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공학
나오코의 입에서 그 선언이 튀어나온 것은 설날 아침의 일이었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손수 만
든 요리가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은 새해의 덕담을 나누고 정종을 나누어 마셨다. 중학교에 합격한
이후, 그녀는 홀짝홀짝 술을 마시곤 했다. 텔레비젼에서는 설날의 흥겨운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창 잘 나가는 탤런트들이 설날 의상을 입고 나와 게임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
램이었다. 코미디언들은 벌칙을 받는 게임을 하고 운동선수는 퀴즈에 도전하는 등, 적어도 오늘만
은 골치 아픈 일은 잊어버리겠다는 분위기가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도 나
오코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편안한 분위기에 마음껏 잠겨 있었다. " 고등학
교 입시?" 텔레비전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때까지는 웃음이 얼굴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보게 해주세요. 내년이면 고등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그
녀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등을 쭉 폈다. "왜 시험을 보겠다는 거지? 지금 다니는
학교에는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도 있으니까, 형편없는 성적을 받지 않는 한 그대로 올라갈 수 있
잖아? 어째서 시험을 보겠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군." "다른 고등학교에 가고 싶으니까요."
"다른 고등학교? 지금 학교에 불만이 있어?" "불만이 있는게 아니라, 내 목적에 맞지 않아요."
"목적이라니?" "장래의 진로라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특별히 가고 싶은 길이 있
어?" "예." "어떤 길이지?" 그는 심각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텔레비전을 껐다. 그녀는 그의 눈
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의과대학이에요." 주위를 시끄럽게 달구던 텔레비전 소
리가 꺼진 직후라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고막을 때렸다. 그는 나오코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았다. 나오코도 기싸움에서는 지지 않으려는 듯이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사람의 시선에서 가벼운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의과대학이라니, 의사가 되고 싶은 거야?"
"그것은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다니는 학교의 대학교에
는 의과대학이 없잖아요." "의과대학이라... ." 그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머리가 멍한 탓인지, 그
녀의 말이 아직 가슴이 와닿지 않았다. 의과대학이라는 말 자체가 왠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 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거지?"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줄곧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결론이 나지 않아, 그렇다면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러자 대답은 뜻밖
에도 간단했어요.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거에요. 왜 이렇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는지, 살
아 있다는 것은 어떤것인지, 의식과 육체라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예
요. 따라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의학을 공부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흐음, 의식과 육
체라... ." 역시 나오코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놓여 있는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
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관심을 끌어당기는 최대의 사항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학 이야기잖아.
고등학교는 지금 그대로 올라가도 좋지 않을까?' "그렇지도 않아요." 나오코의 주장은 다음과 같
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는 분명히 수준은 높지만,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대학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별로 긴장감이 없다. 그런 분위기는 고등학교에 가면 더욱 심해질 것
이고, 자기 혼자 의과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주위 환경에 휩쓸릴 우려가 있다. "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을까? 마음만 있으면 어디에서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
잖아?" 그는 입시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자신감 없이 말했다. 자신이 학교 다니던 그때와 지
금은 입시제도가 또 달랐기 때문이다. "실은, 또 한가지가 있어요." "또 한 가지?" "고등학교는 남
녀공학에서 보내고 싶어요." 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실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왠지 그런 생
각이 머리를 맴돌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다고
도 할 수 있다.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이유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요컨데
의과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수험생 대부분이 남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에서 의식하는 편
이 경쟁심도 불타고 자기 위치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
다. 그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일이라면, 라이벌이 옆에 있는 편이 없
는 것보다는 훨씬 승부욕이 불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침전되어 있는 응어리
