화장품?
〇 이상적인 여인상?
....................
....................
이런 식으로 일상 신변에 대해 별 볼일 없이 물어 보는 것들이라 다소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것이 그들 회지를 재미있게 꾸미는 어느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시피해서 강군이 늘 자주 가서 공부하는 중앙도서관 3층 열람실로 뛰어갔다.
도서관에서 나와 만난 강군은, 내가 건네주는 설문지를 보자마자 조그만 그의 두 눈을 한 치 만큼이나 크게 뜨며 놀라 버렸다.
그리고 그는 몹시 격앙된 목소리로,
「형! 형! 이거 도대체 누구한테 받았습니까? 심자? 혜림이?」
「말해 줄까? 네가 굉장히 짝사랑하고 있는 아가씨한테 받았다. 자기들 여학생회 회지에 실릴 기사래.」
「아이고, 형님도……. 이게 뭔 줄 아세요? 이게?」
강군은 너무도 답답하고 속이 타는지, 내게 건네받은 설문지를 손으로 마구 구기면서 자기 가슴을 탁탁 쳐댔다.
「왜? 특색 있는 남학생들에게만 일부러 부탁하는 거라던데…….」
「어휴, 형님도 참 순진하시긴……. 제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제 경우 말입니다. 그 놈의 어쩌면……. 시리즈에 추남으로 채택되었다구요. 어쩌면 그 남자는 그리 못생겼을까? 세끼 밥은 그런대로 찾아 먹고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말이죠. 」
「뭐, 뭐라고?」
「어휴! 그 빌어먹을 원수, 양심자양이 하구 많은 남학생들 중에서 거의 우기다시피 해 가지고 저를 적극 추천해 댔다지 뭡니까?」
「하하……. 거 맹랑한 것들 봤나!」
「에이, 형님도 뭐 좋아하실 건 별로 없습니다. 형님한테 보낸 설문지 목적이 뭔지 아세요?」
「왜? 미남에 대한 거라면서?」
「후후……. 미남, 미남 너무 좋아하지 마십쇼. 미남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미남입니까? 형님의 경우는, 어쩌면 그 늙은 남자는 아직도 그리 젖살같이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을까? 설마하니 엄마 젖을 아직도 먹고 있는 건 아닐 텐데……. 그 비결은? 에 해당된다구요.」
나는 강군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자 기분이 몹시 불쾌하고 떨떠름해졌다.
그러면 그렇지…….
웬만큼 눈이 나쁘지 않고서야 나 같은 사람보고 미남이라 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런 건 상식적으로 미리 알아 차렸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정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간 신경질이 나고 괘씸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었다.
남은 늙어 가지고 공부하는 것만 해도 서러울 판인데 어린 것들이. 그것도 새까만 후배들이 하늘같은 선배를 가지고 놀아?
이를 부드득 갈고 또 갈아 보았지만 결국 어쩌겠는가?
망신이나 덜 당하려면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속 편하지…….
이것도 다, 강창오군 하나를 잡기 위해서 양양과 이양이 공동으로 파 놓은 함정 아니겠니?
자, 그럼 여기서, 내게 모욕(?)을 감히 선사하려던 무례한 아가씨, 이혜림양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그녀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이 됐듯이 우리 양심자양의 절친한 단짝 친구이자, 강창오군이 지상최대로 짝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인데…….
그녀의 용모, 또는 성격……. 그리고 강군이 그녀에 대해 품고 있는 연정 따위는 구태여 다른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강군의 노트 속에 아무렇게나 적혀진 낙서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아! 봄비보다도 더 계속해서 공상이 떠오르는구나!
그녀에 대한 공상이…….
사랑이란 혼자 생각하며 멀리서 통곡하는 것?
사랑이란 너무 거칠고, 우악스럽고, 너무 야단스러운 거야. 그래서 가끔씩 찔리기도 하구…….
그녀의
아름다움은 쓰기엔 너무나 아깝고 땅 위에 있기엔 너무나 고귀해…….
