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 두계마을로 이사 온 지 1년 반이 되었다. 섬진강을 넘나들며 이 강의 시작과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어찌 아니 없었을까마는 선뜻 강을 따라 걸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섬진강 발원지에서부터 종착지까지의 550리를 도보로 탐사한다는 “섬진강 물길따라, 550리” 여정(2005년 6월 24일 - 7월 1일, 7박 8일)에 합류하여 섬진강 물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소설로 만난 섬진강, 그 그리움과 갈증
섬진강과의 기억할 만한 첫 만남은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를 통해서였다. 국문학이 전공이었던 나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어쩌면 책읽기를 좋아해서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나 소설 또는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통해 섬진강과의 인연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사리 최참판댁 역사에 중독 되기 전까지는 섬진강은 내게 글자로서의 의미조차도 가지지 못했었다. [토지]를 읽으면서 박경리 선생님의 긴 호흡, 깊은 호흡에 압도되었다. 암 수술하고 보름 만에 퇴원을 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다는 서문을 읽으면서 느꼈던 내 가슴의 예리한 통증은 지금도 문득 문득 생생하다. 언젠가 박경리 선생님께서 [토지]의 배경을 하동으로 택한 것은 귀에 익숙한 하동의 사투리와 광활한 토지 그리고 섬진강과 지리산이 지닌 역사적인 무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토지]를 만난 이후 오랫동안 하동은 내게 불치의 그리움과 갈증의 땅으로 자리 잡았다.
섬진강과의 기억할 만한 두 번째 만남 역시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통해서였다. 빨치산들의 지리산권 투쟁기인 조정래 작가의 호흡은 나는 물론 동시대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몇 몇 동료들과 의기투합하여 태백산맥 기행단을 조직했었으나 당시 외박이 허락되지 않았던 나에게 태백산맥 기행단의 흥겨움과 설레임은 어찌나 가혹한 일이었는지. 일행 중에 비교적 문학적인 취향이 있었던 선배의 제안으로 태백산맥 기행단은 평사리를 놓치지 않고 다녀왔다. 마침내 88년 여름 기어이 지리산을 오르고서야 기행단과 동행치 못한 아픔의 기억이 가셔진 듯했다.
이후 이태 작가의 소설 [남부군]을 만나면서 섬진강변에서 스러져간 빨치산과 해후하게 되었고, ‘소설로 쓴 남한인민유격투쟁사’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정지아 작가의 소설 [빨치산의 딸]을 만난 건 아마 1991년 새해가 밝았을 때였을 것이다. 작가의 아버님이 곡성군당 위원장과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님은 남부군 이현상 부대의 정치지도원이었던 까닭에 작가의 소설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소설 형식을 빌어쓴 빨치산 투쟁의 기록이었다.
섬진강 대탐사를 준비하면서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혁명전사들께”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되는 [빨치산의 딸]을 다시 읽게 되었다. 좌우대립의 혼란 속에서도 한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어 갈등했던 백운산의 봄. 그 짧고 무더웠던 여름 - 9.28 후퇴. 기나 긴 겨울, 머나 먼 해방. 남부군의 최후에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멀어지는 지리산. 좌우 이념의 대립 속에 피로 물든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곡성, 구례, 하동. 백아산과 광양.
소설 중편의 절반정도가 작가 아버님의 1년 3개월간 곡성군당 위원장 시절의 기록이며, 등장인물들 중 몇 몇 분들은 곡성군내에 생존해 계시다는 것과 더불어 작가의 아버님도 구례군에 생존해 계심을 알게 되었다. 섬진강과 고달면, 오지리, 곡성읍과 옥과, 삼기 등등의 행정적 지명이나 통명산, 동악산, 명산 저수지 등등의 빨치산 거점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지리산권 특히 곡성과 구례 일대를 누비고 다녔을 빨치산들의 거칠고 진지한 숨소리가 들리는 듯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어느덧 내 안의 유연하고 나태한 걷기 준비는 80년대의 흥분과 설레임으로 차오른다.
다시 섬진강에서 섬진강을 만나다.
귀농을 결심하고 일 년여 동안 물색한 땅은 당연히 하동 땅이었다. 너무 그리워해서일까. 하동과의 인연이 쉽지 않아 귀농을 1년쯤 더 연기할 무렵 “섬진강변에 집이 하나 있는 데 ... 할래?” 무심코 던진 선배의 제안에 귀가 번쩍 뜨여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내린 곳이 곡성역. 한 달 뒤 섬진강 너머 두계마을에 정착함으로써 섬진강에 대한 그 그리움과 갈증은 가신 것 같았다.
섬진강 대탐사는 섬진강 수계권의 생태환경보존이라는 운동적 성격으로 제안되었다.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에서 광양만까지, 550여리의 여정을 단단히 살피고자 섬진강 대탐사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자료를 훝어 보고, 네이버 지식창 검색도 마치는 정도의 센스도 잊지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는 각 해당 관청을 위시해 몇 몇 홈페이지를 살펴보았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이트는 [www.sumjn.net]이었다. 지도는 물론 관련 역사와 자료가 간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자료 출처는 조선일보로 되어 있었다. 곡성읍 도서관에서 섬진강과 관련된 서적을 찾아 읽어 보기도 했다. 그 중 기억나는 책으로는 김용택 시인의 산문집 [섬진강 이야기](1권, 2권/ 열림원), [생태기행](2권 남부권/ 김재일 지음/ 당대), [게으른 산행](우종영 글/ 홍찬표 사진/ 한겨레신문사), [섬진강변의 문화 回廊](申榮勳의 역사紀行/ 金大璧 사진/ 조선일보사), [생명학](1권, 2권/ 김지하/ 화남), [빨치산의 딸](상, 중, 하/ 정지아/ 실천문학사), [지리산자락](한국문화유산답사회/돌베개) 등이었다.
