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원의광의 35대 후손인 다께다 쇼오가쿠로부터 최용술 선생은 약 30여년을 행적을 같이하며 합기도의 무궁한 기법을 전수받게 된다.
잠깐 일본에서의 최용술선생의 행적을 살펴보자면 충북 황간에서 태어난 최용술님은 8세의 어린나이에 같은 동네에 들어와 장사를 하며 살던 한 일본인 부부(아이가 없었슴)에 의해 "유괴"(아이키도측의 어떤 사람이 스스로 따라 나섰다고 하는데 과연 초등학교 1학년의 나이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사리를 분별 할 수 있을 것인가?) 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낯설은 일본 항구에 도착한 최용술님은 속은 것을 알고 큰소리로 울고 슬퍼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소년 최용술을 꾀어온 부부에게 "어린 것을 속여 데려왔다"고 힐난하게되고 그 부부는 소년 최용술을 버리고 황급히 달아난다.
우여 곡절 끝에 소년 최용술은 일본의 한 절의 주지스님에게 발견되어 데려가게 되며 그 절의 주지스님과 절친한 관계에 있던 다케다 쇼오카구에게 넘겨진다.
최용술님의 전언으로는 당시 다테다 쇼오가쿠가 데려갔던 첩첩산중에는 자기또래의 조그만 아이 서넛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삼년이 지나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한다.(그러므로 다케다 쇼오가쿠가 생전에 다른 제자를 두었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이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본 홈페이지의 아이키도와 합기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다케다 쇼오가쿠가 "이것은 본시 조선의 무술이었으니 나는 너에게 이것을 돌려줄 뿐이다!"라고 한 것도 바로 그가 청화원씨 신라삼랑원의광의 후손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이유로 합기술은 가전의 비술로 전해내려왔다.
도주 최선생님은 이분에게 합기도를 배우기 위하여 입산, 무려 3십여년을 수련한 끝에 모든 기법을 몸에 익혔으며 하산 하였을 즈음에 조국은 광복이 되었다.
도주 최선생님은 모든 기법을 지한재(池漢載) 선생에게 전수하였고 지한재선생은 도주의 가르침을 더욱 체계화 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오늘날의 기반을 굳혀왔다.
지한재선생은 합기도의 대중보급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6.25가 발발하고 한 때 침체분위기를 겪다가 다시 국내 정세가 안정되자 대구(大邱)에서 합기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다시 1956년 단신으로 상경하여 많은 고초를 참으며 불모지에 가까운 합기도를 대중에 보급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지한재선생을 받들어 고군분투한 분들은 명광식, 김종택, 황덕규, 김용진, 김영환, 이태준, 유영우, 정원선 등 외 수십명의 합기도 사범들이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암흑기에 처해있던 합기도를 전국으로 보급하는데 총력하였고 마침내 오랜동안의 민족무예인 합기도가 다시 세상에 빛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합기도의 엄청난 위력이 각계에 알려짐에 따라 모(?)기관과 육군사관학교를 비롯, 각종 특수부대요원, 경찰등에서 지도 요청이 쇄도하게 되었다.
참고로 태권도의 역사를 거론하자면 길게는 모두 우수한 배달 무예에서 한 뿌리였다고 볼 수 있으나 원래 일제 치하의 '가라데 협회'가 근간이 되어 그 세력을 주축으로 태수도 협회가 결성되고(해방후)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으며 태권도 협회로 개칭(1965년)하여 왕성한 활동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니 다 같은 민족무예의 한 뿌리이지만 서로의 세력에 예의 주시하며 감정을 첨예화 시키는 것 보다는 우리 민족이 가진 우수한 무술적 역량을 협력하여 집대성하고 과학화, 체계화 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제 합기도는 명실공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적 재산이 되었다.
지금 합기도는 미국, 카나다 등지에서 선풍적인 위력을 떨치고 있고 월남, 스위스, 알젠틴, 호주, 브라질, 유럽 각국에 뻗어나가고 있으며 특히 스페인을 비롯한 수개국에서 [경찰]무술로 체택되는 등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머지않아 합기도는 범 세계적으로 붐을 이룰 것이며 민족 고유무술인 합기도는 우리의 국위를 선양하는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할 것이다.
이러한 장족의 발전을 이룬 뒤안길에서 숱한 고초와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합기도의 토양을 거름지게 한 지한재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님들의 수고와 노력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근래에 일본의 아이키도라는 무술류가 한국에 유입되어 국내에 활동하고 있다.
아이기도는 꺾기를 주무기로 하고 여기에 던지기를 가미한 무술체계이므로 그 수나 기법의 종류가 넓지 못하다.
우리의 합기도는 꺾고, 던지고, 누르고, 조르며 때리고, 차고, 찌르는 기법이 빠르고 위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술기에 있어서도 일본무술에 비하여 월등히 많으므로 비교할 여지도 없다.
일본무술은 굴리는 것, 업어치는 것이 주가 되고 우리 합기도는 적극적인 방어. 공격. 제지. 굴복 순으로 다져지는 완전한 무술체계를 이루었다.
아이키도의 국내 유입에 관한 다음의 일화가 있다.
"최용술은 우에시바 모리헤이(아이키도 창시자)의 아들인 기쇼마루와 나이가 비슷하니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최용술의 제자라고 말도 않되는 얘기를 쓰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아이키도의 한국지부라고 하는 사람이 주장한 바 있지만 70년초 최용술님이 대구에서 TV를 보시다가 부산쪽에 들어와 연무를 시범보인 일본 파견단의 술기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자 측근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게 되고 제자들이 "일본서 문화 교류차 내한해 연무하는 아이키도"라 답했다.
이것을 보신 최용술 도주님은 크게 노하여
"저놈의 XX들이 내가 조선에 있는데 감히 발을 디뎌!"하고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편지를 쓰게 한다. 내용은 "내가 조선에 있는데 너희가 조선에 들어와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글이었다. 그 후 편지가 왔는데 당시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죽고 그 아들인 기쇼마루가 대신 편지를 올리게 되었다.
첫댓글 그편지 공개하면 믿을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