아! 아! 지금까지 아름다움을 보아 왔다고? 내 눈아, 그걸 부정하렴……. 오늘에야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았노라!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창오가>
어디에서 살짝 표절해다 놓은 듯 한 이런 낙서들뿐만 아니라, 그의 짝사랑에 대해 너무나 냉담한 그녀를 보고 그의 시에서는 이렇게 또 울부짖고 있다.(이것은 독일어로 써 놓았기에 외국어 실력이 워낙 짧은 내가 모두 번역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뜻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목: 기다림
시인: 강창오(姜昌五)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면,
그대는 꼭 오실 것만 같아.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젠 너무 지쳐서,
그러잖아도 희지 않은 이 얼굴
더욱 까매졌구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석 달, 넉 달…….
기왕에 기다리는 거 지금까지 버틴 거,
바위처럼 굳건히 지켜 서 있겠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 삼 년, 사 년…….
그대 향한 이 촛불, 다 타오를 때까지,
뒤뜰에 뛰노는 강아지가 손자를 볼 때까지.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대충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삼, 사 천년 정도 나가는 것 같은데…….
원작자인 강창오군이 아닌 다음에야 내 번역이 썩 어울리게 잘 되었는지……. 그리고 또 내가 제대로 기억은 해서 적어놓은 건지는 전혀 자신할 수가 없다.
이혜림양!
마치 엷은 레몬 껍질이나 박하 드롭프스같이 보였고 또 그러한 냄새를 항시 풍겼던 그녀는, 정말 예쁘긴 예뻤었나 보다.
1미터 70에 가까운 늘씬한 장신하며, 길게 늘어뜨린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장기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티 없는 얼굴에 오밀조밀하니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힌 이목구비.
그래서 그 당시 나를 제외한 상당수의 문과대 남학생들이 비록 우리 강군처럼 노골적으로 애정 표시는 하지 않고 있었을망정 저마다 한 가닥씩 설레는 가슴을 알게 모르게 간직하고 있는 듯싶었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속으로만 쌓이고 쌓여지다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것이 그 유명한 변호진 사건!
변호진이랑 이름의 이 친구는 그 당시 국문과에 있었는데 이양이나 양양처럼 재수과정을 밟지 않고 곧장 진학을 했었기에 그녀들과 같은 나이 또래였었다.
그는 1미터 72센티의 보통 신장에 언제나 스포츠머리를 하고 금테 안경을 걸쳐 쓴 멋쟁이였는데……. 두툼한 얼굴에 늘 잘 웃는 그의 인상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부담감 같은 것을 전혀 느끼게 하질 않았었다.
그러나 이 친구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자기 장점 따위를 최대한의 무기로 해서 그녀에게 겁 없이 접근을 시도해 보다가 마침내 큰 코를 다치고 거의 회생불능의 만신창이가 된 채, 비극적으로 사라져 버린 전형적인 인물이었는데,
생긴 것과는 아주 달리 촉삭촉삭 거리던 그의 행동이나 말에서부터 일찍이 이런 비극의 씨앗이 조금씩 싹 텄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사학을 전공하는 그녀(이혜림)에게 어기서 요강 깨진 조작을 하나를 주워 잦고 가서 그게 혹시 고려청자는 아니냐고 짓궂게 물어 본다거나, 자기 딴엔 허물없이 군답시고,
「야! 혜림아! 우리 시원한 주스나 한 잔 마시러 갈까? 물론 반반씩 부담해서 말이야.」
「혜림이 넌 참 예쁘구나! 꼭 큼지막한 인형같애…….」
「오늘 느네 집에 놀러 좀 갈까?」
등등의 말들을 함부로 지껄여 대곤 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수준의 프러포즈 가지고야 콧대 센 우리 이양에게 전혀 먹혀질 리 있겠는가?
보기 좋게 번번이 거절을 당하곤 하자 우리 변호진군은 그 나름대로 최후의 계책 한 가지를 꾸며 내 보았었다.
즉, 이양이 계속 자신의 제의를 안 받아 줄 경우, 되건 안 되건 간에 그녀의 집에까지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짓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협박 내지 으름장 비슷한 것으로…….
이에 너무나 시달리다 못한 우리 이 혜림양은, 돌아오는 일요일 날 오후 1시경, 명동에 있는 모 제과점에서 그와 일대 일로 만나 줄 것을 마침내 약속해 주었었다.