이번에 동행을 못한 두 아들과의 섬진강 기행의 자료로 삼기위해 이번 탐사는 답사처럼 꼼꼼히 챙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효과적인 시청각 증거를 위해 카메라와 수첩, 녹음기를 단단히 챙겨 넣었다. 위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핫파스와 침, 숯가루와 매실, 죽염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챙겼다.
섬진강을 바로 보기위하여, 섬진강 계곡을 건너 곡성역에서 전주행 기차를 탔다. 안도현의 소설 [연어]였던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는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의 삶. 알을 낳으면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을 거슬러 오르는 고행을 마다치 않는 연어들의 진지한 몸놀림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창 밖 섬진강 물비늘의 반짝거림에 넋을 잃었다. 전주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문득 고개를 떨구어 내 몸을 쳐다보았으나 내 몸에서는 연어들의 반짝거리는 몸놀림이나 섬진강 물비늘의 반짝거림 같은 반짝거림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귀농 1년 반 만에 늘어난 몸무게와 퉁퉁해진 살집, 그을린 얼굴과 벌레 물린 상처들에 보태어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게슴츠레한 눈까지, 전형적인 시골 아줌마의 모습이다. 그래도 무엇에 겨운지 하냥 피시시 겨운 웃음이 난다.
겉보기엔 살집 퉁퉁한 시골 아낙이지만 속내는 연어의 반짝거림보다 더 눈부신 열정과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낯선 섬진강과 깊게 사귀어 보리라는 내 안에 소용돌이치는 열정과 흥분. 아이들과의 섬진강 기행을 위한 사전 답사를 철저히 하리라는 이기적 속내. 새색시 옷고름 같은 강으로 종종 여인에 비유되는 섬진강의 여성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문학적 속내로 유연성마저 챙겨 두었다. 전주역 광장에서 섬진강 대탐사 버스에 오르니 제법 마음이 달라진다. 섬진강과 하나 되기 위하여 삶터인 섬진강을 떠나와 섬진강에서 섬진강을 만나보리라.
섬진강에 살아도 섬진강과 사귀지 않으면 늘 낯설기 마련이다. 이번 섬진강 탐사 여정은 섬진강과 사귀기 위해서다. 섬진강을 따라 걸으며 만나게 될 자연 생명의 질서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섬진강이 만들어 내는 자연 생명의 질서 속으로 내 몸과 마음을 굽혀 들어가려는 것이다. 낯선 자연과는 만나 사귀고, 자연이 낳은 문화유산들을 통해 자연과 나의 역사도 되짚어보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자연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사라진 것들, 파괴 된 것들, 죽어 가는 것들 ... 자연은 사라져 가는 또 다른 나와 우리를 만나러 가는 생생한 만남인 것이다.
섬진강 북단 수분재, 데미샘
최근의 운동들은 사회적 공공성을 뛰어넘어 생태순환적 공공성으로 그간의 사회운동들과는 그 본질이 많이 달라졌다. 굳이 생명문화운동인가? 생명실천운동인가?를 가르지 않더라도 인간 생명에 대한 관심은 우주 생명의 영역으로 통합되어 인식되기 시작했고, 인간 영성의 평화란 자연의 평화를 표현하는 다른 표현일 뿐인 시대가 된 것이다.
제법 걷기의 문을 여는 진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걸어서인지 10분 여 만에 숨이 턱에까지 차오른다. 샘을 찾는 방문객이 제법 되는 지 간간이 화단을 조성해 놓은 곳이 많다. 자연군락이 아닌 계곡의 화단 꽃무리들은 좀 실망스럽다. 길섶에 한 포기 피어 오른 취꽃은 서설을 만난 듯 시원하다. 발아래 밟혀 검보라빛을 내비치는 건 산오디. 계곡에 늘어선 산죽. 활엽수와 침엽수가 적당히 섞인 계곡은 내리쬐는 볕을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은 금강의 발원지와 근접하여 있으며,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수정같이 맑고 이가 시리도록 차가워서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 해발 1,080m의 천상데미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샘”이라는 탐사 자료집의 표현처럼 샘물이 이가 시리도록 차갑지는 않았지만 천상데미-하늘을 오르는 봉우리라는 그 이름의 맛이 향기롭다. 반드시 데미샘의 물방울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디선가 시작된 한 방울의 물이 천상데미에서 샘을 만들고 내를 이루어 섬진강으로 흘렀으리라.
데미샘에서 시작된 강줄기는 요천(蓼川)과 합류하여 장수를 지나 압록진이 되어 보성강과 만나고 구례읍을 활처럼 돌아 지리산 노고단을 바라보는 듯 동쪽의 화개천과 만난다. 악양천과 개천산, 운계산의 북록 등 두 지류를 합수하여 황천강과 주교천을 합류하여 하동 포구를 지나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섬진강 북쪽의 데미샘과 남쪽을 합한 협곡천의 길이는 220km, 550여리에 이른다.
강의 북쪽은 협곡이 좁고 자갈이 많고, 남쪽은 강폭이 넓고 모래사장이 눈부시게 빛난다. 강의 북쪽은 산간마을 정취가 짙고, 남쪽은 강변마을의 정취가 짙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섬진강 수계는 어디를 가나 난향유곡(蘭香幽曲)과 대숲이 특징이다.
