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 19
● 제10장 "김정희는 50년간 계속 가족을 찾고 있다."
라루 선장은 <뉴스 다이제스트(News Digest)>지에 그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하느님이 3일간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확신한다. 내가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우리와 동행하신 것을 믿게 된 까닭은 모든 논리의 법칙을 생각할 때 인명 피해가 엄청나게 클 수도 있었는데 단 한 생명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러 번 생각해 봐도 배가 폭발하여 대 참사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전 미 육군소위 밥 러니는 "해군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가 없었다"고 흥남철수에서 해군이 한 역할을 주저없이 치하했다. 해군은 조이 중장이 해양 상선단에 보내는 축하메시지 형식으로 러니의 치하에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귀 상선단의 혁혁한 공로에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동북부의 한 지역으로부터 병력을 성공적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성취한 귀 상선단의 업적을 치하합니다. 온갖 어려운 도전에 선도적, 열정적, 즉각적인 대응을 한 점으로 미루어 일단 유사시에 처하여 귀 상선단만큼 최상의 봉사와 헌신을 한 기관은 없다고 믿습니다. 귀 상선단에서 묵묵히 임무에 충실하여 큰 성취를 이룬 선원 제위의 공로를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옆에서 팀워크를 같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선원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해군에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육군도 해군을 치하하는 답례를 했다. 리지웨이(Ridgeway) 장군은 모든 작전을 제일 먼저 가능케 한 해군의 업적을 극찬했다. 그는 말했다.
"10군단 전 장병과 군 장비를 해로를 통해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해군의 성과에 대해 언론의 대서특필이 미약하여 유감입니다만, 실로 홍남에서 해군은 놀랄만한 기량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위험지구로부터 우리 장병 105,000명, 피난민 90,000명, 차량 17,000대와 수십만 톤의 화물을 철수시킨 과업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략적 대 승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적이 불가능하여 해변에 남긴 군 장비와 군수품 일체를 폭파시켜 적의 손으로 넘어 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전사 연구가이자 작가인 쉘비 스탠튼(Shelby L. Stanton)도 <1950년ㅡ한국의 미 제10군단>이란 저서에서 "철수작전의 성공은 근본적으로 해군의 승리였다. 전함과 상선단의 도움 없이 육상 행군을 했다면 10군단 대다수 병력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스탠튼은 미 육군 전사 자료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다행히 중공군은 그들 자신에게 자명한 이유로 철수작전 진행 중에 대대적인 공세 준비를 위한 정찰 정도의 산발적 공격은 있었으나 우리의 교두보를 제압할만한 집중적 공격은 없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즉, 북한의 민간인 남녀노소 91,000명의 생명을 그들 자신의 인민군과 공개적 협박을 해온 동맹군 중공군으로부터 구출해 냈다.
구출된 인명의 수는 캔자스 주의 엠포리아 (Emporia) 시나 메릴랜드 주의 솔즈베리 (Salisbury) 시의 인구와 맞먹는다. 그리고 아무 시설이 없는 화물선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싣고 간 업적을 볼티모어 (Baltimore)에서 플로리다 주 잭슨빌 (Jacksonville)까지 항해한 것에 견줄 만하다고 했다.
1등 항해사관 러니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안전을 3일 동안 매초 매분마다 위협한 특수한 전시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더욱 극적인 표현을 했다: "기록된 역사 어디에도 격렬한 전투 중에 군인들이 적진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민간인들을 구출한 예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매쉬(MASH)라는 TV 연속 히트작에서 "뜨거운 입술(Hot Lips)"이란 별명을 가진 홀리한 (Houlihan) 소령 역을 했던 여배우 로레타 스위트(Loretta Swit)가 '한국전쟁 비화(Korean War: The Untold Story)"라는 비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쇼에 출연한 러니는 인터뷰 도중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한국전쟁을 회상할 때마다 어머니들, 어린아이들, 애기들의 영상이 머리에 떠오르는 감동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살 길은 오직 바닷길뿐이었어요. 우리 선장님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그 부두에서 건져 왔습니다."
그들이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선장은 사관과 선원들을 모아 놓고 연설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러니는 그때의 일을 설명했다.
"라뤼 선장은 무슨 대단히 특별한 일을 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복해 했던 것은 우리가 영웅처럼 용맹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일을 성공시켰다는 바로 그것이었어요.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그들을 구출했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리라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 것이 전부였어요. 당시는 모두가 공산주의 위협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때인지라. 자유롭게 산다는 것만큼 중요한 이슈는 없었습니다."