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오코를 같은 또래의 남자들과 똑같은 공간에 둔다는 생각만 해도, 표현할
길 없는 저항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정마로 공부 때문에 남녀공학에 가고 싶은 것인가, 그는 진심
으로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젊은 남자들과 놀고 싶어서 적당한 이유를 갖다붙이는 것은 아닌
가. 모나미의 몸을 빌려 다시 한 번 청춘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지나친 억지라고 하면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향학심에
불타서 하는 이야기라면, 남녀공학을 곧 이성관계에 연결시켜 버리는 그의 빈곤한 발상은 경멸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할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나오코에게 경멸당하는 것이었
다. "알았어. 그러면 또 일년 동안 공부에 빠져 살겠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유유히 술을 따랐다. 이해심 많은 아버지, 이해심 많은 남편인 척한 것이다. "내 고집만
피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우리 집은, 의과대학에 갈 정도의 여유가 있잖아요." 그녀는 주저
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받은 보상금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돈은 전혀 손 대지 않고, 여러 은행에
나누어 예치해 두었다. 어떻게 사용해야 죽은 모나미의 의식과 나오코의 육체가 만족해할지, 둘이
서 차분히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대답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최적의 사용처를 떠올린 것이다. "모나미도 틀림없이 찬성해 줄 거야." 그는
술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에서 예상을 했지만, 고등학교 입시 공
부에서도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쉬었지만
이제는 그 휴식도 거의 없애버리고 친구집에 놀러가는 일도 없어졌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입시
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아무도 놀러가자고 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편이 일일
이 거절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덧붙였다. 사치스러운 마음의 여유는 잠시 뒤로 미루자고
해서, 소설책도 사지 않았다. 그 대신 엄청난 양의 참고서난 문제집이 그녀의 책장을 가득 채웠
다. 유일한 오락거리는 음악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수학 문제가 잘 풀린
다고 했다. 영어 공부에는 모차르트, 사회는 카시오페아, 국어는 퀸, 물리는 차이코프스키가 좋다
고 했다. 덕분에 그녀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지금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
었다.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구태여 힘든 길을 선택하고 즐거운 시기를 희생하면서 열심히 공부
하는 것, 이러한 자세와 노력이 보상받지 않을 리 없다. 그 이듬해 봄에, 나오코는 지망하는 보라
는 듯이 합격했다. 그때도 두 사람은 함께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갔다. 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수험
번호를 찾아낸 나오코는 중학교에 합격했을 때보다 훨씬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인젝터 공장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뿜어내는 것은 사람을 위
해서가 아니라 기계를 위해서로, 그곳에는 정밀기계가 많이 놓여 있었다. 헤이스케의 모습을 발견
한 다쿠로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의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인사말을 건넸다. 여전히 모자는 뒤
로 젖혀쓰고 있었다. 보안경도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사들인 패션용이었다.
"뭐 하러 오셨어요? 시찰인가요?" 다쿠로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비슷한
거지. 신혼 재미에 푹 빠진 자네가 농땡이를 치지 않나해서 말이야." "쳇. 신혼, 신혼이라고 하면
서 다들 놀리기만 한단 말이야! 나 원!" 요즘 들어 계속 놀림을 당하고 있는지,다쿠로는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앞에서 나카오가 걸어오다
가 그를 발견하고는 안경 속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계장님께서 여긴 무슨 일인가?" "별일
은 아니야. 최근에 이쪽으로 발길이 뜸해서 잠시 들러 보려고 생각했을 뿐이지." "흐음. 그러면 커
피라도 마시겠나?" 나카오는 종이컵을 드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그거 좋지." 두 사람은 자동
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휴게실로 들어갔다. 창 밖에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미 잔
업시간에 들어간 것이다. "자네, 현장으로 돌아오고 싶은 게 아닌가?" 나카오의 모자 색깔은 빨간
색에서 감색으로 변해있었다. 그 모자는 예전에 헤이스케가 쓰던 것으로, 반장이라는 표시이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동판매기 특유의 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
러내려갔다. 그렇게 맛이 없는 커피라도 동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것을 그는 좋
아했다. "반장일은 어떤가? 이제 익숙해졌나?" "음, 특별한 일이 없으니까." 이번 4월에 그의 부서
는 커다란 변동이 있었다. 과(課)와 몇 개의 계(係)로 나뉘어지면서 헤이스케가 계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로, 처음 들었을 때는 자기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업무 내용
도 크게 바뀌어서 지금까지 과장인 고사카가 하던 일을 그가 맡게 되고, 고사카는 몇 개의 계를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예전처럼 위에서 지시를 받는 대로 일을 하기만 하
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반의 상황을 파악해서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 할 수 있도록 관리하
는 관리자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문제가 발생해도 그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내용
