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七十 章 어검비공
소원은 침울하게 말했다.
『그녀는 딸아이 하나를 남겨두고 오래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네.』
수라대식마는 가만히 지켜보더니 그를 위로했다.
『늙은 오공, 자네는 그런 일로 아직도 괴로워할 것 없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네.』
소원은 핀잔을 줬다.
『자네 주제에 무슨 달관한 노승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안색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내 자네에게 진지하게 권하는데, 자네는 나를 위해서라도 무정산 휘하를 떠날 수 없겠는가?』
수라대식마는 깜짝 놀라서 소원을 바라보았다.
『자네를 위해서라니 그 무슨 말인가?』
소원은 그 말을 더 듣지 않고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자네도 오랫동안 제멋대로 살아온 사람인데 늙어서 어쩌자고 이름을 더욱 더럽히려 드는 겐가? 자네의 명성이란 것이 결국은 사악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파 대종사가 될 만한 마음보와 무공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제 다른 사람의 손아귀 속에서 놀아나면서 무림 전체를 말아먹으려는 장단에 춤을 추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수라대식마는 안색을 굳혔다.
『이보게 소원, 자네는 과거에 내게 베푼 은혜를 빌미로 해서 나를 위협하자는 것인가?』
소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나는 오직 친구의 입장에서 자네를 위해 권고를 하는 것일세. 만약에 자네가 이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의 오래 된 교분도 오늘로서 끝나게 되는 것일세.』
수라대식마는 온몸의 비곗살이 출렁거리도록 부르르 떨었다.
『늙은 오공, 그게 정말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만큼 대단한 일인가?』
소원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남삼객 적군은 터무니없는 야망을 가지고 있어서 무림을 통째로 정복하여 손아귀에 넣으려고 광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하 사람들의 공적(公敵)이라고 할 수 있네. 자네가 만약에 그 미친 자를 도와 포악한 짓을 일삼는다면 나 역시 수십 년에 걸친 우리의 교분을 돌볼 수가 없게 된다네.』
수라대식마는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산주의 무공과 지략은 절세적이라고 할 수 있네. 그 분이 무림을 일통하려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파, 사파, 그래서 또 각문, 각파로 갈라져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서로의 재간을 은밀히 감추고 해서, 그런 쓸데없는 분규를 없이하고 각파의 절예를 공개해서 모두 마음 편하게 무술을 발전시키려는 깊은 뜻이 있어서라네.』
소원은 한마디로 잘랐다.
『자네가 방금 한 그 말이야 말로 적군이 그의 야망을 감추고 호도하기 위해 지어낸 터무니없는 소리라네. 자네는 아직도 적군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그렇게도 모르는가?』
수라대식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늙은 오공, 자네는 어째서 그토록 산주를 싫어하는가? 무슨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는가?』
소원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흐흥, 무림의 공론은 그렇다 치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개인적으로도 원한이 있다네.』
수라대식마는 이상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자네는 수십 년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언제 어떻게 우리 산주와 원한을 맺게 되었단 말인가?』
소원은 설명했다.
『저팔괴, 자네는 나의 하나뿐인 딸아이를 보지 못했겠지? 그 아이를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워한다네. 그런데 적군은 화룡검으로 그 아이의 손목을 잘라버렸다네. 그러니 내 원한이 깊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수라대식마는 입을 벌리고 물었다.
『아!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소원은 진지한 얼굴이 되어 간절하게 말했다.
『팔괴야, 만약 자네가 그 미친 자를 도와 포악한 짓을 계속 하게 되고 끝내 적군의 주구 노릇을 하겠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네. 그 때는 별 수 없이 우리 두 사람이 누가 죽던지 한바탕 겨루어야 할 것일세. 그게 싫다면 자네는 곧바로 나를 따라 천산으로 가세. 우리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무공도 닦을 만큼 닦아 보았으니 이제 미련없이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면서 화외지민(化外之民)이 되는 것일세. 천산에는 자네가 먹을 독물들이 많지 않으나 맛있는 설련자가 있으니 자네가 배가 고프지는 않을걸세.』
수라대식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가 나보고 무정산 휘하에서 떠나라고 하는 것은 한 번 고려해볼 수 있는 일이지만, 자네를 따라 당장 천산으로 돌아가서 은거하자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네.』
소원은 물었다.