두꺼비강, 역사의 격전지
섬진강의 섬(蟾)자는 두꺼비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광양팔경 중의 하나인 수월정(水月亭)터 바로 옆 섬진마을에는 섬진유래비가 서 있다. 이 섬진유래비에는 섬진강이 두꺼비강이 된 내력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고려 말엽 우왕 때(1385년경)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을 때 이 강의 두꺼비들이 울부짖어 왜구를 물리친 이후부터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문학가들이 섬진강을 여성성에 비유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고운 모래 때문인데 강 이름이 모래강(沙川)에서 두꺼비강(蟾津川)으로 바뀐 이유가 고려 왜구의 노략질에 있었듯이 강을 둘러싼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남원, 구례, 곡성 등지의 3백여 리 인접지역은 원래 백제와 가야가 그 소유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더불어 피터지게 싸우던 곳으로 백제가 점유한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이 노략질을 일삼던 곳이었다. 화엄사와 연곡사의 승군(僧軍), 그리고 석주관의 싸움, 칠의사의 무덤 등은 그 이전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얼마나 잦았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시 남원지역에서 도공 80여 명의 도공(陶工)들이 일본으로 잡혀가서 나무 밥그룻을 도자기로 바꾸는 데 동원되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선비들의 유배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남해안의 고깃배와 소금 배들이 구례까지 거슬러 오르내린 곳이기도 했다. 근세에 들어서는 동학군 최대의 전투지가 하동의 광포송림(廣浦松林) 모래사장이었으며, 7백여 동학군이 수몰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는 핍박받고 쫓기는 사람들이 숨어드는 곳으로, 동족상잔의 피가 흐르는 곳으로, 좌우대립의 최후 혈전장이기도 했다.
미륵의 피, 동학의 피
섬진강 수계는 우리나라에서 사찰이 많기로도 으뜸이다. 가야의 수로왕 부인인 허왕후의 아들 일곱이 삭발한 칠불사를 비롯하여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벽송사, 태안사, 도림사, 관음사 등 지리산 안통 절터까지 합하면 어림하여도 수백을 헤아릴 지경이다.
아직도 상투를 틀고 청복(淸腹)을 입고 우성재야(牛性在野)를 외치는 삼신봉 아래 첫동네 청학동이 있는 곳, 노고단(老姑壇)의 국모신앙(國母信仰)으로까지 거슬러 반란, 변혁, 민중 세력들이 마지막까지 그 치마폭에 매달리는 산.
박혁거세의 부인인 선도성모의 대모신앙(大母信仰)으로부터, 불교에서 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발상지인실상사파가 보성강 줄기인 태안사의 동리산파와 짝을 이루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섬진강 남쪽이 대모신앙으로부터 구산선문의 신앙체계를 형성하였다면, 섬진강 북쪽은 회문산을 기점으로 하여 모악산계인 금산사의 미륵신앙(유, 불, 선)으로 이어진다. 이 강마을 사람들의 피는 미륵의 피, 동학의 피인 셈이다.
내가 보고 싶으면 금산사의 미륵전 장육존상 배꼽 밑을 들여다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 강증산의 유언장 중에서
섬진강, 시인의 마을을 걷고 있다.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중략)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시인의 <그 강에 가고 싶다> 중에서
연두빛 일행의 복장이 시원하다. 내리 쬐는 볕마저 상큼하다. 이제 서서히 시인의 마을로 접어든다. 시인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개한 마을 천담리는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섬진강에서 손꼽게 아름다운 마을이 어디 천담마을뿐이랴마는 시인에게는 천담분교 추억이 마음을 더 보태게 했으리라.
시인의 마을을 걷노라니 물 절반 고기 절반 앞 냇가도 궁금하고 꺽지와 가재, 가물치도 궁금해진다. 시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쉬리와 동자개는 돌아 왔을까. 마을에는 아직도 종이 뜨는 집들이 있는 지 궁금하다. 방앗간과 동자바위, 냇가의 징검다리가 사라져버린 천담마을은 영화에만 남아 있겠구나. 이 탐사가 끝나면 영화를 다시 한번 보리라.
길섶에는 유난히도 함박딸기가 많아 일행들의 발걸음을 잠깐씩 잡아 둔다. 함박딸기 외에도 멍석딸기, 붉은가시딸기, 복분자딸기, 덤불딸기 등 딸기가 지천이다. 반하, 닭의장풀, 원추리, 비비추, 나리, 무릇, 한삼덩굴, 명아주, 마나리아재비, 꿩의다리, 애기똥풀, 짚신나물, 뱀풀, 패랭이꽃, 고마리, 부들, 칡, 이질풀, 달맞이꽃, 꿀풀, 더덕, 도라지, 명아주, 취, 엉겅퀴, 개망초, 쑥부쟁이, 금불초, 구릿대, 왕고들빼기, 둥굴레, 금은화 ... 내가 만나는 풀과 꽃들. 흰색인가 하면 노란색, 노란색인가 하면 보라색, 보라색인가 하면 주황색 ... 온 천지가 꽃대궐이다.
오늘 만나보리라던 시인은 어찌된 일인지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날이 저물고 취침시간은 다가오는 데 일정표에 예고된 시인의 내방은 이루어지지 않으려나 보다.