그런데 사고는,
이런 어마어마한 빅. 뉴스(Big News)가 그 전달과정에서 어떻게 잘못 되어 가지고 사전에 발각, 장난질치기 좋아하는 몇몇 학생들의 귀에 흘러 들어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물론 약속된 그날,
그 제과점 안에는 적당히 변장을 한 일단의 장난꾼 학생들이 아예 오전 열한시 반부터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과연 우리의 호프 변호진군의 프러포즈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얼마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는 경마장에서 우승마를 점치듯 수군수군 조심스럽게 논의해 가면서…….
드디어 약속 시간 오십 여분 전!
그러니까 정확히 12시 10분!
한 여름에 백마 타고 오는 눈사람처럼 위아래 하얀 양복에다 하얀색 계통의 넥타이, 심지어 하얀색 구두로 온통 쫙 빼어 입은 우리 변호진군이 예식장에서 신랑 입장하듯 매우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제과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잠시 제과점 안을 척후병처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길 한 5,6초 정도.
마침내 한 구석의 빈자리를 발견한 그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길 50여 분간…….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는 갈증이 나는지 엽차를 자주 마셔댔고,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리는 빈도수가 비교적 많았으며,
무척이나 초조한 듯 출입구 쪽의 쇼윈도를 쳐다봤다, 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한마디로 마음의 안정을 못 찾고 있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었다.
약속된 오후 1시 정각!
역시 그녀는 자신의 애칭인 퍼스트레이디답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때를 맞춰서 제과점 문을 밀고 들어 왔는데,
늘 입고 다니던 연두색 원피스에 조그만 핸드백을 들고 있어서, 오늘을 위해 무슨 특별한 신경 같은 건 아예 안 썼던 것으로 보여진다.
잠시, 제과점 안을 둘러보던 우리 이양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변군을 발견하자, 눈썹을 약간 찡그리면서 그 쪽으로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우리 변군은 벽 쪽으로 자기 고개를 돌려 댄 채 다가오고 있는 이양을 아예 거들떠 조차 보질 않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그녀에 대해선 무관심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가 바로 자기 앞자리에 와 앉았을 때에도 여전히 모르는 척…….
그녀 역시 새침한 척…….
이렇게 서로 침묵만은 지키길 한 3분 정도 계속하다가, 마침내 우리 변호진군은(마치 외국 영화에 나오는 어느 이별 장면처럼) 그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대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혜림이! 내가……. 그렇게……. 미워?」
이렇게 서두를 꺼내면서 우리 변호진군이 준비해 둔 다음 말을 이어 나가려고 막 하던 찰나였다.
「어휴, 참!」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는가 싶더니 우리 이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뛰어 나가 버렸다.
「어? 어?」
너무나 예기치 않던 상황이 벌어졌으므로 이에 당황한 우리 변군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뭐라고 막 말하려 할 즈음, 사방 여기저기서 감춰진 웃음소리들이 일제히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말았단다.
「하하하……. 야, 이 자식아! 관둬라, 관둬! 그까짓 얄팍한 프러포즈에 어떤 아가씨가 넘어가겠니? 응?」
「정신 좀 차려라 정신 좀…….」
「하얀 양복만 빼 입고 오면 잘 될 줄 알았냐?」
「넌 배워도 한참 더 배워야 될 아이 같다. 그게 뭐니? 그게…….」
「임마! 넌 밸도 없냐? 너 같이 굴다간 안돼요, 안 돼! 상대가 누군데 그래?」
사방 여기저기서 사형 집행인들처럼 우르르 나타나는 장난꾼 친구들을 보고, 그 당시 우리 변호진군은 얼마나 아찔해 졌겠으며 또 얼마나 심한 분노를 느꼈겠는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보다는 아마도 차라리 오뉴월 하얀 눈사람처럼 녹아 없어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다음 날 아침,
우리의 변호진군은 모종의 각오라도 하고 왔는지 그의 스포츠머리를 더욱 짧게 깎고 책가방도 안 가지고 학교에 왔더란다.
그는 곧장 사학과 강의실로 들어가서 수업 준비 중이던 이양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야! 너 따위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사람을 망신 줘도 분수가 있지…….
