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102/181015]아름다운 인연(因緣)은 또 이어지고…
멀리 캐나다 토론토에서 귀빈(貴賓)이 최근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다. 193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82세. 대학으로도 약학대학 56학번, 꼬박 20년 선배이다. 지난 9월 16일 귀국, 오늘 가셨으니 만 한 달을 서울에서 지내셨다. 나로선 10년만에 만나 뵙게 되니 반가울 수밖에. 2008년에는 우리 부부를 초청하여 캐나다 동부를 9박 10일 동안 여행했었다. 당신의 집에서 묵은 것만도 다섯 날,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대를 받았다. 나이아가라폭포까지 손수 운전하여 구경을 시켜주고, 피크닉가방에 도시락을 싸주기도 했다. 게다가 나의 큰아이가 미국여행을 한 달 정도 하던 중 불쑥 전화하여 선배님 전화를 물어왔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뉴욕에서 토론토로 날라가 또 며칠 신세를 졌으니,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리라. 2005년 1월 토론토에 사는 초로(初老)의 신사부부가 모교(성균관대)를 근 40년만에 찾아와 보험증서를 내밀었다. 당시 언론에 비중있게 보도돼 화제가 된 ‘사후보험금 10억원(100만달러) 기부’가 그것이다. 두 분이 돌아가시면 받게 될 사후보험금(last die insurance) 20억원 중 50%의 수탁자를 ‘성균관대학교’로 못박았다. 그때 그 선배님을 인터뷰하여 보도자료를 작성, 배포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당신이 아주 어렵게 대학을 다닐 때, 학교에서 아르바이트(근로장학생)를 시켜줘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그 은덕(恩德)을 조금이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했단다.
전북 군산 출신. 군산초교, 군산중고교를 다니셨다. 두 분은 국내에 3년여 체류했다. 선배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다며 사회복지대학원을 다니셨고(석사학위 취득. 학생회장도 했다), 47년생 형수는 이화여고를 나왔으나 가난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 한을 풀고자 방송대학교 국문학과를 다니셨다. 졸업을 1년 앞두고 현지의 사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생활글 쓰는 취미가 나와 같아서 반가웠고, ‘스카보로(토론토의 지명)의 봄’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국내에서 펴내는 데 출판사 섭외, 윤문 등 도움을 드린 인연으로 여러 차례 만나며 친해졌다.
선배는 뵈면 뵐수록 성품이 인자하고 깨끗하고 꼿꼿했다. 선배처럼 지혜롭게 늙어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두 분 모두 배우자를 사별하여 재혼한 지 12년쯤 되었는데, 그런 잉꼬부부가 따로 없었다. 커플티를 입고 명륜동을 산책하는 모습과 무슨 모임이든 부부동반을 하는 것도 보기에 좋았다. 슈퍼마켓과 빨래방을 성실히 운영하여 모은 돈으로 인근에 오래된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수십 년 내는가하면, 필리핀․인도네시아 쓰나미 재앙 때에도 기천달러의 의연금을 내셨다. 소소한 미담(美談)은 이보다 훨씬 더 있다. 남들이 아프고 힘드는 꼴을 외면하지 못하는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들. 부부(夫婦) 일심동체(一心同體)의 본보기이다.
사후보험금 20억원을 받으려면 2003년 계약한 달부터 매달 1661달러(한화 180여만원)를 납입해야 한다. 한 달만 납입하지 않아도 무효가 되는 보험이지만, 지금껏 한번도 거르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납입할 조치를 확실히 취해 놓아 걱정없다며 좋아하신다(노후연금과 펜센 임대료 등으로 충분함). 그래서 나는 ‘토론토의 개결(介潔. 성품이 꼿꼿하고 깨끗하다는 뜻)한 사마리아人’이라고 학교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선배님의 큰아들이 받게 될 20만달러를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라고 반납, 그 몫을 또 현금 1천만원과 함께 모교에 기부했으니 모두 12억 1천만원을 기부한 셈이다. 나머지 8억은 두 가족이 합쳐 이뤄진 대가족(선배는 자녀 3명, 형수는 자녀 2명)의 손자 8명이 각각 1억원씩을 받도록 조치를 취해놓았다 한다.
국내에 3년 동안 계실 때, 고향의 부모님께 인사도 시켜드리고,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제주도 관광을 크게 도와드리는 등 격의없이 지냈다.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형수는 하고 싶은 말도, 쓰고 싶은 글도 많아서 만나면 늘 재미가 있었다. 이민생활의 애환을 얘기할 때에는 귀담아 들을 내용도 많았다. ‘작은 친절’(숙소에 김치 등 밑반찬을 조금 가져다드렸다)에도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아신다. 오죽하면 선배의 대학동기인 여성이 수양딸을 자처했을까. 반면에 선배는 조용한 성품에 언제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조선시대 선비같은 인상이어서 선후배 동문들이 이런저런 초대를 하는 등 인기가 아주 좋았다. 덕분에 그 자리에 거의 끼게 된 막내 입장의 나는 또다른 인연들을 만들게 되었다. 선배부부가 캐나다로 돌아가신 뒤에도 어느 약품회사 명예회장은 불쑥 전화하여 밥을 거하게 사주기도 하고, 선배가 주는 돈이니 괜찮다며 명절 때마다 용돈을 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몇 차례 어울리는 자리가 있었다. 이제는 정말 모국에 오시기는 힘들 듯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 선배는 허리가 많이 굽어져 있었고, 걷는데도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형수는 심장마비로 스탠스를 4개나 삽입했다고 한다. 그러니, 비행기로 열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를 오시기나 어디 쉽겠는가. 은혼식(결혼 25주년)이 앞으로 3년 남았으니, 그때 기념으로 모국 방문을 한번 더 하시라는 덕담을 했지만, 만날 기약이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가 상당히 젊으니까 토론토를 한번 더 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터. 서로 말들은 안했으나, 헤어지면서 건강하시라는 당부만 할뿐, 조금은 목이 메였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아주 신나는 일이 생겼다. 내년 3월 스위스 제네바를 선배의 동생 초청으로 한 달 정도 방문하신다한다. 우리 부부가 나의 정년퇴직을 기념으로 프랑스와 스위스를 27일 동안 힐링여행을 계획하여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해놓은 시점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곧바로 2019년 3월 24일 제네바 상봉을 약속했다. 우연의 일치로 머나먼 외국에서 한번 더 뵐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래서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거구나. 오늘 새벽 3시 40분, 인천공항으로 가야 하는 선배님께 전화를 드렸다. 잘 가시고, 내년 3월에 뵙자고.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 그래도 새해가 되고 곧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니, 신기하고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무사히 귀국하시기를 빈다.
첫댓글 아주 소중한 인연 잘 이어가길 바라고 내년엔 은퇴 하는가 ?
축하하네 . 귀하가 사랑하는 아내의 은퇴식도 같이 하길 바라네
남편의 은퇴와함께 아내의 은퇴도 해야 하네 .
그리고 아내에게 퇴직금도 줘야 하네 . 남편이 일하며 받는 월급 뒤에는 눈물어린 땀과 피가 녹아 있다는걸 아는가 ?
어찌 혼자만이 모든것을 이루었따고 생각 하는가 ? 새벽에 출근 하는 남편에게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떄문이네.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퇴직금을 청구하라 !! 청구하라 !! 청구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