을 파악한 다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고, 그 동안 다른 생산 라인의 일정을 조절해
위에 보고 해야한다. 새로운 라인을 가동하는데 따른 현장과의 마찰을 해결하는 문제도 그의 중
요한 일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연일 보내오는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자신의 서류를 만
드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밑에서 보고를 받으면 위에 전달하고, 다른 부서와 협의해 그 내용을 다
시 다른 부서에 전달하는 동안 그의 눈 앞에는 매일매일 서류가 획획 지나가곤 했다. 그것은 예
전에 생산 라인에 있었을무렵, 컨베이어 벨트 위를 제품이나 부품이 지나가는 것과는 전혀 의미
가 달랐다. 서류는 곧 정보로, 정보에는 실체가 없다. 그만큼 제품이나 부품보다 취급하기 휠씬
어렵고, 그 때문에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기 힘들었다. "오랫도안 현장 일을 하다 보면 출
세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 아무리 출세를 해도 고작해야 반장이 아닌
가?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잔업수당이 없어지는 데다가 일이 완전히 바뀌니까, 골치만 썩히게
되지 않는가?" "그건 그래." 헤이스케는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말했다. 나카오도 이해한다는 듯이
종이컵을 바라보면서 쓸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 회사는 인생의 중요한 게
임을 하는 데니까. 회사에서 출세를 한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똑같은 뜻이 아닌가? 출
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질세."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언제까지 어린애로 있고 싶어하지, 바보짓도 하고싶고,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
네. 이제 아버지가 됐으니까 정신 차려서 일해야 한다든지, 이제 할아버지가 됐으니까 차분히 있
어야 한다든지 하면서 자기들의 잣대로 보려고 하지. 아니야! 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이기 이전
에, 한 사람의 남자일 뿐이라구! 그렇게 소리쳐보아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네. 아들이 태어
나면 아버지가 되고 손자가 태어나면 할아버지가 되니까. 그 사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그렇다면
어떤 아버지가 돼야 하는지, 어떤 할아버지가 돼야 하는지 생각하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는
조용하게 미소지으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주제넘지만 말이야." "자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불쑥 생각났을 뿐이네. 장남
으로서 한마디 했을 뿐이지." "장남?" "그래. 반장은 장남, 계장은 아버지, 과장은 할아버지. 그보
다 위쪽은 뭔지 잘 모르니까 부처님 정도라고 해둘까?" 나카오는 다 마신 종이컵을 꾸깃꾸깃하더
니 휴지통에 내던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일곱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는 자신을 느끼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실내의 공기
는 음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곧장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그
는 옷을 갈아입은 뒤 텔레비전에서 하는 야구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자이언츠 팀과 야쿠르트 팀
의 시합으로, 그가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야쿠르트 선수가 홈런을 쳤다. 헤이스케는 탁자 끝을 치
며 혀를 찼다. 그러나 시합 내용이 머리에 들어온 것은 그때가 전부였다. 그 다음에는 텔레비전
화면보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시계바늘은 일곱 시 반을 지나고 있는
데, 나오코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아직 집에 오지 않은 것이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토록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그녀는 올해 새봄부터 고등학생으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오코가 테니스부에 들어간 것이다. 의과대학
을 목표로 공부할 예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클활동은 하지 않을 것어라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테니스부 연습으로 인해 요즘 들어 귀가가 늦어지곤 했다. 여덟 시가 넘는 일도 있었다.
실은 오늘도 정시에 퇴근한 다음 인젝터 공장에 들른 것은, 곧바로 집에 가서 이제나저제나 조바
심 내며 나오코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길은 또다시 시계로 향했다. 일곱 시
오십오 분.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테니스부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
았다. 그래서 어떤 부원이 있는지, 어떤 연습을 하는지, 헤이스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부원들이 많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오코가 명부를 정리해야 한다
면서 수십 명이나 되는 이름이 기입된 리포트 용지를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절반 이상이 남학생이라는 것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그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는 짧은 테
니스복을 입고 라켓을 흔드는 나오코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늘고 긴 다리에 젊은 남자들의 시선
이 박힌다고 생각하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오코의 몸은, 즉 모나미의 몸은 최근 들어
갑자기 여자답고 성숙해진 것 같았다. 여덟 시 정각이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
녀 왔어요, 하는 나오코의 활기찬 목소리. 헤이스케는 벌떡 일어나서 현관문까지 나갔다.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테니스 라켓을 손에 든 나오코가 신발을 벗다가 고개를 들었다. 라켓을 들고
있지 않은 손에는 슈퍼마켓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니? 아빠!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왔어요?" "꽤