※※※※※※※※
25년이 지난 후 스탠리 볼린(Stanley Bolin)은 미 8군을 위해 흥남철수 후 생존자 12명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과정에 피난민들이 겪은 가장 큰 도전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특히 남한에 아무런 연고자가 없어서 만원 상태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가장 큰 기본문제였다. 인터뷰에 응한 어떤 사람은 "수도 없이 여러 번 굶어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들 대부분이 비참했던 1950년 12월 이후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하는 데는 최소한 수년이 걸렸다. 12명 중 대부분은 여러 도시로 흩어져서 안정된 직장을 얻어 새 가정을 꾸미고 가족의 보다 향상된 생활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인터뷰를 한 사람 중에 6명은 짧은 기간 동안에 2~3번 이사를 했고, 한 사람은 그 기간에 6번이나 이사를 다녔다고 했다.
그들은 남한에서 처음 25년간은 웨이터, 바텐더, 목수, 회계사, 병원잡역부, 점원, 부두노동자 또는 어떤 한 사람은 아이스크림도 팔면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다. 미군기지에서 날품팔이로 일한 사람도 몇 명 있었고, 유엔군 병원에서 보조원으로 일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어떤 부인은 아이들의 식비라도 벌겠다고 암시장에서 양담배를 팔았고, 북한에서 농부였던 몇 사람은 배에서 내린 거제도에 머물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했던 한 사람은 20년간 저축한 끝에 1970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고 하였다.
볼린의 보고서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과 선원들에게 감명을 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자신들의 생명을 구한 강하고 끈질긴 그들의 개성과 특성을 분석했다
"인터뷰한 12명 외에도 내가 접촉한 흥남 피난민들 모두가 끈질긴 불굴의 정신으로 그들의 인생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지난 25년간을 생활고에 지쳐서 맥이 빠지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또순이(Ddosuni)'ㅡ'나는 절대로 안 죽어!' 라는 뜻의 한국어 속어ㅡ처럼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그때를 회상하며 '우리 모두는 주검의 문턱에서 빠져나온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볼린은 또 피난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태도를 인용하면서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말했다
"흥남에서 철수한 피난민 누구에게나 물어보세요. 그들은 당신에게 야직도 말해주지 않은 자신들의 이야기 하나가 남아 있다고 말할 겁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이야기는 아직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 이야기는 다름이 아니라 한국이 하루 빨리 통일되어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자신들의 염원이 실현되는 겁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한 일원으로서 힘찬 미래를 건설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1975년에 이 보고서를 쓰면서 볼린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겐 꿈이 있습니다. 이 꿈의 불꽃을 계속 태워 나가려는 정신으로 그들이 자유민이된 25주년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와 더불어 경축하고 있습니다."
이금순(막달레나)과 훗날 베네딕트 피정센터 원장이 된 강안톤 신부를 포함한 세 자녀는 거제도에서 1년간 살았다. 그리고는 남편이자 아버지를 만나서 온 가족은 그의 고향인 대전으로 갔다가 그 후 서울로 이사를 했다. 6.25사변 전 아버지의 직업이 은행원이어서, 서울에서 은행에 취직을 했다.
서울에 살 때 젊은 안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 지역 교구의 신부가 되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베네딕트 수도사가 되었다. 필자가 강 신부에게 신부가 되려고 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느냐고 물어보자.
"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1950년 흥남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역사적 사건 이후, 이북에 떨어진 가족을 찾겠다고 북한으로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생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라고 강신부는 말했다.
※※※※※※※※
김정희는 러니나 볼린이 발견한 한국인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닌 피난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50년 전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린 남편과 딸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왔다.
그녀는 조카 피터 켐프(Peter Kemp)에게 LST를 타고 부산으로 올 때 겪었던 고생을 회상하며 "아주 끔찍했다"고 말했다.
"첫째는 견딜 수 없이 추웠어요. 상갑판과 갑판 밑에 발도 들여 놓을 틈도 없이 피난민들로 꽉 찼어요. 미군들이 친절하게도 비스켓을 나눠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위생시설 때문에 죽을 뻔했습니다. 배 간이변소에 가려면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을 비집고 가야 하는데 그것이 무척 어려웠어요.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병이 들어 기침하고 구토하는 환자들이었어요."
