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환(李民寏)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고려 영동 정(領同正) 이전(李磚)의 후손이고, 관찰사 이광준(李光俊)의 아들이다.
증 이조참판 시 충간(贈吏曹參判謚忠簡)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정(嘉靖) 계유년(1753, 선조6)에 공이 태어났다.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과 다르고, 문사(文辭)에 일찍 숙달하였다. 10세 전에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 능통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에게 학업을 익혔다. 기해년(1599) 겨울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경자년(1600)에 급제하였고, 괴원(槐院 승문원)을 거쳐 한림원으로 들어갔다. 사서(司書), 정언(正言),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승진하였다.
을사년(1605)에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2등에 참록(參錄)되었다. 어사(御使)로서 부월(斧銊)을 가지고 관서를 안렴(按廉)하였는데, 잘 다스리는 관리를 승진시키고 잘 다스리지 못한 관리를 강등시켜 사사로움이 없었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군(郡)을 청하여 영천 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여 변화에 순응하였다.
충원 현감(忠原縣監)에 제수되어, 무오년(1618, 광해군10)의 일에 원수(元帥)의 막부를 따랐다. 다음해 1월에 우리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서 갈령(葛嶺)에서 명(明)나라 병사를 만났다. 이에 앞서 원수가 광해군의 밀지(密旨)를 받았으나 평안도 감사 박엽(朴燁)과 관향사(管餉使) 윤수겸(尹守謙)이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군량의 공급이 늦어져서 사졸(士卒)이 굶어 죽었다. 그리고 명나라 장수가 우리에게 늦게 출발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원수가 쟁론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3월에 진군하여 마가채(馬家寨)에 주둔하였는데 사졸이 더욱 굶주렸다. 공이 관향사의 비장(裨將)을 참수(斬首)하기를 청하고 서찰을 보내 박엽과 윤수겸을 문책하였는데 말이 매우 준엄하였다. 부차(富車) 지방에 도착하여 사졸이 적과 맞닥뜨렸다. 우리 군대가 굶주려 피폐한 기색이 역력한 군사로 10만의 강성한 군사를 대적하여 진(陣)을 이루지 못한 채 무너졌고, 원수가 적과 화평을 성사시키자 공이 원수를 따라서 또 행군하였다. 적이 별의별 방법으로 회유하고 공의 편장(褊將)과 비장(裨將)과 종의 목을 베고 위협하였지만, 공은 칼날을 보기를 편안한 자리와 같이 여겼으며 어조(語調)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적이 구금(拘禁)하고 막아 지킨 지 모두 17개월이 되자, 공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죄인을 가두어 두라.’라고 쓴 패(牌)에서 성명을 이것저것 뽑아서 남겨두거나 보내기를 결정하였는데, 공의 이름이 보내는 패에 있었다. 이에 공이 두 사람과 함께 의주(義州)로 돌아왔다.
박엽 등은 오래전부터 공이 자신을 꾸짖었던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고, 공이 임금을 만나 상황을 아뢸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평안도 감사와 의기투합하여 박엽이 저들의 첩문(牒文)을 저지하여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액정서(掖庭署)에서 비밀히 도모하였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공이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도신(道臣)이 인패(印牌)를 바쳐서 관서(關西)에 2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다. 인조대왕이 반정(反正)하여 공이 이에 서용되었다.
갑자년(1624, 인조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행재소(行在所)에서 임금을 수행하였다. 정묘년(1627)의 난리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로서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다.
계유년(1633)에 대동 독우(大同督郵)에 제수되었고, 을해년(1635)에 홍원(洪原)의 읍재(邑宰)에 제수되었고, 병자년(1636)에 또 호소사 막부로 달려갔다. 난이 평정된 뒤에 군자 정(軍資正)에 제수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으며,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641)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고, 계미년(1643)에 호조 우시랑(右侍郞)으로 옮겼으며, 갑신년(1644)에 발탁되어 형조 좌시랑(左侍郞)에 제수되었다. 모두 특명이었고, 여러 관사에 성대하게 이름난 업적이 있다. 을유년(1645)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어서는 다스리는 법규가 충원 현감(忠原縣監)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있을 때와 똑같이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 2월 24일 질병에 걸려 관아에서 생을 마쳤으니, 향년 77세이다. 사제(賜祭), 조문과 부의(賻儀)가 법식에 맞았다. 이해 여름에 의성(義城) 산운리(山雲里)에 장사지냈다. 27년 전 을사년(1665, 현종6)에 영양(英陽)의 풍산(豐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옮겨 매장하였다.