세상에 여자가 어디 너 하나뿐이냐?
내가 당한 망신을 너 어떻게 보상할래? 하면서 말이다.
이 바람에 어지간히 콧대가 센 우리 이양도 곁에 있는 양양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도 했었다나?
결국 나이 많은 과 선배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은 변호진군은 그 나름대로 정중한 사과를 한 뒤 물러가긴 했었지만…….
이 문제는 이것으로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전해들은 우리 강군은,
마치 자기 자신이 당한 일들처럼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래도 자기 딴엔 상심하고 있을 그녀를 위로해 준답시고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주책없이 그녀 집에 직접 찾아 갔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그녀를 못 만났지만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길 다 늘어놓고 돌아 간 강군 덕택에 그녀 집안에서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났는줄 알고 학교에 연락, 마침내 그 담당 교수까지도 알게끔 일이 커져 버렸다.
변호진군이 그 다음 다음날로 부득이 휴학계를 제출하고 허겁지겁 군대에 가게 된 것은 이 사건의 추이로 보아 너무나 당연한 결론일는지 모른다.
( 어느 일설에 의하면 강창오군이 그녀 집에 찾아가고 한 것은, 그의 강력한 라이벌은 변호진군을 자동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도 한다.)
변호진군의 사건이 마무리 되어진 후, 어느 정도 자신을 얻은 우리의 강군은, 그녀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활기찬 공세(?)를 펴 나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옛날처럼 그녀 하나만은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구실을 붙여 가지고 큼만 있으면 그녀 집에 찾아가, 커피며 과일 등등을 대접 받고 돌아온다거나, 중학교 다니는 그녀 동생을 밖으로 불러내어 짜장면은 사 준다거나 해서 인기를 얻는 등등…….
어떻게 보면 옛날보다 상당히 진보되고 효과적인 작전 같아 보였다.
그러나 강군이 이러면 이럴수록 우리의 이양은 더욱더 강군을 미워했는데. 그녀가 그를 미워하는 정도는 이제 양양이 그를 미워하는 정도보다 훨씬 커져버리게 된 것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뻔뻔스럽고 파렴치 할 수가 있어요? 툭탁하면 저희 집에 와서 넉살 좋게 장인, 장모나 찾아대구……. 하두 창피해서 이젠 전 집에도 잘 못 들어 가겠다고요.」
울상을 지으며 내게 와서 하소연을 하는 이양을 보고 나는 의아한 점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아니, 집에선 아버님이랑 어머님이랑 아무 말도 안하시던가?」
「글쎄……. 저희 아버님도 옛날에 하필 그런 식으로 해서 장가를 드셨었다구 아버지 어머니께선 그저 웃기만 하시니 이를 어째요? 아이, 참…….」
울상을 짓다가 한편 기가 막힌 지 웃음을 짓다가…….
아무튼 이양의 얼굴은 한시도 편해 보일 날이 없었다.
그러나 강군의 이러한 철면피적 행동도 잠깐 부푼 올챙이 헛배처럼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코끼리만한 덩치를 지닌 그녀 오빠가 해병대 장교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1미터 85 가까이 되는 키에 90kg은 됨직해 보이는 그녀 오빠의 체구는, 비쩍 마르기만 한 우리 강창오군을 그저 가볍게 젓가락질 하듯 냉큼 집어 던질만한 위엄을 갖추고 있었는가 보다.
그러나 우리 강군은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만을 포기했을 따름이지, 그녀에 대한 연정 따위 자체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을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하루 종일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는 어느 날, 그녀가 미리 알아차리고 뒷무능로 해서 도망쳐 버린 줄도 모르고 조그만 비닐우산을 뒤집어 쓴 채 학교 정문 앞에서 무려 3시간 반 동안 달달 떨며 지키고 서 있었다던가.
우연히 종로 거리를 지나가 기적적으로 그녀를 만났기에 정중히 차나 한잔 나누자고 했더니, 우선 일단 앞장서서 가라고 하기에 안심하고 앞장을 서서 걷다가 어딘가 조금 이상해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어느 틈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었다는 등등이 아까의 그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열렬한 구애를 했었으니 그 갸륵한 정성을 봐서라도 하느님께선 뭔가 좀 이루어지게 해 주실 줄 알았었는데…….