LST함 밑바닥 선창에 끼어 타고 왔던 한 젊은 애기엄마는 며칠 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탄 사람들이 겪은 고생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고생은 등에 업은 아기가 그칠 줄 모르고 우는 것이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즉, 아기가 변과 오줌에 뒤범벅이 되었지만 닦아 줄 천 쪼가리나 기저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을 소독하려고 부산항에 설치한 방역소에서 그녀는 두 아이와 자신에게 미군이 DDT를 뿌려서 소독하도록 자신을 내맡겼다. 이 농약은 지금은 발암물질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농작물에도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1950년 당시에는 그런 위험을 몰랐다. 미군이 피난민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얀 DDT 분말을 분무기로 뿌려서 소독했다.
김정희 여인의 말에 의하면, 그때 부산에는 피난민 수용소도 없었고 그들을 돕는 어떤 구호기관도 없었다. 그들은 도시 밖 산언덕에 아무 재료나 구해서 천막을 치거나 판잣집을 지었다. 그것이 그들이 남한에서 처음 마련한 내 집이었다.
김정희는 대구에 산다는 고모를 찾아가기 위해 두 아이를 데리고 기차로 부산에서 대구로 갔다. 그녀는 기차표 살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쌈지에 단단히 싸서 허리춤에 꼭꼭 묶어 숨겨온 금, 은 등 귀중품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경영하던 보석상에서 금, 은, 보석으로 만든 반지, 귀걸이, 머리핀 등과, 그리고 어린애 옷도 자기 옷 속에 숨겨왔던 것이다.
금을 팔아 현찰을 만들어 새생활 개척을 위해 대구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수일 후 그곳에서 켐프(Kemp) 소령의 할머니인 고모를 찾아냈다. 고모와 1년간 같이 산 후 서울로 이사하여 정착했다. 금은보석을 모두 팔아 포목상을 차렸다.
그녀의 조카인 켐프 소령은 남한에서 어린시절을 보낼 때 그의 외숙모가 서울에서 열었던 포목상에서 돈을 잘 벌었고, 따라서 돈을 풀어서 사람을 계속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70년대에 그는 서울에서 외숙모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숙모가 사업에 성공하여 남이 부러워하는 자동차를 샀다. 일제 중고차였지만 사치스럽고 "너무도 근사했다." 당시 한국에서 자가용을 굴린다는 것은 부자들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외숙모의 포목상은 날로 번창해 갔고, 수시로 자가용으로 남한의 여러 도시를 찾아가서 여러 번 가족을 찾는 신문광고를 냈다. 한편 피터는 그가 16살 되는 1975년에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수도 워싱턴 교외 알링턴(Arlington)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에 입대하여 간부후보생 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장교 생활을 시작했다. 군생활을 하는 중에 그는 야간에 메릴랜드 대학교를 다니면서 현대사학위를 취득했다.
켐프 소령이 필자에게 최근에 전한 소식은 그의 외숙모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가족을 찾았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중공과 남한이 국교를 트게 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습니다. 외숙모는 중국에 가서 남편과 딸을 찾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하고, 거기서 두 사람을 고용하여 찾으려고 노력했지요. 두 번이나 가족을 가까스로 찾아내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결국 그들에게 사기를 당하신 겁니다. 그 후로 그 두 사람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고요."
김정희는 아직도 꿈속에서 남편과 딸을 본다고 한다. 켐프 소령의 어머니가 외숙모에게 말했다. "언니, 꿈속에 사람이 나타나는 것. 그거 좋은 징조 아니야. 그건 강 건너로 사람이 넘어갔다는 사인이래."
그러나 외숙모는 힘주어 대답했다. "아니라니까. 나는 내 남편과 딸이 어디엔가 살아 있다고 믿어."
필자가 켐프 소령에게 당신의 외숙모가 지난 50년 동안 그 많은 돈과 시간을 써가며 남편과 딸을 찾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외숙모는 나의 영웅입니다."
이금순(막달레나)과 훗날 베네딕트 피정센터 원장이 된 강안톤 신부를 포함한 세 자녀는 거제도에서 1년간 살았다. 그리고는 남편이자 아버지를 만나서 온 가족은 그의 고향인 대전으로 갔다가 그 후 서울로 이사를 했다. 6.25사변 전 아버지의 직업이 은행원이어서, 서울에서 은행에 취직을 했다.
서울에 살 때 젊은 안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 지역 교구의 신부가 되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베네딕트 수도사가 되었다. 필자가 강 신부에게 신부가 되려고 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느냐고 물어보자. "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1950년 흥남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역사적 사건 이후, 이북에 떨어진 가족을 찾겠다고 북한으로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생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라고 강신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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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러니나 볼린이 발견한 한국인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닌 피난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50년 전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린 남편과 딸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왔다.