늦었구나." 그의 말에는 불쾌감이 깊이 박혀 있었다. 영리한 나오코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가요?" 그녀는 현관입구에 가방과 라켓을 놓고, 슈퍼마켓 봉투만을 들고 거실로 들
어가서 발을 쭉 뻗고 앉아 허벅지와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피곤하다! 오늘 훈련이 너
무 힘들었거든요. 미안하지만 십 분만 기다려요. 그런 다음 저녁을 준비할게요." 곧게 뻗은 다리
가, 그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는 눈길을 피하면서 나오코 옆에 앉았다. "벌써 여덟 시야. 요
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전에는 아홉 시가 넘어서 저녁을 먹었잖아요. 아빠가 늦게 들어왔
으니까요." "저녁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 이렇게 늦게 다녀도 돼? 내가 보기
엔 정상은 아니야." "하지만 테니스 연습을 해야잖아요. 1학년이니까 뒷정리도 해야 하고, 그런 다
음 슈퍼마켓이 들러 찬거리를 사와야 하니까 아무래도 이 정도 시간은 된다구요."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 늦게 와야 한단 말이야? 도대체 무슨 서클이 그래?' "그냥 평범한 서클이에요."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기 싫다는 듯이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다음, 물을 넣은 냄비를 가스 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의과대학을 간다고 했으면서, 그것은 포
기 했나보지?" 그는 나오코의 등을 향해 이죽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시험을 안 볼거냐구?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그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나?" "물론 의과대학에 갈 거예요." 그녀
는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놀기만 해서 어떻게 의과대학에 가겠다
는 거야?" 그의 말투에는 계속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녀는 문득 칼질 하던 손을 멈추더니 몸의
방향을 바꾸고는 조리대에 기대고 섰다.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입시에는
머리만 중요한 게 아니라 체력도 중요해요. 나처럼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경우에는 하는 경우
에는 특히 더 그렇죠. 게다가 아빠는 모르겠지만,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비율이 훨씬 높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물론 그
가 알 리 없었다. 나오코는 부엌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이었다. "집중력이 달라서 그래요. 서클 활
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입시 준비를 빨리 하겠지만,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안심하는지
도중에 해이해지는 일이 많지요. 하지만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뒤쳐졌다고 생각하고
입시 당일날까지 딴 짓을 하지 않아요. 골인 지점까지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거죠.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체력도 있고요. 따라서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마음대로 되겠어?" "적어도 서클 활동이 대학 입시에 방해가 된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어요. 안 그래요?" 나오코는 다시 도마를 향하더니 생선을 손질했다. 그 뒷 모습은
젊은 시절의 나오코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부엌칼을 들고 요리할 때 등이 조금 구부러지고 오
른쪽 어깨가 올라가는 것이다. "지금 말을 듣자니, 마치 입시 공부를 위해서 테니스부에 들어간
것 같군." "입시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야?" "다른 목적이라뇨?" "남자 녀석들이 실실 웃으면서 잘 해주지까 기고만장한
것이 아니냐구?" 그녀의 손길이 또다시 멈추었다. 그녀는 가스 레인지의 불꽃을 줄이고 나서 그
를 돌아보았다. "기가 막히군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죠?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라서 대꾸할 가
치도 없어요." "뭐가 어이가 없지? 남자들과 공놀이를 하는 것은 사실이잖아?" "미리 말해 두겠지
만, 우리 남자 선배들은 보통 혹독한 것이 아니에요. 여자라고 해서 살살 봐주지 않는다구요. 분
명히 아빠가 말하는 이유로 들어온 애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애들은 혹독한 연습에 견디지 못
해 옛날옛적에 그만 두었다구요. 대학의 동아리와 혼동하지 마세요. 우리 학교는 어엿한 운동부라
서 시합에까지 나가니까요." "운동부든 뭐든,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흑심을 품지 않을 리가 없잖
아?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보려고 할 것이 뻔하다구."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죠?" 그녀는 고개를 한 번 흔들더니, 봉투에 손을 넣어 가다랭이포를 한 움큼 움켜지고
물이 끓는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 손길에서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남자라
는 것은 여자를 보면 그런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구. 그걸 알고 있어?" 그러나 그의 말에 나오코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의 등이, 대답할 뜻이 없다는 것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던 신문을 펼쳐들었다. 여전히 땅값이 상승한다는 타이틀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읽지는 않았다. 가슴속에서 싸목싸목 자기혐오가 퍼져 나갔다. 그
는 입에서 튀어나온 말 만큼 나오코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니, 분노의 감정은 손톱만큼도 없
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귀가시간이 늦어
지는 주된 원인은 서클 활동이 아니라, 실은 시장에 들렀다 오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입시 공부에 돌입한 상황에서 서클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도 보통 고등학생처럼 피곤한 몸을 침대에 내던질 수 없다.