장구목
봄부터 비가 적어 계곡 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는 덕분에 섬진강 상류 장구목의 아름다운 바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저 물이 흘렀을 분인데 장구목의 바위들은 큰 웅덩이와 작은 웅덩이들이 연속된 하나의 거대한 자연 작품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이 제각각인데 전체를 보니 그 웅장함에 압도되고, 하나하나를 보니 그 섬세하고 부드러움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물이 찬 장구목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바위의 웅덩이를 채우며 흘러갈 강의 리듬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겨워진다. 바위의 웅덩이를 모양을 보고 ‘요강바위’라는 별칭을 지었나보다. 큰 요강, 작은 요강 ... 요강이 셀 수 없이 많다.
곡성, 강 너머 계곡이 아름다운 곳
탐사 기간 중 가장 아름다운 걷기 구간이었으리라. 아직도 침곡과 호곡 간에는 줄 배가 매어져 있다. 오래 전에는 이 줄 배가 하동에도 있었다고 하는 데 하동과 광양 간을 잇는 다리를 놓으면서 하동 줄 배는 자취를 감추었다. 침곡에서 줄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 강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여러 계곡들과 만나게 된다. 계곡 계곡마다 그 특색이 달라서 거친 계곡, 편안한 계곡, 넓고도 좁은 계곡이 각 각 다르다. 이 곳은 계곡마다 철마다 싸리버섯, 꽃버섯, 능이버섯, 송이버섯이 특히 많이 난다. 3일, 8일 곡성장에 버섯이 나오면 버섯을 채취하러 계곡에 가 볼 일이다. 장에서 본 버섯이 이 계곡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동악산에서 난생 처음으로 송이버섯을 채취한 즐거움이라니. 송이 채취를 목적으로 이산 저산을 누비다가 송이 채취에 실패한 날이면 가는 곳이 있다. 야생 더덕이 많은 곳인데 함께 산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우리 더덕 밭은 잘 있나? 하며 다니곤 하는 곳이다. 더러 작은 더덕은 내년에 채취하자며 그냥 놓아두며 채취하는 곳이다.
섬진강변을 따라 다소 완만한 호랑이골짜기-호곡계곡을 하나, 둘, 세 골짜기를 걷다 S자로 휘돌아 나오면 탁 트인 낮은 길이 펼쳐지고, 넓게 펼쳐진 강물 위로 다정한 두가세월교가 보인다. 두가세월교에서 압록쪽으로는 섬진강 양쪽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강 이편, 저편을 한바퀴 돌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두가세월교 한쪽 끝으로는 맨발공원과 분수대, 넓은 잔디밭과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는 데 이 공원이 시작되는 곳에서 계곡으로 20여분 걸어 들어가면 내가 살고 있는 두계마을이다. 허니 이 자전거 도로와 공원 모두가 내 정원인 셈이다.
두가세월교 근처에는 고니와 흑기러기가 노닐고 지빠귀와 물총새, 청호반새, 오목눈이, 딱따구리가 이리 저리 제 일을 보느라 바쁘다. 이른 아침이나 어슴한 저녁이면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노니는 곳이기도 하다. 간간이 낚시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수달 먹이도 제법 있으리라 짐작된다. 일급수에만 산다는 대사리는 강바닥에는 물론, 마을 계곡에도 제법 많은 데 마을 어르신들 말로는 최근 3년 사이에 대사리가 부쩍 줄었다고 한다. 전에는 30여분만 주워도 한 함지박씩 주웠는데 요즘은 몇 시간을 주워도 허리만 아프다시며 대사리가 부쩍 줄어 든 이후부터는 대사리를 아예 줍지 않는다고 하신다.
알고 보니 3년 전에 군에서 허가했다는 대사리 동력끌개 채취가 그 원인이었다. 손끌개로 대사리를 채취할 경우에는 강바닥까지만 채취가 가능한 데 동력끌개로 채취할 경우에는 강바닥 깊숙이 뻘까지 헤집어서 채취하게 된다. 뻘까지 채취할 경우 대사리는 씨가 말라서 재생산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보성강쪽 석곡면, 죽곡면 농민회를 중심으로 동력끌개 채취를 하지 못하게 감시를 철저히 하고 있으나 섬진강쪽은 3년 동안 속수무책으로 동력끌개 채취를 허가하고 있는 것이다. 곡성군에서 허가를 받은 동력끌개 채취권자의 실세가 이미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대사리 동력끌개 채취로 씨를 말린 후 곡성으로 내려 온 업자라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이야기인 듯하다. 섬진강 동력끌개 채취권의 허가는 5년 허가라 아직도 2년이나 유효한 합법적인 허가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강바닥을 헤집는 동력끌개 채취는 다슬기는 물론 어패류의 산란지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부유물 때문에 산소용존도가 낮아져 생태계 사슬을 위협하게 된다. 부유물들이 강바닥에 퇴적하면 다슬기를 비롯한 패류들이 호흡곤란을 일으켜 폐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이런 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뒤 늦게 곡성까지 걸음하신 김용택 시인의 곡성군내 섬진강 유역 개발에 일침을 놓으신다. 시인은 섬진강을 소박한 강,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한 강이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그나마 개발의 논리에서 소외된 강이어서 비교적 드러나지 않은 덕분일 것이리라 짐작한다. 시인의 입장은 단호하고 분명하여 다소 강경한 어조인지라 곡성군 행정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요량이 아니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이쯤에서 삼천포로 가는 시인의 흐름을 정리하고 시인의 시 낭송을 청해 들으니 시인의 싯구에 나오는 섬진강이란 시어의 맛은 놀랍게도 시인이 표현한 소박함 맛, 무장한 맛을 고스란히 지닌 듯하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르며