그녀는 조카 피터 켐프(Peter Kemp)에게 LST를 타고 부산으로 올 때 겪었던 고생을 회상하며 "아주 끔찍했다"고 말했다.
"첫째는 견딜 수 없이 추웠어요. 상갑판과 갑판 밑에 발도 들여 놓을 틈도 없이 피난민들로 꽉 찼어요. 미군들이 친절하게도 비스켓을 나눠 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위생시설 때문에 죽을 뻔했습니다. 배 간이변소에 가려면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을 비집고 가야 하는데 그것이 무척 어려웠어요.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병이 들어 기침하고 구토하는 환자들이었어요."
LST함 밑바닥 선창에 끼어 타고 왔던 한 젊은 애기엄마는 며칠 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탄 사람들이 겪은 고생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고생은 등에 업은 아기가 그칠 줄 모르고 우는 것이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즉, 아기가 변과 오줌에 뒤범벅이 되었지만 닦아 줄 천 쪼가리나 기저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을 소독하려고 부산항에 설치한 방역소에서 그녀는 두 아이와 자신에게 미군이 DDT를 뿌려서 소독하도록 자신을 내맡겼다. 이 농약은 지금은 발암물질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농작물에도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1950년 당시에는 그런 위험을 몰랐다. 미군이 피난민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얀 DDT 분말을 분무기로 뿌려서 소독했다.
김정희 여인의 말에 의하면, 그때 부산에는 피난민 수용소도 없었고 그들을 돕는 어떤 구호기관도 없었다. 그들은 도시 밖 산언덕에 아무 재료나 구해서 천막을 치거나 판잣집을 지었다. 그것이 그들이 남한에서 처음 마련한 내 집이었다.
김정희는 대구에 산다는 고모를 찾아가기 위해 두 아이를 데리고 기차로 부산에서 대구로 갔다. 그녀는 기차표 살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쌈지에 단단히 싸서 허리춤에 꼭꼭 묶어 숨겨온 금, 은 등 귀중품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경영하던 보석상에서 금, 은, 보석으로 만든 반지, 귀걸이, 머리핀 등과, 그리고 어린애 옷도 자기 옷 속에 숨겨왔던 것이다.
금을 팔아 현찰을 만들어 새생활 개척을 위해 대구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수일 후 그곳에서 켐프(Kemp) 소령의 할머니인 고모를 찾아냈다. 고모와 1년간 같이 산 후 서울로 이사하여 정착했다. 금은보석을 모두
팔아 포목상을 차렸다.
그녀의 조카인 켐프 소령은 남한에서 어린시절을 보낼 때 그의 외숙모가 서울에서 열었던 포목상에서 돈을 잘 벌었고, 따라서 돈을 풀어서 사람을 계속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70년대에 그는 서울에서 외숙모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숙모가 사업에 성공하여 남이 부러워하는 자동차를 샀다. 일제 중고차였지만 사치스럽고 "너무도 근사했다." 당시 한국에서 자가용을 굴린다는 것은 부자들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외숙모의 포목상은 날로 번창해 갔고, 수시로 자가용으로 남한의 여러 도시를 찾아가서 여러 번 가족을 찾는 신문광고를 냈다. 한편 피터는 그가 16살 되는 1975년에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수도 워싱턴 교외 알링턴(Arlington)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에 입대하여 간부후보생 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장교 생활을 시작했다. 군생활을 하는 중에 그는 야간에 메릴랜드 대학교를 다니면서 현대사학위를 취득했다.
켐프 소령이 필자에게 최근에 전한 소식은 그의 외숙모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가족을 찾았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중공과 남한이 국교를 트게 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습니다. 외숙모는 중국에 가서 남편과 딸을 찾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하고, 거기서 두 사람을 고용하여 찾으려고 노력했지요. 두 번이나 가족을 가까스로 찾아내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결국 그들에게 사기를 당하신 겁니다. 그 후로 그 두 사람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고요."
김정희는 아직도 꿈속에서 남편과 딸을 본다고 한다. 켐프 소령의 어머니가 외숙모에게 말했다. "언니, 꿈속에 사람이 나타나는 것. 그거 좋은 징조 아니야. 그건 강 건너로 사람이 넘어갔다는 사인이래."
그러나 외숙모는 힘주어 대답했다. "아니라니까. 나는 내 남편과 딸이 어디엔가 살아 있다고 믿어."
필자가 켐프 소령에게 당신의 외숙모가 지난 50년 동안 그 많은 돈과 시간을 써가며 남편과 딸을 찾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외숙모는 나의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