누군가가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흠뻑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어도 집
안 살림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서클 활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강인한 신념으로 뭉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나오코를 책망
하다니,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자신은 추악한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젊음을 손에 넣은 나오코
를 질투하고 있다. 그런 나오코와 청춘을 즐길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을 질투하고 있다. 동시에 나
오코에게 연애감정이나 육욕(肉慾)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저주하고 있다. 그날 밤의 식사
는, 나오코와 결혼한 이후 최악의 만찬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다만 묵
묵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예전에 몇 번인가 부부싸움을 했을 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어색함
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화를 내고 싶어도 화
를 낼 수 없었다. 그 대신 나오코와 자기 사이에 놓여 있는, 영원히 메울 길 없는 늪의 존재를 인
식하고 견딜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녀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것은, 몸에서 발산되
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런 때만이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이심전심
이 작용하는 것이었다.
여름방학으로 접어든 다음에도, 나오코는 테니스를 치기 위해 학교에 갔다. 그러나 연습은 낮
에만 했기 때문에, 그가 집에 들어갔을 때는 대부분 그녀는 저녁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가끔은
저녁이 늦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그것은 저녁 반찬거리를 깜빡해서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달려나갔을 때 정도였다. 또한 토요일과 일요일은 연습이 없어서, 그도 혼자 있는 적적함을 맛보
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이 집에 있을 때는 항상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 생길 리가 없다. 세
탁기 옆에 있는 바구니에 매일 테니스복이 쌓이는 것이나 날이 갈수록 얼굴과 손발이 초콜릿처
럼 검게 그을리는 것은 개의치 않았지만, 테니스 이야기에서만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녀에게
서 서클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남학생들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고, 그러면 어찌할 수 없이 불쾌
감의 늪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다시 질투를 못 이겨 불만을 터트릴
것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납덩이처럼 무거운 공기가 흐를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스스
러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번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조심을 하는 것은 나오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결코 테니스에 대해서 화
제로 삼지 않았고, 예전에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테니스 시합도 잘 보았지만 그와 말다툼을
한 이후에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탁자 위에 테니스부의 연습 일정표가 놓여 있는
일도, 거실에서 라켓이 굴러 다니는 일도 없어졌다. 때마침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을 위해 다행스러
운 일이 있었다. 음력 8월 15일을 전후해서 추석 연휴가 있는데, 마침 그동안만은 테니스부도 연
습에서 쉰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나가노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나가노란 나오코의
친정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고가 일어난 이후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사고 일주기를 기념해
위령제를 지내느라 그 근처까지 간 적은 있지만, 그때도 나오코의 친정 집에는 들르지 않았던 것
이다.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공부하느라 가지 않았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
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오코가 친정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연히 모
나미의 정신이 나오코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모나미로 대할 것이다. 손녀를 보면서
딸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당신의 딸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
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연로한 아버지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나오코는 아버지를 보면서 언제까지나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예
전에 출장을로 삿포로에 갔을 때 언니인 요코가 며칠 동안 집에 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런 문
제도 없었다. 그녀는 언니를 속이는 것에 쾌감마저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도 그런 기
분으로 대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다는 것이 나오코의 주장이었다. "언제까지나 아버님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잖아? 이대로 영원히 친정집과 교류를 끊을 수는 없어. 당신은 나오코가 아니
라 모나미로서 그들을 대해야 한다구." 그녀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 했지만, 어느 날 저
녁을 먹으면서 불쑥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추석 연휴 때 나가노에 가요." 추석 때 나오코의 친
정집에 가는 것은 10년 만의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지독한 교통정체에 시달리면서 그들은 밤
늦게야 녹초가 되어 간신히 도착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려 주었
다. 나오코의 아버지 사부로는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쭈그러든 것 같았다. 주름밖에 보이지 않
는 바싹 여윈 목은, 마치 털 뽑힌 닭을 연상시켰다. 그래도 사보로는 얼굴이 쪼글쪼글해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모나미를 만난 것이 기뻐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이제 완전히
어른이 다 됐구나. 키가 이렇게 많이 크다니, 이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크구나. 벌써 고등학생이
됐니? 그래그래, 정말 잘 왔다!" 애처로운 눈길로 손녀를 바라보면서 사부로는 어떻게든 기쁨과
놀라움,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았다. 그가 모나미의 모습을 통
해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말을 입에 담지는 않
았다. 그는 나오코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안절부절못했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면 어떡하나.