『그건 또 어째서인가?』
수라대식마는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퍽하고 쳤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동해의 그 두 땡초와 맺은 원한이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만큼이나 높다네. 이곳의 일이 끝나게 되면 나는 동해로 가서 그 두 땡초를 찾아서 기어이 다시 한 번 어울려 볼 참일세.』
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좋아!』
그는 힘주어 말했다.
『자네가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고 내 충고에 응해서 이제부터 무정산과의 관계를 끊겠다면 내 자네와 더불어 동해로 한 번 가서 자네의 그 원한을 갚겠다는 마음을 지워 없애도록 도와주겠네.』
칠지마존 고낙은 수라대식마의 의지가 동요되는 듯한 빛을 보자 재빨리 끼어들었다.
『악형, 저 자의 이간질하는 말을 더 듣지 마시오. 산주께서는 이미 무림을 통일한 후에 당신과 더불어 동해로 가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소?』
수라대식마는 불쾌한 듯 돌아보았다.
『고노제, 자네는 나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 안되겠는가? 내 스스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버려둬 주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소원을 향해 물었다.
『하얀 원숭이, 자네의 말을 믿어도 되는가?』
소원은 정중하게 되물었다.
『저팔괴, 자네는 내가 언제 식언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수라대식마는 무의식 중에 빨간 뱀 한 마리를 꺼내서 입안에 집어넣고 머리부터 퍽퍽 씹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다! 늙은 오공아, 자네가 이겼다고 해두세. 내 자네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울 용기는 없다네. 자, 이걸로 결정했네. 됐는가?』
칠지마존 고낙은 깜짝 놀랐다.
『악형,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산주가 당신을 어떻게 대접했으며 무정산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떤데 이렇게……』
수라대식마는 약간 난처한 얼굴로 달래듯 말했다.
『고노제, 내 평생에 친구가 있다면 이 하얀 원숭이 한 사람일세. 지금 내 비록 무정산에서 떠나가기는 하지만 자네와 나와의 교분은 여전히 지속되는 것일세. 나는 자네가 오늘밤 무사히 이곳을 떠나갈 수 있도록 감히 보증하는 바일세.』
그의 말소리는 전옥린의 단호한 목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런 약속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소생은 그에게 반드시 청산해야만 할 빚이 있습니다.』
수라대식마의 안색이 일변했다.
『전옥린, 자네는 기어이 이 늙은이를 난처하게 할텐가?』
소원이야말로 매우 난처한 듯이 머뭇거렸다.
『여보게 저팔괴, 전노제에게는 나름대로의 입장이 따로 있는 것일세. 자네는 굳이 그렇게……』
수라대식마는 그 말을 더 듣지 않고 가로막았다.
『늙은 오공, 내가 한 말은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는데 자네가 어찌 나보고 다시 거두어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소원은 겨우 수습해 놓은 일이 혹시나 빗나갈까봐 걱정이 되는 듯 전옥린을 돌아보았다.
『노제, 자네는 그를 한 번쯤 그냥 보내줄 수 없겠는가? 그 빚은 나중에 따지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전옥린 역시 그 말을 다 들으려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선배님, 죄송합니다. 저와 천지이로 두 분 사이의 교분은 친형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두 분 형님께서 칠지마존의 암산을 당했으니 저는 반드시……』
이번에는 수라대식마가 그 말을 가로챘다.
『좋다, 좋아!』
그는 고개를 젖히고 소리내어 웃더니 다시 말했다.
『와하하하핫! 전옥린, 자네는 과연 영웅답군. 훌륭하다고 해야겠어. 이 늙은이는 탄복했네. 하지만 내가 한 말 또한 이미 입 밖으로 토해진 이상 거두어들이고 싶지 않네. 더군다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늙은이가 두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공평한 방법으로 자네와 나와의 분쟁을 해결할 것을 제안하네. 그 방법이란 바로 내가 자네의 절학을 한 수 가르침 받겠다는 것일세. 만약에 불행히도 이 늙은이가 자네를 당해 낼 수 없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는 셈이고, 그렇지 않게 되었을 경우에는……』
전옥린이 그 말을 이어받아 아귀를 지었다.
