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째주 사순 제3주일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요한 2.13-25)
장미 한 송이 받아주세요
(허영민 신부. 의정부교구 신암리 성당 주임)
성광 안에 계신 성체 대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대에 앉아 계신다면?
사제 연례) 피정에서 성체조배 중 떠오른 생각이다.
지금처럼 잡념이 드는 대신 교황님의 표정과 말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교황님과의 만남이 끝나면 텅 빈 제대를 바라보며 아쉬워하겠지?
그런데 성전 제대 위에 모셔진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귀에 들리지 않고 내 손에 만져지지 않기 때문일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교황님을 알현하려면 로마까지 가야 하지만
지존하신 성체는 성당 문만 열고 들어가면 너무 쉽게 만날 수 있다.
감실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무덤덤하게 성당에서 생활하였음을 참회 하였다.
성전과 성체에 대한 믿음이 너무 부족함을. 성체 앞에서 고백했다.
뜨거운 눈물이 뺨위로 흘러내렸다.
성체를 감실로 모시면서 성체에 대한 그리움이 난생처음 들었다.
예수님은 왜 분노하셨을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갖 제사를 지내며 기도했지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기도는 강도의 칼처럼 제물과 돈을 빼앗는 도구로 타락했다.
성전을 관리하던 사두가이파와 제사장들의 탐욕은 가장 위대한 존재.
성스러운 하느님을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성전을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기 위해 예수님은 분노의 채찍을 드셨다.
예루살렘 성전을 타락의 길로 몰고 간 탐욕과 부족한 믿음에서 벗어나
나도 이제는 싱싱하고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본당의 날을 맞아 1일 피정을 하던 날.
생후 29개월 된 다윗이 성모상 앞에서 장미를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엄마는 웃으면서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성모님이 장미를 받지 않으신다고 5분째 저러고 있어요.
옆에 서 계신 자매에게 장미를 받아 성모님 손에 올려드리라고 했다.
그제야 다윗은 엄마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나는 수없이 성모의 밤 행사에 참여하고 주례도 하면서 화관이 똑바로 씌워졌나.
성모상에 얼룩은 없나를 살펴보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성모상 너머 성모님의 인격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아침기도를 하러 성당에 들어갈 때는 의식적으로 감실 안 예수님께.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말을 건넨다.
이제는 성전과 성체 그리고 성상과 성화.
그 안에 그 너머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난다.
다윗 어린이와 같은 믿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은혜로운 날이 되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