그때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그러나 다행스럽게 그런 일은 없고, 그녀는 할아버지를 만난 손녀
의 역할을 멋지게 연기했다. 도중에 헤이스케를 힐끔 쳐다보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윙
크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다만, 처음에 아무 일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의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은 모두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 날의 요리는 사부로의 큰딸인 요코와 사위인
도미오가 장만해 주었다. 메밀국수 가게를 이어받은 만큼, 두 사람의 요리 솜씨는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을 정도로 입에 착착 감겼다. 그들은 맛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효과도 훌륭히 연출해 내
서, 어설픈 솜씨로는 도저히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그날의 요리는 호화롭고 섬세했다. 이야기꽃
을 피우며 식사하는 도중에, 잠시 사부로가 자리를 떴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갔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나타난 사부로의 손에는메밀국수 쟁반이 들
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사부로는 나오코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릴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모나미와 약속했지. 설마 이 할아버지와 약속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 나오코는
불안한 눈길로 헤이스케를 흘깃 쳐다보았다. "잊어버렸니? 이 할아버지가 만든 메밀국수를 먹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아아!" 나오코의 입이 조금 벌어지며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퍼져 나
갔다. "모나미는 할아버지가 만든 메밀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었나?" 도미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엉보았다. "한 번도 없었다네. 그렇지?" 사부로가 동의를 구하자 나오코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
덕였다. "원래 그런 법이에요. 집에서 장사하는 음식은 잘 먹지 않으니까요." 요코가 사부로를 흘
겨보며 쿡쿡거리고 웃었다. "나는 언제든지 먹여주고 싶었지. 하지만 나오코가 메밀국수 따위는
질렸다고 하면서 먹지 않으니까, 그만 모나미도 못 먹었지 뭐냐?" 나가노에 도착한 이후, 나오코
의 이름이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모두 피해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나오코가 움찔하는 것을, 헤이스케는 놓치지 않았다. "자, 어쨌든 먹어보렴. 모나미를 위해
서 이 할아버지가 직접 만들었으니까. 이보게, 자네도 많이 먹게." 사부로는 나오코와 헤이스케
앞에 메밀국수와 장국을 내밀었다. "아버지. 오늘 하루 종일 가게에서 꾸물대더니, 이걸 만드느라
그랬군요." 요코가 말했다. 헤이스케는 사양하지 않고 순순히 먹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자신
도 사부로의 메밀국수 맛을 본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메밀국수는 찰기가 있어서 치아에 씹
히는 감촉이 좋고, 메밀국수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입맛을 돌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
성을 자아냈다. "정말 꿀맛인데요!" 사부로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그리
고 그 미소 띤 얼굴을 그대로 나오코에게 향했다. "모나미는 어떠니?" 그 순간 사부로의 얼굴에
낭패스런 빛이 퍼져 나갔다. 나오코가 메밀국수를 장국에 넣고 젓가락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식탁과 바닥을 적셨다. 왜 그러니, 고추냉이
를 너무 많이 넣었니, 하는 농담을 할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말을 잃고 멍하니 나
오코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 분위기를 수습할 사람은 헤이스케밖에 없었다. 나오코는 미소
를 담고, 옆에 놓인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얘야. 이 할아버지가 뭔가 잘못한 거냐?" 사부로가 미안한 듯이,
이미 숱이 적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그냥 엄마 생각이 나서요... .엄마는 할아버지 메밀
국수를 좋아한다고 했거든요. 이것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터
져나왔어요." 다음에는 요코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부로는 눈물을 참는 것 같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잠을 자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요코와 도미오가 이불 두 채를 가지고 와서 나란히 깔아 주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
다음 나오코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완전히 실패예요." "아까 울었던 것 말이야?" "예." 나오코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전까지는 너무나 태연했어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아빠가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말해도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메밀국수... ." 거기까지 말하고 나오코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었다. "그 메밀국수는
아빠의 메밀국수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먹어온, 입에 익숙한 맛이었지요. 그런 생각을
하자 주마등처럼 스치고, 문득 정신을 차리자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어떻게든 눈물을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린 한 줄기 눈물이 턱에 도착