거의 졸업과 동시에 우리 강군의 꿈은, 조금 불다가 만 비눗방울처럼 너무나 허무하게 터져 버리고 말았다.
졸업한 그 다음다음 날로 우리 키다리 미녀 이양은 그녀의 오빠 친구와 함께 결혼식을 마치고 미국인지 캐나다인지 비행기 타고 훨훨 날아가 버렸으니까…….
이에 대해 너무나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평소 그가 걱정하던 간장이 조금 악화되었는지, 한동안 우리 강군의 소식은 뚝 끊겨진 채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그의 행방에 대해 어떤 친구 얘기로는, 고향에 내려가 농사짓는 형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있다고도 했었고, 또 어떤 친구의 얘기로는 너무나 상심을 한 나머지 정신적 피로도 풀겸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시골 친척 집에 가서 요양을 하고 있다고도 했었다.
그러나 졸업을 한 뒤, 군대에 가기도 하고, 취직을 하기도 하는 서로 바쁜 마당에 일일이 그 친구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역시, 모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인지라 그리고 또 시골 여기저기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 등 샤로 시작되는 생활 때문에 그 친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만한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해서 하숙집에 돌아와 보니, 뜻 밖에 우리 강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옛날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두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야! 오랜만이다!」
그는 내가 반갑게 건네주는 인사말에 그저 건성으로 답하면서 매우 피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실은 말입니다. 바로 그 혜림이 결혼식이 있기 하루 전날 밤에 말입니다. 그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전화를 걸어서?」
「속삭이는 듯 조용히 침착하게 말해줬죠. 그 동안 미안했어, 굿바이! 행복하게 잘 살아! 하구 말이죠.」
「그랬어? 야! 그거 참 잘했다. 아주아주 멋진 짓이야!」
나는 크게 감격을 하며 그의 두 손을 덥석 잡아 흔들어 댔다.
그러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띄워대며,
「후후후. 글쎄, 그렇게 했었으면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었겠습니까? 사실 전, 그때 그러지를 못 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바보처럼 쭉 저주만 해왔었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겠다는 마음 자체는 역시 훌륭한 거 아니겠어?」
「휴우―」
그는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뭔가 아쉬운 듯 빈 입맛을 쩝쩝 다셔댔는데…….
나는 이때처럼 맥이 탁 풀려 있는 강군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가끔씩 화를 내기도 하고 좀 덜렁거리기도 하는 그의 성격이었지만,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는 기색이라곤 도통 나타내질 않았던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내 방에 있는 30촉짜리 형광등 불빛에 반사가 되어 그의 조그만 두 눈에 몇 방울의 눈물이 반짝 거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는 갖고 있던 자기 조그만 손가방의 지퍼를 열면서 차근차근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공에서 편히 죽 지내고 있다가, 실은 저……. 두 가지 일 때문에 전 다시 서울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우선 한 가지 일은 취직을 하려는 거죠.」
「뭐? 취직을 한다구? 야! 그거 참 잘 생각했다! 너같이 훌륭한 외국어 실력을 발휘도 못 시키고 그대로 둔다면 그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야!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의 용기에 대한 내 찬사와 격려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 조그만 손가방에서 수 십 통의 편지들을 수북이 쏟아 내었다.
그것은 모두 우체국 소인들이 찍혀져 있는 편지들 이었다.
「그리고, 제가 할 다음 일 한 가지는……. 자! 한번 보십시오! 이게 모두 다 그 망할 놈의 원수, 양심자양이 제게 보내 온 편지들입니다. 순전히 욕만 쓰여 있는 것들이죠.」
「양, 양심자가?」
「네……. 제가 혜림이를 잃고 난 후, 그건 순전히 양심자 네가 곁에 붙어서 내 중상모략을 해 댄 덕택이라고 제가 먼저 욕을 써서 편질 보내 줬더니만, 대뜸 욕으로 답하는 편지를 보내오더군요. 그래서 제가 또 서서 보내주고……. 이렇게 서로 욕만 하는 편지들을 주고받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웬만한 욕들은 여기 편지들 속에 다 들어 있을 겁니다.」
「어허. 이제 그만들 두지 그래? 아, 졸업한 지금까지 와서도 이러면 어떡하나?」
나는 몹시 답답한 듯 혀를 끌끌 차댔다.