공은 자질이 호방하고 기상이 빼어나며 기개와 도량이 우렁차고 넉넉하였다. 시서(詩書)를 깊이 연구하고 사서(史書)를 꿰뚫었으며 고금의 변천에 통달하여 일찍부터 벼슬에 올랐다. 탁월하여 장차 세상에 크게 시행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국 땅에서 포로가 되고 도랑에 빠져 죽지 않으니, 문장이 훼손되고 비방하는 사이에서 공을 연좌시켜 스스로 유쾌하게 여기는 일이 도도하여 듣는 사람이 살피지 않고서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익숙하여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 오래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성상의 감식안이 매우 밝아 발탁하여 경재(卿宰)로 삼고 깨우쳐 주면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실로 경을 알고 있다.[人或有言, 余實知卿.]”라고 하였다. 이는 모함하여 죄를 만들어내는 자의 예리한 입을 깨부수기에 충분하고, 천만세토록 명쾌한 결론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공은 가정에서의 품행을 갖추었으니, 친척에게 도탑게 대하였고 이웃에게 자애로웠으며 선조를 예로써 받들었다.
성현(聖賢)의 긴요한 말을 편찬하였는데, 맨 앞에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공부를 서술하였고, 중간에는 사대(四代)의 예악을 서술하였고, 마지막에는 우(禹)와 직(稷)의 같은 도(道)를 서술하고, ‘박약(博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 향약을 두어 자제를 가르쳤으니, 모두 후생(後生)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나는 늦게 태어난 소손(小孫)으로 설령 공을 알 수 없더라도 산남(山南)의 사론(士論)이 매우 높아 감히 법가(法家)와 필사(拂士)에 공을 꼽지 않을 수 없으니, 이를 가지고도 명을 지을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문장이 있고 有文也。
성대한 치적이 있으니 有治也
하늘이 공에 내린 재능이네 天與公材具也。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爲國家之利。
역참을 맡은 들 어떻고 何郵之舁也。
절뚝이고 넘어져도 어떠랴 何蹇而躓也。
보내어 바친 것은 운명이고 輸而納之命也。
거두어 이룬 것은 지조라네 捲而遂之志也。
밝은 임금의 감식안 크게 빛나 昭昭者大明也。
원망하는 저들의 군소리 그쳤네 彼坎人者之饒舌可已也。
영양 풍산에 무덤을 쌓으니 英山之封也。
신선이 호위하여 지휘하였다네 神之物呵指撝也。
공에 대해 살펴 보려는 자는 有考乎公也。
이 두 비석을 보지 않겠는가 盍觀此二尺碑也。
이옥(李沃)이 지었다
주)
가정(嘉靖) : 1753년은 만력(萬曆)이다. 착오가 있는 듯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의 일 : 명(明)나라에서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병력을 요청하였는데,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2만 명의 군사를 지원했던 일을 말한다.
극기복례 : 원문의 ‘극복(克復)’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준말로, 자신의 사욕을 이겨 천하의 공도(公道)인 예(禮)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가 바로 인이다. 하루라도 극기복례를 할 수 있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이 그 인에 귀의할 것이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라고 대답하면서, 구체적인 조목으로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사물(四勿)을 제시한 대목이 《논어》 〈안연〉에 나온다.
사대(四代) : 고대의 우(虞), 하(夏), 상(商), 주(周) 네 나라이다.
우(禹)와……도(道)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맹자는, 태평성대에 나랏일을 돌보느라 자신의 집을 세 번이나 지나치고도 들르지 않은 우 임금과 후직, 난세를 만나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변치 않은 안회에 대하여 공자가 칭송한 점을 들면서 “우 임금과 후직, 안회는 그 도가 같다.〔禹稷顔回同道〕”라고 하였다.
법가(法家)와 필사(拂士) : 법가는 대대로 법도 있는 집안을 말하고, 필사(拂士)는 필사(弼士)와 같은 말로 보필하는 현신(賢臣)을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내부에는 법가와 필사가 없고, 외부에는 적국과 외환이 없는 경우는,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영산(英山) : 경상북도 영양(英陽)의 옛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