하더니 물방울이 되어 매달렸다. 그는 나오코 옆으로 가서 떨리는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
녀의 눈물로 셔츠의 가슴 부분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나오코가 다시 입을 열
었다. "아빠 빨리 도쿄로 돌아가요. 역시 여기는, 나에게는 너무 괴로운 곳이에요." "그러지." 한순
간, 그녀에게는 '아빠'라고 부르는 상대가 두 명이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날에는 여기저기에서 친척들이 몰려들었다. 명절이라고 몰려든 것이다.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인사
를 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진이 빠져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나오코를 보고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머! 나오코와 똑같이 닮았네!" 그녀를 특별히 귀여워했던 숙모는, 마치 나오코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눈물을 머금었다. 다같이 성묘를 갔다 온 뒤에 어젯밤과 똑같은 자리에서 식사
를 했다. "모나미는 남자친구가 있니?" 펑퍼짐한 몸매에 천진난만하게 잘 웃는 나오코의 사촌이
었다. "남자친구는 없어요." 나오코가 고등학생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어머, 이상한데! 모나미처럼
예쁜 여자애를 남자애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는데." "아직 어리니까요." 헤이스케의 말에 나오코
의 숙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아버지뿐이라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남자친구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사부로 형님도, 나오코를 남자와는 인연이 없는 아이
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어떤가? 재빨리 자기 짝을 찾아내서 결혼하지 않았나? 피로연을 할 때,
형님은 대기실에서 혼자 울었다네." "아니, 이 녀석! 말도 안되는 소리!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
래?" 발끈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 같았다. "울었잖아요. 사위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요."
"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뺨에 손을 댔다. "언제 그랬어? 그렇게 늙어서 아직도 거짓말을 하냐?"
"그만들 하세요." 같이 늙어가는 형제의 장난스런 말다툼을, 주위에 있는 친척들이 웃으면서 말렸
다. 그런 다음에도 사부로는 연신 투덜거렸다. 친척들은 여덟 시가 지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
다. 술을 마신 사람은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떠나고, 개중에는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집이
가까운 사람도 있었다. 나오코는 샤워를 마치고 이불 위에서 소설책을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문득
고개를 돌리자 어느 사이엔가 건강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있었다. 역시 피곤했던 것 같았다.
그는 아홉 시 반이 넘도록 텔레비전을 본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직 나무욕조를 사
용하는데, 끝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두 다리를 마음껏 뻗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그는 맨 처
음 그 집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이렇게 욕조에 잠겨 있을 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이다.
그리고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나오코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물은 따뜻해요?" "딱 좋아."
"그렇다면 됐어요. 미지근하면 말하세요. 장작을 더 땔 테니까요." "뭐야? 여기는 아직 장작을 때
고 있어?" "그래요. 골동품 전시장에나 있어야 할 목욕탕이죠?" 나오코는 싱긋 웃으면서 창문을
닫았다. 머리와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욕조에 들어갔더니 물이 조금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래서 밖
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오코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장작을 더 때주지 않겠어?" 그러나 대답은
없다. 이봐! 이봐! 몇 번인가 소리를 내어 불렀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는 수 없다고 고개를 돌
렸을 때,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목욕물을 끓이는 스위치가 벽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장작을 때
다니, 당치도 않다! 그곳은 일반적인 가스 욕조였던 것이다. 나오코에게 멋지게 한방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헤이스케를 속일 마음은 없었으리라. 잠깐 생각해 보면 농담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낡은 앨범을 뒤적거리듯이 추억을 떠올리며 샤워기를 사용해서 머리를
감았다. 그때는 욕탕에서 나온 다음에도 나오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코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창밖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그녀가 웃음을 참으면서 듣고 있었는지 어
떤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욕조에서 나와 방으로 가는데 안방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
넨가?" 장지문을 열어 보니 사부로가 혼자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다. "또 드시는 거예요?"