『만약에 제가 실력이 모자라게 된다면 저 또한 도리없이 칠지마존 고낙이 한 번 이 자리를 떠나도록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이치가 되겠지요.』
칠지마존 고낙은 얼굴에 음침한 빛을 띄우고 물었다.
『전옥린, 당신은 노부가 당신 손에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전옥린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낙, 당신과 같이 비열하고 몰염치한 자는 암산의 수단을 써서 사람을 해치는 이외에 또 무슨 무공을 쓸 줄 안다는 말이오?』
칠지마존 고낙은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일성을 대갈하더니 엄지손가락을 찍듯이 뻗쳐내었으니 어느덧 혈지마도, 그 피비린내 나는 마교의 절기를 펼쳤다. 대뜸 한 줄기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지풍이 곧장 전옥린의 가슴팍으로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전옥린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의 신형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손을 한 번 떨쳐 소맷자락 속에 갈무리하고 있던 짧은 철검을 뽑아들었다.
그 평범하게 생긴 검에서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검기가 와락 뻗쳐나면서 고낙이 펼쳐낸 지풍과 부딪치며 찍찍 소리가 났다.
칠지마존 고낙의 혈지마도가 먼저 펼쳐지기는 했으나 마치 형체가 보이는 듯한 전옥린의 검기에 부딪쳐 흩어지게 되었으며 곧이어 번쩍하면서 그 무형의 검기가 어느덧 칠지마존 고낙을 향해 급격하게 쏘아져갔다.
고낙 역시 오랫동안 위명을 떨쳐온 사도의 정상급 고수이니 자연히 그 검기의 무서움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안색이 일변해서 수도를 세워 맞받으면서 한 가닥 장풍을 쏟아내는 동시에 발걸음을 슬쩍 돌려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그의 신형이 물러서게 되자 수라대식마의 깍지둥만한 몸뚱어리가 어느덧 그 빈자리에 슬쩍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수라대식마는 커다란 배를 불쑥 내밀면서 그 한 가닥 쏘아져오는 검기를 맞아 가볍게 일장을 뿌렸다.
그의 이 일장은 보기에 아무런 힘도 실리지 않은 것 같았으나 기실 마도의 최고절학이라고 하는 수라밀수를 펼친 것이었다.
이 찰나 조용한 밤빛 속에서 한차례 파박! 하는 가벼운 음향이 잇달아 울려퍼지면서 수라대식마의 큼직한 몸집이 반걸음 쯤 물러섰다.
전옥린은 검기를 쏘아 보내며 그 한 가닥 괴이한 장력의 일격을 바로 받았고 몸을 약간 흔들하더니 역시 발걸음 물러섰다.
그들 두 사람은 겨우 일초를 부딪친 셈이지만 눈이 밝은 사람들은 단번에 두 사람의 공력이 막상막하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다만 공력이 비교적 높고 경험이 많은 은발존자 소원이나 칠지마존 고낙 같은 인물들은 그 일초의 교환에서 전옥린이 간발의 우세를 차지했으며 반수 정도 이겼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라대식마는 안색이 약간 변해서는 큰소리로 웃었다.
『호오, 좋구나, 전옥린! 자네는 과연 검신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군.』
그는 우렁우렁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벼락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자네는 다시 한 번 나의 일초를 받아보시게나.』
그의 그 엄청난 몸뚱아리가 마치 커다란 팽이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급히 맴돌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그의 체형이 그토록 비대한데도 경신법이 이토록 고명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가 신법을 일단 펼치게 되자 그저 하나의 그림자가 한 가닥 끊임없이 선회하며 세찬 바람을 일으켜서 전옥린을 겹겹이 에워싸는 것 같았다.
