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조반정
김상양, 27세. 김 영, 24세. 김 용, 26세. 김 협, 28세.
김시찬, 30세. 김효신, 27세. 김인방, 26세. 김해운, 25세.
김신길, 27세. 김여강, 25세. 김곤보, 28세. 김중정, 27세.
선조의 선위교지(왕위를 물려주라는 서신)를 받지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어렵게 광해군은 즉위한다.
광해군은 등극하자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 영창군, 능창군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받들고있는 소북파와 서인 및 남인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에게 왕위를 이으라고 교지를 내려준 인목대비도 페하고,
서궁에 유페시켰다.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했던 세력들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이귀, 김류, 등이 중심이 되어,
인목대비의 영을 받들어 무력정변을 일으켰다.
광해 15년(1623), 3월 12일 밤에,
그의 조카 능양군을 임금으로 세워, 거사가 성공하니 인조반정이다.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페위시키는 며분 세 가지를 들었다.
1, 선왕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였으며 어머니 자신을 유페 시켰다.
2,과도한 부역으로 민생을 토탄에 빠드리고 정사를 위태롭게
3,두 마음을 품어 오랑케에 투항하였다.
김상양(尙養, 27세)
광해조 통훈대부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인반정의 공로로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24세 문정공 휘 영(양간공파 ‧밀직부사공파)
1577(선조11)-1641(인조19)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자준. 호는 계암.
아버지는 현감 부륜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612(광해5) 증광시 문과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권지 승정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라
승정원 주서가 되었는데 북인들의 농간으로 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승정원일기를 쓰라고 수차 독촉하여,
부득이 상경하여 성 밖에서 일기를 만들어 올리고,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귀향하였다.
1623(인조1) 인조반정후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을 제수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치 않았다.
1627(인조5) 봄 다시 예조정랑. 사헌부 장령.
1633년 세자 시강원 보덕. 사헌부 집의를 제수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인조 14년 사간원 사간, 용양위부사직 집의를,
1637년 보덕과 사간을 겸하여 불렀으나 병을 핑계삼아 모두 거절하였다.
병자호란에는 (家財)를 털어 군비로 보조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고,
순조조에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추증 되었다.
시호는 문정공이며 저서로는 계암문집 3권이 있다.
참고문헌 : 광산 김씨사
문정공 계암 휘 영 행장
선생의 천품이 심히 고상하시고 호매(豪邁)하게 뛰어나니 우뚝한 기우요,
깨끗한 정신이라 바라보면 엄연하여
서리 같이 찬 듯 하나 마주보면 옥과 같이 따사롭다.
일찍부터 고인은 큰 뜻이 있어스스로 과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늦게 과거에 참여하였으나,
어지럽고 탁한 시대를 만나 포부를 펴지 못하였다.
시론이 험악하여 어깨를 겨누고 같이 서있기가 부끄러워, 고향에
돌아와 구업(舊業)을 익히고 정리하며 생각을 연마하고 깨끗이 하였다.
날마다 서사(書史)를 즐기고 때로는
모든 문도(門徒)들과 경의(經義)를 강마(講磨)하였다.
고대와 현대를 토론하고
봄날이 화창할 때면, 죽망혜로 산수를 찾아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고
유유히 자득하며 한 점 티끌도 가슴에 물들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지지(地誌)를 모아 천하지도(天下地圖)를 만들고,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탄식해 가로되 이것을 대하니
내 흉금이 활연(확 트임)하다. 라고 하였다.
약관 시절에 시국의 어지러움을 보고 사람에게 주는 글귀에 이르기를
시세가 진실로 불가하니 서산 언덕 위에 누워 있으리라 하였으니
출처(벼슬길)의 분수를 이미 계산하여 정했다.
루(樓)에 올라 시를 읊는데 이르기를, “
루(樓)옆에 높은 것은 다 개미집 같고
하늘가에 우뚝한 것은 비로소 산 인줄 알겠도다.” 하니
식자들은 특립독행(特立獨行)할 기상이 있다 하였다.
일찍이 선비들과 시사를 말씀하시다가 그 출처를 물으면,
선생이 초연하여 대답하지 않고 강청(强請)하면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홀어미가 그 남편이 불의 하다고 하여, 그
절개를 고칠 손가” 하니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제야 선생의 뜻을 알았다.
수암 선생이 말씀하시되 선생은 당대에 일인이라 했고,
또 우리 공(公)은 청천에 백일 같다 하였다.
졸재 유원재가 말씀하되,
“선생은 당일에 행한 일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백이숙제보다
더 어려움이 있었다.” 했고 또 말하기를
“엄자릉(한나라 광무제 때 사람)보다도 한등이 높다”. 고 하였다.
유암 배유장은 말씀하되, “뜻은 같고 처지는 다르나,
처세함이 도리어 야은(길재)선생보다 난처함이 있었다.” 라고 하였다.
김하담 시양의 말씀에는 교교(皎皎)하도다 이 사람이여!
그 전에 내가 탄핵할 적에 반드시 나더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그때의 선비들이 “선생의 만사(挽詞)에 이르되 혹은 학문이 주렴계의
근원을 거슬러 알았다.” 했고,
혹은 퇴계 선생의 높은 풍도가 다시 여기에 있도다.“ 했고,
혹은 “노중현이 동해를 밟은 것과 같다하고.
정결 선생 도연명이 북창에 숨어 벼슬 않는 것과 같다” 하고,
또 백이숙제와 같다고도 하였으니
선생의 심적(발자취)을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 없도다.
세마 이광정 장략
김 용(鏞, 28세)는 영의 손자요,
김 협(협, 28세)는 현손자요,
김시찬(是瓚, 30세)는
6대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는 학자로 대를 이었다.
김효신(孝信, 27세)은
귀성 중군으로 출정하였다.
반란군의 장작이란자가 졸지에 효신을 치자,
그는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베어 원수부에 보냈다.
전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진무헌 공훈에도 기록되었다.
김인방(仁邦, 26세)은
공로가 인정되어 진무원종공신에 책록.
김운해(運海, 25세)는
광해조에 무과급제. 이괄의 난에 임금을 호조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추증.
충청도 조방장 일때는 공로가 있어 ,
임금으로부터 말과 갑옷을 하사받았다.
김신길(愼吉, 27세)은
어가를 공주로 호송하는데 공이 있었다.
김여강(汝剛, 25세)과
김곤보(坤寶, 28세)는
의병을 일으켜 병기와 군량미 수송을 담담했다.
김중정(重鼎, 27세)은
청백리 겸광의 5대손으로 첨지중추부사.
사직을하고 진안에 내려와 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
긍구당 유고가있고 와룡암과 금구당은 건축 양식이 특이해,
지방문화재로 보존되어있다.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7월.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