「휴― 그래서 전 그 양심자와 만나서 최종적으로 담판을 짓고 이 편지들은 모두 건네주고 깨끗이 결별하려는 겁니다. 이제 저한테 남아 있는 아쉬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말을 마친 강창오군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질 않고 입을 꼭 다물었다.
마치, 모든 걸 정리해서 마지막 유언(遺言)을 남기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날 밤.
강창오군은 내 하숙방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그 다음 날로부터 나와 그는 또 다시 멀리 떨어져 지내야만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3주일간의 장기 출장으로 지방에 있는 자사에 내려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3주일이 지난 뒤,
장기간의 출장을 무사히 마치고 본사 사무실로 돌아 온 나는, 내 책상 위에 웬 편지 한 통이 댕그라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무심코 그 봉투를 뜯어서 알맹이를 꺼내 보았다.
그것은 강창오가 보낸 편지인데 인쇄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고르지 못한 날씨에 선생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평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번에 저희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음을 삼가 알려 드립니다.
바쁘시더라도 오셔서 저희들의 앞날을 축복하여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일시 : 〇〇년 〇월 〇일 〇시
장소 : 〇〇예식장 4층
〇〇년 〇월 〇일
신랑 강창오
신부 양심자
나는 천천히 아래로 읽어 내려가다가 그만, 앗! 하고 가느다란 비명을 질러댔었다.
혹시 내 두 눈에 이상이 있나, 아니면 인쇄된 그 활자들에 잘못은 없나 하고 다시 한 번 똑똑히 들여다보았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기에 나는 그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는데.
다행히 그 편지 맨 끝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들이 적혀져 있어 혼이 빠진 나를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추신 : 형! 너무도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그간 상대방의 단점들을 너무나 열심히 들춰내다 보니까 나중엔 장점들밖엔 남아있질 않더군요. 그래서 우린 결혼하기로 했습니다.(하지만 우린 결혼하고서도 싸움만은 계속할 겁니다) 형님! 출장 갔다 돌아오시는 대로 꼭 연락 주십시오.
저희 회사 번호는 〇〇〇국에 〇〇〇번, 교환〇〇〇입니다.
잠시 후, 악몽(惡夢)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조금 차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옆 자리의 직원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건 말건 간에 껄껄껄 크게 소리 내어 웃어 보았다.
그래, 맞아 맞아…….
원래 사랑이 미움 되고 미움이 사랑된다지 않나?
역시 그 두 사람은 하늘이 정해준 천생연분이었어!
「찬물」과 「더운물」은 얼핏 보기엔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일단 합쳐지게만 되면 아주 알맞은 「미지근한 물」로 되는 법이거든…….
아, 참!
내 지금 이럴게 아니라, 강창오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라도 해줘야지.
아까 그 친구 전화번호가 뭐라고 했더라?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정신없이 다이얼을 돌려댔었다.
내 눈 앞에 바로 마주 보이는 커다란 벽시계는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을 정확히 5분 남겨 두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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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징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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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휴~~다 읽느라 눈뼝 걸렸어요..하하하.........넘 재밌어서.....암튼 해피앤딩..........장문의 꽁트.....넘 웃으며 잘 보았습니다,
넘 재밋습니다아~ 종종 부탁해요오~
ㅎㅎㅎ두번 나눠서 읽었습니다...대단하죠..ㅎ저두 대단하지만 상훈님은 더 대단하신것 같아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이지스님. 너무 길어서 읽어본 사람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읽는 분들이 많이 있군요,. 용기가 납니다....
이 긴 글을 끝까지 다 읽은 자신이 대견스럽습니다. 근데 픽션일까 논픽션일까...암튼 결말이 궁굼해 다 읽었는데 청첩장이 충격적이긴 하셨겠어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글 또 올려 주세요.
쑥갓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격려를 해주시니... 반응이 괜찮은 거 같으니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