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생활/최규리
꼬리가 바글대는 소란한 날에
베이글을 먹어요
구멍 난 하루를 비글이 물어뜯네요
물어뜯긴 만큼의 사료를 감량하고요
방향이 정해진 산책을 합니다
예쁜 이름을 찾고 있어요
이름을 짓지 못해 호명하지 못합니다
개는 원을 돌아요
꼬리의 꼬리를 물고 되돌리기를 반복해요
그러다가 훌쩍 울타리를 벗어나고
새로운 영역에는 똥이 답인가요
사람들은 기다려를 외쳐요
구멍 안에서 예쁜 이름을 찾았는데
개가 없네요
울타리를 벗어난 개는 애완이 어울리지 않아요
애완을 찾으러 갑니다
새로운 개를 발견했어요
귀가 늘어진 개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궤변을 늘어놓아요
딴소리를 물어뜯어요
둘레길에 데려갑니다
정답지 못한 산책을 해요
오르지 못할 곳을 향해 컹컹 짖어요
나무를 오르다 미끄러져요
개를 버리고 귀를 버리고 혼자 집으로 와요
예쁜 이름과 어울리는 개를 검색해요
개보다 이름이 애완입니다
집에는 반송된 이름들이 돌아오고요
또 개를 버려도 개는 돌아오고요
미완의 하루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번도 나를 증명할 수 없어요
나는 누구입니까
페스티벌/최규리
들끓는 인파.
새롭게 개장한 광화문 광장에서 아기가 놀고 있다 서투른 걸음,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넘어진다. 기어가던 아기가 땅에서 손을 떼는 순간
직립한다.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지
인간의 탄생은 손에 있다. 손은 행복했고 따뜻했어. 손과 손의 결합으로. 손에
이끌려 학원을 가고, 손으로 회사 출입문을 해제하고, 손으로 뺨을 얻어맞으며
손을 잃고 주먹을 얻어. 땅따먹기 놀이에 빠진 세계.
손과 손의 결함으로.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떨어지는 총알사탕, 여자 친구는
두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끌려간다.
납작해지고 붉은 꽃물이 흘렀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공원에서, 검은 폭죽이 무성하여, 흰 깃발들이 숲을 이루는
환호. 어떤 함성보다 크고 고요하여 심장이 멈추는.
무수한 나뭇잎이 돌이킬 수 없는 손이 되어.
붉은 꽃잎 사이에서. 죽은 척했던 산 자가 일어난다. 겹쳐진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 겹쳐진 두개골을 들추고. 저 세상 문 앞에서 빠져나온 어떤 사람으로부터.
한 걸음, 한걸음, 발트의 길*을 나서며
다시,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세요.
나와 당신과
저기 저 사람들과
여기 우리와
함께 손을 모아
이 땅에서 손을 떼도록
헬리콥터에 매달린 사람들과 폭격하는 독수리와 물에 빠진 비둘기와 총을 맨
아이들이 찬란한 핏빛 속에서. 넘쳐 흐르지 않게.
익수자는 허우적대며 손을 뿌리치고, 구조자는 동의를 얻느라 손을 망설인다.
어긋나는 물과 불이 되어도, 불꽃이 타오르는 향연에서, 서로 이별하지 않게.
손을 잡고 합창을 할까요.
미래의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씨앗들이죠.
나무가 된 사람들과
행성이 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뻗어
지구를 둘러싼 들끓는 손, 휘몰아치는 칼춤의 정점에서. 눈부시게 환한 나비가
되어 사뿐히 날아오르기를. 연인의 손을 잡듯이, 작은 떨림이, 우기를, 무기를
멈추기를. 아이의 웃음소리가 무덤에서 먼 바다로 흘러가기를.
다만, 노래하는 새와 포옹할래요.
발트*의 신발을 구름에 묶어 두면 좋지 않을까요
어디든 자유롭게
지구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누구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로부터
*발트의 길은 1989년 발트 3국이 소련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주장하며 만든 인간 띠
식욕의 자세/최규리
아무도 죽지 않는 날을 만들겠어요 환생과 환상의 구름다리를 부수고 죽어도
죽지 않는 날을 위해. 나무로 만든 침대는 불타오르죠. 여전히 뜨겁지만 죽지 않
아요. 타오르는 심장은 이미 불타고 있으니
나이프와 포크가 필요하겠죠. 밤마다 칼을 갈 필요는 없어요. 우아함을 버리면
되는 일. 원시적인 방법이 직관을 단련 시켜요. 미각과 후각은 진화할 테고 간사
한 혀의 설득력으로
먹어치우기로 했어요. 손으로 이빨로 물어뜯어요. 송곳니가 천장을 뚫고 엘리
베이터를 끌어올려요. 초고속으로 상승하는 아드레날린은 세상의 모든 맛을 빨
아올려요. 맛을 알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음식들까지. 숨도 쉬지 않는 벌어진 입
안 통증 없는 날을 만들겠어요. 죽어도 죽지 않는 해지는 쪽으로 행복한 기류를
오늘 밤 세상의 죽음을 훔치러 가요.