은발존자 소원은 안색이 일변해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는 전옥린의 천지지교가 이미 유통되었으며 내공이 언제나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라대식마의 무공이 그토록 증진된 것을 보자 역시 전옥린을 위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라대식마는 수라미종보(修羅迷踪步)를 펼치고 있었으며 신형을 마치 팽이처럼 급히 돌려 형적을 찾을 수 없도록 하면서 전옥린의 주변을 원을 그리듯 하고 있었는데 일단 실낱같은 빈틈을 찾게 되면 즉시 살수를 펼쳐 상대방을 격살하려는 기세였다.
전옥린은 손에 그 짧은 철검을 들고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띄운 채 눈을 똑바로 뜨고 검끝으로 비스듬하게 수라대식마를 겨눈 채 상대방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데로 따라 돌면서 방어하고 있었으니 한 가닥의 빈틈도 노출하지 않았다.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무림 인사들은 수라대식마가 팽이처럼 돌아가고 전옥린 역시 맴을 도는 것을 보자 매우 놀라워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안력(眼力)이 대단하지 않다 하더라도 수라대식마가 줄곧 공격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같은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두 사람의 절정고수가 다툼에 있어서 일초 반식에 쌍방의 생사가 판가름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 모든 사람들은 가슴을 조이며 눈을 크게 뜨고 구경을 했고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했다.
이때 싸우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평소보다 느리게 흐르는 듯 느껴졌다. 더욱이 수라대식마는 바로 이대로 날이 밝아왔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초조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의 체형이 너무나 비대하고 컸기 때문에 맴을 도는 데는 엄청난 힘의 소모가 있었다. 쌍방의 기세는 이미 형성된 셈이라 승패를 판가름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은발존자 소원은 눈앞의 형세를 살피며 속으로 역시 초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으로서도 이때만은 전옥린과 수라대식마를 떼어놓을 방법이 없었다. 만약에 경솔하게 손을 썼다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평형을 깨뜨리게 되면 세 사람이 다같이 치명적인 화를 입을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사람들의 가슴이 뛰는 가운데 다시 한동안 시간이 흐르게 되었고 수라대식마의 신형은 어느덧 훨씬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왼손을 높이 쳐들고 오른손으로는 땅을 누르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수라대식마 역시 정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끌어올린 진력은 수백 바퀴의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는 동안 이미 적지않게 약화되었고 이대로 나가다가는 지쳐서 죽을 것만 같았다.
용단을 내린 그는 이빨을 깨물며 벼락같이 선회하던 몸뚱어리를 멈추면서 두 손을 음양(陰陽)으로 나누어 교차하여 후려쳤다. 수라음양수, 두 가닥 전혀 다른 성질의 장력이, 독성이 담긴 비린내를 긷고 세찬 파도처럼 전옥린을 향해 덮쳐갔다.
전옥린은 바로 이때 길다란 휘파람소리를 내지르며 짧은 철검을 떨치면서 한 가닥 부채꼴 모양의 광막을 펼쳐 내었다.
음양, 두 가닥의 웅혼한 기운이 거세게 뻗쳐나가다가 곧바로 부채꼴 검막에 저지를 당하게 되었고, 떨리듯 움직이는 검막과 함께 그 흉악한 기운이 스스로 소멸되어 버렸다.
수라대식마는 아차 흠칫했다. 그 순간 전옥린이 갑자기 뒤로 몇 자 스르르 물러서면서 철검을 수평으로 겨눈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전옥린이 이미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뒤로 물러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라대식마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환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전옥린이 몸을 뽑아 뒤로 물러서는 것 같았으나 기실을 한 가닥 무형의 검기를 내쏟아 곧장 자기의 가슴팍 앞으로 들이닥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로는 그가 크게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문호(門戶)가 활짝 열려 있어서 상대방이 검기를 쏟아내기만 한다면 그는 막아낼 방법이 없이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찔끔 눈을 감았는데 한참 지나서야 겨우 전옥린이 자기의 명예를 보존해주고 너무 난처한 입장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같은 자세를 취하고 자기가 물러설 기회를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온 몸의 비곗살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두 손을 내렸다.