(중략)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중략)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중략)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 1> 중에서
지금은 눈을 씻고 둘러봐도 자갈과 바위 밖에 보이지 않지만 곡성 섬진강에는 지금의 평사리 못지않은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80년대 무분별하게 곡성 상류의 금빛 모래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채취하여 모래사장이 자취를 없앴다고 하니 그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가 짐작이 간다. 아름답고 작고 소박한 것들은 다 사라져 간다더니 모래사장을 사라지게 한 그 잘못을 다슬기 동력끌개 채취 허가로 다시 한번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다.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 시인이 소개한 천담마을이라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은 두계마을일 것이다. 마을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에 내 집이 있다. 마을 보다 다섯 배쯤 깊은 곳까지 논과 밭이 펼쳐지고, 논과 밭이 끝나는 곳에서 한 시간여를 올라가면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마을보다도 더 해가 오래 들고 따듯한 곳이다. 이 곳에서 마을 쪽으로 돌아보면 마을은 온데 간데 없고 아름다운 섬진강만 멀고도 아득히 눈에 들고, 건너 송정마을 뒷산이 멀다. 탁 트인 시원함과 눈에 걸리는 것 없는 광활함 그리고 따스함이 감도는 계곡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시골에 어찌 그리도 화려하고 거대한 다리를 만들었는지 두계마을 옆 가정마을 앞에는 커다란 출렁다리가 있다. 휴가철 이 출렁다리는 밤이면 더 화려해진다. 온갖 조명을 다 켜 놓기 때문이다. 출렁다리를 지나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압록에 다다르게 된다. 강감찬 장군이 어머니를 위해 소리를 질러 모기를 쫓았다는 전설이 따라다니는 압록이 바로 이곳이다. 송흥록 명창이 구룡폭포에 들어가 콩 열말을 한알식 던져 막자치기로 피를 쏟고 목이 텃다는 동편제가 섬진강이라면 압록에서 합수하는 보성강이 서편제의 고향이라는 것도 이색적이다. 흔히 동편제는 지리산 연봉의 만학천봉을 휘어 넘기는 폭포소리요, 서편제는 그믐달이 뜬 싸락눈 오는 밤길 같은 애절함이 있다고 한다. 압록을 경계로 보성강을 따라가면 주암댐과 만나게 되고, 섬진강을 따라가면 구례, 하동, 광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곳은 래프팅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였는지 이곳에서 탐사단은 대나무 탐사배를 띄웠다. 뒤에 들으니 물이 적어서 얼마 못가서 배는 차로 옮겨졌다고 한다. 탐사가 끝난 후에 압록에서 래프팅을 체험했는데 걸으면서 바라 본 강과 산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강에 누우니 물의 편안함은 물론, 올려다 보이는 하늘도 길도, 산도 적막하고 아득한 것이 선계에 누워 있는 듯하였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 나아온다”는 표현의 맛을 이제야 알겠다. 무아지경이란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물과 내가, 산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절로 깨닿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동풍이 건 듯 부니 물결이 고히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아온다
-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에서
남원에서 이 압록까지 이르는 강줄기를 순자강이라 칭한다. 순자강 주위엔 삼밭(麻田)이 많다. 예로부터 돌실나이(삼베)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기도 하다. 옥과 성덕산 관음사 터엔 심청전의 모태설화를 낳게 한 효행탑이 서 있다. 뿐만 아니라 흥부, 놀부, 춘향, 홍길동, 심청 설화가 이 순자강을 끼고 이루어진 것도 재미있다. 하다못해 무당이 있는가 하면, 가루지기타령의 변강쇠가 있고, 고대소설의 효시인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도 있다.
구례
곡성도 아주 따듯한 곳인 데 구례의 따듯함에 비하면 곡성의 따듯함은 비교가 되질 않는 다. 구례로 접어들자 벌써 감 크기가 다르다. 곡성 땅 감은 아직 밤톨 크기를 면하지 못 했는데 구례 감들은 제법 굵직한 것이 제 크기의 30-40%는 커진 듯하다. 구례 농업기술센타 야생화단지에는 여름인데도 제법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야생화의 30% 정도의 야생화를 보유하고 있는 이곳은 아이들과 자주 놀러 오던 곳이라 익숙한 곳이다. 정자에 큰대자로 누워 노래를 부르며 속을 털어내 보았다. 정자 앞엔 화단엔 금은화가 곱게 피어 있고, 조금 떨어진 못에는 연꽃 몽우리들이 비죽이 올라오고 있어 장마 끝에 오면 활짝 핀 연꽃을 볼 수 있겠구나 싶다.
근세 5대 명창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유성준 명창과 송만갑 명창의 고향이 구례이다. 두 명창 모두 고종 말엽에 활약한 명창들로 유성준 명창은 창의 이론과 자라가 토기 잡는 대목에 능했고, 송만갑 명창은 동편제와 서편제를 겸비한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송만갑 명창은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 등의 명창 가문이기도 하다. 특히 수궁가는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을 거쳐 한편으로는 유성준 명창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송만갑 명창에게 이어졌다. 유성준 명창을 통해 김연수, 임방울, 정광수, 박초월 등에게 이어졌고, 김연수는 오정숙에게, 정광수는 안숙선과 김영자에게, 박초월은 조통달에게 전수했다. 송만갑 명창을 통해 박복래, 김정문, 장판개 등에 이어졌고, 박복래는 박봉술에게, 장판개는 배설향에게 전수했다.