"자기 전에 반주로 조금 마시는 걸세. 어떤가? 한잔 하지 않겠나?" "좋습니다." 그는 사부로 건너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스키에 얼음을 넣어 줄까?" "예." 사부로는 그를 위해 위스키잔에
얼음을 넣기 시작했다. 얼음통이나 예쁜 술잔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애당초 그와 마실 생각
이었던 것 같다. 저녁에 먹던 요리는 어디에도 없고, 그 대신 간단한 안주들이 접시에 담겨 있었
다. "우선은 건배!" "감사합니다."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나서, 헤이스케는 장인이 얼음을 섞어
만들어 준 위스키를 들었다. 너무 진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목욕을 마치고 마시기에는 딱 좋은 정
도였다. 요리사는 이런 것에도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구나! 그는 절로 감탄했다. "이번에 정말
잘 왔네. 다들 기뻐하고 있다네." 사부로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그는 당황해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나오코는 내일 도쿄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은 이미 사부로에게 말해 두었다. "그나저나 잠시 보지 못하는 사이에 모나미는 어른
이 다 됐더군. 이제 걱정할 것이 없겠어. 어머니가 없어서 걱정했네만 자네 혼자서 그렇게까지 잘
키워주다니, 정말 고맙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죽은 나오코를 대신해서 다
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제가 특별히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오... 모나미가 알아
서 다 했으니까요." "아닐세. 자네 고생은 누구보다도 내가 알지. 회사 일만 해도 바쁠 텐데 정말
대단하이." 안주를 씹으면서 연신 '대단하다'고 되뇌이는 사부로의 말에, 그는 조금 어색해직 시작
했다. "하지만 남자 혼자 살아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아니. 그렇지 않습
니다. 나... 모나미가 잘 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모나미도 앞으로는 힘이 들 것이 아닌가? 조
금 전에도 언뜻 들었지만, 의과대학에 가고 싶다던데. 그러면 공부에 시달리느라 집안일도 제대로
못할 것이 아닌가?" "예. 하긴 그렇겠지요." 그는 술잔 속에 있는 옅은 호박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사부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조금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보게, 우리 딸에게 의리
를 지킬 것은 없네." 그는 장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 말을 하려고 하는가. "자네
는 아직 젊어. 내 나이가 되려면 수십 년이나 남아 있지.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가? 만약에 상대만 있으면 누구에게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재혼하면 되네. 그때는 나도 기꺼
이 찬성하지." "감사합니다만,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부로는 연신 고개를 가
로저으며 고집을 피웠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만다네. 지금 자네를 젊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자네 나이도 만만치
가 않으이. 이제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때가 아닌가?" "예에... ." 헤이스케는 웃음으로 얼버
무리려고 했다. "물론, 억지로 가라는 건 아니네만." 그의 술잔이 빈 것을 보고, 사부로는 즉시 한
잔 더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딱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방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몸의 열기
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역시 북쪽 지방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
했다.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나오코가 몸을 뒤척였다. 눈은 감고
있지 않았다. "아빠와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더군요." "음, 그래." "재혼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들
었어?" "우리 아빠, 원래 목소리가 크잖아요." 이 경우의 아빠는 사부로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그
는 왠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곤란해서 혼났어." "재혼에 대해서 생각한 적은 있어요?" 나
오코의 말에서 오랫동안 고뇌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지. 주
위에서 하도 난리를 피우니까.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 한순간 모나미의 초등하교
담임이었던 다에코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즉시 사라졌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
요?"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나에게는 나오코가 있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눈길을 내리깔고, 반
대편으로 몸을 뒤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 괜찮지." 그는 그녀의 연약한 등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이후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괜찮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에게는 나오코가 있다. 다
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나에게만 보이는 아내가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히 행복하
다. 어느 사이엔가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괜찮다는 생각을 껴안은 채 잠의 세계로 여
행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일찍부터 서둘러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시골에
가면 항상 그렇듯이 이것저것 챙겨 주어서 그것만으로도 트렁크가 가득 찼고, 뒷좌석에도 종이봉
투나 상자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아버지 말씀 잘 들으렴. 그리고 설날에 또 와야 한다." 조수석
창문 밖에서 사부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또 올게요. 할아버지도 건강하세요." "그래
그래. 고맙다, 고마워." 사부로는 눈이 더욱 작아져서 주름에 파묻할 것 같았다. 아스팔트에 반사
되는 햇살이, 오늘도 뜨거운 하루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귀경길 정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젯밤의 텔레비전을 통해 알고 있다. 그는 미리 각오를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조금
멀어지자 나오코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세워 주세요." "왜 그래?" 그는 도로 옆쪽에 차를 세웠
다. 나오코는 뒤를 돌아보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
니 슬픔이 밀려와서요." "왜? 오고 싶으면 오면 되잖아?"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나에게는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니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나
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그들의 세계는 나 없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 곳에 가면 나는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을 수 밖에 없잖아요." 눈이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나오코는 손수건을 꺼냈다. "미안해요. 오늘 하루만 더 울게 해줘요." 그는 아무말 없이 차를 출발
시켰다. 나만이 이 여자의 진정한 가족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 둘 밖에 없다. 이 여자를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