요단강을 끓여요. 저승사자는 껍질을 벗겨 쉣깃 쉣깃 믹서에 넣고
먹방 유투브를 찍어볼까. 좋아요를 누르면 엄지 척이 되지만 난 배가 불러 풍
선이 될까요. 괴물이 될까요. 그동안 수고했다고 쓸모없어진 내장들을 나무로
만든 침대를 질겅질겅 씹어요. 우리가 함께 먹을 수도 있으니
잡다한 것들이 찬란한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네요. 뻣속까지 시원한 소독약
을 마셔요. 사향 원숭이 배설물을 마셔요. 코피루왁의 특별한 능력처럼요. 우리
의 배설물이 영원성에 기여한다는 가설이 사기가 되지 않도록
위장의 내부는 끔찍하지 않아요. 삶이 늘 복잡하듯이
앨리스는 기름 덩어리를 녹일 수 있을까. 토끼굴을 먹어요. 도마에 오른 반성의
서사를 닥치는 대로. 누워있는 시간을 뜯어 먹어요.
가슴을 달자 / 최규리
유리컵이 미끄러진다 깨진 조각들을 밟는다 발바닥이 서늘하다 신선한 감정은 가장 바보스러워서 좋았다 일어나 창문을 연다 흰 것을 숭배하는 자처럼 불온한 손을 내민다
창밖의 아이들아, 너희들의 반항에 위선 따위는 없다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한다 한낮의 빛은 날카롭고 푸른 종소리는 폭풍을 걷어가지 못했지 오해의 속도는 굽이치고 어떤 노동보다 가파르다 발바닥에 흐르는 피는 나를 보호하지 못하고
검은 가루가 떠다녔다 치열하게 눈썹을 떠는 오후에는 포도밭으로 가자 흰옷을 입고 춤을 추자 포도를 던지고 포도즙으로 샤워를 하고 붉은 향기로
격렬하게 저항하는 어린 날을 데려와 기억을 재구성한다 유리컵이 떨어진다 누가 먼저 그랬냐고 다그치는 선생님이 있었지 싸우는 아이들도 선빵이 중요하다네 누구든 유리 조각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묻지 않는다 너무 쉬워 보여서 다 알고 있는 감정이라고 절대 베이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내려놓을 곳을 찾아 불면의 시간 속으로 피에 젖은 발등으로
미끄러지는 언어에, 실패하는 대화에 가슴을 달자 언제나 따뜻하고 물렁한 엄마의 것처럼 푹신한 식빵에 얼굴을 묻고 촉촉한 이해의 결을 따라 얄팍한 입술을 대자
프시케를 소환하여 잠으로 가자 열등한 뇌에게 온기를 주자 게으르고 느림의 춤을
절반의 발끝으로 꿀이 흐르는 가슴으로
하얀 이불이 떠다닌다
대리운전자와 안티고네의 매드 무비 / 최규리
우리는 잠이 든다 전진하면서 잠이 든다 운전자는 능숙한 솜씨로 가로수길을 빠져나간다 창밖의 네온들이 긴 실뱀들을 풀어 놓는다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 쿵! 둔탁한 물체와의 강렬한 접촉 붉은 열매가 총알처럼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뒷자리는 눈물로 가득 찬다 제발, 무덤을 주세요 대리자는 문을 열고 나간다 어둠 속에서 어깨가 들썩인다 빠르게 바닥에서 물러난다 병원은 언제나 무섭고 멀다 길 위에 있는 대리운전자는 차 안의 여인의 입을 틀어막는다 열매는 핏줄로 엉켜있다 모래를 뿌리게 허락하세요 맨드라미는 지속되어야 해요 지나간 맨드라미와 억울한 맨드라미 또는 흙투성이와 피투성이가 난무하는 골목에 열매들이 뒹굴었다 실뱀들이 가득 찬 곳으로 빨리 빠져나가야 하지 대리자는 대리자 일 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지든 대리자에게 책임을 묻지마 그는 검은 물체를 그대로 둔다 골목은 매우 아득한 피와 봉인된 입술이지 맨드라미는 무덤으로 가야해요 꽃잎이 없어요 대리자는 손수건으로 자동차를 닦는다 병원에 가는 길은 언제나 멀다 대리자는 자격증이 없어도 언제나 잘하고 무엇이든 잘한다 캄캄한 골목은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병원은 킥킥거리는 간호사들을 만든다 찬란한 실뱀들이 엉켜있는 거리에 자동차 키를 걸어두는 일은 전혀 공포가 아니다 복부를 절개하고 피부를 열어놓는 쉽고 빠른 일상에 간호사들이 열매를 베어 문다 병원은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안전하다 제발, 무덤을 주세요 모래를 뿌리게 허락하세요 좋아요 오늘의 일을 묻어둡시다 차의 소유주라는 사실이 평생 공포라는 것을 묻어 둡시다 열매를 묻어둡시다 열매는 꿈틀거리지 않아 그저 고요한 땅과 같아 꽃잎을 밀어냈던 열매는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을 기는 것은 실뱀이 아니다 대리자는 나이프를 꺼낸다 복부를 절개하고 피부를 열어놓는 쉽고 빠른 일상과 하얀 거즈가 무덤처럼 쌓인 밤, 대리자는 무엇을 했을까 CCTV도 없이
[ 최규리 시인 약력 ]
최규리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16년 『시와세계』 시 등단.
* 시집으로 『질문은 나를 위반 한다』 『인간 사슬』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