유성준 명창의 수궁가는 사설이 유려하여 한편의 서사시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봄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놓은 듯한 유성준 명창의 아니리(사설) 한 대목을 보자. 별주부가 용왕의 명을 받고 토기 간을 구하러 수궁을 나와 처음 보는 지상 풍경이다.
작작(灼灼)한 두견화는 향기를 띠어 있고, 쌍쌍한 범나비는 춘홍을 못 이기어 이리저리 날아들고, 하늘하늘한 버들가지는 시냇가에 휘늘어지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고운 소리 벗을 불러 구십춘광을 희롱하고, 꽃 사이 잠든 학은 자취소리에 자주 날고 ... 가지 위에 두견새는 불여귀를 화답하니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라.
- 유성준 명창 <수궁가> 중에서
방죽을 따라 걷다보니 구례에서 참가한 류재관 생태해설가가 일러주기를 이곳은 일반인들 출입이 안 되는 곳이라고 한다. 그 이유인 즉 이 곳이 수달 서식처이기 때문에 보호지구로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수달은 바위가 많고 인적이 끊어진 곳에 서식한다고 한다. 섬진강변에는 이곳을 비롯해 몇 몇 군데에서 수달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수달은 세계적인 희귀동물이며,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이기도 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수달 서식지 일대를 관리하고 생태계를 보존해야한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니 수달과의 만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번 탐사 길에는 살펴 볼 수 없었지만 산동을 빼 놓고 구례를 지나칠 수는 없다. 이제는 산수유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는 산동. 만복대 골짜기에서 발원한 서시천 계곡이 마을을 휘돌고 있어 지리산 온천 개발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현장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꿋꿋하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순사건이후로 예전의 영화롭던 마을이 풍비박산되어 20여 호 남짓한 가구가 산수유와 고로쇠에 매달리고 있는 산간마을 중의 하나이다. 전설에 다르면 중국 산동성의 한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 오늘의 산수유 군락을 이룬 것이라고 하는 데 구례의 산동과 중국의 산동이 모두 산수유 군락지라는 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봄에 노란색 꽃을 피우는 산수유는 같은 시기에 피는 생강나무꽃과 비슷해서 얼핏 보거나 먼발치에서 보면 어느 편이 산수유나무고 어느 편이 생강나무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연기조사가 화엄사 터를 잡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남쪽에서 불끈 솟아오른 섬진강 물은 구례분지의 주먹 위를 돌아가는 듯한 빠른 물길(南出北流)로 그 급히 돌아드는 폼새가 지리산 용(龍)이 돌아보고 웃는 형국이고, 북쪽 언덕에서 풀을 뜯던 말이 놀라 울음을 퍼지르며 쫓겨 드는데 그 궁둥이를 보니 살이 포동포동 쪘더라는 배산임수의 바로 그 자리에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곳, 이곳이 바로 지금의 연기암이며 화엄사 터인 것이다.
그 뿐인가. 구례에서 하동 쪽으로 걷다 보면 섬진강과 지리산을 배산임수로 앉은 아흔아홉 칸짜리 옛집인 운조루(雲鳥樓)를 지나게 된다. 이곳 사람들은 구름 속에서 새가 운다는 운조루를 일러 지리산녀가 금가락지를 벗어 놓고 빨래를 헹구는 곳이라고 한다. 풍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운조루를 여성의 음부 형국의 금환락지(金環落地) 명당으로 친다. 운조루의 문전옥답은 구례에서 가장 넓다. 그래서인지 지명도 토지면이다.
운조루를 지나면서부터는 금빛모래가 눈부시게 펼쳐지는 섬진강과 벗하여 걷게 된다. 섬진강은 이즈음에 와서야 산골마을에서 강변마을로 그 정취를 바꾸면서 깊어진다. 최초로 피 농사를 시작했다는 직전(稷田)마을은 피아골 연곡사를 끼고 있다. 피아골로 오르다 보면 좁은 산비탈을 일궈 만든 계단식 논들을 볼 수 있다. 평지를 마다하고 이 깊은 지리산 속에 들어와서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고달픈 삶의 애환이 묻어난다. 한국전쟁 직후 남부군의 아지트였기에 빨치산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적신 곳이기도 한 피아골은 피의 골짜기란 뜻이 아니라 피 농사를 지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이곳 사람들은 빨치산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피아골 단풍이 여느 계곡 단풍보다 더 붉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하늘도 사람도 붉게 물든다는 피아골 단풍도 놓치지 말아야 할 풍광 중의 하나이다.
