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趙稷)
자는 여형(汝馨),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단양(丹陽)에 거주하였다. 고려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조렴(趙廉)의 후손이고, 좌승지에 증직된 조정현(趙廷顯)의 아들이다.
비문(碑文)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8)에 공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순수하여 덕기(德器)가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후배들이 높이 받들었다. 서애(西厓) 상공(相公)의 문하에 사위가 되어서는 화려한 명성이 점차 커졌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사산 감역(四山監役)을 맡았다. 내직으로는 상의원(尙衣院)⦁광흥창(廣興倉)⦁내자시(內資寺)⦁전생서(典牲署)의 주부(主簿), 호조⦁공조⦁형조의 좌랑, 사헌부 감찰,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등을 역임하였고, 상의원과 공부에서 또 판관과 정랑을 거쳤다. 외직으로는 비안(比安),문경(聞慶),태인(泰仁) 등의 고을을 맡았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으며 아전을 단속하고 백성을 어루만졌으니 고과(考課)는 항상 최고 점수를 받았다.
집안에 연로한 할머니가 있어 평소에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정묘호란을 당하여 임금에게 진정을 아뢰고 돌아와 그 효도를 마쳤다. 만년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여강(驪江)의 옛 별장에서 생을 마쳤다.
공의 재주와 행적으로 공경(公卿)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나, 나이 겨우 서론에 한직(閑職)을 맡은 것은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또한 세속에 따라 기교를 부리지 않으려 하였다. 오직 온화하고 담백하게 스스로 지키면서 청렴과 결백으로써 공무를 받들고 효도와 우애로써 집안을 다스였다. 성품은 또 경서와 역사서를 좋아하여 옛적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고 결국 대사헌공(大司憲公)에게 그 성취가 돌아갔다. 세 조정에 올곧게 서서 진퇴에 법칙이 있어 추은(推恩)하여 추증하고 봉해 주었으니, 포상과 장려가 살아 있을 때 미쳤다. 그 어훈(御訓)의 부귀와 영광에 현양하고 영화롭게 한 것이 한결같이 구양공(歐陽公) 영숙(永叔)과 같으니, 참으로 가법(家法)에 법도가 있고 명목이 있었으며 하늘의 응답이 어긋나지 않았다.
기묘년 7월 2일에 생을 마쳤으니, 춘추 66세이다. 원주(原州)의 작곡(作谷) 부묘(負卯)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0년 뒤에 정부인(貞夫人) 유씨(柳氏)를 부장(附葬)하였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정숙하고 현명하였으며, 일찍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들었다. 혼인을 하여서는 집안 살림에 빈틈이 없었고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에게 어질게 하였다. 자손들을 훈계하거나 노복(奴僕)을 부리거나 마을 사람을 대우하는 경우에는 은혜와 의리를 겸하여 다하였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는 특히 정성스러워 몸소 제기(祭器)를 챙겼으며 병이 들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릇 남에게 받을 때는 반드시 삼가서 조금도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대사헌공이 감영(監營)에서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자 또한 풍족하게 올리지 말게 하고 이르기를 “나는 평소 가난하고 검약하게 지낸다.”라고 하였다. 군자(君子)가 여기에서 문충공의 가법이 역시 딸의 아들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후세에 전하는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삼가 남아 있는 행적을 모으고, 이어서 명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순수하고도 곧으니 粹而貞。
아, 가법의 올바름이여 繄家法之正而。
쌓이고 쌓여 드러나니 積而發。
아, 대 이은 아들의 경사로다 繄後嗣之慶而。
내가 빗돌에 이를 새기니 我刻茲貞珉。
아, 아름다운 영광 길이 이어지리 繄休光之垂永永而。
강백년(姜栢年)이 지었다.
주)
대사헌공(大司憲公) : 조직(趙稷)의 장남 조수익(趙壽益)이다. 조직은 영의정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의 따님과 혼인하여 아들 셋과 딸 여섯을 낳았다.
구양공(歐陽公) 영숙(永叔) : 구양수(歐陽脩, 1007~1073)이다. 송(宋)나라 학자로, 자는 영숙, 호는 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이다.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으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이르렀다. 《宋史 蘇軾列傳》
부모의 가르침 : 원문의 ‘반계(鞶戒)’는 주머니를 주면서 훈계한다는 뜻이다. 옛날 여성들이 천으로 주머니 만들어 수건이나 작은 물건을 담아서 차고 다녔는데,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이것을 매어 주면서 훈계를 했다고 한다.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