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로 가라
요나 3:1~6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요나는 구약에서 요나서를 제외하고는 열왕기서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왕하14:25). 그는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활동한 북왕국 출신의 예언자로 아밋대의 아들로 알려진 것 외에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살던 사람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나서의 저자는 그 요나가 아닙니다. 학자들은 요나서에 사용된 단어 분석을 통해서 이 책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서는 요나라는 인물의 실제 활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요나라는 인물을 편의상 등장시킨 것이라는 말입니다. 요나서 본문의 히브리어 첫 낱말은 바예히(vayehi)인데, 이 낱말은 “그리고…이 있었다”는 뜻으로 마치 우리가 옛날이야기를 시작할 때 ‘옛날 옛날에~’라고 입을 여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북왕국 이스라엘도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도 멸망한 그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야기꾼은 요나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배경으로 해서 말입니다. 이야기꾼은 자기 동족의 가슴에 서린 아시리아와 바벨론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보았습니다.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이방 땅으로 끌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몸속에 퍼진 독처럼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움이나 원망처럼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풀지 않는 한 창조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어떤 마성적인 힘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것의 실체를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피하고 싶지만, 우리 속에 있는 미움, 두려움, 질시, 비겁함 등을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꾼이 아시리아를 등장시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시리아로부터 받은 수모와 공포를 잊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외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요나는 다시스, 지금의 스페인으로 달아나려 했습니다. 청중들은 요나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을 겁니다. 아시리아 사람들이 행여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라도 한다면 마음 여리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은 하나같이 요나 선지자를 통해 들려오는 그 말씀대로 아시리아가 망해버리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꾼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 속에 절묘하게 풀어놓습니다. 스페인행 배를 타긴 했지만, 그 배는 풍랑을 만났고, 풍랑으로부터 배를 구하기 위해 선원들이 제비를 뽑자 요나가 걸렸고, 그들이 요나를 제물로 바다에 던지자 물고기가 그를 삼켰고, 그 물고기는 그를 어느 바닷가에 뱉어놓았던 것입니다. 더는 회피할 수 없게 된 요나는 니느웨를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느웨는 지금의 북부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변에 있던 아시리아의 도시로서 산헤립이 다스리던 주전 704년경부터는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큰 성읍’(1:2, 3:2, 4:11)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는 데 사흘 길이 걸릴 정도로 큰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인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일종의 과장이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렇다 해도 니느웨에는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었다고 하니 고대인의 눈에는 메가시티(mega-city)로 보였을 겁니다. 니느웨를 두고 ‘큰 성읍’이라고 말한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3은 ‘크다, 충분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간 모리아산이 사흘 길이었습니다. 자식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아버지의 고통을 충분히 느꼈다는 말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예수님이 무덤에 사흘을 머무신 것도 그렇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신 것입니다. 니느웨가 사흘 길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크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중요한 도시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도시의 죄악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한 수사일 겁니다. 니느웨가 받을 형벌에 대해 내다보고 쓴 묵시록인 나훔서는 니느웨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나3:1)
“네 상처는 고칠 길이 없고, 네 부상은 치명적이다. 네 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네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서 손뼉을 친다. 너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나3:19)
크고 화려한 도성 니느웨는 ‘거짓말’과 ‘강포’와 ‘노략질’이 그치지 않는 곳이고, 사회적 약자들이 학대받는 현장이었습니다. 나훔의 예언을 듣고 있노라면 춘향가에 나오는 이몽룡이 변 사또의 잔치 자리에서 읊은 시가 생각납니다.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를 뽑아 만들었고(金樽美酒 千人血),
옥쟁반에 담긴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짠 것이고(玉盤佳肴 萬姓膏),
촛대에 촛물 흐를 때 백성들의 눈물도 흐르고(燭淚落時 民淚落),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높더라( 歌聲高處 怨聲高).