하동
백석지기도 아니고, 천석지기도 아닌 만석 부자 서넛은 만들고도 남을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는 하동 악양 평사리. 강가에 조성된 평사리 공원의 모래사장엔 늘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제법 물안개가 자욱한 최참판댁에 당도하니 비가 멈추어서 시야가 맑다. 별당 앞에 우물가, 우물가엔 반드시 앵두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우물가를 둘러보니 역시 빨간 앵두가 대롱대롱 제법 남아 있는 앵두나무가 있다. 백제와 신라가 결사항전 했다는 평사리 들머리 고소산성에서 보면 악양과 섬진강 하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최참판댁 너른 곳에서 내려다보니 저기 멀리 멀리 강 건너는 해발 1278미터의 백운산자락이다. 백운산 자락 그 아래쯤일 섬진강이 눈짐작된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이 산에 들어 숨어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
옛글에는 어진 사람들이
특히 이 산에 들어와 저를 닦았다는데
신라말 최치원 선생 자취가
이 골짜기 곳곳에서 나를 새로 눈뜨게 한다
가야산 바위에 신발 벗어놓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던 그가
화개동천 구름과 서리를 불러 글씨를 썻다
- 이성부 시인의 시 < 화개동천에서 최치원을 보다> 중에서
봄이면 섬진강에 연하여 난 길가는 벛꽃이 만발하여 누구든 걷지 않고는 지나가지 못하는 길이 된다. 특히 화개에서 쌍계사까지는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진 벛꽃 길이 십여 리나 펼쳐져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례에서 광양 가는 길의 벛꽃은 하동 벛꽃에 비해 나무의 굵기가 조금 못하기는 하지만 벛꽃 나들이 철에도 길이 막히는 법이 없고, 길을 따라 난 마을들의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풍광은 그 어느 길보다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화개천은 토끼봉과 형제봉에서 발원하는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계곡의 물이 맑고 차서 은어와 황어가 올라오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 화개천은 차나무가 최초로 심어진 곳이라고 한다. 쌍계사의 진감국사 비문에 보면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던 김대렴이 차(茶) 종자를 가지고 와 이곳 지리산 자락에 심은 이후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차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화개천 양쪽 언덕배기에는 야생차밭이 즐비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계장터엔
윗마을 구례사람 아랫마을 하동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 조영남 노래 <화개장터> 중에서
실제로 구례사람들이 장에 오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화계장은 1일, 6일 장이다. 가끔 장날 이 길을 지나다 보면 하동쪽에서 화계장으로 나물등속을 팔러 오시는 어르신들을 태워드린 적이 많으나 구례쪽에서 화계장으로 걸음하시는 어르신들을 태워드린 적은 한번도 없다. 거리상으로도 화계는 하동이나 광양 생활권과 가깝다. 구례장은 3일, 8일 장으로 곡성장과 같은 날이다. 인근 장중에서 구례장이 가장 규모가 크다. 화계장이 정형화되어 소박한 감칠맛이 없는 데 비해 구례장은 아스팔트 위에 장이 서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시골장터의 인심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장맛이 나는 곳이다. 그에 비해 곡성장은 장터의 환경과 교환 수단이 시골장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인근 장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장이다. 화개장터에 지리산 화전민들과 전라도 황화물 장수들, 구례 장수들, 하동 장수들이 이고지고 넘어 와 장을 펼치던 북적거림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옛날 화개장터의 모습은 화개장의 역사가 적힌 기념비와 김동리의 소설 [역마(驛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1953년 9월 18일 빗점골 합수내 근처 절터 돌밭어귀에서 김용식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현상의 빨치산 시절 가명은 노상명으로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 확약하였다 하여 ‘지리산곰’, ‘덕유산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0여발의 총에 난사당해 머리통이 날라가 버렸다는 이현상의 시체는 화개장터에서 화장되고, 그 재는 이 강물에 뿌려졌다. 당시 그의 나이 51세.
하동에서 광양 간전면으로 건너가는 섬진강 다리가 놓인 그 자리에서 90년대 낚시꾼들이 희귀한 물고기를 낚았다. 연어였다. 섬진강에서 연어가 사라진 지 30여년 만에 연어가 다시 돌아 온 것이었다. 연어가 돌아오자 섬진강 수계권 사람들이 섬진강 연어 되살리기 운동을 시작했다. 구례에서는 ‘섬진강 환경어족보존회’가, 광주에는 ‘연어사랑시민모임’, ‘청년환경지킴이’ 등의 시민 모임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1993년에는 강원도 ‘양양내수면연구소’로부터 연어 치어를 분양받아 섬진강에 방류하기도 했다. 연어는 고향을 떠나 사할린, 캄차카반도, 베링해협, 알래스카 등의 북태평양에서 일생을 보낸 후 3-4년이 지나야 산란과 수정을 위해 모천(母川)으로 돌아온다. 연어가 사라진 지 30여년 만에 연어의 회귀 여부가 섬진강 수질의 지표종이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섬진강은 회귀성 물고기들의 고향 같은 강이다. 봄이면 황어와 숭어, 은어가 올라오고, 가을이면 연어가 올라온다. 황어와 숭어는 산란 후에 바다로 내려가고, 은어는 가을까지 있다가 섬진강에서 일생을 마친다. 게 중에서도 유일하게 회귀성인 참게는 섬진강가에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엄지손톱만한 치게가 되어 모천으로 돌아온다. 치게는 섬진강에서 제 몸을 키워 늦가을에 광양만으로 내려간다. 섬진강 사람들은 여름밤에 불을 들고 돌무더기를 뒤져 참게를 잡거나, 가을밤에 바다로 이동하는 참게를 잡는다. 오래 전에는 여문 옥수수를 새끼줄에 꿰어 바위가 많은 개울가에 놓아두면 참게들이 붙어서 옥수수 알을 빼먹느라 정신이 없어 새끼줄을 당겨도 도망가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은 참게도 중국에서 치게를 들여와 양식장에서 양식한다고 한다.