『전옥린, 탄복했네. 내가 졌네.』
전옥린은 그가 두 손을 내리자 역시 철검을 내리면서 포권을 했다.
『선배님께서 손에 사정을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라대식마는 전옥린이 그렇게 나오자 할 말을 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노제, 이 늙은이가 힘이 모자라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칠지마존 고낙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몸을 솟구치면서 나는 듯 달려갔다.
은발존자 소원이 소리쳤다.
『고낙! 너는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딜 도망을 치느냐?』
그는 바짝 칠지마존 고낙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전옥린은 칠지마존 고낙이 몸을 돌리는 그 찰나 이미 그의 뜻을 헤아리고 길다란 휘파람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몸이 허공에 떠있는 상태에서 팔을 쳐들고 한 번 손을 떨쳐 그 짧은 철검을 날렸다.
과거에 그는 금응검법과 열두 자루의 단검으로 무림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금응대협 전옥린의 비검지술(飛劍之術)이 암기의 범주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옥린이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던지게 되자 여전히 그가 비검지술을 펼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 단검은 그의 손을 떠난 이후 나직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유성을 초월하는 속도로 곧장 칠지마존 고낙을 쫓아가는 것이었다.
칠지마존 고낙은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날아오는 파공성에 후딱 고개를 돌렸을 때 얼핏 짧은 철검이 질풍과 같이 쏘아져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총망중에 몸을 돌리며 엄지손가락을 비스듬히 찍어서 혈지마도를 펼쳐내었다.
한 가닥 날카로운 지력이 날아오는 철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물론 그의 생각으로는 지풍이 그 날아드는 철검을 쳐서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무사히 무당산 위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지력이 쏘아가게 되었을 때 그 철검은 마치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는 물건처럼 스륵 아래로 떨어져서 지풍을 피하면서 더욱더 빠른 속도로 쏘아져 왔다.
칠지마존 고낙은 이런 기이한 현상에 깜짝 놀라게 되었고 그 순간 적군이 예전에 그에게 말해주던 한 가지 사실을 머리에 떠올렸다. 검도 최상승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은 이기어검(以氣馭劍)을 펼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비검과는 천양지차가 있으니 검이 백보 안을 날아가는 동안 운용하는 이의 심령이 통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이 방향을 바꾸면서 얼마든지 사람을 쫓아가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날아가던 철검이 강력한 지풍을 만나자 거침없이 방향을 틀어서 반짝이는 뱀처럼 영활하게 상대를 쫓아가는 광경을 보고 몇몇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외쳤다.
『어검비공(馭劍飛空)!』
그 소리의 메아리가 허공에 남아 있는데 철검은 어느덧 칠지마존의 목 언저리를 비스듬히 스쳤다. 고낙의 머리통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날아올랐고 그 철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살아있는 물건처럼 다시 전옥린의 손아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칠지마존 고낙의 머리통이 저만큼 날아서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으나 그의 삐쩍 마른 몸뚱어리는 관성으로 십여 걸음 이상 앞으로 달려가서야 경우 힘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목구멍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쏘아져 나와서 멀리까지 뿜어져 땅바닥에 피를 뿌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런 상황을 보면서 수라대식마마저도 가슴속이 써늘해졌다. 그는 자기가 오늘 옛 친구 소원 때문에 한 목숨을 또다시 구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위는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이어 와아! 하는 떠들썩한 소리가 일어나고 찬탄과 놀라움의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거기 있던 무림 호걸들은 한 번 크게 시야를 넓힌 셈이었다. 그들은 전설처럼 전해오며 천고이래로 지고의 검도절학으로 말만 들어온 어검비공의 절기를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반짝이며, 방향을 스스로 바꾸며 날아가던 철검이 그들의 마음 속에 각인처럼 새겨졌으며 그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은발존자 소원은 전옥린 쪽으로 마주나가 두 손을 뻗쳐내어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노제, 자네는 어검지술을 완성했군! 살아생전에 이 광경을 보게 되다니 이 늙은이가 오래 산 보람이 있구먼. 축하하네!』
전옥린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노선배님, 고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실은 노선배님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수라대식마는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 마주나오며 입을 열었다.