이것은 당시의 민중들의 눈에 보이는 지배자들의 행태를 춘향가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몽룡의 이 노래야말로 나훔 선지자나 혹은 미가 선지자의 외침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낍니다. 이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진면목입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크기에 주목하고, 화려함에 눈길을 주지만 하나님은 화려함의 이면, 그늘에 눈길을 줍니다. 하나님의 눈에 아시리아는 약자들의 피와 기름을 짜내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큰 성읍’ 니느웨는 멸망을 앞둔 도시입니다. 이것이 ‘큰 성읍’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라 생각합니다. 혹시 도시의 건설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성경은 에덴의 동쪽을 떠돌던 가인이 최초의 도시 건설자라고 말합니다. 매우 상징적입니다. 질투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던 가인이 만든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제에 대한 경쟁의식, 서로를 연민과 사랑으로 보듬어 안기보다는 질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냉랭함, 그리고 폭력 이런 것이 도시를 규정하는 삶의 형태라고 창세기 저자는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눈 밝은 사람에게 큰 것은 복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화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 규모를 넘어서는 크기라고 하는 것은 화려해 보이는지 몰라도 그 속에 어쩔 수 없이 폭력의 논리, 거짓의 논리를 함축할 수밖에 없음을 성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니느웨에 당도한 요나에게 두 번째 소명이 주어집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이제 더는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룻길을 걸으며 외쳤습니다.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이 짧고 건조한 다섯 마디 말은 요나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억지로, 마지못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겁니다. 멸망을 앞둔 사람들을 향한 연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의 표정은 어쩌면 얼음장처럼 차가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정 없는 그의 외침에 반응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꾼은 뜻밖의 반응을 들려줍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5)
이건 너무 급작스러운 반전 같습니다. 이야기꾼은 백성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참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왕도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많습니다만, 오늘은 두 가지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역사의 변혁은 아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하늘의 뜻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땅에 가까운 사람들임을 우리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은 지배자들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어리석은 대중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역사의 낌새를 알아차립니다. 백성들이 참회하고 자기들의 삶을 돌이키게 될 때 임금도 자기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임금의 옷을 벗고 잿더미에 앉아 참회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집권자들이 다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자신도 살고 나라도 살게 됨을 요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외침에 정부가 귀를 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말씀을 받은 이들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리라고 예단하며 말씀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예언자의 직무를 파수꾼에 비겨 말했습니다.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면 나팔을 불어 알려야 합니다. 나팔을 불었는데도 그들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백성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대비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습니다(겔33장). 가끔 선포하는 말씀이 허공을 치는 것 같아 아뜩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은 참을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말은 무기력한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변혁시키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참을 말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요나는 당황했습니다. 자기 죄악 중에 머물다가 멸망 당해야 할 원수들이 저마다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시고 노여움을 푸실지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에 기대어 참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페인으로 달아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현실을 예견했기 때문이라며 하나님께 불퉁거립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2b)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보아야 시원하겠는데, 하나님은 심판의 손길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대들고 싶지만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은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을 앞세우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식을 달래듯 평온한 목소리로 물으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러나 요나는 대답도 없이 성읍 동쪽으로 가 초막을 짓고는 그 아래 앉습니다. 니느웨가 어찌 되는가를 지켜보려는 심산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박 넝쿨 하나를 자라게 하셔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음 날 동틀 무렵 하나님이 보내신 벌레 한 마리가 박넝쿨을 쏠아 버리자 그 식물은 시들고 말았습니다. 해가 뜨자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기력이 빠져 하나님께 외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은 또다시 묻습니다. “박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한 일이냐?” 요나는 그렇다며 대듭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0-11)
참 기막힌 이야기 솜씨입니다. 이야기꾼은 우리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는 질문 앞에 세웁니다. 그는 누구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내 고통에는 민감하지만 남의 고통에는 둔감합니다. 먹을 것을 쌓아놓고도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지금 지구에 사는 사람 절반이 굶주리고 있고 그 가운데 8억 명이 절대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요?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전 세계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아프리카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선진국들이 반성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 예컨대 돈이나 명예, 체면이나 지위 따위는 벌레 한 마리로 말미암아 스러질 수 있는 박넝쿨 하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요나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요나서는 청중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기초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6월은 또다시 뜨거운 거리의 함성과 더불어 열렸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촉발된 국민들의 저항이 좀처럼 수그러들 것 같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시144:14) 히브리 시인의 마음이 가슴 저리게 다가옵니다. 위정자들은 지금의 소란을 ‘음모’, ‘배후’, ‘괴담’ 따위의 말로 색칠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엎드려 ‘거짓’과 ‘폭력’과 ‘탐욕’으로 채워왔던 삶을 참회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이웃들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하게 지내왔는지, 지구에게 우리가 얼마나 큰 폭력을 저지르며 살아왔는지를 참회하고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을 새로운 역사를 낳기 위한 창조적 진통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이 없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더 이상 원한 감정과 갈등과 미움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이 고통을 통하여 새 나라를 이루기 위해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