광양
지금은 청매실농원의 안주인이 된 홍쌍리 매실아줌마의 시아버지가 5만여 평의 백운산자락에 매화나무 5천여 그루와 밤 5천여 그루를 심은 지 30여년 만에 광양 다압면 일대는 전국 최대 매실 생산지가 되었다. 섬진강의 봄을 알리는 전령 중의 하나가 매화꽃이다. 매화꽃이 벌기 전에 유리병에 꽃몽우리를 따 반나절 그늘에 말려 뚜껑을 덮어두었다가 찻잔에 하나씩 놓고 따듯한 찻물을 부으면 조금 후에 찻잔에서 매화가 꽃을 피운다.
섬진강 일대 사람들은 망종을 전후해 청매실로 매실청, 매실효소, 매실장아찌를 만든다. 몇 해 전 텔레비전 드라마 <허준>을 통해 매실의 효능이 소개된 이후에 전국적으로 매실 값이 폭등하는 이변이 생기자, 시장에는 어린 복숭아를 매실로 속여 파는 일까지 생겼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어린 복숭아와 매실 구별법은 매실을 구하려는 주부들의 필수가 되었다. 최근에는 중국 매실이 수입된다고도 하는 데 청매인 채로 중국 매실이 수입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매실은 따서 반나절만 지나고 청매가 황매로 익어가기 때문이다.
광양 다압 일대는 전국 최대의 매실 생산지이기도 하지만 고려 때부터 차를 덖어 온 차밭으로도 유명하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하동쪽으로는 화개천 양편으로 차밭이 연해 있고, 광양쪽으로는 섬진강가를 따라 차밭이 연해 있다. 티백 녹차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광양시청에서 맛 본 다압 티백 녹차는 은근히 발효차의 맛이 나는 것이 맛이 깔끔했다.
섬진강 재첩 중에서 가장 맛있는 재첩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채취한 재첩이라고 한다. 따라서 섬진강과 광양만이 만나는 곳의 재첩이야말로 가장 맛있는 재첩이라는 것이다. 또한 강바닥의 재첩과 깊은 뻘 속의 재첩은 색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고 한다. 허니 제대로된 재첩 맛을 보려면 광양에서 맛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르신의 수고로 재첩을 채취해 살펴보니 어느 것이 뻘에서 채취한 것이고 어느 것이 강바닥에서 채취한 것인지는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이곳 사람들이 갱조개라고 부르는 재첩은 겨우내 모래갯벌 깊숙이 묻혀 있다가 봄이 되어 날씨가 따듯해지면 조금씩 강바닥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다사, 고사, 마을 이름들에 유난히 선비 사(士)자가 많다. 유배 온 선비가 많아 자연히 마을 이름도 선비 사자가 많다고 한다. 수많은 선비들이 자신의 유배지로 들어가기 위해 나룻배를 탓던 설움의 나룻터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다리가 지금의 남해대교라고 한다. 이 자리는 인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로 알려진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허니 남해대교 자리는 광양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쉬고 있는 자리인 셈이다. 다압, 소압, 외압 등 백로와 해오라기를 지칭하는 압(鴨)자가 붙은 마을들도 연이어 있다. 그러고 보니 강에는 백로와 해오라기가 많이 보인다.
바다를 간척해서 세운 광양제철은 백운아트홀 때문에 인연이 먼저 있는 곳이다. 때마침 백운아트홀 로비에는 움직이는 국립미술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그림 기법들도 이채롭고 비를 피해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기분도 이채롭다. 광양제철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꾸려지는 광양은 차갑고 어두운 제철이라는 광물성의 느낌 보다는 깨끗하고 따듯한 느낌이 우선했다. 제철에 대한 관념과는 전혀 다른 현장 역시 이채로운 경험이었다.
이제 다시 섬진강으로 돌아와서
협곡이 좁고 길어서 물살이 빠른 강. 물살 빠른 강의 곡선이 아름다운 강. 이 550리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새가 날고 강모래가 쌓인다. 우리 국토의 남단에 마지막 하나 살아 숨쉬는 강. 산마을의 산수유꽃이 저무는가 싶으면, 강마을에 매화꽃이 한창이고, 모래강마을엔 배꽃이 흐드러지는 곳. 굽이굽이 휘어진 강마을마다 연어가 돌아오고, 봄철의 황어, 여름철의 은어, 가을철에 눈치, 참게가 소리치며 돌아오는 곳.
7박 8일 동안 섬진강 수계를 둘러보고 이제 다시 섬진강으로 돌아왔다. 일정 중에 장마가 시작되어 섬진강 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는데 돌아온 당일 밤의 집중 폭우로 그 아름답던 두가세월교는 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두계마을로 이사 온 지난해에 장마로 처음 다리가 자취를 감추고 길이 사라진 광경을 접한 아이들은 탄성을 질렀다. “엄마, 길이 없어졌어요. 신기하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길이 없어지다니 말이다. 아이들은 섬진강 물이 빠져 다리가 다시 보일 때까지 다리가 보일만한 곳에 지키고 있겠다며 호기심어린 눈과 설레는 가슴으로 섬진강을 내내 지켜보았다. 다리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낼 기미도 없이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졌고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늦은 아침 강가로 나가보니 어느새 다리가 다시 생겨나 있었다. 아이들의 놀라움과 즐거움은 연이은 탄성으로 계속되었다.
사라졌다 돌아 온 두가세월교처럼 섬진강을 제대로 보려고 섬진강을 떠났더니 다시 섬진강에 돌아와 있었다. 사라졌다 돌아 온 다리 밑에는 여전히 흑기러기와 고니가 노닐고, 바쁜 새들의 지저귐이 가득하고, 이런 사정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장마로 불어난 섬진강 물살은 콸콸콸 급하게 달음질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