『늙은 오공, 나는 자네에게 승복했네. 이제 자네가 명하게. 나는 자네를 따라 어디로 가야하는가?』
은발존자 소원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자네가 남삼객 적군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면할 수 있다면 우리와 함께 무당산으로 올라가세. 자네가 내키지 않거든 이곳 산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려주게나.』
수라대식마는 웃었다.
『글쎄 내가 용기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네만 어쨌든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은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걸……』
은발존자 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산 아래에 남아 있도록 하게나.』
수라대식마는 물었다.
『자네들은 언제 산 위로 올라가겠는가?』
은발존자 소원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빛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으로 지금 산위로 오르는 것은 너무 어중간하니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 같네.』
수라대식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도, 보지 못했던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세.』
그제사 거기 모여있던 무림의 호걸들이 모두 그들 주위로 모여들었으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의 이름과 호를 밝히고 전옥린을 에워싼 채 분분히 인사를 청했다.
그들은 모든 근심 걱정거리가 다 없어졌다는 듯이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그들은 전옥린이 어검비공지술을 펼치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반드시 남삼객 적군을 격패시키고 각파 장문인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은발존자 소원은 전옥린이 군웅들에게 에워싸인 것을 보고 수라대식마를 끌었다.
『이보게 저팔괴, 우리들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세.』
수라대식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 하더니 그 말뜻을 이제야 절감하겠군! 우리는 늙었고 세상은 젊은 사람들의 것일세.』
그는 마음 속이 쓰릿쓰릿 해진 나머지 식욕을 크게 느낀 듯 참지 못하고 손을 주머니로 집어넣어서 몇 가지 살아있는 독물들을 꺼내서 으적으적 씹기 시작했다.
은발존자 소원은 그가 마구 먹어대는 것을 보고 위장이 뒤집힐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저팔괴, 자네는 옛날에 이같이 심하게 먹는 습관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서 요즘은 밤낮 없이 독물들만 먹는 것인가?』
수라대식마는 씁쓸히 웃었다.
『이 짓도 부득이한 노릇이라네. 그 옛날 그 두 땡초와 싸울 때 오장육부가 모조리 상했는데다 내가 연마한 것이 또한 마도의 사공이기 때문에, 공력이 흩어지는 고통을 피하려니 별 수 없이 독물로 배를 가득 채울 수밖에 없다네. 오랜 세월을 두고 이렇게 해온 결과 몸은 점점 불어나고 그만큼 더 많은 독물들이 필요하게 되었다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꼬락서니를 보건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오래 살기는 틀린 것 같으이. 자네는 나와 달리 여자를 얻고 딸을 길렀고 이제는 또 강호 제일의 사위를 보게 되었으니 장래를 의지할 수 있게 되었군. 정말 부러운 일일세.』
은발존자 소원은 웃었다.
『여자와 사랑을 한다는 일은 역시 몸속에 수천수만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근질근질하게 따갑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라네. 거기다가 딸자식을 혼자 기르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 참을성을 요구하며 얼마나 사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인지 자네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걸세.』
그는 빙곡에서 설희를 키우고 가르치며 골치를 썩혔던 수많은 문제들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수라대식마는 끊임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은발존자 소원은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기쁜 듯이 말했다.
『다행히 이제 그 계집아이는 주인을 찾은 모양일세.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늙은 뼈다귀가 조만간 그 애 때문에 모두 삭아서 내려않아 버렸을 것이네.』
수라대식마도 가벼운 어조로 받았다.
『그 아이를 시집보내고 우리 늙은이 두 사람을 당분간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낼 수 있겠구먼. 참 맞았네. 우리는 마땅히 동해로 쳐들어갈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봐야 하겠네. 그 땡초들이 도무지 여간 아니어서 말일세.』
그들 두 사람은 풀밭 위에 앉아서 오랜만에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는 노인네처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으며 멀리서는 때때로 군웅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니 터져 나오곤 했다.
밤은 지새려 하고 있었고 여명의 빛이 곧 인간 세상에 찾아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